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서원: 尊賢養士 스크랩 송시열 3 ... 萬東廟
이장희 추천 0 조회 28 14.09.16 16: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만동묘(萬東廟)

 

 

 

 

 

 

 

 

 

만동묘(萬東廟)는 1703년,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 준 明나라 황제 신종(神宗)과 그의 손자이며 마지막 황제인 의종(懿宗)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만동묘의 위치는 동천구곡(洞川九曲) 중 제3곡인 읍궁암(泣弓巖) 위쪽에 낙양산(洛陽山)을 배후로 하여 北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정에서는 明에 대한 報恩의 義理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만동묘를 보호해 주었다. 

 

 

 

 

 

 

즉, 묘우(廟宇)의 수호와 제향(祭享)에 관심을 표명하였고, 수직사(守直使)를 임명하거나 전결(田結)을 주기도 하였다. 봄과 가을의 제향에는 큰 성황을 이루어 유생을 비롯한 촌민, 수령 등 각계 각층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만동묘의 위세가 날로 증대해 그 폐해가 막심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 자성지폐(紫盛之弊)는 물론이고 免稅田이 확대되어 국가의 경제적 손실이 커지고, 免役이 인정되는 수직사를 지원하는 자가 늘어 軍役의 기피현상이 나타났다. 이 후 대원군의 집정시기에 철폐되었으나, 얼마 후에 최익현 등의 상소로 다시 복귀하였다가, 일제시대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하지만 근래 만동묘정비가 출토되어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하였으며, 충청북도 문화제로 지정되었다.

 

 

 

 

                           만동묘 입구의 하마비(下馬碑)와 흥선대원군의 수모

 

 

 

 

 

만동묘의 입구, 길 양쪽으로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중국의 황제(神宗)과 송시열을 모신 곳이니 말에서 내려 걸어 가라는 뜻으로 서 있지만, 일반적인 하마비의 모습과는 다르다. 이 곳에서 고종황제의 아버지인 이하응(李夏應 .. 흥선대원군)이 대원군이 되기 전에 화양동에 사는 이준령이라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가  이 곳을 지나게 되었다.

 

 

하마비 앞을 지키고 있던 빈(賓)씨 성을 쓰는 사람이 이하응이 무심코 말을 타고 그냥 지나치려 하자 말에서 이하응을 끌어 내리고 하는 말이 ... " 만동묘 앞을 무엄하게 말을 타고 지나 가려 하였으니 엎드려 절을 하고 지나가라! "고 하였다. 대원군을 두들겨 팻다는 얘기도 전해 온다.

 

 

이러한 봉변으로 이하응은 훗날 대원군이 되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는 다음과 같다. 대원군이 되자 이하응은 화양동의 빈(賓)씨를 한양으로 불러 올려, 대원군은 빈씨에게  " 지금도 나를 말에서 다시 끌어 내리겠느냐 ? " 고 물었다.

 

 

이에 빈씨는 대답하기를 ... 天子의 명이라면 지금도 그리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대원군은 기가 막힐 노릇이기는 하나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벌을 주기보다는 상을 주어 내려 보냈다고 한다.하여튼 당시 만동묘의 위세와 그에 따는 폐해는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계단에도 그렇게 깊은 뜻이....

 

 

 

 

만동묘(萬東廟)에 오르는 계단은 무척 좁고 가파르다. 명나라의 두 황제를 모신 곳이니 앞으로 걷지 말고, 옆으로 조심그럽게, 경건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라는 의미...  쉽게 말하면 그야말로 게걸음이다. 뼈 속까지 스며든 모화사상(慕華思想)... 이러고도 이 일대를 민족 自尊의 유적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랑케라 멸시하며 淸나라를 배척하는 것이 민족자존의 상징인지...淸의 배척은 바로 明나라에의 尊崇에 다름아닌데...남한산성에도 민족자존의 상징이라는 안내문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이 것도 역사이니 보존할 필요는 있지만, 민족자존의 성지는 아닐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봉변

 

 

만동묘 입구에 하마비를 무시하고 말을 타고 지나려던 흥선대원군은 이 계단에서도 봉변을 당한다.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오른 것이다. 이를 본 만동묘지기는 대명황제묘 앞에서 감히 부축하여 올라간다며 대원군을 발로 차 굴러 떨어지게 하였다. 물론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기 전의 일화이다.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어 첫번째 조치가 서원철폐령이었다. 이하응의 이러한 개인적인 봉변 경험도 작용하였겠지만, 당시 서원의, 특히 만동묘와 화양서원의 폐해는 극심?다. 오죽하였으면 삼정승(三政丞)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유행하였겠는가..

 

 

 

 

 

 

 

 

 

 

                                                          복원 이전의 만동묘(萬東廟) 터

 

 

 

 

 

 

 

 

 

 

 

 

 

 

 

 

 

                                                                     만동묘의 유래

 

 

만동(萬東)이란 물이 만구비를 꺾어 흘러 마지막에는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로 존명의식(尊明意識)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 본 뜻은 중국의 힘은 항상 동쪽으로 흘러 조선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즉 宣祖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말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당이나 서원은 햇볕이 잘 드는 남향,동향 또는 동남향으로 세우는데,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굳이 北向으로 지었다. 즉 중국을  바라 보는 방향이다.

 

 

 

 

 

 

 만주족인 淸나라는 明을 정복하기 이전에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일으켰는데, 이 만동묘는 明을 정벌하고 조선까지 침략한 이민족,오랑케인 淸을 사상적으로 부정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숙종대 문인, 민정중(閔鼎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최후의 황제인 의종(懿宗)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의 글자를 얻어와서 송시열에게 주었는데, 송시열은 1674년(현종 15)에 이 글씨를 화양리의 石壁에 새긴 뒤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국문을 받기 위하여 유배지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다가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는데, 송시열은 사약을 받기 전에 弟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서면으로 명나라 神宗과 의종(懿宗)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부탁하였다. 만동(萬東)이란 이름은 권상하(權尙夏)가 宣祖 御筆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것이다.

 

 

 

 

 

 

 

 

 

                                                               

                                      만동묘정비   萬東廟庭碑

 

 

 

송시열이 죽은지 400주년이 되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그를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이며, 뛰어난 정치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선 후기의 정치를 당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일등공신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송시열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는 당대에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의 의도적인 왜곡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일제의 역사 왜곡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통치하면서 그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한다. 일제는조선 멸망의 원인을 끊임없는 붕당간의 싸움 때문이며, 그 싸움의 중심에 있던 老論에게 그 책임있다는 것이다. 일제는 붕당정치를 부패와 事大의 상징으로 폄하하면서, 송시열을 당쟁을 이끄는 당파의 괴수로 묘사하였다.

 

 

송시열위 각종 비갈(비갈)에 표현된 " 유명조선(有明朝鮮) "은 자주의식의 상징으로 배청(排淸)의 의미를 지닌 것임에도, 일제는 이를 명나라에 소속된 조선의 의미로 오도하여 시대의 상징으로 왜곡시켰다. 사실 배청사상은 항일사상과 맥이 통할 수 있는 조선의 자주정신이기에, 위협을 느낀 일제와 친일파 등이 이를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日帝의 송시열 유적 파괴

 

 

 

일제의 역사 왜곡은 이론작업에 그치지 않고, 송시열과 관련된 문화재의 훼손으로 이어졌다. 우선 화양서원은 전국 유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1년 3월16일에 훼철되어, 講學의 건물들이 사라졌으며, 묘정비(廟庭碑)는 땅 속에 묻히게 되었다.

 

 

만동묘 역시 1908년 훼철되고 그 재산은 일제에 귀속되었다. 이에 대하여 유림들은 "존화계(존화계)"를 결성하여 비밀리에 제사를 올리는 등 명맥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1937년에 일제는 관련 儒林들을 구속하고, 위패와 제구는 불살라 버렸으며,

 

 

묘정비(廟庭碑)도 "명(明)"자가 있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징으로 쪼아져 훼손되었다. 1942년에는 건물들이 불살라지고,  묘정비를 아예 땅 속에 묻어 버린다. 그리고 1943년에 이르러서 만동묘는 완전히 철거되었다.

 

 

 

 

 

            日帝에 의하여 碑文이 징으로 쪼여진 비문 .. 明나라에 관한 부분은 제외되었다.

 

 

 

 

 

 

 

 

 

 

 

 

 

 

 

 

 

 

 

 

 

                                             승 경 가  昇 卿 歌

 

 

 

무보다 문을 숭상하던 조선왕조 시절, 아이들이 부르며 놀던 노래를 승경가(승경가)라고 한다. 권력의 실재에 따라 벼슬자리의 높낮이를 매긴 옛 동요는 당시의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

 

 

모화(慕華)사상이 사회의 저류에 흐르던 세도정권 시절..임진왜란 때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明나라의 신종(神宗)을 제사 지내던 만동묘(萬東廟) 묘지기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