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북정맥의 끝자락으로 지기(地氣)가 왕성하다
종로구 인의동(仁義洞) 48- 2가 되는 효성 주얼리 시티 터는 한북정맥이 마지막 숨을 고르는 지맥 끝자락을 점하고 있다. 내룡(來龍)은, 우리나라의 시조산(始祖山)이 되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출맥(出脈)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금강산(金剛山)에 이르기 직전 추가령에서 크고 웅장한 가지 하나를 서남쪽으로 분기(分岐)하였는데, 이 맥(脈)이 한북정맥(漢北正脈)이다. 한북정맥은 평강 백암산(白岩山, 1110m)을 지나, 대성산(大成山, 1175m)과 백운산(白雲山, 904m)등 크고 작은 여러 연봉(連峰)들을 일으키며 진행하여 서울 어름에서 이 터의 태조산(太祖山)인 도봉산(道峰山, 739.5m)을 웅장하게 솟구친다.
다시 이 맥은 우이령 고개를 크게 과협(過峽)하고는 또 하나의 위용을 과시하는 삼각봉(三角峰)인 북한산(北漢山)을 일으켜 세워놓고, 크게 기복굴곡(起伏屈曲)하여 남서쪽으로 진행한다. 행룡(行龍)하던 연맥(連脈)은 크게 몸을 솟구치면서, 보현봉(普賢峰)과 형제봉(兄弟峰)을 일으키고, 북악터널이 지나는 정릉고개를 과협한 뒤에 북악스카이웨이가 지나는 도로 부근에서 무명봉(328m)을 기봉(起峰)시키고, 남으로 진행하여, 재차 머리를 치켜세우면서 서울(한양)의 진산(鎭山)인 북악산(北岳山, 342.4)을 일구어놓았다. 여기서 한 맥이 남동쪽으로 진행하여 이 터의 주산(主山)인 응봉(鷹峰)을 일으켰는데, 기복(起伏)과 위이굴곡( 屈曲)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을 포옹하고, 마지막 한북정맥의 종단(終端)인 종묘(宗廟)를 갈무리하였다. 그리고, 종묘에서 동쪽으로 나간 한 자락의 은맥(隱脈)이 지기(地氣)가 왕성한 이 터를 일구어 놓았다.
2. 인의동(仁義洞)의 동명(洞名)
이 터를 관할하는 인의동의 입지는 성균관(成均館)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사학(四學)의 하나인 동학(東學)과 관련하여, 유학(儒學)의 대강(大綱)을 지명으로 표기하여, 인의(仁義), 효제(孝悌), 충신(忠信), 예지(禮智) 등의 동명(洞名)이 생겼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인의동이 된 것이다.
인(仁)이란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의(義)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인데, 오상(五常)에서 나온 말이다.
인의동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자연부락을 이루어, 가정동(嘉井洞)은 더운 우물 부근에 작은 우물이 있다 하여, 개우물골이라 불렀으며, 연지동을 연지골이라 하고, 훈정동을 후정동(後井洞)이라 불렀다.
이 터는 예전에 배고개가 있어 '배오개' 혹은 '이현(梨峴)' 이라 하였으며, 배오개는 일명 도깨비고개·백고개·백채·배고개·이현 등으로도 불렀는데, 인의동 112번지 동쪽(인의동 48번지로 이 터임)에 있던 고개 이름이다.
이 고개는 배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어 배나무고개·이현이 되었다고 하고, 다른 설은 숲이 무성하고, 인적이 뜸해 짐승들이 들끓자, 대낮에도 혼자 넘지를 못하고,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백 명을 채워 넘은 고개라 하여 백고개로 불렀다고도 한다.
3. 인의동 48 번지 터
-어영청(御營廳)
이 터에는 조선 후기 5군영(五軍營)의 하나로, 수도 방위와 왕실 호위를 맡았던 어영청(御營廳)이 자리를 잡고있었다.
어영청은 1623년(인조 1), 인조 반정 후, 국내정세가 어수선하고 국제적으로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왕을 호종(경호)하는 직속 부대로 창설되었다. 그 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왕을 경호하는 군사 1천 여명을 증원되어 훈련도감과 함께 중앙군대의 핵심이 되었다. 이어서 정묘. 병자호란 후, 어영대장 휘하에 7천명의 군사를 배속하였고, 효종 때는 북벌정책을 추진코자,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삼은 2만 1천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어영청은 당시 별초군(別抄軍)과 기병(騎兵)으로 조직된 정예군을 발족시켜 경상. 전라. 충청. 황해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켰다. 순조 이후부터 장어영(壯御營). 총어영(總御營) 등으로 바뀌었다가 고종 31년(1894)에 폐지되었다.
-이현궁(梨峴宮) 터
이 터는 인의동 112번지 일대에 걸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잠시 살았던 이현(梨峴, 배고개)궁이 있었다. 그 후 별궁(別宮)이 되었는데, 광해군 2년(1610)에는 세자빈을 간택하여 가례(嘉禮, 혼례)전까지 이곳에서 머무르게 하였다. 이현 본궁(本宮)이 된 이 터는 1623년(인조 1)에 인조의 생모인 연주 부부인(府夫人) 구씨의 거소(居所)로도 사용되면서 계운궁(啓運宮)이 되었다. 또한, 병자호란(丙子胡亂)때는,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집이 소실(燒失)당하자 이곳에 거처를 정하기도 하였으며, 인조의 아들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의 혼례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숙종(肅宗)때는 숙빈방(淑嬪房, 영조 어머니)으로 사용하였으며, 숙종 37년(1711)때는 연잉군(延仍軍 영조)이 거처하였다.
-두산그룹 발상지 배오개
서양의 문물이 밀려들어오면서 한창 개화가 진행 중이던 1896년 8월, 두산그룹의 창시자인 박승직이 면직물을 취급하는 점포(두산그룹의 모태)를 배오개에 최초로 문을 열었다.
일찍이 전국을 무대로 환포(換布)상을 하던 박승직은 도도한 개화의 물결 속에서 나라 경제의 미래상을 정확히 예측하고, 당시 민족자본의 보금자리가 된 배오개 터에 근대기업의 기틀이 최초로 마련되었다.
배오개 점포는 날로 승승장구, 번창하면서 각 지방으로 지점이 확산되어갔고, 그 뒤를 따라서 여러 민족기업들이 탄생함으로써, 배오개 터는 일약 한국 기업의 본거지로 부각되었다.
박승직은 1905년 일제의 화폐개혁에 맞서 동대문시장 상인들을 주축이 된 배오개 터에 광장주식 회사를 설립, 일인들과 맞섰으며, 1906년 지금의 한국 전경련 성격을 지닌 한성상업회의소를 설립, 이 회의소는 훗날 대한상공회의소의 효시가 되었다. 결국 배오개 터는 한국기업의 원동력이 된 큰 터전이었다.
두산그룹은 1996년 창설 100주년을 맞아 그룹 발상지(효성 주얼리 시티 모델하우스공사장 앞)에 20m 높이의 초대형의‘두산탑’을 준공하고, 다가오는 200주년에 개봉한다는 계획으로, 타임캡슐을 매장해 놓았다.
4. 종로구 인의동(仁義洞) 48-2번지 풍수적(風水的) 조명
「鐘이 있는 거리」, 「모든 길은 종로로 통한다」란 말처럼 큰 의미를 담은 종로(鐘路)가 처음 탄생한 것은 1398년(태조 7년)이다. 경기도 광주(廣州)땅에서 종(鐘)을 주조하여 처음에는 현재의 탑골공원 앞, 청운교(靑雲橋) 서편에 매달았는데, 그때가 태조(太祖) 7년(1398년) 4월이다. 그 후 종각(鐘閣)은 광통교(廣通橋)의 북쪽, 즉 현재의 종로 사거리로 옮겨져, 정도 600년 내내 황토현(黃土峴, 세종로 네거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거리를 종로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수도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이 거리는 비단 서울의 중심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나라의 중심지(中心地)는 이 터와 연접된 종묘(宗廟)가 되어, 조선조(朝鮮朝)내내 나라 고을로 들어가는 시발점인 도로원표(道路元標)가 종묘 입구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인들의 일방적인 횡포로 세종로로 이전해간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조의 10리는 대동여지도에서 확인된 것처럼 5.7km 로 사용되던 것을 4km로 정해버린 것도 이 무렵이다.
종묘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4대 조상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이은공, 그리고 부인인 이방자 여사의 위패를 모셔놓았는데, 역대 왕들은 친행(親行)이라 하여 매년 다섯 차례에 걸쳐, 제를 드리기 3일전에 이곳, 어숙실(御宿室)에 묵으면서 목욕제계를 하고, 고기와 여자를 멀리한 신성한 장소였다.
이 터가 중심이 된 배오개시장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가「한양성시전도가(漢陽城市全圖歌)」에다, 이현(梨峴)과 종루(鐘樓) 그리고 칠패(七牌)는 온갖 공장(工匠)과 상인. 고객들이 물밀 듯 모여드는데, 도성에서 유명한 3대 시장이다. 이곳에는 조선 팔도에서 들어오는 많은 물화(物貨)와 함께 수많은 수레가 줄을 잇는다고 기록하여, 배오개시장은 종루 앞과 남대문 밖 칠패시장을 합쳐 서울의 3대 시장이 되어, 조선의 상권을 독점하였었다.
외국의 문물이 밀려들어오던 1876년 개항이후, 일본상인들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1905년에 박승직, 김종한 등이 자본금 78,000환으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처음 광장주식회사는 188개의 점포를 구성하여, 점포는 이곳 터를 비롯하여 종로 5가 쪽과 청계천 쪽 양편에 행랑을 짓고, 두 건물 사이에 또 한 줄의 상가를 세웠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배오개시장' 으로 불렀다. 이 터에 뿌리를 내린 광장시장은 당국으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장이 되었다.
이 터로 들어온 용맥은 한양의 경복궁을 진호(鎭護)하는 북악산이 한 맥을 좌측으로 뻗어, 종묘의 현무봉인 응봉(鷹峰)을 일으키고, 여기서 중출맥(中出脈)으로 나온 내룡(來龍)이 위이굴곡( 屈曲)으로 행룡하면서 창덕궁과 창경궁 터를 일구면서, 종묘로 들어와, 종묘에서 나온 연맥(連脈)이 이 터를 갈무리한다. 즉, 도심 안으로 들어온 은맥(隱脈)을 타고 지기가 공급된다.
이 터의 물형(物形)은 꿩이 엎드린 복치혈(伏雉穴)이다. 종묘의 수림대(樹林帶)가 풀 섶에 해당되고, 이 터를 중심으로, 북악산, 남산, 낙산, 인왕산이 큰 원을 두르며, 둘러싸고 있다. 풍수에서는 이를 나성(羅星)이라 하는데, 중심외곽에 성을 쌓았다는 뜻이다. 이 터로 연결되는 용맥은 응봉이 되고, 이 터는 마치 나무숲에 엎드린 꿩의 모습이다. 복치혈은 매(응봉)와 함께 사냥개가 되는 사격(砂格)이 있어야 성국(成局)이 되는데, 그것은, 매는 꿩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꿩은 바짝 긴장을 하고, 목에다 힘을 불어넣는데, 그 긴장이 생기를 동(動)하도록 하여, 복덕(福德)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꿩은 무한정 엎드려있다고 능사는 아니다. 결국 힘이 소진되면, 매의 먹이가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쪽에는 매를 노리는 사냥개가 있어야, 삼수부동(三獸不動)이 되어, 꿩의 생기를 오랫동안 이어가는 것이다.
즉, 이곳의 형세(形勢)는, 꿩(터)을 노리는 매는 응봉(鷹峰, 매봉)이고, 매를 견제하는 것은 사냥개에 해당하는 북악산이 된다.
이렇게 해서 꿩인 이 터와 함께 뒤쪽의 매와 사냥개가 버티는 형상이 되어 그 기가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이다.
이곳 터의 사신사(四神砂)는 응봉에서 가회동 쪽으로 뻗은 한 자락이 백호(內白虎)가 되고, 성균관대학교를 일으킨 용맥이 청룡(靑龍)자락이 되는데, 응봉의 중심에서 나온 중출룡(中出龍)이 종묘까지 들어와 이 터를 작혈(作穴)한다.
또한 터의 조건은 음(陰)인 용(지맥)과 양(陽)인 물의 음양교배(陰陽交配)를 이루어야 지기를 뭉치는데, 이 터의 내룡 앞에 청계천이 지나고있어 결지(結地) 조건을 충족하였다. 앞쪽에 우뚝 선 남산은 뒤쪽에서 흐르는 한강이 암공수(暗拱水)가 되어, 남산의 산기(山氣)를 앞으로 미는 지렛대가 되어, 조선왕조를 500년이나 발복 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도 이 터로........
지기를 불어넣는다.
효성 쥬얼리 시티 전경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