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식 김해에서 버스를타면
구포까지 비포장 신장로라 키가큰
나로선 환기통에 머리를 두고
교통부끼지 덜컹그리는 버스속에
生 故生 하던때가 추억으로 남아
있고 시내버스는 통학시간때는 앉은 사람이 가방을 받아주지 않으면 몸과 가방이 따로 놀고 어쩌다 자석에 앉아을땐 무릅에 가방을 포개받아 가방무개에 다리에 쥐가 내릴때도~~
사진을 보니 잠시 그시절에 생지옥 버스가 추억으로 남아있어서
올려봅니다.
-신장로-
부산 시내에서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구포대교를 건너면 도심과는 사뭇 다른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한때 김해평야의 중심부로, 부농(富農)의 자긍심이 대단했던 지역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고, 이후 개발시대에는 오히려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시절을 하소연하며 살았다.
이곳은 지금도 1960년대 후반의 풍경에 갇혀 있는 '신장로마을'이다. '신장로'란 명칭은 지난 1933년 3월, 당시 김해 대저와 부산 구포를 잇는 동양 최장의 구포다리가 건설되면서, 마을에 '새 길이 생겼다'는 한자어로 '신작로'(新作路)란 이름이 지어졌다. 그것을 사투리 심한 주민들이 쉽게 '신장로'(新長路)로 불렀다. 원래 낙동강을 따라 흘러온 모래가 퇴적돼 형성된 '대저도'(大渚島)가 위치한 지역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지리지에 '대저도에 국농소(國農所)가 있었고, 백성들이 들어가 산다'는 내용이 있는데, 조선 세종조 이전부터 주민들이 생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치해 일본인을 이주시켜 낙동강 치수사업을 시작했다. 또 1934년 낙동강 제방공사와 대저·녹산수문을 완공해 김해평야를 독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지역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생계를 위해 제방을 쌓는 고초를 겪었다. 이런 영농기반은 해방 이후에도 신장로마을을 중심으로 질 좋은 쌀과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저배' 등 특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고,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로도 크게 발전했다.
신장로마을에는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자원이 많다. 구포다리가 생기기 전까지 인근의 서연정에는 구포와 연결된 나루터가 있었고, '섬장'으로 알려진 유명한 '대저장'도 섰다. 장날이면 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가축, 갈대자리 등 특산물이 거래되고 소싸움, 윷놀이, 장터국밥으로 시끌벅적한 큰 장이 펼쳐졌다. 지금도 옛날 규모는 아니지만 1, 6일이면 으레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로 난전이 열리고 어물전을 펴는 10여 명의 촌로들은 '사덕시장'을 지키고 있다.
우리 과거의 수난사를 느끼게 하는 흔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주민들을 착취한 일본인 지주들이 거주하던 가옥과 창고, '대저배'를 저장하던 곳간들이 원형을 유지한 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최근 부산시는 일본식 가옥인 '낙동강칠백리 식당'을 근대건조물로 지정해 역사적 자원으로 남겼다.
이 지역은 유명한 가곡 '구름', '그네'를 작곡했고, 지휘자 금난새 씨의 아버지인 음악가 금수현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1919년 7월 22일 이 지역에서 태어나 대저공립보통학교와 부산제2상고를 다니며 낙동강의 수려한 물길과 아름다운 자연을 음악에 담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선생의 생가가 있던 집터 바로 앞 낙동제방에는 선생의 아들인 금누리 씨가 디자인한 노래비 '그네' 가 세워져 있어 선생의 옛 추억을 상기시키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도시는 서로 차별화하고 특화하기 위해 지역적 특성과 자원을 찾아 스토리텔링을 억지로 만드는 추세다. 그러나 신장로마을은 주변에 잘 조성된 낙동제방과 대저생태공원, 아름다운 벚꽃 길, 오랜 전통의 사덕시장, 근대건조물로 지정된 일본식 가옥 등을 고루 갖추고 있다. 여기다 이제 '금수현 음악거리'로 조성할 가능성도 있으니 앞으로 '잊혀진' 신장로마을이 아니라 '새롭게' 거듭나는 마을이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부산시와 강서구청도 신장로마을이 가진 '이야기'에 대해 살짝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