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1 장
아나데마 (2)
바울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진리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아쉬울 게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괜찮다. 그러나 당신들을 위해 내가 기꺼이 그 자리로(아나데마의 자리로) 내려가 내 삶 속에서 내가 파괴되고, 부정되고 그래서 나를 통해 진리가 설명된다면 그건 내가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그와 혈통적으로 묶여 있는 민족적 이스라엘도 역시 그러한 ‘아나데마’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무슨 가치가 있고 위대해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게 아니다. 그들도 (이스라엘도 위의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진설, 티데미] 되어 있는) 아나데마의 존재들이다. / 그들에게 주어진 양자 됨이나 생명, 제사, 율법 이런 것들 또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준 것이다. / 그들이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을 흠향하신다.’는 선민사상을 갖기 쉬운데 그들이 그런 용도로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 ‘나’조차도 그렇게 (‘아나데마’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 잘난 체 하지 말고 내가 진리를 말하는 것을 정신 차리고 들어라.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아나데마’의 삶을 살다가 갔다. 아담과 하와, 아벨, 셋, 에녹,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엘리사, 다윗, 솔로몬, 베드로, 바울, 심지어 예수까지 하나같이 ‘아나데마’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게 어떤 삶인지 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진리를 새겨놓으셨다. 아니 그들의 삶이라는 도화지에 당신이 진리라는 시나리오를 쓰신다. 그리고 당신이 택한 백성들에게 자신을 교과서로 주신다. 그렇게 쓰임을 받는 자들의 삶이 ‘아나데마’의 삶이고 ‘티데미’의 삶이다. => 그들의 육적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차압당하고 몰수당했다. 그게 발에서 신을 벗은 자들의 인생이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나를 당신에게 양도합니다’라는 뜻이다. / 그런 뜻으로 신을 벗으면 상대방은 그 사람의 발을 몰수해 버리고 자기가 가진 새 발을 줘야 한다.) /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당신을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성령으로 주실 제자들의 발을 새 발로 씻겨 주셨다. 신을 벗긴 다음에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길 거야’ 하셨다.
그 당시에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나를 양도한다’는 것이고, 발을 씻긴다는 것은 ‘영접한다’는 뜻이다. / 제자들이 신을 벗었다. => ‘나를 양도합니다. 내 발을 몰수해 가십시오.’ / 주님이 ‘그래, 내가 그 발을 영접한다. 그 발을 몰수한다. 그리고 새 발을 줄 거야.’ 하시고 물로, 진리로 씻어주신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새 발, 진리를 갖게 되고, 그 새 발은 내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못 가고 내 밖에서 그 발에 띠 띄운 방향으로 끌려가는 게 성도의 삶이다. 그게 ‘아나데마’의 삶이다. -> 그게 어려운 삶이다. /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저게 저주(詛呪)지, 복된 삶이야?’ 이렇게 생각한다. 그 모습이 그냥 그 껍데기 그대로 보이면 그들에게 그것은 저주로 보인다. 그런 삶이 ‘아나데마’이다. / 그래서 바울이 ‘내가 그 아나데마, 그 저주의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에게 진리가 전해졌으면 좋겠다’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나 지옥 가도 상관없어.’ 그런 말이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 안에서 그 증거를 찾아보자.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육적 이스라엘(자기의 혈통적 이스라엘)을 진리 설명용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 그들은 유대인이라고도 불린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유다에서 나온 것이다. (북: 이스라엘 / 남: 유다.) -> 유다와 이스라엘은 같은 말이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생이 당연히 겹쳐진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다. 하나님은 그 유다의 후손, 유다의 씨로 메시야를 보내겠다고 야곱의 유언을 통해 언약하신다. 그 유다, 이스라엘은 물론 영적 이스라엘 즉, 우리를 말한다. 그 유다,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씨로 가져야 한다. 진리를 씨로 가져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 언약한 것이다.
유다의 후손의 모형으로 먼저 왔던 사람이 다윗이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고 씨를 낳는데 [‘샬롬’, 솔로몬]이라는 아들을 낳는다. -> 반드시 이스라엘, 유다는 그 씨를 가져야 한다. 아들을 그 안에 가져야 한다. 그래서 주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도 부른다. 주님의 모형으로 먼저 살다 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형이기도 하다.
(창49:8-10)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이건 요셉에게 일어난 일이다. 요셉과 유다와 이스라엘, 야곱의 삶,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삶이 정확히 겹쳐져야 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왕권이)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그리스도,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마치 유다를 장자로 책봉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 유다, 그 장자를 오게 하라.” / 당연히 장자여야 한다. 그런데 어떤 과정을 거쳐 장자가 되는지를 설명해 주는 게 성경이다. / 우리가 공부하는 로마서 9장, 10장의 그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된 그 유다, 그 이스라엘, 그 요셉, 그 야곱이다. 역대상에서는 그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래서 유다에게 일어난 이 예언이 요셉에게서 그대로 성취된다.
(대상5:2)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느니라
이스라엘과 요셉은 (이스라엘이 유다니까 유다와 요셉은) 반드시 장자를 그려내는 같은 삶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서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되고 창세기 39장에서 그 이야기가 전개된다. (38장을 빼면 바로 연결된다.) / 그 요셉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바로 전에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가 창세기 38장에 삽입되어 있다. 그것은 요셉의 이야기를 유다의 이야기로 보라는 것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로 시작된다. => 야곱의 삶은` 이런 것이다. / 그 야곱은 얍복강을 건넌 야곱 즉, 이스라엘이다. / “그 요셉의 이야기는 유다의 이야기로 봐야 한다”고 하면서 38장에서 유다의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 요셉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유다의 이야기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여야 한다. -> 그것이 영적 이스라엘, 영적 장자인 우리들의 이야기여야 한다. / 로마서 9~10장을 우리의 이야기로 보지 않고 육적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보면 여러분은 성경을 엉터리로 보는 것이다. / 성경은 한 맥으로 연결되어 있지 뚝뚝 끊어져 있지 않다. 성경은 하나이다.
유다 즉 이스라엘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창세기 38장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바울이 왜 [‘알레떼이아, 진리’]를 말한다고 하면서 ‘아나데마’라는 단어를 진리의 내용으로 썼는지 잘 보아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부 그 삶을 살았다.
유다는 메시아를 씨로, 아들로 낳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모형이다. -> 그 후손에서 반드시 그 씨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다윗도 나오고, 그 후손으로 예수가 나온다. 우리가 그 족보의 한 인물로 존재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이야기이다.
유다의 이야기는 며느리와 통간해서 쌍둥이를 낳은 것 외에 별로 특이한 내용이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성경에서 이 이야기는 빼도 될 뻔했다.’고 한다. 아니다. 그걸 빼면 안 되는 내용이다.
유다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었다. 반드시 그 라인에서 씨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죽으면 안 된다. / 유대 사람들에겐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가 있다. 첫째가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형수를 둘째에게 줘야 한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그 첫째 아들은 형의 족보로 입적되고, 둘째부터 그 둘째의 아이가 된다.
그래서 둘째 아들 오난에게 그 형수를 줬는데 오난은 그게 싫었다. 그래서 땅에다 설정했다고 한다. 땅에 씨가 설정되면 그게 멸망이다. 씨는 반드시 [‘네케바, 여자’] 안으로 들어가 아들로 맺혀야 한다. 그런데 그 하늘의 씨를 땅에다가 설정하면 죽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둘째까지도 죽여 버리신다. 씨를 못 가지면 죽는다는 말이다. 하나님 말을 듣지 않아서 죽였다는 게 아니다. / 이제 셋째가 남았다. 유다가 셋째 아들마저 저 며느리가 잡아먹을까 봐 안 준다. 다말에게 “셋째가 아직 너무 어리니 다 클 때까지 기다려라.”하고 친정으로 보낸다. 며느리는 철석같이 믿고 간다. / 오랜 시간이 흐르고 유다의 아내가 죽는다. / 유다는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딤나로 양털을 깎으러 간다. 그 소식을 들은 다말이 보니 셋째가 다 컸다. 그런데 아직도 셋째를 자기에게 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한다. 그리고 몸값의 담보물로 도장과 지팡이를 받아놓는다. / 원래 유다가 다말의 몸값으로 주기로 한 것은 염소 제물이었다. 그런데 다말이 그것을 받지 않고 도장과 지팡이만 갖고 사라진다. / 마누라가 죽은 지 며칠 되었다고 유다가 창녀하고 그런 짓을 하느냐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가 아니다.
얼마 후에 자신의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유다의 귀에 들린다. 이건 다말이 죽어야 하는 일이다. 유다는 이때다 싶어서 다말을 데려다가 불살라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다말이 자기 뱃속에 있는 아이 아비의 담보물을 내어놓는다.
유다가 다말을 죽이려고 ‘너 그 배에 들어 있는 게 뭐야?’라고 물으니 다말이 그 아비의 담보물(도장과 지팡이)을 내놓는다. / 그렇게 해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나고, 마태복음 1장 예수의 족보에 그들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그 족보에는 기생 라합도 있고 아주 콩가루 족보이다. 그게 메시야의 족보이다
그리고 다시 요셉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도대체 야곱 즉 이스라엘의 약전을 설명한다고 하는데 왜 이 지저분한 이야기가 중간에 들어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걸 빼버려야 한다고 한다.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놓아야 할 담보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 도장은 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 그 인을 말하고, [지팡이, ‘라메드, למד’]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라메드’라는 단어 자체가 ‘가르치다’는 뜻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자칼(זָכָר)과 네케바(נְקֵבָה)’의 [‘자칼, זָכָר’] = ‘인치다, 표하다, 기억하다’ (주: 생각하다, 회상하다, 묵상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언급하다, 선언하다, 암송하다, 기원하다, 기념하다, 고백하다) / [‘네케바, נְקֵבָה’] = ‘그릇’ (홈, 어떤 걸 담는 그릇.) / ‘네케바’가 ‘자칼’을 자기의 반쪽으로 담아서 연합하면 그게 하나님의 인(印)이 된다. / 하나님이 그 인친 자만 기억한다 해서 자칼을 ‘기억하다, 표하다, 인치다’는 뜻으로 쓴다. 그걸 ‘구원’이라고 한다.
요한계시록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부 이마에 인이 쳐져 있다. 그건 인두로 지져놓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뜻한다. 그가 그 자칼, 진리, 기름을 갖고 있으면 인친 자이다.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이 터번 같은 두건을 쓰는데 그 두건에, 이마에 ‘여호와께 성별’이란 인을 도장 새기듯이 새긴 데에서 ‘인’이라는 개념이 비롯되었다. -> ‘저건 내가 인친 거야. 도장찍은 거야.’ 이런 뜻이다. 그래서 이마에 인을 친다고 한다.
그 인, 그 도장을 갖고 있으면서 ‘[이쉬, אִיש]ׁ가 뭐야?’라고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면 죽는다. ([이쉬, אִיש]ׁ = 남자, 남편) / 그 도장은 ‘이겁니다.’ 하고 내놓을 수 있는 담보물이 된다. / 성경은 그 인을 ‘기름부음’이라고도 한다. / 기름은 항상 하나님의 진리를 뜻한다. / 구약시대 때 기름은 올리브기름밖에 없었다. / 감람나무, 올리브나무는 항상 하나님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 그 하나님의 말씀, 그 기름으로 항상 빛나야 하는 것이 촛대였기 때문에 그 인을 ‘기름부음’이라고도 한다. 그 기름은 또 ‘성령’이라고도 한다.
(요일2:20-27)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거룩하신 자’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다. / ‘기름부음을 받았다’ = 그리스도가 그분의 영으로 내 안에 들어왔다.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는 말은 하나로 말하지 않는다. 두 가지로 말한다는 것이다. / 아버지와 아들의 말을 한 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두 말로 말하면 그게 적그리스도이다. / ‘아버지의 말’은 율법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 / ‘아들의 말’은 진리로 해석된 아들의 말씀이다. 둘이 원래 같은 말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적그리스도이다. (그 둘이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앤타이 크라이스트, Anti-Chris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