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송헌강 한남대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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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선교부의 유산
남장로교의 선교 스테이션
한국에 와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선교 패턴을 보면, 먼저 선교 대상 지역의 중심도시에 그들만의 생활공간을 건설하고, 그 안에 병원과 학교, 그리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방법을 취하였다. ‘스테이션’(station, 선교거점 또는 선교지부)은 선교사들의 주거와 전도, 의료, 교육의 기능이 하나의 유기적인 조합을 이루는 복합선교지구인 것이다. 이러한 스테이션 중심의 선교 전략은 19세기 후반 구미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상식인 것으로 보인다.
먼저 1913년 당시까지 7개 국가(콩고, 브라질, 중국, 쿠바, 일본, 한국, 멕시코)에 320여 명의 선교사를 파견한 미국 남장로교는, 교단의 해외선교를 총괄 담당하던 선교본부 산하에 모두 10개의 선교부, 54개의 스테이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영토가 넓은 브라질에는 3개, 중국에는 2개(중국중부선교부와 북광서선교부)의 선교부를 별도로 두었다. 그리고 10개의 선교부에는 각각 4-8개의 스테이션이 설치・운영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이 1867년에 생긴 항저우(杭州, Hanghow)스테이션인데, 그해는 바로 남장로교가 중국 선교를 개시한 시점이기도 하다.(여기서 선교의 시작이란 선교사 개인의 파송이 아니라 곧 스테이션의 설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후 1913년까지 46년 동안 남장로교는 거의 1년에 하나꼴로 해외 스테이션을 조직한 셈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 상황은 교단의 선교기관지를 통해 본국 교회 내에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남장로교단의 직영 신학교 출신으로서 재학 시절부터 이미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자신의 파송을 위해 교단 선교본부와 긴밀하게 소통했던 한국선교부(Korea Mission) 소속 선교사들은 내한 이전에 이미 스테이션에 대한 학습(스테이션의 개념, 설치, 운영 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892년 11월 한국에 처음 도착하여 한국선교부를 조직한 7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이듬해 봄 전주스테이션 개설을 준비하였다. 한국에 온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설치를 추진할 만큼 스테이션은 일종의 당위(當爲) 문제였던 것이다. 1894년 3월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와 드루(Alexander D. Drew)는 6주 일정으로 전라도 답사에 나섰다. 남장로교는 이미 1893년 1월 장로교선교부연합공의회를 통해 호남을 선교구역으로 배정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 이때 그들이 방문한 곳이 결국 나중에 스테이션의 입지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그 답사의 목적은 그저 단순히 전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 스테이션 설립이 가능한 도시를 물색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먼저 인구가 밀집해 있는, 지역을 대표할 만한 도시에 선교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스테이션은 선교 상황이 아니라 선교 기획의 산물이다.
그 결과 남장로교는 그 후 20여 년 동안 모두 5개의 스테이션을 호남에 설치・운영하였다. 거기에는 대개 10만㎡ 이상의 넓은 면적에 병원과 학교, 그리고 선교사 주택과 교회당 등이 들어서 있었다. 즉 전주에는 화산 언덕 10만 평 선교 부지에 전주예수병원, 신흥・기전학교, 서문교회가 세워졌고, 군산에는 군산예수병원, 영명・멜볼딘학교, 구암교회가, 목포에는 프렌치병원, 영흥・정명학교, 양동교회가, 광주에는 기독병원, 숭일・수피아학교, 광주제일교회가, 순천에는 알렉산더병원, 매산남녀학교, 순천중앙교회가 설립되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호남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이 5개의 스테이션은 해당 지역 복음화의 전진기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선교가 실질적으로 진행된 최일선의 현장으로서, 선교사들의 일상생활과 선교활동은 모두 스테이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호남 지역 기독교 유적지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바로 스테이션 유적이다. 1940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철수할 무렵 한국에는 모두 8개 지역(5개 스테이션과 서울, 평양, 지리산)에 373개 동의 건물이 선교부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건물과 토지를 합친 전체 재산 규모는 100만 달러(320만 엔, 현재 가치 3,200억 원)를 상회하고 있었다. 북장로교 한국선교부는 그 3배인 300만 달러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남긴 대표적인 유산으로서의 스테이션 유적들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전주스테이션 유산
선교사들이 철수한 후 지금 전주스테이션 자리에는 5개의 유적만이 남아 있다. 엠마오사랑병원 건물로 사용 중인 ‘구 예수병원’은 1912년에 지은 건물이 1935년 화재로 소실되자 그 건물의 보험료를 받아 재건축한 것이다. 1936년 지상 2층의 붉은 벽돌 40병상으로 새롭게 문을 연 예수병원은 1950년대 몇 차례 증축되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 예수병원 별관 옆의 산기슭에는 선교사 거주지로는 유일하게 ‘매튜기념관’이 남아 있다. 1949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예수병원 간호사 매튜(Esther B. Mathews)가 살던 단층 벽돌집으로 최근 개축되었다. 1915년 한국에 온 독신 선교사 매튜는 1923년부터 1930년까지 전주에서 살았다.
예수병원 부설 의학박물관(의료선교자료 전시) 건물 뒷산에는 ‘전주 선교사 묘역’이 있다. 예수병원을 내려와 신일아파트를 끼고 왼쪽으로 돌면 ‘선교사 묘역’이라는 안내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 이곳에는 모두 17기의 무덤이 안장되어 있다.
예수병원 옆의 신흥고등학교에 들어서면 1927년 건립된 ‘리차드슨관’의 현관 유적이 눈에 띈다. 리차드슨관은 원래 신흥학교의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1982년 화재로 전소되어 지금 그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그리고 신흥고등학교가 현재 강당으로 사용하는 ‘스미스기념관’(등록문화재 172호, 전주 신흥고등학교 강당과 본관 포치)은 지난 1933년 미국의 리차드슨 부인이 자신의 오빠 스미스(E. Smith)를 위해 기부한 돈으로 지은 2층 벽돌 건물이다.
신흥고등학교에서 내려와 다리 하나를 건너면 바로 우측에 전주 서문교회가 보인다. 서문교회가 지금의 위치에 자리하게 된 것은 1905년이었다. 교회가 성장하자 선교사들은 전주 서문 밖 대지 780평을 매입한 후 은송리에 있던 테이트 선교사의 사택을 옮겨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식 기와 지붕을 올린 붉은 벽돌의 57평 건물이었다. 1911년 증축된 이 교회당은 1935년 연건평 230평의 2층 고딕식 예배당을 지을 때 없어졌다. 그리고 그 건물 역시 1983년 지금의 방주형 예배당을 지으면서 사라졌다. 그 옆의 100주년기념관은 1993년 건립되었다. 100주년기념관 1층 역사자료실에는 전주 서문교회의 다양한 역사자료들을 만날 수 있고, 교회 마당에는 1908년 소천한 전킨 목사 기념종(직경 90cm)을 달기 위해 만든 6.8m의 한옥 종각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종은 일제 말에 공출되었다고 한다. 또 그 옆에는 최근 다가공원에서 이전한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인전 목사와 배은희 목사의 기념비가 서 있다.
군산스테이션 유산
군산 구암동산은 2015년 새롭게 단장된 스테이션 유적지이다. 이곳은 1948년 남장로교 선교부가 군산 철수를 결의한 후 매각되었고, 한국전력 사택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군산시는 2013년부터 ‘군산 구암동산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여 2013년 한전 사택들을 모두 철거한 후 2015년 구암동산을 조성하였고, 이제 다시 구내에 영명학교를 복원하여 ‘군산 3・1운동 기념 체험/교육관’으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구암교회를 오른쪽으로 두고 동산을 오르면 맨 먼저 보이는 것이 바로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 발상지 조형물’이다. 이곳은 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불의 사택 부근으로 추정되는데, 바로 그 아래에 윌리엄 전킨(William M. Junkin)과 듀피(Lavalette Dupuy)의 사택, 그리고 멜볼딘여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1919년 3월 5일의 군산 3・1만세운동은 스테이션 구내의 멜볼딘여학교와 영명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이 동산에 기념조형물을 세운 것이다. 바로 그 밑에는 ‘군산 궁멀 선교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구암교회 교인들이 뜻을 모아 1916년 새로 지었던 ‘ㄱ’자형 예배당 역시 지금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43년 후에 건축된 석조예배당은 지난 2008년 ‘군산 3・1운동 기념관’으로 탈바꿈했다. 1919년 3월 5일 벌어진 군산
3・1운동의 발상지인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군산시가 10억 원의 예산을 들여 교회 건물을 기념관으로 꾸민 것이다. 군산의 3・1운동은 당시 구암교회 성도들과 영명학교, 멜볼딘학교 교사와 학생, 그리고 예수병원 직원들이 주축이 된 의거였다. 기념관 안에는 기미년 당시 익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순국한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 열사의 피 묻은 의복을 비롯해 군산 만세운동을 이끈 박연세 열사에 대한 일제의 재판기록, 3・1운동 당시 사용된 태극기 목판, 독립군들의 소총과 배지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그 앞에는 ‘군산 3・1독립운동 사적지’, ‘호남선교 100주년기념 성역지’라고 새겨진 기념비와 ‘군산 3・1운동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목포스테이션 유산
목포 선교와 근대화의 진앙지였던 목포스테이션의 모습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우선 그 많던 땅이 스테이션 폐쇄 이후 계속 줄어들어 지금은 정명여학교가 갖고 있는 3,000여 평과 목포 양동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가 소유한 850평이 전부이다. 영흥학교 터는 1980년 학교가 다른 지역(목포시 상동)으로 이전하면서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정명여학교 주변도 지금은 주택가와 상가로 변했다. 길 건너 프렌치병원 건물도 허물어 없어졌다. 현재 목포 양동에서 옛 스테이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정명여학교와 목포 양동교회뿐이다. 다행히 이곳에는 선교사 주택 2채와 교회 건물이 남아 있다.
학교에 들어서 왼쪽 언덕을 오르면 먼저 보이는 것이 석조 2호 주택이지만, 석조 1호 주택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2003년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된 건물이 바로 1909년 지어진 목포스테이션의 석조 1호 주택 ‘목포 정명여자중학교 구 선교사 사택’이다. 한남대 초대 학장을 역임한 남편 린튼(William A. Linton)의 사망 후 목포로 와서 1964년까지 활동한 린튼 부인(Charlotte W. B. Linton)은 이 집을 가리켜 선교 구내에 지어진 첫 번째 주택이라고 술회하였다. 1971년 선교사들이 떠나면서 방치되어 화재를 당하기도 했지만, 최근 보수 공사로 어느 정도 원형을 회복했다.
정명여학교 안에는 또 하나의 선교사 주택이 남아 있다. 바로 석조 2호 주택이다. 이 건물 역시 1909년 1호 주택과 동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 선교를 이끌었던 해리슨(William B. Harrison), 그리고 커밍(Daniel J. Cumming) 선교사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석조로 된 이 이층집은 그 후 양옆으로 시멘트 건물을 이어 붙여 본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 건물은 목포뿐만이 아니라 3・1운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3년 이 건물 1층 천장에서 독립운동사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석조 2호 주택 앞에는 1985년 건립된 ‘목포 독립운동 기념비’가 놓여 있다.
정명여학교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나와 다시 우회전하여 조금 걸으면 석조 건물의 목포 양동교회(전남 목포시 양동 127번지, 등록문화재 제114호)가 보인다. 1911년 겨울 준공된 목포 양동교회 예배당은 전형적인 서양식 조적조(組積造, 벽돌 등을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 구조) 건물로서, 1982년 한 차례의 증축 과정을 거쳐 계속 사용 중이다. 예배당 왼쪽 출입구 위에는 “大韓隆熙四年”(대한 융희 4년)이라는 글씨가 태극문양과 함께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건물 옆에는 ‘선교 107년 기념비’와 ‘순교자 박연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26년 목포 양동교회에 부임한 박연세 목사는 1942년 일본의 황민화 정책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가 체포되어 결국 1944년 대구형무소 독방에서 동사(凍死)하였다.
광주스테이션 유산
광주스테이션 유산은 먼저 ‘오웬기념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웬기념각은 광주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펼치다가 1909년 사망한 오웬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한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2층 건물이다. 오웬의 가족과 친지들이 낸 성금으로 1914년에 건립된 이 기념각은 당시 숭일학교의 예배당 겸 강당으로 사용되었다. 이 기념각의 현판에는 “吳基冕及其祖韋廉之紀念閣”(오기면급기조위렴지기념각)이란 한문 기록과 영문 “In Memory of William L. and Clement C. Owen”이 병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광주 신문화의 요람’으로서 다양한 공연 활동이 펼쳐지기도 한 오웬기념각의 설계자는 남장로교의 장로이자 건축가인 스윈하트(Martin L. Swinehart)였다.
그리고 호남신학대학 구내에는 광주스테이션 유적 중 가장 먼저(1909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윌슨기념관’(우일선 선교사 사택,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5호)이 보존되어 있다. 윌슨기념관은 회색 벽돌로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의 1백여 평 규모의 전형적인 미국 남부식 주택으로 의료선교사 윌슨(Robert M. Wilson)이 진료소와 집으로 사용한 곳이다. 윌슨은 1908년에 내한해서 1925년까지 광주기독병원에서 활동했다.
‘남장로교 광주 선교사 묘지’는 현재 호남신학대학 구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여기에는 12개의 무덤이 있었는데, 순천과 목포스테이션이 정리되면서 그곳에 있던 묘들을 지난 1979년 이곳으로 이장(移葬)한 결과 그 규모가 많이 늘어났다. 지금은 순천에서 온 10기와 목포에서 옮겨진 4기 등을 합해 모두 28기의 무덤이 이곳 묘역에 있다.
호남신학대학에서 내려와 수피아여고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 언덕 위에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커티스 메모리얼 홀’(등록문화재 159호)이 보인다. 1925년 사망한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선교사를 기념하여 1926년 건축된 것으로, 지하실을 갖춘 단층의 회색 벽돌의 예배당이다. 커티스 메모리얼 홀에서 내려오면 학교 중앙에 지난 1995년 건립된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동상’과 최근에 건립된 ‘조아라 기념비’를 볼 수 있다.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수피아 홀’(등록문화재 제158호)은 1908년 시작된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가 1911년에 지은 지상 2층의 벽돌 본관 건물로, 미국의 스턴스(M. L. Stearns) 부인이 동생 스피어(J. Speer)를 위하여 내놓은 기부금으로 지어졌다. 선교사들은 이를 기념하여 ‘수피아 홀’이라 명명하고, 학교 이름도 ‘수피아여학교’라 불렀다.
또 일제강점기에 수피아의 두 번째 교사(校舍)로 사용된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윈스브로우 홀’(등록문화재 제370호)은 전주신흥학교의 ‘리차드슨관’과 똑같이 스윈하트가 설계한 것으로 화강암 기초석 위에 붉은 벽돌로 미식 쌓기를 한 2층 건물이다. 이 건물은 미국 남장로교회 여신도들이 보낸 생일감사 헌금으로 1927년에 지었고, 그 모금을 주도했던 윈스보로우(W. C. Winsborough)의 이름을 건물명으로 했다.
광주스테이션 자리에 남아 있는 나머지 유적은 1935년 어간에 세워진 ‘수피아여고 소강당’이다. 지상 1층의 100평짜리 수피아여고 소강당은 원래 체육관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당시 이곳에서 학생들은 농구, 정구, 체조, 핸드볼 등의 체육 활동을 하였다. 이 건물은 ‘윈스보로우 홀’을 건축하고 남은 돈으로 지어졌다.
순천스테이션 유산
순천스테이션 자리였던 현재의 순천시 매곡동 매산중학교와 매산여고 일대에는 모두 7개의 기독교유적이 남아 있다. 먼저 순천중앙교회 바로 뒤에 ‘순천 구 남장로교회 조지와츠 기념관’(등록문화재 제127호)이 있다. 원래 이 건물은 와츠 기념 성경학원으로 사용하다가 해방 후에는 결핵환자 진료소 등이 입주했다. 3층 유물실에는 유진 벨 선교사가 쓰던 테이블 세트 등 20점의 유물이 있고, 2층 전시실에도 다양한 자료가 모두 14개 함에 담겨 진열되어 있다. 마당에는 ‘롯티벨(Lottie Bell) 선교사 추모비’ 등 여러 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순천기독진료소에서 다시 조금 올라가면 매산중학교와 매산여고가 보인다. ‘매산중학교 매산관’은 1911년 개교한 매산학교의 화강암 석조 2층 교사(校舍)로 1930년 11월 신축되었다. 그리고 매산여고의 ‘순천 구 선교사 프레스턴 가옥’(등록문화재 제126호)과 ‘휴 린튼 기념관’은 1920년 나란히 지어진 60평 규모 화강암 벽체의 2층 석조 건물이다. 이 두 곳에는 각각 프레스턴(John F. Preston, 변요한)과 휴 린튼(Hugh M. Linton, 인휴) 가족이 살고 있었다.
매산여고를 나와 다시 언덕을 오르면 3개의 유적을 더 만날 수 있다. 순천스테이션 유적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1913년의 ‘순천코잇선교사가옥’(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9호)은 2층의 석조 건물로 매산학교 교장이었던 선교사 코잇(Robert T. Coit)이 생활하던 곳이다. 1915년 지어진 ‘구 순천선교부 외국인 어린이학교’(등록문화재 제124호)는 회색 벽돌 단층 건물로 선교사 자녀들이 교육받던 장소이다. 또 ‘더램기념관’은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원래 고등성경학교 자리에 있던 것을 해체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더램(Clarence G. Durham) 선교사가 조선식 기와를 올려 토착적인 멋이 나는 이 집에서 마지막까지 살았다고 한다.
송현강 | 한남대학교와 전주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공부(문학박사)하였다. 저서로 『대전・충남 지역 교회사 연구』,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역사 연구』, 논문으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부’의 목포 스테이션 설치와 운영(1898-1940)” 등이 있다. 현재 한남대 사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