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20041220 성례론 논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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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0 부산강의-성례론 논쟁 배경
(강의:이근호 목사)
낱낱이 하나하나 다 아마 보시면 기분이 좋으실 걸요. 그런데 마치 뭔가 준비되는 것처럼 그 글을 쓰면서 그런 사례들이 자꾸 들어와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표류하는 교회가 표류 안 하기 위해서 시추봉을 박아버리면 되거든요. 망망대해에. 시추봉이 뭐냐 하면, 그것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막대한 헌금을 갑자기 강요해 버리면, 교인들의 심리는 그걸 피하는 것이 아니고, 오기가 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시, 내가 하나님을 이번 기회에 만나느냐, 안 만나느냐?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 내가 한번 시험해 보겠다는 오기가 발동되거든요. 그 오기를 보고 그 목사와 장로는 뒤에서 키득거리거든요.
그리고 본인들은 목돈을 내면서 에라, 신이여, 한번 먹어봐라. 내고 난 뒤에 차후에 내 인생이 어떻게 변하는지 한번 두고 보겠소. 하는 오기에요. 마치 주식투자하는 사람들이 계속 무리한 오기를 하는 것처럼, 그러한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교인들에게 잠자는 교인들의 신앙을 자극하는 자극제가 되는 겁니다. 잠 오는 졸음 오는 성경말씀은 자극이 안 돼요. 설교시간은 자극이 안돼요.
그들이 내 능력으로서는 이 이상 못합니다. 하는 자기 능력을 뛰어넘게 만들어 줘야 돼요. 목사가.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보세요. 그것이 어떻게 다 캄푸라치가 되고 다 원상회복이 되고 오히려 몇 배나 복을 받는지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하나님이 계신가? 이번 기회에 한번 제가 기회를 제공드릴 테니까 한번 해보세요.
그게 그러니까 초짜 목사들은 왜 어떻게 해서 기존교회 당회장이 어떻게 신앙을 돈으로 바뀌는지 입을 딱 벌리는 거예요. 부교역자들은. 너무나 놀라운 거예요. 부교역자 보기에는 자기는 무리수다. 이런 기회에 이십억 모은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거다. 그런데 되더라 이 말이죠. 말도 안 되는 그걸.
봉투 돌리고 한 사람이 한 구좌씩 500만 원 하는데 수입이 백만 원도 안 되는 사람이 500만 원 헌금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지, 부교역자들은 초짜들은. 되더라 이 말이죠. 왜냐 하면 교인 스스로가 작심을 하고 마음 단단히 먹고 이번 기회에 하나님 만나겠다고 아주 작심을 하기 때문에 그게 나중에 되고, 된 다음에 대해서 교인들이 나중에 환호성을 올려요. 나중에 대환호성을 올려요. 야, 되는구나.
그걸 내가 낱낱이 다 적어 놨어요. 무엇이 목회? 그게 목회에요. 목회라 하는 것은 이게 교육학에 나옵니다. 스승이라 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고 학생이 갖고 있는 도발적인 무한한 잠재력에 자극제를 줘서 그 학생 스스로 본인이 자기 능력에 자기가 미치게 만들 때 그걸 교육에서 최고로 쳐주거든요.
그러니까 목회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목사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인 갖고 있는 잠재력에 자극을 줘서 교인 스스로의 능력으로 신과 접선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거예요. 그게 목회라. 자극을 주는 방법이 아까 시추봉 방법. 예상치도 못한 설마 여기서 우리교회에서 20억 나오겠나? 요번에 20억만 하면 안돼요. 콘크리트로 물 뿌려서 다져줘야 되잖아요. 한 몇 년 지나서 이번에 50억. 이번에 교육관 짓기 50억. 되더란 이 말이죠. 무리하다 싶고 교인 떠나지만 얼마 안 돼서 원상복귀 돼요. 또. 같이 사람 또 와서 과거 지 돈 낸 게 있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는 거예요. 장로들은 목회자를 원하는 게 아니고 사업가를 원해요. 그게 바로 목회고 바로 사업이에요.
그런데 이걸 누구든 할 수 있는데 단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은 도저히 못하지요. 그런데 예수를 만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든지 아직 못 만나서 예수처럼 잘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포기하고 그쪽으로 다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에 의한 심판은 이미 시작했어요. 천국, 지옥의 가름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땅에서 시작을 했어요. 마지막 십자가 지고 난 이후부터는 이미 심판이 개시되었습니다. 심판이 개시되었는데 그거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 원하는 그 기준 하나 들고 결국 계속 주님께서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들이대는 거예요. 계속 십자가 하나 들고 마지막까지.
그래서 진짜 십자가를 최후로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탈락시키는데 주님께서는 도사입니다. 어설프게 하는 것, 다 탈락시켜서 네 갈 길로 가지. 어디서 믿음도 없는 게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 네 갈 길로 가라 하면서 훌쳐내는 작업을 계속해야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끝까지 십자가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했던 것을 참 재미있는 게 15년 전에 신학생들, 목사님들 모였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다 이야기했다고. 이런 사례를 들면서 이야기를 다 했거든요. 했을 때 절대로 그런 걸 미리 이야기해서 참 고맙고, 절대로 우리는 그런 길로 안 빠지겠다고 작심들 한 사람들이에요. ( ) 그런 사람들이. 아, 저렇게 위험하구나. 복음 버리면 안 되는구나. 다들 마음에 각오와 작심을 했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마찬가지에요. 그 이야기를 들으나, 안 들으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게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에요.
그것은 바로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본색을 바꾸어서 구원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결국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이란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되지, 자기의 성질 달라져서 구원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결국은 자기 성질 그대로 가게 되어 있고 구원은 주님께서 은혜로 시키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지금 그렇게 믿는 사람 같으면 계속 구원까지 가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느끼지만 그래 확인 해볼까 하는 식으로 사는 사람 같으면 전혀 해당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자, 그럼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침 칠판이 있기 때문에 그림으로 제가 설명해 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의 그 내용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구성되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이게 점차 확대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확대되어 나옵니다. 확산되고 점점 확대되었지요. 이게 커져서 내용이 풍성해집니다.
특히 종교개혁의 성례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례, 세례와 성만찬을 가지고 성례라 합니다. 세례와 성만찬, 거기에 유아세례도 포함되는데, 세례와 성만찬에 대해서 어떤 내용을 갖고 있습니까? 라는 이 논쟁에 대해서는 옛날에 있었던 삼위일체가 그대로 또 재판돼요. 삼위일체 이론이 또 섞인다고. 옛날에 있던 삼위일체가 이 사상이 여기 성례론을 하면서 또 이것이 마치 귀신처럼 또 논쟁이 돼요. 또 피어납니다. 유티케스, 아폴로나리우스라든지 여러 가지 키릴 주장, 안디옥 학파.
삼위일체가 왜 생겼느냐 하면,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안디옥 신학과의 대결로 생겼어요. 이것 때문에 서로 논쟁 가운데 안디옥이 튕기면서 알렉산드리가 승리하면서 삼위일체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승리한 전리품으로 등장한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안디옥 신학은 튕겨 나가버리지요.
[조직신학의 고속도로]에 보면 제가 안디옥 신학의 언급을 해놨지요. 너무 함축되어서 깊은 내용에 대해선 여러분들이 모르는데. 안디옥 신학이 뭐냐 하면, 그래서 변증법, 정반합이라는 겁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뭐냐 하면, 이것부터 이야기해야. 안디옥 신학은 이것 반대하다 튕긴 사람들이에요.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뭐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냐 하면, 영지주의 때문에 발생된 거예요. 영지주의는 뭐 때문에 생겼느냐 하면, 유대교 때문에 생겼어요.
그래서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누구하나 툭 이렇게 제직회 할 때 김 집사가 하나 주장하면 괜히 미워서 최 집사가 한 마디 거들고, 김 집사하고 별로 안 좋은데 최 집사가 싫기 때문에 이 집사가 또 발언하고. 갑자기 최 집사하고 이 집사하고는 동지가 되지요. 평소에 안 친했는데 동지가 된다고.
그러니까 바리새인하고 사두개인은 별로 안 좋았어요. 왜 안 좋을 수밖에 없는 게 권력을 누가 쥐느냐?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이 싸움에서 사두개인은 눈에 보이는 행정체제 가지고 쥐고 있고, 바리새인들은 민중들의 호응도 가지고 쥐고 있는 거예요. 말씀 같으면 생활화가 되어야지, 생활화가 안 되는 말씀이 그게 형식적이지, 우리는 실제적인 실천과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이고, 니, 사두개인 너희들은 너희 혈통이나 따지고 말이지 그게 뭐냐? 서로 적이었어요. 적이었는데 이 두 적이 갑자기 누가 등장하니까 동지가 돼버렸습니까? 예수님이 등장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 때문에 이야기했냐 하면, 예수님은 바리새인 치려고 한 거예요. 물론 사두개인도 치지만. 예수님은 특히 바리새인을 치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두개인은 우리야, 뭐 성전에서 제사만 지내면 끝나는 문제지. 민중들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그것은 지 성깔대로 가는 것인데 우리가 왜 간여하느냐? 이렇게 되는데.
바리새인들은 뭐냐 하면, 우리 마음 밖에 있는 법이 마음의 할례를 받고 마음속으로 들어와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에스겔 15장입니까? 15장, 17장, 예레미야 31장에 나오잖아요. 우리 마음 밖에 있는 말씀이 되면 안 되고 마지막 때는 메시아가 올 때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바리새인 당신들이 지금이 메시아인지 마지막 때인지 아닌지는 당신이 어떻게 장담하느냐?
바리새인들이 그런 이야기할 때는 묵시적 분위기였습니다. 이 묵시적 분위기에서 튀어나온 게 뭐냐 하면, 주 개념이 곧 그리스도 개념이고, 인자 개념이고, 하나님의 아들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성경 가지고 주, 하나님 아들, 인자 그것 구분해서 이 내용이 뭐냐? 어떻게 차이 나는가? 백날 연구해도 안돼요. 그 당시 배경을 알아야 돼요. 이미 주,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 아들, 이런 개념이 풍문이든 어떻든 간에 사람들의 속에 역사적인 위기의식 속에서 이게 대량 신학적으로 유포가 된 상태입니다. 분위기가 업된 거예요. 위기의식이 조성된 겁니다.
왜 위기의식이 조성되었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를 사실은 신학교 때 성경배경사 속에서 이것이 다 정리가 되고 가르침이 돼야 될 텐데 신학교수들이 이 사람들이 놀자고 놀자 판으로 살기 때문에 그게 참 안타까운데. 그 이야기를 좀 더 해드릴까요? 더 해야 되겠지요. 오늘 이 강의가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이야기해야 돼요.
바리새인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거는 따로 놀자에요. 이게 항상 헤겔의 변증법적인데, 따로 놀자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파실이라는 에이, 대충 놀자. 이게 있기 때문에 반대해서 나온 거예요. 지금 계속 반대에다가 반대, 최 집사, 김 집사, 이 집사 반대, 반대로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역사라 하는 게. 반대하고 올라가면 그게 되면 또 반대하고 또 올라가면 반대하고 이렇게 되는 거지요.
김동리하고 누굽니까? 서정주가 우리나라의 문단을 쥐고 있으니까 거기에 반대한 게 이어령 씨가 반대해서 이어령이 나오니까 또 밑에 60대에 참여, 김수영이라든지, 신동엽이라는 시인이 와서 거기 반대하고,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것 또 반대한 게 누구냐 하면, 순수 쪽 한 게 이문열인데, 이문열 반대한 게 또 튀어나오고. 역사라는 게 있으면 가만 두질 않고 잡아 댕기는 거예요. 이근호 있으면 안티 이근호 나오고. 안티 크로스빌리지 나오고.
대충 놀자. 대충 놀자라는 것이 그냥 놀고 싶어서 노는 게 아니고, 이미 마카비 시대 때 나라꼴이 말이 아니잖아요. 지금 다 죽을 판이라니까요. 다니엘의 예언에 의하면 이미 이스라엘은 70이레 동안, 특히 대부분 62이레 동안 아예 숨죽여 살아야 될 팔자에요. 당해도 철저하게 당해야 될 팔자란 말이죠. 그래서 62이레 동안 곱게 당합시다. 하는 그 운동. 그 운동이 무슨 운동이냐 하면, 묵시운동이에요.
묵시운동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봅니까? 현실도피죠. 현실 도피적인데 현실도피라 하는 것이 너무 자기 정당화에 자기 신앙 안 지키는 것에 대한 정당화로서 많이 변질되고 말았다 하는 것이 바리새파들의 주장입니다. 그중에 진짜 몇몇은 인자를 기다리겠지요. 그게 아니고 사람이 먹고 살라고 하는데 신앙은 나중 문제 아닙니까? 신앙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신앙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그냥 세상에 적응해서 살겠다는데 니가 내 생활 책임질래?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게 진짜로 묵시를 주장했던 그 사람과 다른, 이 묵시가 뭐로 변했다? 현실 도피형으로 분위기가 바뀌니까 뭐가 정당화 돼버립니까? 현재 나쁜 놈들한테 안식일 빼앗기고, 제사 빼앗기고, 성전 빼앗긴 것이 아주 정확한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됐기 때문에 그러면 그 앞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뭐가 돼버려요? 뭐, 당연한 거 아니가? 신앙이고 뭐고 없이 하나님은 일하시고 우리는 놀겠습니다. 이게 대충 노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노는 게 아니고 그 당시 신앙을 압제했던 친일파죠. 친일파 알죠. 그 당시 친일파. 압제했던 것과 계속 결탁이 이루어지죠. 한번 결탁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뭐가 됩니까? 그게 대대손손에 하나의 권력을 승계하게 되지요. 일제 때 경찰 간부한 사람, 해방되고 경찰 고위간부 다 차지하지요. 실무자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독립 운동했던 놈들 완전히 거지되어 버리고, 50만원 연금 받고 살고, 지금 모든 국회의원, 저희 조상들 전부다 일제 앞잡이들이고.
이걸 이미 역사 속에서 물론 일제 시대 때 그렇게 된 것은 일제통치가 36년에 끝날 줄 아무도 몰랐지요. 이광수도 그렇게 누구도 지식인들 다 그래요. 이것은 영원히 이제 우리민족은 끝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미 끝난 마당에 한 구찌 챙겨서 자자손손 권력 챙긴 마치 그 당시였어요.
하나님이 인자가 구름타고, 다니엘 7장에 보세요. 인자가 뭐 타고 오신다? 구름타고 오실 것 아닙니까? 하지만 62이레 남아 있잖아요.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냥 우리는 많이 챙기고 그냥 편하게 살다가 인자 오시면, 주여, 인자를 묵시를 믿었습니다. 해서 덜렁 올라가면 되지 안 되느냐 하는 인간적인 타협책 같은 것이 있었단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뭐냐 하면, 우리가 왜 옛날에 이방민족한테 안식일도 빼앗기고 제사도 폐지되고 왜 이런 수난과 핍박을 순교자가 생기고 하는 원인을 우리가 무슨 행동 때문에 그렇게 했는가를 한번 반성해보자는 그런 반성의 기치를 높이든 그런 무리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사상은 지금 대단히 중요한 오늘날 신학을 구성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상인데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여기서 나온 게 자유의지에요. 묵시가 돼버리면 뭐가 무시가 되냐 하면, 자유의지가 무시가 돼버려요. 특히 신앙적인 자유의지가 무시되잖아요. 묵시가 발효되면 무슨 짓을 해도 오시면 되는데. 그런데 왜 묵시를 묵시로서 올 수밖에 없는가를 반성해보자 이 말입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죠.
왜 하나님께선 우리를 니 멋대로 니가 하든 나는 내 식대로 하고 니는 니 식대로 한다. 라는 그러한 꾸중의 말씀을 꾸중의 징계기간을 왜 주시게 되었는가? 니는 아직도 안 잊어버렸느냐를 따져 볼 때는 그 책임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나온 거지요.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했죠.
지금 아까 이야기했습니다만 교회, 개척교회하면서 복음 버리고 예수 버린 사람들, 그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당신, 복음 버렸습니까? 아니요. 예수 믿습니까? 다 믿지요. 그 사람들 자기는 아직도 십자가 중심이고 복음 중심이고 오는 사람들한테 그렇게 이야기 안 하는 것은 너무나 신앙이 연약하기 때문에 가르쳐 가르쳐서 나중에 십자가 중심으로 가도록 나는 중간 역할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게 교회부흥이 전부가 아니고 나는 교회부흥보다도 예수 십자가만 믿습니다. 이렇게 큰소리치는 사람입니다. 전부다. 설교에서는 그렇게 안 나오지만.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믿으면서도 자기의 모든 것은 성질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다는 이 말이에요.
그런데 십자가를 믿는다고 했잖아요. 나무 십자가 믿는 것하고 왜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가를 믿는 것하고 다른 문제죠. 그죠? 왜 예수님은 내 대신 돌아가셨는가하는 나와 결부시킬 때 십자가하고, 그냥 덜렁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하고 십자가 믿습니다하고 다른 문제다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붕대 감고 내 앞에 끄덕끄덕 지나가니까 저 사람이 다쳤다 하는 걸 내가 안다 이것하고 저 사람이 다친 것은 내가 뺑소니 쳐서 다친 것하고 다르잖아요. 그 사람 다침 속에 뭐가 포함이 없다? 내 죄가 포함된 채 그 사람을 전부다 받아들인 거고, 그냥 저 사람 다쳤구나 하고 다친 걸 믿습니다하는 건 뭐냐 하면, 나와 관계없이 그냥 그 사람 다쳐서 그 대가로 나는 구원 받는다 이것하고는 전혀 앞에 이야기하고 뒤에 이야기하고는 문제가 완전히 다른 문제거든요.
성경적으로 보면, 십자가 믿고 우리하고 이렇게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십자가 이렇게 있고, 인간 있고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성경적으로 보면. 중간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성령님이 들어간다는 거죠. 이게 성경 아닙니까?
그런데 개척교회 하면서 무당질하는 놈들은 성령을 십자가 여기에 집어넣는 게 아니고, 성령을 인간 뒤에다 집어넣죠. 중간에 집어넣는 게 아니고. 만약에 성령을 십자가와 인간 중간에 집어넣으면 성령은 십자가에서 나와 버리고, 만약에 성령께서 인간 뒤에 집어넣으면, 내가 십자가 믿고, 재림 믿고, 내가 선한 일하고, 거룩한 이 모든 것을 명령을 주는 뒷받침해주는 성령, 이렇게 보지요. 이 성령은 어디는 안 들어간다? 십자가와 내 사이에는 안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은 아니란 말이죠.
왜 그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을 거부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 중심이지,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고 본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란 말을 안 믿어요. 하나님은 하나님 편도 되지만 내 편도 된다는 거지요. 내 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이 내 편 대줘야지. 내가 십자가 믿기 위해서는 성령이 와야 십자가를 믿는다. 그 사람들은 말합니다. 성령이 와야 십자가를 믿는다. 그건 나도 동의한다. 그거는 철썩 같이 믿는다. 믿지요, 믿지.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십자가 믿도록 성령이 도와준다. 이걸 믿지요.
그러니까 그 성령은 결국 뭐냐 하면, 진짜 성령이 아니고, 인간의 종교성에서 이미지화 한 거지요. 종교성에서 나온 또 하나의 그냥 헛되고 헛되기 짝이 없는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겁니다. 저거는 인간들이 자기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개념에 불과한 거예요. 성경이 이런 상태인데 여러분, 바리새인들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현재 묵시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심판하겠다고 그렇게 된 것은, 옛날 뭔가 우리 쪽에서 잘못한 게 있다는 겁니다. 뭘 잘못했느냐 하면, 이방화된 생활.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제사 드리고, 형식적으로 안식일 지키고, 성경 아모스 봅시다.
아모스 5장에 봅시다. 4장 4절부터 읽어보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의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그리고 5장 21절에 보면,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재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걸 바리새인들이 모르겠습니까? 도사들인데. 다 알고 있어요. 지금 계속해서 반성하는 거예요. 우리는 왜 이렇게 분명히 여호와 존재를 인정하고 이거는 사두개인도 인정하고 바리새인도 인정하고 전 국민이 다 인정해요.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기 핏줄이 여호와에서 나왔거든요. 자기 피가 여호와에서 나왔잖아요. 아브라함의 족속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고 아브라함의 약속에 의해서 자손에 의해서 약속대로 열두 지파가 있었고, 열두 지파라는 게 그냥 인간의 이름 지은 게 아니잖아요. 니는 빨강해라, 파랑해라 이렇게 지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지어준 열두 지파고, 그 증거들이 성전과 제사장을 통해서 확정된 입장에서는 여호와를 절대 부인하지는 못해요. 무슨 수가 있어도 여호와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다만 여호와가 계신데 왜 이렇게 이방민족한테 수치를 당하느냐? 그것만 해결하면 되는데 해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형식으로 제사 드리고 형식적으로 예배드리고 실제로 십일조 백날해도 그건 다 안 되고. 우리 마음으로 여호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아모스 보면, 내 사랑을 알고 돌아오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당시의 권력자에 대한 질투 같은 게 있을 것이고, 권력 자본자에 대한 어떤 분노 같은 것도 있었을 거예요. 여호와 말씀대로 돌아가자. 물론 순교하겠지, 죽겠지. 하지만 옛날에는 순교하면서도 지켰더라면 하나님께서 이런 벌을 안 주실 것인데 그건 옛날이야기고, 지금이라도 우리가 순교하면서 그들과 대항하면서 버티자. 성경대로 살아보자.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소위 권력층에 있는 그런 사람들은 누가 밉겠어요? 바리새인들이 굉장히 밉겠지요. 바리새인 때문에 쓸데없는 빌미를 다른 정복하는 국가에게 줘서 오히려 핍박이 가중되면 죽어나는 건 누가 죽어납니까? 소위 믿음 좋다는 바리새인들은 믿음 좋아서 지는 좋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민중들은 생뚱맞지요. 이거는 완전히 엉뚱하게 일본 놈한테 홀대당하는 거예요. 믿음 좋으면 믿음 좋은 너희끼리 하지, 왜 생뚱맞게 민중들은 학대를 당하게 하느냐?
우리가 권력이 좋아서 권력을 쥐는 게 아니고, 대다수의 불쌍한 민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믿음을 믿음인지 아닌지 알지만 타협하기 위해서 살려둬야 나중에 메시아가 오면 이만큼 이라도 우리가 살아남았습니다. 갖다 바칠 민중이라도 있어야 될 게 아니냐 이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이겁니다. 묵시 안에서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역사는 반성의 기간이에요. 그러니까 고통이 오고 고난이 오잖아요? 고통과 고난이 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기 위한 그런 징계의 기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구약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뭘 주목하느냐 하면, 이사야 53장을 주목합니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 6절 봅니다. 거기 보면,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이 나오지요. 그가 누구냐? 그가 바로 누굽니까? 바로 마카비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신앙대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그'라는 하나의 단일인물로 대변해 주는 거지요. 장차 마지막 때가 되기 직전에 신앙 때문에 고난 받는 사람들의 모임, 그걸 그라고 집합명사로서 그렇게 보지요. 때로는 그가 단수로 되어 있고, 때로는 집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하나의 융합, 조립해 보면 그게 집합명사로 결론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리새인의 의견과 이런 신학의 개념이, 그러니까 '주'가 뭡니까? 주라 하는 것은 지금의 권력체를 때려 부수는 거지요. 주가.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누구에요? 맨 마찬가지에요. '인자'가 누굽니까? 맨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아들'도 마찬가지에요. 전부다 뭡니까?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만 구원하시는 하나님, 메시아죠. 고난 속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아무나가 아니고, 신앙으로 고난 속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자. 그럼 고난 받는 자의 대표자가 누구냐? 바리새인이죠. 바리새인 자기들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뭐라 했습니까?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못하면 천국에 못 간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신학이 대중들로부터 이미 무시 못 할 정도로 분위기가 확 퍼졌단 말이죠. 세상에, 이레 두 번 금식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살기 바쁜데. 십일조 꼬박꼬박 내고 구제하고.
그리고 특히 이사야 같은 경우에 뭣 때문에 심판 받습니까? 구제를 안했어. 뭡니까? 이웃사랑을 안 한 거예요. 예레미야 7장에 보세요. 예레미야가 가로 막잖아요. 왜 가로 막습니까? 네가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이게 무슨 성전이냔 말이죠. 오늘날 시민연대에서 하는 것과 똑같아요.
제가 크로스빌리지와 [교회의 사정과 개인의 사정] 글 올렸지요. 왜 올렸느냐? 거기에 배추이야기 나오지요. 인간이 아무리 믿음 좋고, 복음 좋고 해도 그 사고방식은 바리새인을 못 벗어나요.
참, 그게 대구의 심매동에 드림교회인가 그럴 거예요. 그 목사님의 설교 또 적어놨지요. 뭡니까? 주의 성령으로 오실 분은 오고 갈 분은 가야지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뭐 있죠. 되게 복음이라. 교인 몇 명? 3명. 김장값 보태서 배추 100포기 주니까 그것도 몇 포기는 다른 주고 했다 하지요. 참, 대단한 주의 종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합니다. 생뚱맞다. 그 밑에 개인의 사정보세요. 울면서 삼백 킬로 밤중에 새벽 몇 시에 울면서 걸어오는 그 사람. 커텐 공장하다 망한 그 사람 나와 있지요. 둘 중에 누가 주의 종입니까? 둘 다 아니지요.
왜 우리가 이 바리새인이나 성경을 볼 때 왜 깊이 있게 다 공부해야 되느냐 하면, 아무리 십자가, 복음 이야기해도 언제 이런 또 사고방식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니까. 우리 내부 여기에. 이게 불거져 나와서 성경해석 개판으로 만들고 실컷 십자가하다 나중에 인간 동정론으로 빠져버리고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철저하게 예수님께서는 딴 사람, 사두개인 놔두고 일반의 못된 세리와 창기 그런 나쁜 놈들 놔두고, 하필이면 최고의 정점에 있는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완벽한 신학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럴 정도의 최고의 바리새인에게 왜 공격합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니는 율법도 모른다고 했어요. 따라서 우리가 진짜 예수님의 종이라면 우리는 뭐 해야 돼요? 율법도 모르는 사람 돼야 돼요. 어떤 사람에게? 말씀대로 살자 하는 사람에게 율법도 모르는 사람 돼야 됩니다. 그래야 됩니다.
이 반성이라는 게 칸트 이후에 쉘링이라든지 피히테, 쉘링 이런 헤겔 이런 철학에 나가보면 이 바리새인 신학이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뭐냐 하면, 신이 있는데 신은 추상적 개념이니까 신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느냐? 반성하면서 움직인다. 이게 피히테부터 헤겔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반성하면서 결국 자아로 돌아와요. 왜? 자아 속에는 뭐가 있기 때문에? 신의 속성,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성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헤겔부터 쉘링, 헤겔의 전부다 이야기입니다.
그게 이번에 [자기구원을 위한 신학의 구조]라는데 보면 첫 번째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의식을 해서 반성을 통해서 자기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늘 반성을 하는 거예요. 반성할 때 반성의 근거는 뭐냐 하면, 색다른 경험을 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되돌아보면서 반성을 하는 겁니다. 소위 점잖은 사람, 무식한 자갈치 아줌마 같으면 돈벌러 오겠지만 그것도 약간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돈벌러오는 게 아니고 반성하러 오죠.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 반성하러 오지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에게 반성을 많이 한 사람이 바리새인들이에요. 반성을 전혀 안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 세리와 창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 얼마나 반성을 했으면 금식기도를 하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저런 내용을 전부다 알게 되면,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 측면에서 어떤 사람에게 육체적으로 힘든 고난의 시기를 주게 되면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반응하느냐면, 스스로 반성하면서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뭔가 회복되기를 기대하겠지요.
그게 상당히 어려운데 원리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선악과에서 선이라 하는 것은 특징이 뭐냐? 악을 비난해야 선다워요. 그러니까 인간 속에는 선악과를 따먹다 보니까 인간 속에 악이 있고 선도 있잖아요. 인간이 선을 알고 악을 아니까. 인간 내부에서 분쟁이 생기지요. 어떤 분쟁입니까? 나의 양심이 나의 못된 짓하는 나를 자꾸 추궁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는 거죠.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자꾸 자기를 저주하게 돼요. 자기를 미워하게 되고.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마지막에 뭐 했습니까? 뭐 때문에 자살했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선이 자기 속에 있는 악을 징계하기 위해서 자살했잖아요. 그런데 가룟 유다를 욕할 게 아니고 그런 식으로 안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되려면 기초적으로 내가 살아야 되거든요. 무조건 살아야 된다 말이에요. 내가 없어지면 안 되니까. 나는 없어지면 안 되고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된다. 살아야 된다는 이 이야기와 살려면 어떻게 돼요? 남을 피해를 줘야 되니까 상대를 피해를 줘야 되고 어떤 경우에는 사랑을 유보해야 되잖아요. 살기 위해서는 악을 저질러야 되고 악을 저지르면 선이 나무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나는. 인생은 평생 모순이에요. 살기는 살아야 되겠고 살려 하니까 악을 저지르고 저지르면 내 속의 양심이 그 악을 가만 안 두고 자꾸 나무라고. 그렇더라도 살기는 또 살아야 되겠고.
그래서 제가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했지요. 야, 공부하라 하니까 공부하고 죽으란 말입니까? 부모 자식간의 이야기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뭘 겨냥하느냐 하면, 왜 살아야 되느냐를 추궁해요. 니가 왜 살아야 하느냐를 추궁해요. 니가 왜 살아야 되느냐를 추궁하니까 여기에 답이 없어요. 인간은. 그러니까 주님께서 뭡니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하잖아요. 예수님께서 추궁하는 것은, 니가 왜 살아야 되는지를 니가 아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답이 없는 기라. 그러니까 대신 나온 게 뭐냐? 바르게 살게요. 착하게 살게요. 왜? 그러니까 착하게 살 테니까 계속 살려주세요. 말씀대로 살 테니까 계속 살려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묵시라 하는 것은, 이 테마의 결론 내려봅시다. 바리새인에 있어서의 역사라 하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될 때 이것이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되잖아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우려면 뭐는 보장돼야 됩니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무조건 존재해 있어야 되지요. 이스라엘이 사라지면 안 되잖아요.
바리새인들의 허점은 이거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우리는 유지돼야 된다. 왜?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약속이고 이삭의 약속이고 야곱의 약속이기 때문에 있어야 된다. 이것이고, 예수님은 뭐냐 하면, 새로 시작하겠다는 거예요. 새로 시작하는데 뭐로 시작하느냐?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시작하겠다. 그렇게 되려면 뭐가 되느냐 하면, 손성식 목사님이 잘 지적했는데, 묵시가 묵시적 존재가 뭘 공격하느냐 하면, 역사를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거예요. 이게 묵시의 특징이에요.
그러니까 나의 속의 선이 내 속에 있는 죄를 공격하는 게 아니고 내속의 악을 공격하는 건 우리 식이고, 그걸 뭐라 하느냐? 두 자로 하면 반성이죠. 내 선이 내 악을 공격하는 건 반성이고, 묵시 자체가 아예 너는 사람도 아니야. 라고 공격하는 것은 그게 묵시적 기능이 되는 겁니다. 이걸 바리새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진짜 메시아가 오면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알아보는 반길 수 있는 건 자기들 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니까 예수님은 이단이면 오히려 하나님의 적이며 메시아의 적이며 가짜 이단으로 오신 분이 메시아로 그들은 인정될 수밖에 없었어요. 뭐를 공격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처음부터 너희 애비는 마귀다 했어요.
너희 애비는 마귀다 이 말은 뭐냐? 만약에 마귀 새끼를 계속 키워놓으면 그건 마귀의 확장이기 때문에 그거는 일체 너희들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만약에 개척교회 해서 온 사람 보고 너희 애비, 당신은 마귀새끼다 하면 누가 오겠어요. 그 사람들은 반성하러 왔는데. 물론 무식한 사람은 돈 벌러 오겠지만 좀 고상한 복음 안다는 개척교회 한다고 반성하러 오잖아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주의 뜻을 잘못 살아서 역사 가운데 고난 받는다. 고난 받는 이유가 있다. 왜? 우리가 뜻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뜻만 순종하면 우리는 복 받는다. 이게 모든 한국교회의 이단들의 특징 아닙니까? 우리는 기복신앙 한 적 없다. 기복신앙 안 했지요. 초장에나 했지 안 하거든요. 그러면 기본 틀은 뭡니까? 기복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말씀대로 살아서 나란 존재를 계속 내 식으로 유지해 보겠다는 거예요. 한번 버틸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겁니다. 갈 때까지 가 보겠다는 거지요.
역사라 하는 것은 묵시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보고, 잘못된 사람들은. 그러나 성경적 내용은 뭐냐 하면, 묵시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고. 부정한다는 말은 없앤다는 게 아니고 죄로서 만들어서 부정하는 거죠. 그냥 부정하는 게 아니고. 없어지면 그냥 불 질러서 없어지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죄가 뭣이냐를 알리기 위해서 역사가 있어야 되죠. 그들은 죄가 무엇인지 아니까 우리는 거기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그 결과로 우리가 살자는 쪽으로 나오고. 그냥 예수님은 니가 어떻게 살아도 죄라고 지적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구약성경을 주신 것은 그를 죄로 가둬두기 위함이다 하는 것이 예수님이 바리새인한테 시비 걸면서 그것이 들통 나는 거죠.
예수님의 바리새인에 대한 공격 속에는 현재 우리가 하는 종교개혁의 반발하고 너무나 유사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이후에 제가 방금 삼위일체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삼위일체는 흐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흐름이 뭐냐 하면,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를 표방했어요. 처음에 사도들이. 그렇게 보였지요.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인데,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라 해버리면 이거는 배타적입니다. 배타적이니까 여기에 반대한 사람이 뭐냐 하면, 기존의 철학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기독교에 흡수할 수 있습니다. 철학과 기독교를 합세하자. 합류하자는 겁니다. 합류하니까 잘 들어보세요.
처음에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 1번. 두 번째 뭐라고요? 그러면 너무 배타적이니까, 사람 수가 부흥이 안 되니까. 현재 갖고 있는 철학과 기독교가 통합할 수 있다. 터툴리안 같은 경우에 할 수 있다. 어떻게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들이 아는 신은 로고스거든요. 로고스란 말은 신이 아니고 신성입니다. 신적인 요소. 신성이 로고스가 뭐 됐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본 거예요.
여기 육신이 된 것하고, 인간이 된 것하고 나중에 큰 싸움이 벌어져요. 육신이 됐느냐, 인간이 됐느냐? 이 문제에요. 초창기에는 육신이 되었다고 봤고, 오리겐 이후에는 인간이 되었다고 봤어요. 인간이 되었다고 하니까 문제가 커져 버렸어요. 완전히 난로에 바깥에서 휘발유 부은 것처럼 확 퍼져버렸어요.
그러면 인간이 돼버리면 어떻게 돼요? 인간 내부가 복잡해 버리잖아요.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걸 천하가 다 아는 것 아닙니까? 그 인간이 보통 인간이 아니고 초능적 인간이라 할 때는 뭐만 집어넣으면 돼요? 신성, 로고스만 집어넣으면 문제 끝나는 거예요. 로고스만 집어넣어서 로고스가 불멸적인 요소, 불사적인 요소. 불멸적이고 불사적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안 멸하고 안 죽잖아요. 그런 로고스가 예수님께 있기 때문에, 지금 철학과 기독교가 합류해야 하는 이유가 뭐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의 구원은 뭡니까? 죽은 문제이잖아요. 안 죽어야 된다고. 안 죽으려면 예수를 믿을 때 안 죽는 게 뭐가 있어야 돼요. 안 죽는 근거가 예수 안에 있어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 안에 뭐가 있느냐? 불멸적이고 불사적인 요소가 들어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로고스라는 거예요. 신성이죠. 그러면 구원문제에 있어서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그죠?
예수 믿으면 예수님께 흡수되고,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어서와. 너는 불멸로 들어와. 불사로 들어와. 오오, 예수 믿게 되면 예수님이 갖고 있는 속성 가운데 안 죽는 속성이 있는데 그 속성을 내가 안에 합류하게 되면 그 속성이 내 속성에 전이되면서 나도 불멸의 존재, 불사의 존재로 변하지요. 그러면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잖아요.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 또 다 잊어버렸다. 뭐냐 하면, 아까 붕대 감은 이야기 다 잊어버렸죠.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어떻게 불멸이 되는지, 예수님 십자가 어떻게 믿기만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되면 안 되지요. 그 안에 뭘 집어넣는다 했습니까? 나의 죄라 했는데 그 죄가 뭐냐 하면, 내가 십자가 믿고 내가 불멸적 존재가 돼야지, 라고 하는 그것은 어디서 나왔다? 인간의 선악에서 나왔고, 이거는 악을 집착이라는 선의 몸부림이죠. 내가 선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 아닙니까?
그 몸부림 중에 하나가 뭡니까? 내가 예수 십자가 믿고 구원받아서 나의 악을 해결해 보겠다는 사고방식. 이 사고방식 때문에 바리새인 되었고, 이 바리새인으로 인하여 누가 죽었다? 예수님 죽었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러한 바리새인들에 있던 순환구조, 논쟁이 초대교회에도 똑같이 되풀이 돼요. 해서 이렇게 합류된 거죠. 철학과 해서 구원론 쪽으로 나가니까 확실하게 구원론으로 하기 위해서는 뭐냐 하면, 왜 구원이 필요하냐 하면, 여기서 한번 보세요.
영지주의가 반박하는데, 영지주의가 구원을 시키는데 인간적인 요구나 욕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출발해요. 하나님은 뭐냐 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고 또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인데, 구원이란 뭐냐 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이 구원이라 본 것입니다.
아아, 인간의 아이디어가 단수가 높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이 붙으면 천당 가고 진노하는 하나님이 붙어있으면 그 진노를 받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진노가 사랑으로 바꿔버리면, 영지주의 입장은 그거에요.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변덕쟁이는 믿을만한 게 못돼요.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 진노했다가 헷가닥 바꿔서 사랑 바뀌면 그거는 일관성이 없잖아요. 하나님이 일관성이 없잖아요. 하나님이 사랑 같으면 사랑으로 밀어붙이든지 진노로 들이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돼요.
그러니까 진노하는 하나님이 있었다는 겁니다. 옛날에. 언제? 구약 때. 무슨 이름으로? 여호와 이름으로. 그런데 여호와 이름으로 했는데 무슨 하나님이다? 진노의 하나님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나중에 알아보니까 예수로 나타난 절대적 하나님보다 단수가 낮아. 그러니까 과장급이야. 여호와는 단수가 낮아서 뭘 모르느냐 하면, 사랑을 미처 몰랐어요. 성질만 내는 화만 내고 성질만 내는 단수가 낮은 하나님이에요.
이런 단수가 낮은 하나님을 어떻게 했다? 신약에 와서 유대인들을 통해서 했던 하나님은 이제 유대인들은 끝나고 모든 사람을 이방인들 구원하기 위해서 무슨 하나님 나타났다? 그걸 꺾어 버리고, 사랑의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왜 죽었습니까? 진노의 하나님 믿는 사람 때문에 누가 죽었어요? 진짜 사랑의 하나님 편으로 오신 예수님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살해했다 이 말은, 이것은 하나님 보기엔 적이다 이 말이죠. 진노의 하나님 믿는 사람. 그러니까 여호와 믿는 건 적 아닙니까?
적을 치우고 이젠 사랑의 하나님, 예수를 믿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이 영지주의가 말하는 사도 바울의 정신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상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두 패가 나누어져서 베드로가 최고다. 베드로, 베드로. 사도 바울은 이단이라 하고. 이쪽은 바울, 바울. 베드로 이단이라 하고.
이러한 영지주의가 나온 이유가 뭐예요? 사람들에게 설득되고 납득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그런 하나님이 아마 진짜 하나님일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전부다 교회 부흥하는 것이지요. 교회 세력 확장하는데 있어요.
쟈크 엘룰은 이런 것까지 잘 모르고 깊이 있는 건 모르고 그냥 구제를 하고부터 교회가 커졌고 따라서 복음은 포기했다. 왜냐하면 돈 이야기하는데 왜 십자가해서 당신 죄인이요 하는 말을 왜 합니까? 돈만 주면 그만 아닙니까. 그러니까 교회가 크기 위해서 돈, 구제할 때부터 이미 복음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없고 그 다음부터 복음 이야기하면 다 차 버리는데 차인 학파가 뭐냐? 안디옥 학파.
이렇게 되니까 이 영지주의에 대해서 반대해야 되겠지요? 그죠? 이러한 영지주의에서 반대하고 나온 것이 바로 아폴로나리우스,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나오는데 하나님과 예수님이, 예수님은 하나님 밑에 있는 게 아니고 처음으로 동등하는 동렬, 같은 위치에다 놓아버린 것이 바로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최초로 나옵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안디옥 신학을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영지주의를 치려고 하는 거예요. 뒤 늦게 나오는 것이 요 알렉산드리아 신학을 치는 것이 바로 안디옥이에요. 아까 했지요. 계속 뭐 하나 김 집사 이야기하면 최 집사 이야기하고 계속 니가 잘났나? 또또 튀어나오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게 신학의 역사에요.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등 되면서 처음으로 삼위일체 개념이 성립해요. 그런데 그 뒤부터는 뭐냐 하면, 동등한데 동등해버리면 로고스가 설 자리가 없고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과 뭐와 같다? 인간과 같아지려면 예수님이 인간관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가 부과돼야 돼요.
그래서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게 아니고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나온 게 뭐냐? 이게 안디옥 신학이고, 안디옥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 안에는 하나의 인격밖에 없으며 신성과 인성으로 통합되었다고 본 겁니다. 이게 유티케트 신학이에요.
그 논쟁이 바로 루터, 칼빈, 쯔빙글리 성례론에 또다시 이게 번집니다. 논쟁으로. 하나님이 몸이 되었다는 거죠.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면, 그러면 성례식 할 때 몸은 어디 있느냐? 떡이 몸이다. 루터 쪽이에요. 그건 큰 몸속에 하나의 상징이다. 보는 것은 쯔빙글리고, 성령에 의해서 그게 떡인데 몸으로 변한다. 이게 칼빈이에요. 그리고 천주교는 아예 그 떡 자체가 먹어야 된다. 루터와 천주교와 다른 점은 먹기만 하면 그게 되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먹어야 그래서 믿음이 받쳐줘야 그것이 예수의 몸이 떡으로 변한다고 보는 게 루터고.
아, 복잡하다. 이거 설명해야 돼요. 참, 내가 보니 이거 약간 어려워요. 이거 한꺼번에 다 파악을 해줘야 되는데. 방금 이야기한 것 한번 봅시다.
떡은 무조건 몸이다. 천주교입니다. 떡이 몸 된다. 떡이 무조건 몸 되는 것 맞는데 고린도에서 이거는 내 살이니, 믿음이 받쳐줘야 된다. 이거 루터입니다. 떡이 몸 되는데 ‘믿음을’이 아니고 그때 성령이 오셔야 된다. 성령이 오는데 성령이 은혜 줄 땐 두 가지 베팅이 있다. 하나는 뭐냐 하면, 말씀에 있는 것 있고, 하나는 성례식에 있다.
이거 총신에서 다 가르칩니다. 성령께서 오신 이게 은혜의 방편, 은혜의 수단, 통로 뭐냐 하면, 말씀과 성례 두 가지 있다는 거죠. 이게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 말씀과 성례 나누었잖아요. 나누니까 이걸 합치자는 쪽이 나와요. 뭐냐 하면, 이걸 안 보이는 은혜의 수단이고 계시고, 요걸 보이는 떡은 보이니까, 보이는 계시라 하자. 이게 상당히 문제가 돼요. 일단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떡 같은 소리하고 있네. 떡은 예수님을 회상하라고 예수님 몸을 회상하라고 하나의 기억하라고 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게 쯔빙글리에요. 이게 다 달라요.
여기서 왜 이렇게 우리 같으면 이거 다 무시했으면 좋겠는데. 왜 무시가 안 되느냐 하면, 그 당시가 삼위일체가 진리로 덮여 있는 상태입니다. 이거 어려운건데 잘 한번 들어보세요.
이미 삼위일체가 정착되었지요. 그런데 정착된 게 또 있어요. 뭐가 정착되었냐 하면, 교회 성례식이 정착되었어요. 이 두 정착된 사이에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여기 있잖아요. 여러분, 삼위일체를 이해하면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지. 좋아. 그러면 교회 성례식 참여하면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지.
자, 그러면 삼위일체는 아는데 성례식 참여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 구원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구원 못 받아요. 그러면 성례식 참여 했는데 삼위일체 모르면 구원받습니까? 이거는 이단이라서 구원 못 받아요. 그러면 둘 다 해줄 때 구원받는다는 것이 이미 확정된 분위기이라. 루터, 칼빈, 쯔빙글리, 종교개혁 필요 없어요. 이게 확정된 분위기에요. 교회 성례식을 포기를 못하는 분위기에요.
그러면 삼위일체에서 성부, 성자, 성령에서 어떻게 이게 나왔느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파가 네 패로 갈라졌어요. 처음에 천주교는 이렇습니다. 행하심에 의한 행함이다. 참, 말도 어렵다. 행하심의 행함 이론 가지고 이걸 설명합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 이렇게 설명하는데.
행하심의 행함이란 무슨 말이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뭐가 나와요? 은혜가 나오지요. 은혜가 우리 보고 행하라고 지시했다는 거죠. 그 지시대로 따랐더니만 행함이 나온 거예요. 그 행함이 뭐냐? 성례식이다. 그러니까 지시대로 따랐기 때문에 나는 하자 없다 이 말입니다.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뭐가 하자냐, 뭐가 잘못이냐 말이죠. 그렇게 연결시켜버립니다. 연결시켜버리면 어떤 맹점을 갖고 있느냐 하면, 삼위일체는 눈에 안 보이죠. 일반교인들이. 아까 이것도 하고 이것도 하라 했잖아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눈에 안 보이는 삼위일체는 본인이 안다하면 끝나는 거예요.
문제는 결국은 보이는 것은 뭡니까? 교회가 보이고 교회 내에서 성례식이 보이겠지요. 삼위일체는 포기하고 이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여기에 반대한 사람이 종교개혁자입니다. 심사해서 하겠다. 그냥 세례 받고, 태어났다. 세례주자. 성만찬 떡 먹었나? 구원받았다. 천주교는 쉽습니다. 떡만 먹으면 돼요. 그러나 일반 집사나 일반 평민이 주면 안 되고, 신부가 줘야 됩니다.
그래서 루터가 천주교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어이, 신부야. 와. 네가 집례하는 거, 그거 정당하냐? 집례자를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하니까 천주교에서 뭐라 합니까? 우리 집례자 ... 곤란하거든요. 신부가 자기 집에서 뭘 했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신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신부는 아무나 안 되기 때문에 신부는 그럼 누가 돼야 됩니까? 사도 베드로의 계열에 해당돼야 신부가 되죠.
그러니까 여기서 루터가 반대하고 하는 말이,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도입하는 거예요. 인간 빼고. 그러니까 어떤 인간이든 상관없이 성령으로 하면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칼빈이 또 뒤바뀝니다. 어떤 인간도 하면 교회 사찰 됩니까, 안 됩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반대하니까 천주교가 말을 바꿔서 신부가 한다 하다가 그 다음부터 뭐로 완전히 바꾸었냐 하면, 신부가 사람에 상관없이 집례자가 누구냐 상관없이 성만찬 자체로서 효력을 본다고 이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천주교에서.
그러니까 뭐는 포기해 버리고? 신부가 집례하는 그건 포기하되 뭐는 포기 안 하고? 무조건 성만찬 떡은 무조건 예수님 몸이다 이건 포기 안 한 거예요. 그럴 때 루터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떡이 몸 같으면 그러면 주님의 몸은 또 어디 있느냐? 편재된 몸과 떡 안에 있는 제한된 몸이 한번 구분해 보라. 이렇게 나왔어요. 그러니까 삼위일체 논쟁이 또 벌어지는 거예요. 몸이 두 개 되어 버렸어요.
신학대학원 1,2학년 때에 교수도 모르고 학생들도 모른 채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이 교회 머리다 하는 것 있잖아요. 예수님이 머리다, 몸이다 하는 것 있잖아요. 이거 이야기할 때 아무도 거론하지 않아요. 왜? 양쪽 다 쉬쉬 하기로 타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어디 있느냐? 말이에요. 머리만 있고 몸은 어디 있느냐?
그래서 루터교에서 나오는 성경구속사 교재 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베델 교재 마지막 그림이 뭔 줄 알아요? 사람이 하나하나 모여서 하나하나 보니까 사람이라. 근데 전체적으로 보니까 거대한 몸이 되고 머리 부분은 예수님이 되고 이게 마지막 때 요한계시록의 예수님의 신부다. 양봉하는 사람, 벌 붙었을 때 그 모습해서 이거는 완전히 SF영화에 나오는 마징거 Z 합체, 독수리 오형제 합체하는 것 같아.
합체를 가지고 합체되었다 이걸 가지고 루터는 뭐라 하느냐? 연합이다. 연합인데 혼합이 아니고 연합이라는 거예요. 왜 이런 자꾸 아이디어를 내냐 하면, 이미 성만찬이 성례식 이것이 이미 대중들에게는 그거 참여 안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게 확정된 상태기 때문에 그들은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죠. 그걸 자꾸 설득해야 되는 거예요. 자꾸 납득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봅시다. 성경에서 세례라 하는 것은 그냥 연합이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여기에 교회도 안 들어가고 인간도 안 들어갑니다.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 안’이 들어가요. 예수님 안은 다른 말로 하면, 구약적으로 하면, ‘언약 안’입니다. 언약 안을 하나의 단편적인 예를 든다면 어린양, 유월절 안에 이렇게 보면 됩니다. 어린양 문설주에 바른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이걸 누가 실시하느냐 하면, 중요한 것은 문제가 뭐냐 하면, 이걸 우리가 실시하자. 이렇게 나와요. 우리가 실시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뭔가 해줘야 그걸 바탕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줘도 은혜 주는 기지, 우리가 개뿔도 아무것도 안 하는데 은혜가 줄 리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성례식도 안 하고 세례식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은혜가 도대체 도착할 지점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 주려다가도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냥 가버린다는 겁니다. 뭐라도 폼을 잡고 있을 때 캐처가 앉아 있어야 공을 잡을 수 있지, 이리 가고 있을 때 공 날아오면 받지를 못한다는 거죠. 도대체 이 사람들이, 신학공부하다 보면 이 사람들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뭘 하겠다는 겁니까? 도대체 신학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이 사람들이.
이들은 말합니다. 오늘도 사이비 목사도 말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라는 게 아니고,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한다고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가 설명한다. 맨 날 그렇게 핑계를 대는데. 구약의 언약을 알면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잖아요.
더 쉽게 합시다. 홍해가 갈라지는데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까? 이것은 뭔 뜻이냐 하면,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안 걸어가면 구원 안 됩니까? 인간 쪽에선 안 걸어가면 구원 안 되지요. 그죠? 안 그러면 애굽 사람 돼버리니까 안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적으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뭘 하시느냐 하면, 이들이 안 걸어갈 수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걸 모른다니까.
빌립이 내시를 만났잖아요. 내가 뭘 받았습니까? 세례 받았지요. 세례, 이거는 필요 없다. 이랬습니까? 어, 물 있네? 나한테 세례 줘. 물 찍어 바르려고 환장한 사람이 아니고 나 뭐하는 사람이다? 예수 이제 믿기로 작정한 그것이 피할 수 없는 도대체 그건 피할 수가 없는 이야기다 말이죠. 어찌할 수 없는 이야기에요. 뭐, 내시님. 와. 그거 세례 안 받아도 구원받습니다. 이럴 필요가 없다니까요. 본인 받겠다는데 주지 뭐. 아니 받겠다니까 주는 게 아니고 예수 믿겠다니까 주는 거예요.
성령세례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물세례는 인간이 하는 일이다. 이 자체가 말이 안돼요. 물세례를 입욕하게 하신 그 모든, 물세례도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게 진짜 자기 죽겠다고 ... 이게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것조차 누구 소관이다? 성령께서 안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뭐냐? 고린도전서에서는 세례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바로 홍해 건너가는 걸 고린도전서 10장입니까? 홍해 건너가는 것을 표현했다고. 너희 세례 받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이게 언제까지냐? 성경이 확정될 때까지입니다. 계시가 확정될 때까지입니다. 사도가 있을 때 세례가 의미가 있어요. 왜냐하면 사도는 12지파의 대표하고 이것은 바로 구약의 언약의 연속성을 말하거든요. 열두 지파가 있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했죠. 다시 이야기할 필요 없죠. 이스라엘은 있어야 돼. 라고 바리새인들이 주장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그따위 이스라엘은 없애버리고 이스라엘 누가 만든다? 내가 만든다. 나다나엘아, 니가 참 이스라엘이구나. 예수님이 만드는 거예요.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열두 지파를 가지고 만들었어요. 지금 우리교회에서 열두 지파합니까? 안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왜 합니까? 그것은 이벤트에요. 뭘? 성경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옛날의 구약의 언약을 이룬다는 걸 보여준 이벤트를 벌이신 거예요.
호산나라는 것은 시편 118편의 이야기입니다. 호산나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루신다는 뜻이에요. 호산나를 이룰 것이다. 할 때는 호산나를 이야기하면 안돼요. 다 이루었을 때 호산나가 나와야 됩니다. 정말 기가 막히게 다 이루어졌구나, 할 때만 호산나에요. 될 걸? 앞으로 돼야 돼. 할 때는 호산나 말하면 안돼요. 과연 당신이 오시는 그분이시군요. 할 때 호산나 되거든요. 그때 예수님은 나귀 탔고 이쪽은 누가 탔습니까? 환영하러 나온 마중 나온 사람 있지요. 이 자체가 하나님 하신 이벤트입니다.
지금 호산나 합니까? 지금 옷 벗어 깔까요? 누가 목사 오는데 깔까요? 지금은 뭐만 있으면 돼요? 성경 있으면 돼요. 성경은 뭘 지향하느냐? 십자가로 끝나 버려요. 모든 이런 이벤트, 결국은 모든 이적은 최후의 이적은 요나 이적밖에 없는데 그 이적은 뭐냐? 십자가로 끝납니다.
그래서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하노라 하면서 사도 바울이 뭘 보태냐 하면, 나는 세례 주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세례 주려 함이 아니고 세례 말고 뭐다? 복음이다 말이죠. 그럼 복음에는 뭐가 포함이 안돼요? 세례가 포함 안 되지요. 그럼 세례 없앨까요? 그런 뜻이 아니고, 세례라 하는 것은 복음을 이야기한 사전의 이벤트했던 것이다. 어디까지? 사도시대까지. 성경이 확정될 때까지.
주가 오실 때까지 기념하라고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와 있지요. 성례식을 잘못 참석한 사람은 두 가지 해당돼요. 첫째는 뭐냐 하면, 아팠던 경우. 성례식을 잘못 참석했더니만 아팠다. 또 한 사람은 더 심한 사람은 죽었다. 성례식이 그 당시 무슨 역할을 했느냐 하면, 아프게 하고 죽게 한 역할 했죠.
그러면 성례식은 무슨 역할입니까? 성례식은 계시의 역할 했고, 그 계시는 유효성 있는 계시에요. 그냥 말만 계시가 아니고 실제 유효성이기 때문에 아팠고 죽었잖아요. 이 사람들이 왜 아프고 죽었습니까? 구원시키기 위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이 사람들이 아프고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무슨 이벤트냐 하면, 이것이 주님께서는 무슨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을 움직인다는 것을 실제로 그들에게 보여주는 주께서 일으키신 일들입니다. 실제로.
뭘 기념하라? 성례식을 기념하는 것도 아니고, 이걸 기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십자가 죽었다는 걸 기념하는 거예요.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성경은 뭡니까? 십자가 중심으로 십자가를 기념하는 그런 식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도가 예언과 방언, 통역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예언과 통역, 방언들이 그렇게 많았지만 이것은 옳은 예언, 옳은 방언, 옳은 계시라고 측정하는 자격자는 그 당시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었고. 그러니까 제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게 뭐냐 하면, 이 이야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총신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은혜를 주시는 방편이 말씀과 성례라 했을 적에 제가 방금 이렇게 했잖아요. 말씀은 성경말씀이니까 새로 추가할 수 없고, 뭐는 할 수 있다? 성례는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성례가 되면 천주교가 되잖아요. 그래서 천주교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칼빈은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우리가 하는 성례가 아니고, 이거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성례로 보는 거예요. 우리가 이걸 하면 은혜 오는 이런 식으로 교리를 만든 게 아니고, 이거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웠다고 보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눈에 보이는 은혜의 수단으로. 그래서 함부로 떡을 먹지 말라 이 말이에요. 함부로 떡 먹으면 아픈 수가 죽는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거기다가 거기에 대한 간증들이 몇 개 나와 있어요. 어떤 목사가 노회에서 성찬식 하다가 얼마 전에 죽었다. 이런 게 나와요.
그렇게 되면 뭐 되냐 하면, 아까 같이 똑같아요. 말씀은 믿는데 십자가는 믿는데 성례 안 행하면 은혜 못 받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이게 아무도 이야기 안 해 줘요. 아무도 이야기 안했다고.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형편 되면 둘 다 해도 좋은데, 형편이 안 되면, 예를 들어서 감옥소에 있다든지, 감옥소에 있으면 성례식 안되잖아요. 목사가 못 오잖아요. 형편이 안 될 때에는 이건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이걸 안 했기 때문에 은혜를 열 개를 받을 것을 이걸 안 했기 때문에 다섯 개 밖에 못 받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모일 때마다 늘 해야 돼요.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늘 했다고요. 초대교회가 모일 때마다 한 이유가 뭐냐? 성례식 하라고 모인 게 아니고 성례식 중심으로 뭘 보여주느냐 하면,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모일 때마다 사도의 편지가 회람되었고 그때마다 그 말씀과 그리고 실제로 그 당시 떡을 떼고 피를 나누면서 아, 이 모든 말씀은 핵심이 뭐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죽으심이 복음의 능력이라 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걸 위해서 그들은 모였고 떡 떼면서 말씀 들으면서 결국 두 개를 결부시킨 거예요. 초대교회는.
그런데 그것이 핍박받는 과정에서 성례가 원활하게 되질 않았어요. 특히 요한시대가면 엄청난 핍박을 받으면서 마지막 사도를 끝내면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사도의 편지, 요한계시록. 성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니가 어떤 악마의 666받지 말고 성례식을 행하라. 이게 아니라 요한 편지를 어떤 경우라도 요한 편지가 맨 성경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 성경 말씀을 위로 받으라 이렇게 되거든요. 어린양의 피로서 됐다.
그러니까 나중에 성경에 요한계시록에 와 보니까 이 피, 어린양의 피라는 것, 몸이라는 것이 결국은 현재 묵시적인 존재,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동안 일을 벌려왔던 임시적인 일이었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다 밝혀졌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에 있는 어린양의 피로서 말미암아 땅에 있는 사람이 하얗게 흰옷 같이 어떻게 됩니까? 희어졌잖아요. 지금 하늘에 가신 어린양 피 때문에 지상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교회도 못 나가죠. 감옥소에 간 사람이 무슨 교회 갑니까? 교회도 못나가고 지금 사자굴 간 사람이 성만찬, 사자굴 앞에서 떡 뗄까요? 아무것도 못해도 그들은 뭐다?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다면 옛날에 이야기했던 그 자체가 성례지요.
성례가 뭐냐 하면, 성령에 의해서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언약 안에서 어린양의 피로 하나 되듯이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벌어진 성례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가 성례를 행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행하신 성례, 그러니까 그 피로 인하여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뭘 바라본다? 피를 바로보기 되었다. 이 자체가 성례에요. 늘 주님의 피를 바라보면서 그분의 공로를 생각하면서 그 자체가 성례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도 환난이 심하니까. 어디서 떡 떼고 모여서 형식적으로 잘 씻었습니까, 주스입니까, 따질 문제가 아니라니까. 집사가 왜 그래? 이거 따질 문제가 아니라니까
말씀이 완성되었다 이 말은 말씀이 은혜가 나타나는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은혜 준다 이 말은 맞아요. 이 말은 맞는데 그전에 뭐가 빠졌어요. 뭐가 빠졌느냐 하면, 성령께서 은혜를 준다 하니까 은혜를 가지고 여기에서 정죄 기능이 없는 것처럼 고발 기능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아, 말씀 하면 복 주는구나.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이 말씀의 완성을 가지고 우리가 인간들의 모든 행함, 행함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 의. 이 모든 교회, 교회 부흥되는 움직임 이 자체를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걸 전부다 고발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앞에 뭐가 없어야 됩니까? 성령이고, 성만찬이고 이런 것들이 형식적인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을 옹호할 필요 없지요. 세례주면 주는 거지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와서 목사님, 제가 은혜 받고 세례 받고 싶습니다. 주세요. 주되 그것이 정기적인 성례식을 했기 때문에 성례식의 일부가 아니라 주께서 말씀 가지고 했던 말씀의 일부로 보자 이 말입니다. 이걸. 인간이 행한 성례식의 일부가 아니고 말씀의 일부로 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세례하면 세례 줄 수 있고, 그리고 딴 거 뭐 하고 싶다 하면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말씀이 스스로 지금 모든 일을 실시하신다. 이것만 되면 이렇게 되면 교인들은 자기 자랑을 자기 업적을 쌓을 틈을 주지 못하지요. 나, 이 교회에서 성례식 열 번 했다든지, 스무 번 했다든지 그런 걸 틈을 줄 필요 없어요. 나는 이 떡을 뗄 때마다 여기에 의미를 두는 나 자신이 미워진다든지, 내가 이거했기 때문에 씻어진다는 그러한 미신적인 것이 싫어진다든지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성례식은 떡을 떼는 성례식보다도 차라리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 해물탕 앞에 두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그것이 주께서 이루어지는 옛날 그때 그 당시의 성만찬입니다. 옛날 고린도전서에 잇는 성만찬이에요.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 생각하고 같이 식사하고, 식사 안 해도 뭐, 다시 떡을 떼고 고스톱까지는 곤란해도. 아무튼 그 형제의 모임이 거기서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이 생각했던 기념하는 내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그렇게 해요.
왜 삼위일체가 여기다 또 덧대어서 몸은 어디 있느냐? 여기 있느냐? 니가 유티케트다. 아니다. 나는 안디옥파다. 싸움 할 필요 없이 이 모든 것은 다 설득하려고 사람들 포섭하기 위한 하나의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하려는 그러한 지나지 않는데, 이제는 주님 측면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지금 벌이고 있는 이 모임도 하나님의 성례식인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만약에 혹시 교회에서 목사님, 애 낳았는데 세례주이소. 하면 주세요. 줄 때 무슨 마음으로 하느냐? 그리고 그때 성례식의 의미를 해서 복음적 의미를 해서 그걸 뭐, 우리교회는 성례식 없습니다. 선포해서 그것 또 자랑이나 한 것처럼 되게 복음적인 것처럼 까불 것이 아니라 본인이 정말 그런 형식이라도 요구된다 할 때는 하지만 아마 그 사람 두 번 다시 그런 것 할 사람 없을 거예요. 누구나 그런 걸 겪기 마련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왜냐하면 사람은 아무리 이렇게 복음 하지만 완벽하지 않거든요. 우리가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가도 또 무슨 미신적으로 나는 술은 안 마신다. 나는 이 비디오는 안 봤습니다. 이렇게 또 성례식 비슷한 게 있다하니까. 나는 만두부인 2까지는 봤는데 3은 안 봤습니다. 이런 되도 않은 자기 나름대로 있다고요. 그런 것들 다 부질없고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는 그 자체가 성도라 하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인간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 인간의 정신이 관심사가 엉뚱한 데 가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내가 뭘 해야 주님의 은혜를 독점하고 소유하느냐에 정신이 팔려있는 철없는 우리를 주께서 이제 바꾸어서 늘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 생각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