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빛 고을 광주행(光州行)
방배동의 삼영빌딩 5층에 자기 잡고 있는 유일상사의 사무실이 잠시 조용해 졌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을 본 직원들이 모두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일어서서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최윤길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비서실로 들어선 최윤길은 넥타이를 매만지고는 바로 노크를 하며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던 강경춘은 문이 열리자 고개를 들었다.
회장실로 들어선 최윤길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강경춘에게 인사했다.
손짓으로 오른편의 소파를 가리키며 최윤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한 강경춘은 최윤길이 자리를 잡고 앉자 입을 열었다.
"알아봤나?"
"그와 회 사이에 무언가 사건이 벌어진 것은 확실한 듯 합니다.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정보가 불확실하긴 하지만 수원에서 움직이는 회의 정보원들 움직임이 급박해지고 과감해 졌습니다. 임한이 민감해질 수도 있을 정도로 감시 거리가 좁아진 것을 보면 분명 그 동안 그들이 움직이던 패턴과는 다릅니다."
"평소와 다른 움직임이니 그럴만한 이유가 생겼음에 틀림없다 이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윤길의 대답을 들은 강경춘이 자리에서 일어나?T다. 강경춘은 170센티미터 정도의 크지 않은 키였지만 50대 초반의 나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군살이 없고 근육질을 느끼게 하는 단단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뒷짐을 진 채 사무실 안을 천천히 거닐던 강경춘의 시선이 그를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난 최윤길을 향했다.
"그자의 주면에서 그처럼 회의 정보원들이 끊임없이 꼬이는데 임한과 접촉할 타이밍을 잡을 가능성은 있는 건가?"
"죄송합니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서 있던 최윤길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임한과 회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만을 알아내는 데에도 사실 그가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했다. 그 이상의 정보를 얻고자 했다면 그는 시신도 찾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사정을 강경춘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강경춘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언제나 기다리던 때가 온다는 말인가?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일개 말단 형사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니."
"서충원의 경우를 생각하면 어떤 시도든 보안 유지를 할 자신이 없다면 아예 하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결려도 기다려야 합니다. 회장님."
"그들에게 당한 서충원의 부하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
"예, 회장님."
두 사람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임한이 경찰서에 복귀한 후 그와 접촉할 기회를 노리던 그들이 모든 행동을 멈춘 배경에는 소름끼치는 이유가 있었다.
임한이 형사계에 복귀한 얼마 후 강경춘은 사무실로 찾아온 회의 인물을 맞이해야 했다. 그 인물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갈색의 대봉투 한 부를 그에게 건네주고 갔는데 사무실에 함께 있던 최윤길과 봉투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한 그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봉투 안에는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살아있는 자들의 다리를 전기톱으로 자르는 장면과 한쪽 다리가 발목으로부터 잘려 나간 20여 명의 사내들이 핏구덩이에 누워 있는 장면이었다.
그 사진들 중에 한 장은 다리가 잘려 나가지는 자의 얼굴이 잘 드러나게 찍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일부러 얼굴을 확인시키기 위해 찍은 사진임이 역력했다.
그리고 최윤길은 그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알아보았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얼굴의 소유자는 한때 경춘파에 가장 위협이 되었던 자 중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30대 초반의 짧은 머리에 매부리코여서 어딘지 잔인해 보이는 얼굴을 한 사내. 북악파 세 개의 행동대 중 하나를 이끌던 김영찬이었다. 그는 북악파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스트리트 파이터였다.
김영찬에게는 늘 일 대 일 대결에서는 누구에게도 상수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그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고수가 그였다. 그렇게 화려한 명성을 떨치던 그가 모습을 감춘 것은 3년쯤 전이었다. 서충원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명되었다는 소문과 함께였다. 그런데 뜬금없어 전기톱에 다리가 잘려나가는 장면의 주인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강경춘과 최윤길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북악파는 모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것이 재수 없게 회의 정보망에 걸렸음에 틀림없었다. 회는 서충원을 직접 징계하는 것보다는 실제 모반의 과정에 몸담은 자들을 제거한 것이다.
그것은 강경춘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서충원이 이용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서충원도 사진의 한 장을 차지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회가 사진을 강경춘에게 보낸 것은 경고였다.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경고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사진들을 본 강경춘과 최윤길은 임한과 접촉하고자 하는 시도를 감히 할 수 없었다. 그 시도가 발각된 이후에 닥칠 결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리가 잘린 후에 그들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그들의 신병을 회가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어디 섬에라도 가둬 놓은 모양이야. 잔인한 놈들."
강경춘은 이를 갈았다. 그의 두 눈 깊은 곳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었다. 그도 오늘날의 경춘파를 키우면서 손을 쓸 때 인정을 두지 않았지만 20여명의 사내들을 한꺼번에 불구로 만든 적은 없었다.
한국의 치안상황에서 그런 짓을 할 수도 없었지만 그런 일을 벌인다는 자체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람은 개돼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본 사진 속의 불구가 된 사내들은 개돼지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그들의 다리를 자른 후 그렇게 아무렇게나 핏구덩이 속에 눕혀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경춘의 말에 최윤길도 입술을 깨물었다. 사진 속에 있는 자들은 북악파 내에서도 최고 소리를 듣던 주먹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실력은 회가 그들을 처리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회의 힘을 생각하자 최윤길은 사지가 오그라드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사진이 전달된 것은 경춘파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회의 지배를 받는 모든 조직에 전달되었을 것이고, 전달된 곳마다 김영찬처럼 각 조직에서 아는 얼굴들의 사진은 확대되어 전해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의식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긴장이 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손바닥에 통증을 느낀 최윤길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말문을 열었다.
"회장님, 지금은 엎드려 있어야 할 때입니다. 저희 자력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회가 올 겁니다. 제가 만났던 임한은 회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사내가 아니었습니다. 북악의 서회장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리수는 화를 부르게 됩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어!"
강경춘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지러운 심기를 가라앉혀야 했다. 최윤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이미 회의 힘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그가 아닌가. 서충원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다.
창가에서 걸음을 멈춘 그의 눈에 밝은 빛을 뿌리고 있는 태양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한이 동광주 인터체인지를 통과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적당히 따스한 햇볕이 열린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근 2년 만에 오는 길이었지만 낯선 느낌은 없었다.
그가 멀리 웅장한 무등산의 정상이 보이는 동네로 들어선 것은 동광주 인터체인지를통과한 지 30여 분이 지난 후였다.
서석동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무등산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여서 무등산과 접한 서석동은 일 년 열두 달 많은 관광객들이 지나치는 곳이었다. 근처에 조선대학교가 있는데다가 여러 해에 걸쳐서 도시 미관에 관련된 공사가 계속된 탓인지 동네가 예전에 왔을 때 보다 더 정돈되고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서석동의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든 차는 몇 블록을 지나 단층의 고택 앞에 섰다.
성인의 목 어림 정도까지 밖에 오지 않는 담 너머로 저택의 안이 보였다. 넓은 마당의 뒤로 목조 마루가 눈에 들어왔다. 비바람에 씻겨 색이 바랜 목조 대문과 군데군데 이가 빠지듯 파손된 기와지붕이 이 집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은 골목에 차를 주차시키고 대문 앞에 섰다.
"통통통."
그가 조심스럽게 대문에 달려 있는 쇠로 만든 문고리를 몇 번 두드리자 안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끼이익."
"누구십니까?"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온 사람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그는 짙은 남색의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둥글고 눈매가 부드러워서 온화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대문 앞에 서 있는 한을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아!"
"안녕하셨습니까? 형님!"
한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목례를 주로 하는 그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중년인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한에게 다가가더니 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이놈, 이 무심한 놈. 전화 한 통 없더니 도깨비처럼 나타나는구나!"
"죄송합니다."
중년인의 얼굴은 보름달을 연상시킬 정도로 환했다. 한은 그 얼굴을 보며 죄스러움을 느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된 것이다.
그렇게 무심하게 지내기에는 지금 눈앞에 있는 중년인이 그에게 보여주었던 정은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깊었다."
"선생님 계십니까?"
"나가셨어. 잘 왔다. 안 그래도 요즈음 너를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셨다."
중년인은 한을 안으로 안내하며 대답했다. 중년인과 마루에 나란히 앉은 한은 집 안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변한 게 없습니다. 오래 걸리시는 일입니까?"
"아냐. 돌아오실 때가 거의 됐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어딜 가셨는데요?"
"백제사 연구 발표회가 있어. 그곳에서 향토 사학자들을 초빙했는데 아버님도 초대받았다."
양손으로 마루를 짚은 채 상체를 뒤로 젖히며 이세영은 말했다. 말을 하는 그의 눈가에 그늘이 져 있었다.
"잘 안가시잖아요? 가봐야 비웃는 자들밖에 없는 곳에 왜?"
"당신이 움직이실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니까 연구하셨던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신다."
한이 찾아온 이세영의 아버지, 이준하는 백제사를 연구하는 재야의 향토사학자였다. 그는 평생 동안 백제의 대륙 경략을 연구했는데 학계에서는 이단아라고 불릴 정도로 대륙 백제의 실존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너는 어떻게 지냈냐?"
"이 직업을 아시잖아요. 늘 그렇습니다."
한의 대답에 이세영은 피식 웃으며 한의 어깨를 쳤다.
"얼마 전에 너희 경찰서가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았다. 큰 사건을 해결했더구나. 아버님도 그 방송을 보시며 네 얘기를 하셨다. 언제나 너를 걱정하셨어. 네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스타일이란 걸 너무 잘 아시니까."
"형수님은 아직도 캐나다에 계신 겁니까?"
한은 화제를 바꾸었다.
"응. 좋다는 구나. 아버님 때문에 말을 못하지만 나도 나왔으면 하는 기색이다. 얼마 전에 전화 왔을 때는 그곳으로 아예 이민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보더라."
"이민이요?"
"그래. 나도 고민 중이다."
"하지만 형님이 공부하신 것들은요?"
한은 몇 년 사이에 이세영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이곳을 마지막으로 찾아 왔을 때는 그가 형사계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때 이세영의 처 유민경은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가던 아들 이태일을 데리고 캐나다로 막 떠난 참이었다.
이세영은 목포 토박이로 전남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그의 아버지 이준하와 함께 백제사를 연구해 왔다. 그 성과는 적지 않아서 재야 사학계에서는 백제사를 말할 때 이준하와 함께 꼭 언급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리고 국수주의자라고 불릴 만큼 감한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을 했으니 한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이세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부? 공부야 많이 했지. 하지만 우리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역사 해석이 홀대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버님과 내가 한 많은 연구가 강단사학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설 취급을 받고 있는 것도 현실이지."
"알아 달라고 연구하셨던 건 아니잖습니까, 형님?"
"물론 그렇다. 남들이 알아 달라고 연구했던 것은 아니야. 하지만 6개월쯤 전 백제사 연구 발표회장에서 이름만 대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알 저명한 학자라는 인간이 아버님에게 했던 말을 들은 후에 내가 지금하고 있는 역사 연구가 과연 내 몫일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민도 그 뒤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아버님에게 시대에 뒤떨어진 영토지상주의자라고 하더구나."
이세영의 말을 들은 한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어떤 개잡놈이 선생님에게 그런 같잖지도 않은 말을!"
이세영은 한의 어깨를 툭 치며 털털하게 웃었다. 한이 스무살 무렵의 젊은 시절 손을 쓰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는 그였다. 20대 초반의 한은 지금보다 덜 신중했고 더 격정적이어서 불의를 보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었다. 지금의 한은 그때에 비하면 괄목상대하다고 할 정도로 진중해져 있었다. 세월의 힘이었다.
"허! 녀석. 진정해라. 네 녀석이 그 자리에 없었기에 망정이지 네가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훤하다. 그 말을 들은 아버님도 화를 많이 내셨어. 알잖아. 아버님 성격. 불같이 노하셔서 그 자리에서 그 말을 했던 교수와 한바탕 하셨다. 그 이후로 연구 발표하는 곳에는 완전히 발길을 끊으셨다가 오늘 다시 나가신 거야. 아까 말했던 대로 연구하신 내용을 무덤으로 가져갈 수는 없으시다면서."
"그런 인간들의 말은 한 귀로 흘리세요.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습니다. 선생님과 형님이 잊혀진 우리 역사의 많은 부분을 복구한 그 자료들의 가치는 계산할 수도 없을 정돕니다. 당대가 아니라면 후대에라도 반드시 올바른 평가를 받을 겁니다."
"아버님은 몰락도 나는 아닌 것 같다. 생각이 많아"
이세영은 입을 다물었다. 한은 이세영에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세영은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었지만 그 아버지, 이준하와 성격이 많이 달랐다.
이준하는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히지 않는 대나무와 같은 기질을 갖고 있어서 학문에 관해서는 타협할 줄을 몰랐고 누가 어떤 식으로 싸움을 걸어오든 피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박해도 많이 받았다. 민주화운동 문이 아니라 사학 때문에 박해받은 드문 케이스였다.
당시 그는 우리나라 사학계를 정화해야 한다고 늘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자들이 강단 사학계를 장악하고, 그들이 만든 국사책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 그는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 정도 선에서 그쳤으면 정권 차원의 박해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라사 중심의 국사 서술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사의 뿌리를 은연중 신라에 두려는 정권 차원의 시도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정권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다.
그는 당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고구려와 백제, 발해 그리고 고구려의 유민 이정기가 세웠던 제나라 등에 대해 주목했고 우리 민족이 세웠던 그 모든 나라의 역사를 국사책에서 신라만큼의 비중으로 다루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뿌리를 북방의 유목 민족으로 본 그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신라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몇 건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서슬이 시퍼렇던 군사 정권의 비위를 거슬렀다.
당시 신라사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 인식은 대세였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었다.
북한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상황에서 남한은 그 역사의 뿌리를 고구려로 할 수가 없었다. 일단 지배했던 지역이 북한에 속해 있는 상황에서 남한이 신라에 그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려 한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5.16 이후 권력을 잡은 자들이 원한 결과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신라를 민족사의 정통으로 간주하는 사관이 폭넓게 자리를 잡으려 하자 이준하는 그런 시도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집권했던 영남 지역의 권력자들이 이준하를 어떻게 생각했을 지는 불문가지였다.
이준하는 간첩으로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그 이후에도 그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었다.
군사정권이 완전히 붕괴된 90년 대 초까지.
그런 역경 속에서도 이준하는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가 센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이세영은 이준하와 달리 심성이 여리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이준하의 뜻을 이러 백제사를 연구했지만 그 연구로 인해 고통 받았던 아버지를 보며, 그리고 민족이란 화두가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현재의 학문적 추세를 보며 자신의 연구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끼이익."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마당으로 들어서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180센티미터는 될 정도로 키가 컸고 흰 한복을 입었는데 한복만큼이나 흰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단정하게 등 뒤에서 묶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은 햇빛을 잘 보지 못한 듯 창백했고 깡마른 몸매였지만 오관이 뚜렷한데다가 눈이 맑고 날카로워서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을 느끼게 하는 노인이었다. 그가 이준하였다.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마루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한을 본 이준하의 눈이 커졌다. 한의 방문이 뜻밖이었던 듯 놀란 얼굴이었다. 한의 옆에 있던 이세영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 한이가 왔습니다."
이준하의 시선이 한의 눈과 마주쳤다. 평소의 표정을 회복하고 있었던 그의 눈매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매서운 기세를 느끼게 하는 눈길이었다.
"나랏일을 하는 것이 아무리 바빠도 한 번 찾아올 여유도 없더냐? 이놈!"
소리치는 이준하의 목소리는 컸지만 화난 음성은 아니었다. 그의 음성은 쇠를 부딪치는 듯 카랑카랑했는데 화났다기보다는 서운해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는 음성이었다. 한의 고개가 깊이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한과 이세영의 옆을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친 이준하는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의 시선이 한과 이세영을 차례로 훑었다.
"들어들, 오너라."
한과 함께 마루에 올라선 이세영은 이준하가 들어선 안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책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안은 사방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들은 사면 벽에 마련된 책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창문과 이부자리를 펼만한 공간을 제외한 방바닥에 쌓여 산을 이루고 있었다.
책이 없는 빈 공간, 이부자리를 펴는 아랫목에 앉은뱅이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 책상 위엔 오래되어 보이는 고서가 펼쳐져 있었는데 이준하가 보던 책인 듯 했다.
이준하는 책상을 한쪽으로 치운 후 자리에 앉았다. 한은 이준하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절을 한 후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한을 바라보는 이준하의 눈매는 처음과 달리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상처는 괜찮으냐?"
"다 나았습니다."
이준하가 묻는 상처가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이준하도 한이 저격당했던 일을 알고 있었다. 한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저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이준하의 심정이 손에 잡힐 듯했기 때문이다.
"바쁠 텐데 어떻게 내려온 거냐?"
"부산에 일이 있어 가는 길입니다."
"용케 시간을 냈구나."
이준하의 말투가 완연하게 부드러워졌다. 옆에서 이준하의 눈치를 보던 이세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이준하가 한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아는 그였다.
그는 이준하가 그동안 찾아오지 않은 한에게 서운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서운함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초가을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잘 가꾸어진 정원에 내려앉고 있었다. 정원의
연못가를 거닐던 한형규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어 연못가에 마련되어 있는 잉어 사료를 한 줌 쥐어 그것을 연못에 뿌렸다.
길이가 50센티미터가 넘어 보이는 형형색색의 잉어 수십 마리가 덩치에 걸맞은 느릿한 동작으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잉어들이 물 위에 떠 있는 사료들을 큰 입을 벌려 삼키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한형규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사람을 보냈다고?"
"그렇습니다."
한형규의 뒤를 따르던 김정만이 공손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한형규의 시선이 김정만을 향했다.
"아직도 돈을 찾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할 말이 없을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그자들이 이번에 사람을 보낸 것은 정보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보? 무슨?"
"박송원 의원에 대한 정봅니다."
김정만의 대답을 들은 한형규의 얼굴에 짜증난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박송원이라는 이름에서 심한 불쾌감을 느낀 듯, 입을 열었을 때는 말투에 비꼬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 미친 작자에 대해서 말인가? 박송원이 정보랄 것을 갖고 있기나 한가?"
"박송원이 제정신을 가진 자가 아니긴 하지만 이번에 그자들이 전해준 박송원에 대한 정보는 그냥 듣고 흘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 한번 말해 보게."
한형규는 정자에 올랐다. 그가 방석 위에 앉자 맞은 편에 조심스럽게 앉은 김정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박송원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번에 그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기로 했던 자금을 탈취한 자에 대해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자들의 말로는 자금을 탈취한 것은 오래 전부터 그들을 적대해 왔던 자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음지에서의 그들은 쾌 쓸 만한 솜씨를 갖고 있는데도 쉽게 처리하기 곤란할 정도로 능력이 있는 자라고 하더군요. 배후 세력도 만만찮고요."
"그자들이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할 정도라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박송원이 최근 그자와 접촉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들의 만남이 문제가 된다는 뜻인가?"
"박송원이 만나고 있는 그자의 배후 세력이 갖고 있는 성향이 향후 우리의 일에 중대한 장애가 될 것이라는 것이 회의 판단이었습니다. 저도 그들의 판단에 동의했습니다."
김정만의 말에 한형규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성향이 어떻기에?"
"회가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우리의 자금을 탈취한 자들은 음지에서 회가 두려워할 만큼 막강한 능력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자들 중 드러나 있는 자의 성향이 박송원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 덜떨어진 민족주의적 성향 말인가?"
"예"
"회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 만하군. 회와 적대하는 자들이 박송원의 그늘 속으로 숨을까 봐 두렵다는 것이겠지. 박송원은 이 나라의 국회의원, 비록 야대여소이긴 해도 여당의 국회의원이니까."
"저도 회와 마찬가지의 우려가 됩니다. 박송원이 회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음지의 힘을 얻게 된다면 향후 우리에게 더 힘든 상대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박송원이 주장하는 민족자주 반외세는 정말 위험합니다. 그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정보 라인의 보고로는 국민들 중엔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그자의 힘이 더 강해진다면 주변의 강대국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런 긴장을 마다할 자도 아니고요. 그는 현재도 국회 내의 반미 성향의 의원들을 이끌고 있는 잡니다. 게다가 대표적인 친일파청산론자이기도 하고요."
"휴우, 그 미친놈이 갈수록 해괴한 짓들을 하고 다니는군."
한형규는 나직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짜증이 심하게 묻어있는 한숨이었다.
"회가 그런 정보를 전해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되나?"
"박송원을 처리해달라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너무 위험해. 그는 일반인이 아닌 국회의원이야.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움직일 기관이 한둘이 아니네."
"하지만 어르신은 그 기관들의 움직임을 막으실 수 있지요."
김정만은 입가를 비틀며 작게 웃었다. 강한 자신감이 그 미소 뒤에 숨어 있었다.
한형규는 연못의 잉어를 향했던 시선을 돌려 김정만을 보았다.
"회는 우리 힘을 빌려 손 안대고 코를 풀고 싶은가 보군"
"흥. 그런 마음이야 굴뚝같겠지만 그들이 감히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박송원을 제거한 이후 공안 기관들의 수사를 무마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거는 그들이 맡고요."
"그렇게 나쁜 조건은 아니군. 어차피 우리가 샐행 하는 것이 아니라면 회의 꼬리가 수사망에 잡힌다 해도 상관은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회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능력을 생각하면 쉽게 꼬리가 잡힐 자들도 아닙니다. 게다가 그 일이 실행된다면 눈에 가시 같은 박송원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회도 우리에게 더 강하게 예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국의 국회위원을 제거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그들이 감히 우리를 배신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한형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도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언제 대답해 주기로 했나?"
"어르신의 결심을 받는 대로 연락하기로 했습니다."
"잘했네. 한 이틀 정도 후에 연락을 하게. 고민하는 척은 해야지. 그래야 그들이 더 안달을 할 것이 아닌가. 자금 회수 문제도 질책하는 것 잊지 말고. 우리가 그들에게 주었던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알겠습니다."
김정만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정원은 다시 정적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한형규와 김정만은 회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읽지 못했다. 그것은 회를 세력이 큰 조폭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그들의 한계였다. 그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