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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경 보물701호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경은 부처의 힘을 빌리거나 수행을 통해서 모든 죄악을 없애고, 장수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을 적은 경전이다. 이 책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2㎝, 가로 11.3㎝이다. 제1장과 제2장의 일부분이 없어진 것을 제외하면 상태는 완전한 편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책 끝에는 간행에 관계된 사람의 이름과 무오(戊午) 5월에 다시 간행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글자의 새김이나 종이질, 인쇄상태로 미루어 보아 고려 우왕 4년(1378)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교하게 그려진 변상도는 판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책은 죄(罪)를 멸(滅)하고 장수(長壽)의 법을 설(說)한 경전으로 책 끝에 다음과 같은 간기(刊記)가 있다. 무오(戊午) 오월일(五月日) 중각(重刻) 권선(勸善) 비구자연(比丘自延)동원(同願) 비구각관(比丘覺寬) 동원(同願) 비구해선(比丘解禪)시주(施主) 비구법홍(比丘法弘) 김신주(金臣柱)여기에 연대는 무오(戊午)로만 있고 연호(年號)가 없으나 판식(板式)·지질(紙質)·인쇄 등이 모두 고려본(高麗本)의 특색이 짙어 우왕(禑王) 4년으로 추정된다.
호법론 보물702호
호법론(護法論)은 송나라에서 불교배척론이 일어나자 장상영이라는 사람이 유교·불교·도교의 학설을 내세워 불법을 지키기 위해 펴낸 것이다. 이 책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으며, 크기는 세로 22㎝, 가로 15㎝이다. 책 끝에 있는 이색(李穡)이 쓴 발문(跋文:책의 내용과 그에 관련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통해, 고려 우왕 5년(1379)에 고승 환암(幻庵)의 명으로 승준(僧俊)과 만회(萬恢)가 충주 청룡사에서 다시 간행한 것임을 알수있다.
장승법수 보물703호
법수는 일종의 사전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 책은 불교에 관한 책 전체를 모아서 기록한 대장경에 수록된 명수(名數)를 차례로 배열하여 찾기 쉽도록 한 것이다. 이 책은 원나라의 승려 가수(可遂)가 편집한 것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고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공양왕 1년(1389)에 다시 찍어낸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가로 17.6㎝, 세로 28㎝이다. 장승법수는 몇 종류의 책이 전해지고 있으나 책 끝에 무학대사가 간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글자가 많이 닳고 없어진 것으로 보아 판을 새기고 훨씬 뒤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승법수 보물704호
법수는 일종의 사전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 책은 불교에 관한 책 전체를 모아서 기록한 대장경에 수록된 명수(名數)를 차례로 배열하여 찾기 쉽도록 한 것이다. 이 판본은 2책 목판본으로 무학대사가 공양왕 1년(1389)에 중간한 것이다. 몇 종의 전래본이 있으나, 무학대사가 간행한 경위를 적은 이색의 발문이 붙어 있는 것은 보기 드물다. 보물 제703호로 지정된 『장승법수』에는 발문이 있으나, 보물 제704호에는 이 발문이 없는 상태이다. 이 두 판본은 새긴 글자에 다소 마멸된 부분이 나타나고 있음으로 보아 그 글자를 새긴 연도로부터 휠씬 뒤에 인쇄된 것으로 여겨지고, 보물 제704호는 시간이 더 지난 후에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합철<불설부모은중태골경> 보물705호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줄여서 ‘부모은중경’, ‘은중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부모의 소중한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얘기한 경전이다. 은중경은 구마라습이 번역한 것이며, 이 책은 고려 우왕 4년(1378)에 예문관대제학 한천(韓천)의 시주로 간행한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29㎝, 가로 11.3㎝이다. 일반적인 은중경과 같이 부모의 10가지 소중한 은혜를 글과 그림으로 함께 나타내고 있으며, 책 뒤에는 불설부모은중태골경이 함께 들어있다. 이 책은 수충익대공신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輸忠翊大功臣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을 역임했던 한천(韓천)의 시주(施主)로 인출(印出)되었다.
중용주자혹문 보물706호
『중용주자혹문(中庸朱子或問)』은 고려 공민왕 20년(1371)에 원나라로부터 수입하여 목판본으로 찍어낸 책으로, 송나라 주희가『사서(四書)』가운데 하나인『중용』에 대해 여러 문제점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비교적 원본(元本)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글자새김이 정교하고 인쇄가 깨끗한 편이다. 현재 두 권이 전해지는데 한 권은 고려대학교도서관에서, 다른 한 권은 서울에 사는 조병순씨가 소장하고 있으며, 각각 보물 제706호 ·보물 제70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책 끝에 홍호(洪虎) 4년(1371) 7월에 진주목에서 개판(開板)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는 고려시대 지방관판본으로 문헌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중용주자혹문 보물707호
『중용주자혹문(中庸朱子或問)』은 고려 공민왕 20년(1371)에 원나라로부터 수입하여 목판본으로 찍어낸 책으로, 송나라 주희가『사서(四書)』가운데 하나인『중용』에 대해 여러 문제점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비교적 원본(元本)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글자새김이 정교하고 인쇄가 깨끗한 편이다. 현재 두 권이 전해지는데 한 권은 고려대학교도서관에서, 다른 한 권은 서울에 사는 조병순씨가 소장하고 있으며, 각각 보물 제706호 ·보물 제70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책 끝에 홍호(洪虎) 4년(1371) 7월에 진주목에서 개판(開板)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는 고려시대 지방관판본으로 문헌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인쇄상태로 보아 이 책이 보물 제706호보다 약간 늦게 인쇄된 듯하다.
급암선생 시집 보물708호
『급암시집(及菴詩集)』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민사평(1295∼1359)의 개인 시집이다. 사평(思平)은 문과(文科) 출신으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냈고, 시(諡)는 문온(文溫)이며 급암(及菴)은 그의 호(號)이다. 이 시집은 문인 이단(李端)이 경상도 안찰사로 재직할 때 이색의 발문을 받아 고려 공민왕 19년(1370)에 목판본에 찍은 인쇄본이다. 인쇄된 지 워낙 오래 되어 서문 제 1, 2장과 권 1∼4까지 16장이 훼손되어 다시 찍어낸 곳도 있다. 내용은 책 첫머리에 이제현과 이색의 서문이 있고 「급암묘지명연보」가 있다. 그리고 고시, 율시, 사소 등 5권으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설곡시고 보물709호
『설곡시고(雪谷詩藁)』는 고려 후기 문신이었던 정포(鄭포 1309∼1347)의 개인 시집이다. 정포 선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의대부의 벼슬을 지냈으나 37세의 젊은 나이로 목숨을 다하였다. 시와 글짓기에 뛰어났으며, 글씨로도 이름이 높았다. 이 책은 그의 아들 공권이 밀직제학의 벼슬에 있을 때 부친의 시집을 정리하여 우왕 2년(1376)에 굉찬사에게 부탁하여 목판본으로 인쇄하여 발간한 것이다. 책머리에 이색과 이제현의 서문이 있고 다음에 정포의 시와 글씨 등이 1, 2권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2권 1책으로 만들어졌다. 책끝에는 이방한이 쓴 발문에 홍무(洪武)의 무(武)자가 빠져있는데 이것은 고려 혜종의 이름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고려본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의 하나이다. 현재 이 책은 서문에서 본문 6장까지는 누락되어 있는 상태이다.
동인지문사륙-권1∼6, 10∼15 보물710호 『동인지문사륙』은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최해(崔瀣,1287∼1340)가 편집한 책이다. 그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에는 「동인문서(序)」와 「동인사륙서(序)」가 있다. 「동인문서」에 의하면 그는 우리나라 시문을 선집하여 시를「오칠」, 문을「천백」, 병려를「사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동인사륙서」에는 「사륙」에 대해 따로 체례(體例) 문제를 서술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동인지문』에는 「오칠」, 「천백」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륙」만이 남아있다. 이 책은 신라와 고려시대의 문장을 모은 것으로 가장 오래된 서적에 속한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권 1∼6, 권 10∼15으로 총 12권 4책이다. 이 밖에 고려 김태현의 『동국지감(東國之監)』이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 책 권 5의 마지막 간행물에 나타난 고려시대 역대 왕의 휘호인 건(健), 무(武), 운(運), 요(堯), 치(治) 등의 글자는 획을 빠뜨리거나 대신 다른 글자를 쓰고 있는데, 이는 고려본의 공통된 특징이다.
동인지문사륙-권1∼6 보물710-2호
『동인지문사륙』은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최해(崔瀣,1287∼1340)가 편집한 책이다. 그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에는 「동인문서(序)」와 「동인사륙서(序)」가 있다. 「동인문서」에 의하면 그는 우리나라 시문을 선집하여 시를「오칠」, 문을「천백」, 병려를「사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동인사륙서」에는 「사륙」에 대해 따로 체례(體例) 문제를 서술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동인지문』에는 「오칠」, 「천백」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륙」만이 남아있다. 이 책은 신라와 고려시대의 문장을 모은 것으로, 권 1∼6의 총 6권 2책이다. 이 밖에 고려 김태현의 『동국지감(東國之監)』이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 책 권 5의 마지막 간행물에 나타난 고려시대 역대 왕의 휘호인 건(健), 무(武), 운(運), 요(堯), 치(治) 등의 글자는 획을 빠뜨리거나 대신 다른 글자를 쓰고 있는데 이는 고려본의 공통된 특징이다. 권 1은 서문과 목차, 제1∼2장의 오른쪽 위 끝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다.
동인지문사륙-권10∼12 보물710-3호
『동인지문사륙』은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최해(崔瀣,1287∼1340)가 편집한 책이다. 그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에는 「동인문서(序)」와 「동인사륙서(序)」가 있다. 「동인문서」에 의하면 그는 우리나라 시문을 선집하여 시를「오칠」, 문을「천백」, 병려를「사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동인사륙서」에는 「사륙」에 대해 따로 체례(體例) 문제를 서술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동인지문』에는 「오칠」, 「천백」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륙」만이 남아있다. 어쨌든 이 책은 신라와 고려시대의 문장을 모은 것으로 가장 오래된 서적에 속한다. 이 밖에 고려 김태현의 『동국지감(東國之監)』이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동인지문사륙-권13∼15 보물710-4호
『동인지문사륙』은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최해(崔瀣,1287∼1340)가 편집한 책이다. 그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에는 「동인문서(序)」와 「동인사륙서(序)」가 있다. 「동인문서」에 의하면 그는 우리나라 시문을 선집하여 시를「오칠」, 문을「천백」, 병려를「사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동인사륙서」에는 「사륙」에 대해 따로 체례(體例) 문제를 서술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동인지문』에는 「오칠」, 「천백」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륙」만이 남아있다. 이 책은 신라와 고려시대의 문장을 모은 것으로 가장 오래된 서적에 속한다. 이 밖에 고려 김태현의 『동국지감(東國之監)』이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동인지문사륙』권 13∼15를 간행한 것은 복주와 진주 두곳에서 이루어졌는데 고려대학교도서관 소장본(보물 제710호) 권 12와 권 15 끝을 보면 지정 15년(고려 공민왕 4년,1355)에 복주관(안동부의 옛 명칭)에서 발행한 기록이 표시되어 있다.
동인지문사륙-권7∼9 보물710-5호
『동인지문사륙』은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최해(崔瀣,1287∼1340)가 편집한 책이다. 그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에는 「동인문서(序)」와 「동인사륙서(序)」가 있다. 「동인문서」에 의하면 그는 우리나라 시문을 선집하여 시를「오칠」, 문을「천백」, 병려를「사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동인사륙서」에는 「사륙」에 대해 따로 체례(體例) 문제를 서술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동인지문』에는 「오칠」, 「천백」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륙」만이 남아있다. 이 책은 신라와 고려시대의 문장을 모은 것으로, 크기는 가로 19.7㎝, 세로 31.8㎝이며, 권 7의 마지막에『진주목개판』이라는 간기(刊記)가 명시되어 있어 그 간행지(刊行地)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졸고천백』과 이 책의 판식(板式)이 일치하며, 책을 조각하는 사람 이름이「정(正)」「고(高)」로 어미(魚尾)에 음각되어 있어, 정은 정연(正連), 고는 고청열(高淸烈)임을 바로 알 수 있고, 이것이『졸고천백』을 개판할 때에 같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인지문사륙-권7∼9 보물710-6호
이 책은 최해(崔瀣,1288∼1340) 선생이 펴낸 시문집인 『동인지문』가운데 사륙변려문만을 모아놓은 것으로 권7∼9의 1책이다. 고려 말기의 문신 최해는 신라 최치원의 후손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의 과거에도 급제하는 등 학문에 뛰어났다. 성격이 곧고 강직하였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책을 쓰는데 힘써 『동인지문』외에도 문집으로 『졸고천백』2책을 남겼다. 『동인지문』은 최해가 신라 최치원에서부터 고려 충렬왕 때까지의 역대 명현들의 시문을 엮은 것으로 그 가운데 시(詩)를 「오칠」, 문(文)을 「천백 」, 변려문을 「사륙」이라 이름하였다. 동인지문의 차례는 「오칠」, 「천백」, 「사륙」의 순으로 구성되었으며, 「오칠」 9권, 「천백」 1권, 「사륙」 15권으로 총 권수는 25권으로 되어 있다. 「사륙」에는 교서나 축문 등이 실려 있으며, 이 책은 제710-5호로 지정된 진주본과 같은 판본으로 영본(零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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