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대로, '존재 위백규'는 <의도공 김헌 傳>을 지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또한 '김헌'의 조카, '김효신'의 行狀을 지었다.
그러면서 장흥 행원, 광산 김씨 집안의 무반가 내력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다.
".......(절도사 김효신) 이후 대대로 무반(武班)으로 명성을 드러냈으며
지금까지 이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있다. "
존재 선생이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가 있다.
'김헌'의 조부 '김협'은 문과 급제자, 증조부 '김려원(麗源)'은 進士 입격자이다.
원래는 문반 집안인데, '김헌, 김효신' 이후로 무반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김효신(金孝信,1574~1627)
장흥 행원 출신, 광산 김씨 양간공파
1600년 무과,
'이괄의 난' 진압에 참여한 공으로 '진무일등훈' 책록,
충청도 수사, 황해도 병사 제수,
1816년에 '장흥 행강사'에 추배.
ㅡ 절도사 김공 행장〔節度使金公行狀] ......존재 위백규
公의 휘는 효신(孝信)이며, 자는 사성(士誠)이다.
김씨의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족보는 대사성(大司成) 휘 성옥(成玉)에서 시작되며, 대대로 문음(文蔭)을 입었다.
5세손 휘 협(浹)에 이르면 承文院 敎理 벼슬을 하고 判校에 추증되는데, 이 사람이 公의 증조이다.
할아버지는 휘 광진(光震)으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참의(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는 휘 지(志)로, 주부를 지냈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장흥 임씨(長興任氏)로, 현감 임팔원(任八元)의 딸이며,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 4월 5일에 공을 낳았다.
골상은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총명함은 뭇사람보다 뛰어났다.
점차 자라면서 효성이 마음에서 우러나 즐거운 낯빛으로 부모를 봉양하니
사람들 모두 기뻐하며 탄복하였다.
겨우 20세에 풍채는 헌걸찼으며 뜻과 기량은 크고 깊었다.
경서와 역사서를 모두 섭렵하여 대의(大義)에 통달했으며,
3석의 무게가 나가는 활을 잡아당겨 쏘아 명중시켰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다른 형제가 없는 외아들이어서 차마 부모 곁을 떠나 벼슬살이를 할 수 없었다.
몸소 부모를 봉양하고 공경과 사랑을 극진히 하자
고을 이웃 사람들이 孝子라고 칭송하며 흠잡는 말이 없었다.
계묘년(1603)에 판서공이 세상을 떠나자 公은 슬픔과 예법을 모두 지극히 하였다.
三年喪을 마치고 혼자 홀어머니를 모시며 오랫동안 고향 집에 있었다.
갑인년(1614, 광해군6)에 상신(相臣)의 천거로 武臣 兼 宣傳官의 參下官에 임명되자
모부인(母夫人)의 당부를 받들어 마지못해 벼슬에 나아갔으나 곧 체직되었다.
다시 장관(將官)이 되어 일찍이 숙직을 한 적이 있는데, 상의원(尙衣院)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마룻대와 서까래가 불에 타며 탁탁 갈라지자 사람들이 감히 다가서지 못했는데,
公이 멍석을 물에 적시더니 몸에 두르고 불길을 무릅쓰며 곧장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겨드랑이에 큰 궤짝 2개를 끼고 나왔는데 무게는 모두 수십 근에 이르는 것으로,
先朝에서 전해 내려오는 면류관(冕旒冠)과 곤복(袞服)이 모두 이 궤짝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功勞로 인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품계가 올랐다.
公은 정치가 혼란한 상황을 보고 나서 벼슬할 뜻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 몸소 농사짓고
어머니를 모시며 평생 이렇게 살 듯하였다.
신유년(1621)에 북방의 경보(警報)가 매우 다급해지자
都元帥府에서 公의 지략과 용맹을 알고 軍官으로 임명해 주기를 임금에게 아뢰어 청하였다.
公이 부임하려 하지 않자, 모부인(母夫人)이 “충(忠)과 효(孝)는 본래 두 가지가 아니다.
너는 이미 출신(出身)하였으니 적의 침입을 막고 절개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신하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채수(債帥)가 된다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고,
만약 네가 忠臣이 된다면 나는 살아서도 마음 졸이며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나라에 난리가 난다면
너는 반드시 시동생께서 금산(錦山)에서 행하신 의로운 행동을 본보기로 삼거라.”라고
훈계하였다.
公은 공손히 명을 받들어 임지로 가서 수년 동안 변방의 군막을 돌아다녔다.
사람들로부터 덕망이 매우 두터워 당시 외방의 책임을 맡은 장수들 모두 公을 보좌관으로 삼고자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중군(中軍)으로서 구성(龜城)에 있었는데,
1월 22일 역적 이괄(李适)이 역모를 꾀해 인근 수령들을 속이고 위협해 군사를 일으켰다.
구성 부사(龜城府使) 역적 한명련(韓明璉)이 함께 모의해 정예병 30여 기병(騎兵)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며
公으로 하여금 별장(別將) 강작(康綽)과 함께 아하군(牙下軍 아병(牙兵)) 1200명을 거느리고
연이어 출발해 영변(寧邊)으로 속히 달려가게 하였다.
公은 한명련이 말한 것과 같이 역적 강작(康綽)과 함께 출발하였다.
1월 23일 저녁 영변에 도착했는데,
이괄(李适)이 한명련과 함께 성안의 병사를 모조리 긁어모아 이미 출발했기 때문에 성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公이 그제야 이상하다고 의심해 늙은 병사에게 따져 물었더니 과연 모반을 꾀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역적들은 떠났지만 여전히 가까이 있었고 도원수(都元帥)는 멀리 있어,
公은 근심하고 분개하며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일부러 행군을 늦추고 즉시 자모장(自募將) 지계최(池繼凗), 兵房軍官 이협(李莢) 등을 불러
귀에 대고 은밀히 이야기하여 상황을 바로잡을 계획을 정하였다.
그다음 강작(康綽)에게 말했더니, 강작(康綽)의 낯빛이 변하며 그저 “예, 예.” 할 뿐이었다.
당시 한명련의 가족들은 곁방에 머무르며 말에게 꼴을 먹이고 있었다.
公은 먼저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의 목을 베려고 하였으나
역적들이 가까이 있고 군사가 적어 그만두고 한윤을 속여 먼저 가게 하였다.
군속을 모두 불러 모아 군막 아래 세워 놓고 눈물을 훔치며
“역적 이괄이 모반을 꾀하는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 감히 이처럼 하늘을 향해 활을 쏘니,
신(神)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할 대상이다.
우리들은 불행히도 역적에게 속임을 당해 뒤를 따르다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신하 된 사람은 차라리 임금께로 돌아가다 죽을지언정, 누가 차마 역적을 좇아 목숨을 부지하겠는가.
장차 나는 임금께 돌아가고자 한다.
저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여 규율이 없고 위협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복종하고 있으니 역시 장차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아, 우리 모든 군사 가운데 누군들 부모가 없으며 누군들 처자식이 없겠는가.
누군들 타고난 본성이 없으며 누군들 충성스러운 울분이 없겠는가.
전화위복할 이때에 한 치의 사사로움도 허용치 않겠다.
모두 내 말을 들어, 혹시라도 하늘과 사람에게 죄짓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명령하기를
“내 명령을 받들 자는 서 있고, 내 명령을 받들지 않을 자는 앉아 있어라.”라고 하였는데,
모든 군사가 서 있자 公이 눈물을 거두며 기뻐하였다.
한 번 나팔 부는 소리가 울리자 아기(牙旗)를 다시 세우고 말머리를 일제히 돌리며 정모(旌旄)의 색을 바꿨다.
역적들이 뒤쫓아 올까 염려되어 큰길을 버리고 행군하였는데,
그날은 1월 24일로,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아직 반달이 뜨지도 않아 구덩이와 언덕을 판별할 수 없었으므로 사람과 말이 함께 넘어져 나뒹굴자,
公이 즉시 말에서 내려 좌우 사람들을 불러일으키며 격려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한 몸 탈출해 혼자 도원수의 진영으로 돌아간다면 재앙을 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와 모든 군사는 의리로써 생사를 함께하기로 하였다.
게다가 이처럼 잘 단련된 1천 명의 모든 군사가 온전히 돌아간다면
이들 모두 임금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 어렵다.
어찌 차마 포기하여 역적에게 고스란히 넘겨줘 죽은 뒤 역적의 귀신이 되게 하겠는가.”라고 하자,
모든 군사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고 감히 뒤처지는 자가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숙천(肅川) 경계에 이르러 사정을 살펴
원수부(元帥府)가 현재 평양(平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조사윤(曺士允)과 전경홍(全敬弘)에게 명령을 내려 원수부에 급히 보고토록 했다.
다만 역적 강작(康綽)은 한명련의 심복으로서 겉으로는 비록 마지못해 따르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사실 분하게 여기며 한탄하고 있었다.
항상 말에서 기색을 드러내고 군사들의 마음을 미혹시켜 어지럽히려고 하였다.
公은 강작(康綽)의 목을 베고 조리를 돌리려고 했으나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먼저 목을 베어 죽이면 군사들이 마음에 의심을 품고 두려워할까 걱정돼 머뭇거리며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말 탄 군사 3명이 자산(慈山) 쪽에서 급히 달려와 도착하였다.
진영(陣營) 문의 군후(軍候)가 전하여 고하기를
“말타고 온 자가 자신을 부원수(副元帥)의 군관이라고 일컬으며
중군과 별장이 계신 곳을 묻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公이 즉시 말을 타고 가 마주 보고는
“네가 만약 한명련이 있는 곳에서 온 것이 맞다면 나는 응당 너를 쏘아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답하기를 “나는 부원수의 사람이 아니라 도원수의 군관이다.
전령을 가지고 왔으니, 네가 과연 도원수의 명령을 따르는 자라면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받들라.”라고 하였다.
公이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 사람은 일찍이 從事官을 따라 구성(龜城)에 왔으니, 실제로 도원수의 군관이 맞다.
다만 역적들이 있는 쪽에서 왔으니 상당히 의심스러우나,
나와 별장이 장차 말에서 내려 전령을 받아 그 진위를 밝히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먼저 말에서 내리다 강작(康綽)을 보니,
처음에는 부원수라는 말을 듣고 기쁜 빛을 얼굴에 드러내다
점차 중군이 있는 곳에서 떨어져 군사들 가운데로 물러나 서 있었는데, 그 거리가 수십 보였다.
중군이 두 번, 세 번 오라고 불렀는데 끝내 응하지 않자
公이 지계최와 함께 말에서 내려 교사(敎師) 김여중(金汝中)에게 전령을 받아 오게 하였다.
중군이 서서 읽으니 과연 도원수의 전령이 맞아 군사들은 기쁜 마음에 머리를 맞대고 주목해서 들었다.
역적 강작(康綽)이 뒤를 쫓아가 몰래 칼로 公의 머리를 내리쳤는데,
公이 칼을 꺼내 들어 도리어 강작(康綽)을 내리쳤다.
강작(康綽)이 재빨리 피하자 公은 말고삐를 잡아당겼고
노비 귀생(貴生) 및 군관 7, 8여 명이 한꺼번에 강작(康綽)에게 재빨리 화살을 쏘아
강작(康綽)을 고꾸라뜨리니 중군이 몇 걸음 달려 나가 강작(康綽)의 목을 베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칼에 베인 公의 상처를 살폈는데,
상처의 깊이는 뼈가 드러날 정도였고 피가 온몸에 줄줄 흐르니,
주위 사람들이 앞다투며 서로 부축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온 군사가 놀라고 슬퍼하자
公이 기운을 내 말하기를
“울지 말고 놀라지 말라. 내 목은 살집이 두툼하고 상처의 깊이는 필시 죽을 정도는 아니다.
하늘이 알고 계시니 나는 응당 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또 행군해야 하니 속히 상처를 감싸라.”라고 하니,
兵房軍官 이협이 차고 있던 문서 주머니로 상처를 감싸 고정시켰다.
말을 타고 진군해서 해 질 무렵에 숙천관(肅川館)에 도착해 진(陣)을 쳤다.
公이 방으로 들어가 상처를 치료하는데 곧 숨이 끊어질 듯 위독하자,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필시 公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슬피 울면서 해산할 생각을 하였다.
1월 26일 새벽, 公이 가늘게 숨을 쉬며 여전히 살아 있었고
군사들을 흩어지게 할 수 없었으므로
公이 애써 몸을 일으켜 진영에 나갔더니,
군뢰(軍牢)가 군문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 대부분 이미 도망을 가 버렸다.
公이 혼자서 말을 타고 숙천관 앞까지 나아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숙천부의 취타수(吹打手)를 불러 나팔을 불고 북을 치게 하였다.
군사들이 公이 진영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일제히 나아가니,
진영의 형세가 다시 온전해졌다.
강작(康綽)의 목을 군문에 매달아 놓고
公이 직접 진영을 순찰하고 격려하며 말할 때마다 눈물을 함께 흘리자,
모든 군사가 심복하여 감히 웅성거리지 않았다.
마침 백성의 말을 빼앗는 일이 발생하자
그중에 더욱 불량한 몇 명의 목을 베고 조리를 돌리니 많은 사람들이 숙연하였다.
이날 조사윤 등이 돌아와 도원수가 가상히 여겨 포상하려고 한다는 뜻을 전했고,
도원수가 또 특별히 군관 임극열(林克悅)을 보내와 公을 위로하였다.
公이 즉시 군관 한신종(韓信宗)에게 명령을 내려 돌아가는 길에 강작의 머리를 함께 보냈다.
곧이어 출발해 평양으로 서둘러 가는데 길을 가는 도중
자산(慈山) 쪽에서 온 70여 명의 군사들을 붙잡았다.
군사들이 말하기를 “역적 한명련이 중군을 기다리며 머물고 있었는데,
오늘 닭이 울 즈음에 중군이 지금의 상황을 바로잡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의 마음이 크게 술렁거려 연이어 도망갔습니다.
소인들은 호랑이에게서 벗어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라고 하였다.
公이 거짓인지 의심스러워 자세히 캐물었는데 사실이 확인되자 진영의 행군을 따르라고 명령하였다.
1월 27일, 방어사(防禦使) 김완(金完)과 만나 합세해서 함께 행군하였다.
公은 통증 때문에 말을 탈 수 없어 가마를 탔는데 가마 속도가 느려 가마에서 내려 말에 올라탔으며,
순안(順安)으로 가서 묵었다.
1월 28일 정오, 평양에 도착하니 도원수가 곧장 맞아들여 위로하고 격려하며
“중군의 충성과 절의는 전고(前古)에 견줄 데가 없다.
어려운 지경에 처해 일에 대처하는 데 있어 조금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또 상처를 싸매고 먼 곳까지 말을 타고 와 수고했다며 평양부에 명령을 내려 안심하고 상처를 치료하게 했으며,
소주 두 항아리를 특별히 보내 주니 관하(管下)의 군인 가운데 기뻐하며 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원수부에서 이협ㆍ정계생(鄭繼生)ㆍ한기종(韓起宗)ㆍ조사윤이 곁에 머물며
公의 상처를 보살피는 일을 허락했고,
김완(金完)에게 명령을 내려 그 군대를 거느리고 다시 행군토록 하였다.
1월 29일, 公이 칼에 맞은 상처가 깊어 썩어 문드러지자 보는 사람마다 놀라며 몹시 슬퍼하였다.
다음 날 더욱 기운이 없어 힘들어지자 公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상처의 땀을 씻어 내고 쑥을 태워 그 기운을 쐬니
주위에서 계속 입을 모아 말하기를
“관운장(關雲長 관우)이 자신의 뼈를 칼로 긁어내게 한 것도 이보다 더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며칠 만에 병세가 조금 나아졌는데,
2월 7일에 역적들이 임진(臨津)을 건너자 박효립(朴孝立) 등이 궤멸되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근심하며 분하게 여기니 기운이 막히고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연달아 어가(御駕)가 남쪽으로 쫓겨 갔고, 역적 이괄이 한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 차례씩 부르짖으니 번번이 상처가 터졌다.
역적들이 역적 이제(李瑅)를 추대하자 한양 사람 모두 머리를 숙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온 나라에 용감한 남자는 한 명도 없구나!”라고 하고는
곧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자 주위에서 하지 못하게 말렸다.
2월 15일 역적들이 패했다는 보고를 듣고 病이 조금 나아졌으며,
2월 18일 들어가 감사를 뵙고 함께 가기로 약속하였다.
2월 24일 한양으로 들어가 도원수를 뵙자 손을 부여잡고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金某의 충성과 절의를 이야기하고, 또 상처가 깊은데도 죽지 않았다고 말하니,
듣는 사람마다 金某의 충성과 절의를 이야기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 모두들 상처가 깊은데도 죽지 않았으니 金某야말로 진정한 장군이라고 말했다.
2월 22일 어가가 한양으로 돌아오자 도원수가 제일 먼저 公의 충성과 절의를 아뢰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여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 주었고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벼슬을 내렸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또 아뢰기를
“金某는 節義가 아주 분명하여 용감하게 임금께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나서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을 모두 데리고 왔으며, 임금님의 군사를 왕성하게 했습니다.
의로운 말을 먼저 꺼내 군사들의 마음을 감격시키니 역적들의 뜻은 마침내 내부에서 무너져
이윤서(李胤緖)ㆍ유순무(柳舜懋) 무리는 연달아 달아났고, 청천강 북쪽 여러 고을이 마음을 돌려 귀순했으니,
이는 모두 김 아무개의 덕택입니다.
그의 공로는 안현(鞍峴)에서 전투를 벌인 것보다 못하지 않으니
정훈(正勳)에 추가로 기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특별히 명령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더해 주었다.
5월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 水軍節度使)에 제수되었고,
병인년(1626, 인조4) 6월 황해도 병마절도사(黃海道 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전후로 사직 상소를 올리자 비답하기를
“경(卿)의 충성과 절의, 굳건한 용맹은 옛날과 비교해 보아도 드물다.”라고 했으며,
또 “이런 시기에 이런 임무는 충성과 절의가 이미 드러난 자가 아니면 불가하니
속히 가서 맡은 일을 살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부임한 뒤에는 모두 명성과 업적을 쌓아 중용될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가 있었다.
정묘년(1627, 인조5) 여름, 칼에 맞은 상처가 다시 썩어 문드러지자
7월 27일 벼슬에서 교체된 다음 세상을 떠나니, 향년 54세였다.
고향으로 公의 시신을 운구하여
행원(杏園) 뒤에 있는 선영 오른쪽 아래 병향(丙向 南東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고령 신씨(高靈申氏)로,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신용해(申容海)이다.
맏아들 선(墡)이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자,
둘째 아들 해(垓)가 승중(承重)했으며 음직(蔭職)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손자 남백(南伯)은 오위도총부 경력(五衛都摠府經歷)을 지냈으며,
손녀는 박세림(朴世霖)에게 시집갔다.
맏 증손자 시경(始慶)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부사(府使)를 지냈고,
둘째 증손자는 희경(禧慶)이며, 증손녀는 최태연(崔泰淵)에게 시집갔다.
이후 대대로 무반(武班)으로 명성을 드러냈으며
지금까지 이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있다.
아아, 公은 이미 부모를 섬기는 데 孝道를 다했고,
그 孝誠을 옮겨 임금을 섬겼으니, 이는 당연한 이치이다.
창의할 당시 앞에 역적의 진영과는 겨우 20리 거리였으며
군사들의 수가 많고 적음이 현격하게 달라 혹시라도 역적들이 알아차리고 쳐들어왔다면
분명 죽음을 당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물며 도원수 및 평안도 관찰사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그 형세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도,
오히려 과감하게 결단하여 전체 군사를 격려하고 이끌어
맹세코 죽을지언정 임금에게 돌아가기로 하였다.
당시 公이 마음으로 원하는 것은 의리였고, 믿는 것은 하늘이었다.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단지 나라만 알 뿐, 죽음과 삶, 영예와 치욕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역적의 우두머리는 그저 그의 처음이나 속였을 뿐, 그의 끝은 알아차릴 수 없었으며,
역적의 칼날은 단지 그의 몸에 상처나 입혔을 뿐, 그의 마음은 범할 수 없었다.
서쪽 변방 봄추위에 매우 먼길을 말을 타고 가면서도 公의 심한 상처조차도 公을 죽일 수 없었으니,
진정 의로운 남자이며 진정한 장부이다.
만약 公이 상처를 입지 않고 대장군을 따라 선우(單于 후금의 태종)와 맞섰다면
그가 이룬 공적은 반드시 환하게 빛났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公이 상처를 입어 업적을 세우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데
이는 단지 공명(功名)만을 가지고 논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필시 公으로 하여금 만 번 죽어도 한 번은 살 수 있는 상황에 두고
참된 강직함과 굳건한 의리를 이루도록 한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또 만약 강작(康綽)의 목을 베어 죽이지 않고 내부에서 반란을 꾀하여 官軍의 후방을 어지럽혔다면
안현 전투의 성패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公이 이미 역적 이괄과 한명련의 수족 같은 강작(康綽)을 목 베어 죽였기에
안현에서 여러 장수는 단지 역적들의 귀나 머리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종묘사직이 복이 많아 임금이 이 때문에 안정될 수 있었다.
이광(李廣)처럼 封해지지 않았지만 公이 어찌 일찍이 섭섭하게 여겼겠는가.
뛰어난 忠義로 인한 목의 상처는 하늘의 해가 비춰 주고,
水軍의 깃발과 兵馬의 부절은 만고토록 신하들의 표준으로 밝게 빛나리라.
그 후손들을 훌륭하게 하여 그의 공렬(功烈)을 잇게 했도다.
증손자 시경은 호복(戶僕)이 세력을 믿고
첨정(簽丁 군역을 담당할 장정을 군적에 기록함)을 피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관직 생활을 한 후손들은 대대로 청렴하다는 명망이 있었으니,
이는 그 마음이 모두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실로 公의 충의(忠義)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계승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내가 변변치 못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야사(野史)를 증거로 삼고
남아 있는 행적을 모아 公의 행장을 쓴다.
[면류관(冕旒冠)과 곤복(袞服) : 왕이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낼 때와 正朝ㆍ冬至ㆍ수책(受冊)ㆍ납비(納妃) 등의 행사 때 착용하던 대례복(大禮服)을 가리킨다.
[채수(債帥) : 원문의 ‘채수(債帥)’는 탐욕스러운 장수나 무관을 지칭하는 용어로, 원래는 ‘채권자의 장수’라는 말이다.
당나라 때 정치가 부패하여 장수가 내관에게 뇌물을 바쳐야 벼슬을 얻을 수 있었는데, 돈 없는 자는 부잣집에서 돈을 꾸어 뇌물로 바치고 벼슬을 얻은 뒤에는 백성에게 수탈하여 그 이자를 갑절로 갚았으므로 ‘채수’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런데 고우(高瑀)의 명이 있은 뒤부터“천하에 빚진 장수가 없어졌다.〔天下無債帥〕”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新唐書 卷171 高瑀列傳》
[시동생께서 …… 행동 : 의사(義士) 김헌(金憲, 1561~1592)의 업적을 말한다. 김헌은 1591년(선조24) 무과에 급제했으며,
다음 해인 임진년에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따라 금산에서 왜적을 막다가 순절하였다. 《存齋集 卷23 義徒金公傳》
[하늘을 …… 쏘니 : 원문의 ‘사천(射天)’은 반역을 꾀한다는 의미이다. 《사기》 권3 〈은본기(殷本紀)〉에 “무을(武乙)이 하늘과 경쟁을 벌여, 우상을 하늘이라고 하며 박혁놀이로 승부를 다투면서 하늘이 지면 욕하고, 또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공중에 매달아 놓고 활을 쏘면서 하늘을 쏘는 것이라고 했다.”라고 나온다.
[노비 귀생(貴生) : 귀생은 김효신의 작은아버지인 김헌이 금산 전투에 참여할 당시 김헌을 수행하였다.
김헌이 금산에서 순절한 뒤 살아 돌아와 금산 전투의 전말을 전했다. 《存齋集 卷23 義徒金公傳》
[관운장(關雲長)이 …… 것 :< 삼국지 권36 ,蜀書 관우전(關羽傳)〉에 따르면, 관우가 번성(樊城)을 공격하다 왼쪽 팔에 독화살을 맞자 화타(華陀)가 관우의 왼쪽 팔을 째고 뼈에 묻어 있는 독을 모두 긁어냈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가 ‘괄골요독(刮骨療毒)’
[이광(李廣)처럼 봉해지지 않았지만 : 이광은 漢나라의 명장 飛將軍을 말한다. 漢武帝 때 흉노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는데, 그의 부하 장수들은 제후로 봉해졌는데도 정작 자신은 끝내 높은 관작에 봉해지지 못했다.
이를 운명 탓으로 돌리며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는 ‘이광미봉(李廣未封)’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