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을
만든 헛스윙"
목표에 다가설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견딘다.
(담배의 길》《신의 작은 땅》등을 쓴 소설가 아스킨 골드웰은 꽤 잘나가는
저널리스트였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찬 그는 기자 일을 그만두고 집필에 전념한다.
그러나 야심차게 써서 보낸 원고는 늘 되돌아오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우편료가 없어서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지 못할 지경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무명의 잡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원고료는 줄 수 없지만 소설을 게재해도 좋다는 것. 그는 뛸 듯이 기뻤지만 사실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날아드는 부채 통지서와 실패에 대한 압박감이 계속 골드웰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일류가 되려면 최소 10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록 무보수였지만 글자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해 잡지 연재를 마친 골드웰은,
얼마 뒤 유명 잡지 편집자의 눈에 띄어 연거푸 신작을 발표하며 인기 소설가가 되었다. 하지만 인생 홈런을 날리는 방법이 한 우물을 파며 인내하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퍄일 거라 예상하고 고개를 푹 숙였는데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릴 때, 우연이라는 미름을 가진 승리의 여신이 브이 자를 그려 주는 순간도 분명 있다.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는 수상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연성 레이저 이탈 기법은 우연이었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저런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두 용액을 섞었는데 그것이 생물학적 거대분자의 질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법을 개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평범한 연구원이었던 그는 노벨상 수상 이후 일본 내 유명 대학에 교수로 초빙돼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다나카 고이치의 '홈런'은 분명 우연에서 시작되었지만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이다.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하지 않고 묵묵히 노력해 왔던 그의 태도가 홈런을 만들어 냈다고 해도 관언이 아니다. 인생 홈런을 날리는 사람들은 실패하더라도 보란 듯이 일어나는 근성을 지녔다. 또 행운이 오기만을 넋 놓고 기다리기보단 기회가 왔을 때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철저히 훈련했다.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자신만의 항로를 개척해 나가는 사람만이 역전의 용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있다.
타인에게 겨눈 총구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지닌
'반전 캠페인' 광고를 제작해 세계 5대 광고제를 제패한 이제석. 만 서른이 채 안 된 이 젊은이는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인 원쇼페스티벌의 최우수상을 시작으로 국제광고 공모전에서 29개의 메달을 휩쓴 광고 천재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소위 '루저'였다. 똑똑한 형에게 밀려 공부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과서에 낙서나 하면
수업 시간을 때우는 불량 학생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오라는 회사가 한 군데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동네에서 간판을 제작하며 지냈다. 그러다 '어차피 주저앉을 인생, 세상과 한번 싸워 보자.'는 생각에 뉴욕으로 날아가,
쥐가 돌아다니는 골방 복도에서 작업을 하고 미친놈 소리를 들어가며 광고에만 빠져
지냈다.
그리고 2년 만에 광고계의 빛나는 별이 되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스스로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만약 그가 동네 간판장이로 만족했다면 광고인 이제석을 꿈꿀 수 있었을까. 담장 너머로 뻗어 나가는 희망을 보고 싶다면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 당장은 빗나갈지라도 물러서지 않고 타격품을 재정비할 수 있는 배짱 두둑한 사람만이 손끝에서 전해오는
홈런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자, 어깨 한번 툴툴 털고 다시 휘두르자. 인생 홈런이 터질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참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대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다른 재주나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보통 사람들한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인내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인내를 통해서 성공한 사람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포기합니다.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재능이 많은 것만으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만으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용기가 있는 것만으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인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도중에 포기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낙심할 때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게을러질 때도 있습니다. 미국의 사업가 강철 왕 카네기는 "승부를 가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참고 있으면 반드시 기회가 생긴다" 라고 했습니다. 생존 경쟁에서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음과 삶에 인내라는 뿌리가 내리면 성공이라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성숙과 성공은 인내의 값을 치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귀중한 결실이니까요. 인내를 통해 삶은 성숙해집니다.
-좋은 글
중에서-
'승영이의 소원'이 만든 행복한 요양원
[성수대교 붕괴 20년… 14가지 소원 남기고 간 女大生]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의 풀 내음 나는 시골길
끝자락에 널찍한 요양원이 하나 있다.
몸이 불편한 어르신 26명과 이들을 돌보는 15명이
함께 모여 사는 '작은손길 공동체'라는 곳이다.
이곳을 일군 최만재(57·목사)씨는 해마다 10월 21일이 되면 20년 전 숨진
스물한 살 여대생의 이름을 되뇌며 기도를 올린다.
그를 위한 기도는 한결같다. "승영씨, 당신의 이름은
'오늘 하루 제가 무엇이 부족했나' 되묻게 하는 이름입니다."
목숨을 잃은 서울교대 3학년생이었다.
그는 교생 실습 닷새째, 버스를 타고
강북에 있는 초등학교로 출근하던 길에
다리 상판과 함께 20m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당시 30대 회사원이었던 최씨는 승영씨의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최씨의 삶에 두 번의 선물을 선사했다.
가난한 신학생이던 그를 목회자로 이끌고,
기댈 곳 없는 노인들을 모시던 50㎡(15평) 무허가 판잣집을
대지 3159㎡(956평)의 번듯한 요양원으로 변신케 한 기적이었다.
쪽방에 살면서도 2000년부터 아내 김영샘(52)씨와
인천 부평 뒷골목에서 매주 무료 급식을 했다.
파지를 주워 연명하던 노인 11명을 모시고 무허가 건물에
월세 20만원짜리 세를 얻어 '작은손길 공동체'를 세웠다.
학비가 없어 힘겨워하던 그는 2002년
"승영장학생으로 선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승영씨의 '14가지 소원' 이야기도 그때 처음 들었다.
딸의 유품을 챙기던 승영씨 어머니 김영순씨가 딸의 일기장에서
'내가 일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이란 14가지 소원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대신 이루고 있다는 뭉클한 이야기였다.
'한 명 이상 입양한다, 장학금을 만든다, 이동도서관을 강원도에 만든다,
복지마을을 만든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남서울교회에 기탁해 가난한 신학대학원생을 위한 장학금을 만들었다.
그는 "승영씨의 소원 중 '복지마을을 만든다'는 꿈은
내가 꼭 대신 이뤄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무허가 보금자리는 불안하고 불편했다.
최씨의 아내는 "남편은 매일 새벽 '우리 어르신들
편히 지낼 곳을 마련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했다.
또 하나의 기적이 시작됐다.
그가 모시던 80대 구씨 할아버지가 어느 날
"내 고향 용인으로 같이 좀 가자"고 최씨를 조르기 시작했다.
"가족도, 갈 데도 없는데 재워달라"며 와서는
3년간 함께 지내온 고집 센 할아버지였다.
최씨는 "마지막 소원 들어 드리자는 심정으로
고향으로 모시고 갔다"고 했다.
고향 땅을 밟은 구씨 할아버지가 거짓말 같은 얘기를 꺼냈다.
"여기 야산과 논밭이 다 내 것이네."
할아버지는 십수억원대 자산을 가진 이 동네의 유명한 갑부였다.
최씨는 "아들딸과 떨어져 살던 어르신이
외로움 때문에 우리 공동체를 찾아오셨던 것 같다"고 했다.
구씨 할아버지는 "매일 새벽 당신의 기도를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 산과 논밭을 모두 목사님과
우리 공동체 명의로 돌리고 싶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최씨가 만류했지만,
할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최씨는 논밭 대신 공동체 건물을 세울 수 있는 야산 일부만 받았다.
작은손길 공동체는 기적처럼 당시 정부 지원금 2억8000만원을 받아
새 보금자리를 지을 수 있게 됐다.
구씨 할아버지가 땅을 기증하겠다고 한 지 3년 만인 2007년 11월,
지금의 터에 건물 면적 633㎡(192평) 규모의
'작은손길 공동체 요양원'이 탄생했다.
투병 생활을 하다 2006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전 "요양원이 생기면 돼지 잡아
마을 잔치라도 하라"며 건넨 100만원과,
최씨 부부를 억지로 금은방에 데려가 직접 골라준
5돈짜리 금반지가 할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장정자(77) 할머니는 "깨끗하고 따뜻한 이곳에서
새 친구들까지 만났으니 말년에 축복을 받은 셈"이라 했다.
초기 치매를 앓고 있는 장원순(82) 할머니도 거들었다.
"기적이지… 고마운 일이죠…."
최씨는 "구씨 할아버지 덕에 승영씨에게 약속했던
진정한 '복지마을'을 완성할 수 있었다"며
"이것도 승영씨가 하늘에서 꾸준히 기도하고 응원해준 덕"이라 했다.
최씨 내외는 요양원을 운영하며 무료 급식도 15년째 계속하고 있다.
부인 김씨는 매년 10월만 되면 가장 힘들 때
힘이 돼준 승영씨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승영장학생 89명이 지금도 각지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승영씨라는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20년이 지나서도 계속 열매를 맺고 있는 셈이죠.
살아있는 우리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데
진정 살아있는 건 그분 아닌가 싶어요."
‘공짜 점심’에 교육의 質 뚝!… 교사 줄이고 교실보수 미뤄
[미로에 갇힌 무상복지]<上>복지 봇물에 백년대계 휘청
무상급식과 무상보육 등 각종 무상복지 정책이 삐걱대고 있다.
예산이 넉넉하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뿐 아니라 고교생, 나아가 대학생도
‘공짜 점심’을 주면 좋겠지만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각 시도와 교육청 모두 ‘돈이 없다’며 아우성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책 순위에서 무상복지에 밀린 사업도 적지 않다.
수석교사와 일부 기간제 교사는 전혀 채용하지 못한다.
진로상담교사와 보건교사도 대폭 줄어든다.
교육감 공약으로 확대 추진하려던 ‘교원 연구년’은
대상 교사 358명의 예산 179억 원이 전액 삭감돼 내년부터 잠정 중단된다.
교원힐링센터와 보건교육센터, 경기학습클리닉센터 건립은 보류됐다.
무상급식 등 복지예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교육의 ‘질’은 밀려나는 상황이다.
○ 무상복지에 교육사업 차질
강당 신축과 특별교실 증개축 같은 시설 예산이
2009년 1210억 원에서 지난해는 401억 원으로 67%가량 급감했다.
학교 외벽 균열보수, 방수작업 등 안전 관련 교육환경개선 사업비도
1175억 원에서 지난해 906억 원으로 23% 삭감했다.
교육청 관계자는 “교육환경개선 사업비 감소가 누적되면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전시 관계자도 “무상급식에 너무 많은 예산을 지원하다 보니
힐링캠프 같은 청소년 선도사업도 하기 어렵다”며
“새로운 교육사업 발굴은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교직원 명예퇴직을 절반으로 줄이는 한편 ‘농어촌 에코버스’ 등
주요 정책도 최소한만 도입할 것을 검토하는 등
예산 절감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광주시교육청은 최근 은행에서 ‘급전’ 100억 원을 빌렸다.
정부 교부금은 늦고 당장 지급해야 할 공사대금과
물품구입비 등은 쌓였기 때문이다.
이 교육청 관계자는 “내년 재정이
1900억 원가량 부족할 것으로 예상돼
무상복지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감들의 무상급식 확대 공약도 재정난에 부딪혀 ‘빈말’이 되고 있다.
인천시교육청은 교육감 공약인 중학교 무상급식을 내년부터 시행하려 했지만
인천시와 기초자치단체의 예산 분담이 확정되지 않아 불투명한 상태다.
교육청은 초등 무상급식 예산 319억 원을
인천시에 요청했지만 244억 원만 편성됐다.
중학교 무상급식은커녕 초등학교 급식에도 차질이 예상된다.
인천시 관계자는 “재정 압박이 심해 지방채 발행을 확대하거나
급식비 정부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다.
계획이었으나 일단 1년 정도 미루기로 했다.
부산시는 내년 초등 무상급식 예산을 50억 원 늘려달라는
교육청의 요구를 거절했다.
김석준 부산시교육감은 “정부 교부금이 크게 줄어드는 데다
지자체의 지원도 어려운 상황이어서
교육재정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며
“중학교 무상급식 유예에 따른 예산 106억 원은
교육환경 개선사업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충북도교육청도 교육감 공약인 무상급식 확대를
예산 사정으로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 소방도로도 못 내는 실정
주민을 위한 최소한의 민원조차 해결해주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지자체 관계자들은 “복지가 봇물 터지듯 하다 보니
지자체 기능이 마비되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많다”고 전했다.
구청이 부담해야 할 50억 원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또 옛 위생매립장에 짓고 있는 다목적체육관 건립의 구청 부담금
17억 원을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목적체육관에 공사비 38억 원이 모자라 공사가 중단될 처지다.
광주 서구에는 30년 된 낡은 구립어린이집을 다시 짓고
비좁은 동사무소를 신축해 달라는 민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예산이 없어 손을 대지 못하는 실정이다.
서구 관계자는 “도로 개설도 여러 곳 필요하지만
전혀 추진하지 못한다”며 “표를 앞세운 무상복지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재정자립도가 15% 수준인 대구 서구는 복지예산에 기반시설 보수공사 등
필수 예산을 제외하면 자체 사업에 쓸 예산은 거의 없다.
낡은 동주민센터 신축이나 아스팔트 포장,
인도 블록이나 가로등 교체도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서구 관계자는 “문화회관의 음향장비 교체비용 5000만 원이 없어
소리도 제대로 안 나오는 마이크를 고치면서 대충 쓰고 있다”며
“대응 투자할 여력이 없어 복지사업 하기가 겁이 난다”고 말했다.
서구는 예산(2290억 원)의 59%(1341억 원)가 복지예산이다.
복지예산은 전체 예산(2231억 원)의 57%인 1272억 원이다.
600m짜리 소방도로 개설도 20년 동안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구 관계자는 “지방채 발행은 재정 여건을 더 어렵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며
“답답해서 에너지 절약과 일상적인 경비절약 운동까지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戰作權(전시작전통제권)을 군사주권이라고 선동하는 이들" 單政 반대파 통일정부 열망은 서울 아닌 평양서 폐기됐는데
이승만과 김구. 1945년 8월 광복 후 이 두 거인(巨人)은 서로 등을 보이며 반대 방향으로 갔다. 한 사람은 대한민국 건국으로, 또 한 사람은 '단독 정권(대한민국)' 수립 반대로. 그리고 70년이 흘렀다. 남은 것은 이승만 노선과 김일성 노선의 둘뿐 김구·김규식·남북협상파 노선은 휴전선 양쪽에서 다 사라졌다. 이게 '해방 70년사'의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휴전선 이남에서는 그러지 않았다는 데에 한국 정치의 아이러니가 있다. 대한민국이 선 지 69년이 지났는데도, 그래서 그 나라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개최할 정도로 컸는데도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노선이 옳은가, 김구의 남북 협상 노선이 옳은가?"라는 '선사(先史) 적' 싸움이 툭하면 재연(再燃)하곤 한다. 그것도 사극(史劇)이 아닌 국회에서까지. 우리 정계와 지식인 사회 일각엔 아직도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에 대한 불복(不服)이 끈질기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불복 심리가 '이승만 죽이기'와 '김구 띄우기'로 연출되는 것이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노선은 '분단 악(惡)'이고, 이에 반대한 김구의 남북 협상 노선만이 '통일 선(善)'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사실 오인(誤認)이다. 이승만은 그에 대응해 '가능한 지역이나마' 자유 체제로 건지려 한 것뿐이었다. 1948년 4월 19~23일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 등의 '통일적 민주 정부론'을 짓밟은 장본인도 이승만 아닌 김일성이었다. 그러나 회의장에 가보니 그들은 수많은 공산당 외곽 단체 틈에 섞인 '여럿 중 하나'였다. 회의는 공산당이 짜놓은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남쪽 참석자들은 발언 한 번 변변히 하지 못했다. 4월 30일에야 남북협상파의 입장이 반영된 '전(全) 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공동 성명'이라는 문건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 정부는 일반적·직접적·평등적·비밀 투표로 통일적 조선 입법 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조선 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남북을 통틀어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엿장수 마음대로?" 하며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는 이미 소련 점령군 사령관 스티코프의 지령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닌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착착 진행시키던 참이었으니까. 김일성에게 남쪽의 남북협상파는 그들이 평양에 오기까지만 유용했을 뿐 그 이후는 필요 없었다.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폐기 처분당했다. 그래서 거듭 확인해야 한다. "김구 등의 통일 충정을 실컷 이용만 해먹고 차버린 악당은 이승만이었나 김일성이었나?" 김일성이었다. 이게 그때의 사실이자 진실이다. 유어만(劉馭萬)의 설득대로 김일성의 '남북 협상 쇼'에 말려들기보다는 이승만과 함께 반(反)전체주의 자유 진영을 짰어야 한다. 그리고 다퉈도 그 안에서 다퉜어야 한다. 그러나 김구는 이를 사양하고 "소련이 북조선군(軍)을 남진시켜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것"이라는 당장의 대세(大勢)론에만 잠겨 있었다. 민족주의의 화살이 정곡(正鵠)을 비켜 가는 순간이었다. 한·미 FTA를 '이완용 짓'이라고 몰아붙이더니, 이번엔 또 전작권(戰作權) 전환 연기를 '군사 주권 포기' '제2의 을사늑약'이라고 매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야당으로서 이견(異見)은 말할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한 전쟁 억지 장치를 그렇게 '대외 종속'이라고 터무니없이 때려잡는 것은 1980년대 NL(민족 해방) 운동권의 초짜들이나 하던 짓이다. 이런 용어 과잉, 남발은 노무현 시대로 끝났어야 한다. 이 시대의 민족주의는 '글로벌 민족 이익 추구'로 새롭게 정의(定義)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