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 수필의 본질 재 이해
우리가 지향하는 수필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문제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나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물론 그 동안
▲ 최원현 수필가 |
수많은 정의가 내려졌으나 누구나 만족할만하게 ‘이것이다’ 하고 인지될 만큼 명확한 답으로 정의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러다 보니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정의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진솔하게 쓰는 글’이라면 꼭 수필만이겠느냐는 의문도 생긴다. 그래서‘수필은 詩的 분위기의 산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수필은 번쩍이는 지성도 중요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 씌어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뿐 아니라 ‘수필은 작자의 인생관이나 특수한 순간의 감정, 그렇게 되는 그 자신을 직접 독자에게 보여준다’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이러한 여러 정의들이 과연 수필의 본질을 얼마나 확실히 해주고 있었을까?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쓰는 글’을 수필의 출발이라고 할 때 비문학적인 글들과 구분되어지는 문학성은 또 어디서 찾을 것인가. 뿐 아니라 그것이 창조적인 것인가 아니면 모조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또 어떻게 풀 것인가. 따라서 수필에는 기존의 대상을 통하여 새로운 대상을 탐구하고 재창조하는 노력과 기술, 다시 말하면 존재의 전환 내지 재구성까지도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보다도 수필은 기술(記述)적 문제가 아닌 심정(心情)적 문제가 더 큰 무게 중심을 갖고 있다는데 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글이란 창작동기를 통하여 작가의 체험과 철학이 작가의 표현력(기술)을 힘입어 객관화된 표출 곧 문자화된 것이다. 문학이 문자라는 도구를 통해서 표현되는 예술이다 보면 문자화의 결과인 문장은 문학을 이루는 기본 요소가 되는 것이며, 문체는 작품의 분위기를 이끌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씌어진 글이 예술적 특히 문학적 분위기를 지닐 때 문학작품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씌어진 글이라도 읽어주는 이 없이 사장(死藏)이 되어 버린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한 목적 곧 누구에겐가 보여지고, 어디엔가 전달되어져야 비로소 글이 되는 것이다. 전달의 대상은 독자인데 문제는 이 대다수 독자의 특성은 글(책/작품)에서 문학성을 찾는 외에 흥미(재미)를 더 많이 찾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흥미의 요소와 문학 요소의 교직이 바로 작품을 만든다고 할 수 있는데, 흥미요소이건 문학요소이건 만들어내는 건 모두 작가의 몫이지만, 독자는 이 두 가지가 혼합되어 나온 결정물(結晶物)이 벌 나비가 꿀 냄새를 맡고 날아드는 것과 같은 흥미요소(꿀 냄새)로 보다 강하게 나타날 때 그 작품을 선택하고 선호하게도 되는 것이다.
또한 수필은 ‘자기’라는 개성의 향취를 문학화한 것으로 尙虛가《文章講話》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기의 심적 나상(裸像)’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정(情)과 감(感)이 마음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고 조화롭게 교합(交合)되느냐에 따라 그 결정물인 수필의 완성도(完成度) 곧 독자의 감동지수도 달라진다.
너무 추상적인 표현은 읽은 뒷맛(여운)을 없애버리고,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은 읽을 맛(구미, 흥미)을 돋우지 못한다. 너무 열어놔도 품위를 잃을 수 있고, 너무 닫으면 분위기를 잃어 외면당하거나 외톨이가 될 수 있다. 자기다움으로 열고, 자기다움으로 닫으며, 자기 내부에서 생성되고 담겨진 것들을 분위기(품위+흥미) 있게 내놓을 때 수필다운 수필이 된다. 그만큼 수필은 쉬운 것 같으나 대단히 고상한 문학이요, 그렇기에 더더욱 문학다워야 할 것이며, 문학답기 위해 문학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결국 ‘수필은 그것을 창작해 낸 사람의 체취이고 체온이며,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수필을 쓰는 사람의 가장 큰 고뇌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냈을 때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과 자기에게 돌아올 반대급부 적인 문제점들’을 살펴야 하는데, 그것은 작가의 인생 전부에 대한 평가도 될 수 있고, 살아온 삶의 정의가 될 수도 있다. 해서 ‘수필이 인생의 반영이고 보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제재를 찾고 주제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생활에는 항시 모순이 내재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뒤따르고, 글은 내가 주체가 되므로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주관적인 견해 속에서 한 편의 수필이 쓰여질 수밖에 없다.’고 했을 것이다.
수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내 삶이고 소망이고 철학이지만, 그 ‘나’라는 게 ‘독불장군의 나‘가 아니라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나이고 보면 결국 나의 이야기는 나와의 관계 이야기일 수밖에 없고, 그것들이 글감이 되고 주제가 되면서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 및 문학관에 의해 수필이란 이름의 재 창조물이 태어난다 하겠다. 물론 그 관계는 꼭 사람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일 수도 있고, 그가 바라는 소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을 쓰는 근본적인 목적이란 자기의 삶을 보다 객관적으로 조명하여 그 삶이 가진 의미를 재음미함으로써 보다 진실 된 삶의 가치를 찾아 나서는데 있다 할 것이며, 그것이 바로 수필다운 수필을 탄생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물에 대한 시각과 해석이 개성적이고 자신의 결점까지도 정면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각도에서 중화시키고 의미화 하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도 될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수필에 대한 개념이 환경적 변화로 인하여 많이 흔들리고 있다. 이는 마치 뿌리도 잘 내리고 잘 자라고 있는 나무인데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 심을 때 겪는 몸살처럼, 고수해 왔던 것을 더러는 과감히 버려야 하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도 해야 하는 결정 앞에도 놓인다. 무엇이 가장 이상적인 것인지, 지금의 결정과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부담스러운 것은 시행착오를 통한 이러한 과정이 우리 수필문학의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용범위에 관한 문제로 본다면 보다 폭넓은 수필의 영역을 확보하는 일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여하튼 21세기는 수필문학에도 새로운 개념 정립이 필요한 전환기다. 아울러 현기증이 날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진정 수필이 독자의 사랑을 받는 문학으로, 나아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수필을 생명처럼 여기는 수필가의 몫일 수밖에 없다.
2. 21세기의 특성과 시대적 이해
21세기의 특성을 일반적으로 국제화, 정보화, 세계화라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정보기술의 확산, 가속화를 기반으로 한 지식사회로의 전환에 부응하여 가치관도 새롭게 정립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 가치관은 인간 중심 가치관이기보다 물질 위주이고, 성과, 능력 등 결과 위주이다. 그러면서 ‘놀이와 상상 그리고 창조적 힘으로 끝없이 삶을 허구(Fiction)와 이미지로 충만케 하는 인간 곧 호모 픽토르(Homo Pictor)의 세기’라고도 말한다. 뿐 아니라 유연성과 섬세함․인내력 등이 요구되는 시대, 서바이벌게임처럼 살아남는 자에게만 가치가 적용되는 시대라고도 한다. 그만큼 변화도 많고 다양한 요구와 다양한 능력이 공존하는 시대인 것이다. 특히 한꺼번에 많은 일을 그것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스피드의 시대로 끊임없이 몰려드는 일들 속에서 남보다 빠르게 정보를 얻어 일을 처리하고 그만큼 여유를 챙겨야 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문학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수요자인 독자가 이 시대 사람인만큼 곧 이 시대를 사는 그들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쏟아져 나오는 지식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그들(독자)의 시선을 끌어 오느냐도 문제인 것이다. 특히 인터넷 시대인 요즘, 컴퓨터는 어느덧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직장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에서도 컴퓨터는 방마다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 국민의 70%인 3,200만 명이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다 하니 가히 인터넷 왕국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제 컴퓨터는 아이들의 가장 선호하는 놀이기구가 되었고, 주부들의 시장을 보는 도구이며, 세금을 내며, 각종 지식과 정보의 가정 백과사전으로 활용된다. 집에서 컴퓨터로 은행 일을 보고, 각종 티켓을 구매한다. 가고 싶은 곳의 정보를 얻고자 할 때 직접 가본 사람보다 더 정확하고 상세하게 사전 정보를 입수한다. 신간 서적이 어떤 게 있고, 그 중 읽을 만한 책은 어떤 책인가 앉아서 정보를 얻는다. 주문도 인터넷으로 하며 할인 혜택까지 받는다. 인터넷 시대, 사이버 시대의 모습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음악도, 미술도, 영화도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듣고 싶은 음악을 필요한 만큼 컴퓨터에서 다운 받을 수 있고, 영화도 아주 값싸게 볼 수 있다. 유명한 그림도 쉽게 감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어떤가. 문학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아니다. 문학은 이 부문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미 대다수의 많은 작가들이 육필에서 타자기로, 타자기에서 컴퓨터로 옮겨온 지 오래다. 거의가 전자우편(e-mail)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작가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각종 작품 공모도 인터넷상에서 이뤄지는가 하면 홍보는 인터넷만큼 빠르고 효용성 있는 것도 없다. 종이 책을 위협하며 전자 책 발간 붐이 조성되고 있고, 쓸만한 작가를 찾는 문예지나 잡지사의 기자들 발길도 인터넷 문학 사이트에 잦아지고 있다. 그만큼 사이버 공간의 활용이 작가나 독자 및 문학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극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쓰는 육필 문인이 아주 없어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다. 그러나 모든 예술 장르가 다 그렇겠지만 문학 역시 시대를 무시하고 그 시대와 유리된 채로는 그 시대와 공감대 및 설득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때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 했다. 물론 과학이나 문화가 인간의 삶에 다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을 추구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지식, 정보,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작은 단점은 수용하며 보다 큰 장점의 유익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 시대적 상황일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잘 활용해 나가야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이들의 자세일 것이며, 특히 문학도 이를 효과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경우도 하루의 업무를 시작하기 전 맨 먼저 하는 일은 밤사이에 어떤 메일이 와 있는가 부터 확인한다. 고정적으로 배달되는 아침 편지들을 확인하고, 답을 해야 할 것은 바로 답을 한다. 많은 사람에게 한꺼번에 소식을 전해야 할 경우도 전자우편이 쓰인다. 원고 송고는 말할 것도 없고, 사진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전자우편으로 보내주면 된다. 원고 쓰기도 컴퓨터에 직접 쓰는 일이 많아졌다. 초고만은 노트에 써서 컴퓨터에 입력하고 수정해 나가지만 이미 컴퓨터는 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가 21세기로 대표되는 인터넷 시대에 대응하는 것일 순 없다. 바로 삶의 내용, 문학의 형식과 내용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유한근은 그의 평론 <한국수필의 현황>에서‘19세기의 문학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내용 및 형식의 측면에서 도전을 받아왔던 것을 우리는 안다. 리얼리즘 문학 운동이 다다이즘, 큐비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등 파격적인 모반적인 예술운동의 도전을 안팎으로 받아 왔으나 금세기 말까지 버텨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버틸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문학 작품의 창작이 아니라, 그 창작품을 실을 매체에 대한 불안과 염려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정보 매체인 컴퓨터의 역할이 어떻게 확대될 수 있는가, 그 확대 여부와 기능에 따라 예기치 않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수필을 위해서, 그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고도화되어 가는 사이버 시대에 전개될 사항을 간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 오프라인 상에서 종이 책만이 문학이던 시대에서 온라인상의 영상문학, 전자문학으로 급선회하면서 사이버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는 2.30대의 수준과 성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필이란 장르가 아직까지 중년문학으로 인식이 되어 있고, 그 작가 층이 중년이어서 온라인 세계에 쉽게 적응이 되지 못한 관계로 종이 책의 위치가 보전되고 있긴 하지만 이제 수필도 젊은 층 독자 곧 사이버 공간의 독자를 확보치 못한다면 참으로 큰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보다 잘 이해하고, 적절한 대응과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3. 새 시대의 독자와 작가
소설의 독자는 ‘그런 삶도 있구나’ 하고 이야기를 읽지만 수필의 독자는 작가의 삶을 통해 자기 삶을 들여다본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이 작가의 체험이라면 곧 독자의 체험도 될 것이다. 제각각의 삶이라지만 서로의 삶은 공통분모로 같아질 수 있다. 시골 풍경은 대개가 서로 비슷한 것처럼 살아온 삶의 질곡과 고난의 강도는 다르더라도 우리 삶의 형태는 서로 비슷하기 마련이다. 수필이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려면 독자가 ‘아니, 이 이야기는 바로 내 얘긴데?’ 하는 충격이 올 때라고 한다. 그만큼 수필은 독자 개개인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작가나 독자가 이해하고 있는 수필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이다.
첫째, 형식이 없는 자유로운 산문이라는 것이다. 수필은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산문문학이면서도 구성상의 제약이 없이 자유롭게 씌어지는 산문이다. 그래서 내용 면에서도 인간이나 자연의 어느 한 가지만 다룰 수도 있고 여러 가지를 생각나는 대로 토막토막 다룰 수도 있다.
둘째, 개성적이고 고백적인 문학이라는 것이다. 시에서는 정서의 승화와 은유의 기법 속에 개성이 융합되고, 소설이나 희곡은 표현의 뒷면에 개성의 향취와 분위기가 있지만, 수필은 작가의 적나라한 심상(心像)과 개성이나 취미․인생관 등이 그대로 나타나는 고백적인 문학인 것이다.
셋째, 제재가 다양한 문학이라는 것이다. 인생이나 사회․역사․자연 등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느낀 것과 생각한 것은 무엇이나 자유자재로 서술할 수 있으므로 그 제재의 선택에 있어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해학과 기지와 비평정신의 문학이라는 것이다. 수필에는 서정의 감미로움과 입가에 스치는 미소와 비판정신이 있어야 한다. 특히 수필에서는 지적 작용을 할 수 있는 비평정신이 밑받침되어야 하며, 정서와 신비의 이미지를 그리기 위하여 해학과 기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작가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고, 작가는 독자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수필은 작가의 삶의 이야기면서 독자의 삶의 이야기로써 서로 공감하고 동화되는 것으로 한 편의 수필로 하여 작가와 독자가 동심(同心)을 이룬다. 거기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독자와 작가는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독자와 작가가 동시에 만나고, 또 순간적으로 독자의 요구 또는 의견이 작가의 작품에 반영될 수도 있다.
한 번 출간이 되면 다시 출간하지 않는 한 수정이 불가능한 종이 책에 비하여 작품발표가 시시각각으로 용이한 온라인상에선 작품의 수정 보완도 가능하다. 공지와 함께 수정된 작품을 다시 보내주면 앞의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이다. 또 누구든 작가가 될 수 있다. 자신이 없으면 익명의 발표도 가능하다. 그러니 작가와 독자의 구분이 명확했던 오프라인과는 많이 변화된 시각차를 보인다. 곧 21세기, 그리고 앞으로는 작가와 독자라는 그런 획일적인 구분보다는 온라인상에서 아이디나 닉네임만으로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고, 또 가차 없는 비판도 할 수 있다. 더욱이 ‘바쁘다’는 전제, ‘시간이 없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각양의 이 모든 현상들도 마음에만 들면 얼마든 걸음을 멈출 수도 있다는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악세사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같은 이 시대 사람들 곧 독자의 눈높이, 독자의 취향에 맞아야 하는, 다시 말하면 독자를 매료시킬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어야 비로소 만남이 이뤄지게 되는데 여기서 기존 작가들은 혼란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작품 제작이 작가 기준이냐 독자 기준이냐 하는 문제인데 작가가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한다 해도 독자가 없다면 무용지물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인터넷 세대들에겐 작품의 수준은 약간 떨어진다 하더라도 독자(네티즌)가 좋아하는 작품이 더 좋은 작품이라는 주장을 간과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유명세나 경륜 등 이름으로 찾던 작가의 시대는 가고 만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벌써 작가의 이름은 몰라도 작품의 내용은 잘 알려져 있는 사이버공간의 작품들이 많고, 또 그런 작품이 오프라인에 역으로 들어와 출판이 되고 있지 않은가.
4. 21세기 수필문학의 시대적 경향
한국문인협회 회원 8천여명 중 수필가는 시인 다음으로 많다. 그러나 등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필을 쓰거나 사회 저명인사로써 수필가란 이름을 같이 쓰고 있는 사람까지 한다면 수필가는 문학 장르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수필을 타 장르보다 선호해서 수필로 몰린 것일까? 그러나 그 대답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수필은 시나 소설이 아닌 글이면 수필이다 라고 대충 생각해 버리는 경향 때문인 것 같고, 각 분야의 전문가 및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글을 쓸 때 수필가라는 명칭을 붙여 주거나 몇 번 글을 발표하면 스스로도 붙여 써온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물론 거기에는 수필가의 책임이 크다. 오히려 정식으로 등단한 수필가보다도 훨씬 맛깔스런 수필을 쓰는 이들이 많고, 잡지나 여타 매체에서는 문학수필보다도 가볍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글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뿐 아니라 수필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도 문제가 있다.
채수영이 “한국수필의 가장 큰 장애요소는 ’아무나 쓰는 글‘ 혹은 ’붓 가는 대로‘의 명제에 현혹되었던 문제일 것이다. 이는 그만큼 편안한 글이라는 비유가 오히려 수필의 장애요소로 받아들여지고, 또 누구나 수필집 한 권을 갖는 마치 잡상(雜想)의 모음이 수상집이라는 의미로 전락되었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는 일은 한국현대문학 1세기여를 지나는데도 여전히 위력을 발하고 있고 풀어야 할 고민으로 남아있다.”고 말한 것과도 상통한다.
또 하나 철학성이 없는 신변수필이 난무하고 있음이다. 아무나 쓰는 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무식한 오해는 수필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수필이다’고 쓰게 한다. 자기가 쓴 글에 대해 문학적 사명이나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은 작가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폐를 앓고 나면 완전히 낫더라도 방사선 촬영을 하면 흔적이 나오는 것처럼 한 번 글을 발표하고 나면 그것은 좋은 글 아니면 나쁜 글로 자신의 흔적이 남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수필다운 수필이 못 되는 수필이 좋은 수필마저 잡초처럼 덮어씌워 버린다면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필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일이나 아무나 아무렇게나 쓰여진 글이 다 수필은 아닌 것이며, 수필의 문학성을 지켜줄 책임과 사명은 바로 수필을 쓰는 수필가에게 있음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수필가 김시헌은 “모든 예술은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했을 때 문학은 다른 어느 예술 분야보다 사상을 깊게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모습이 분명합니다. 어떤 때는 설명을 통해서 직접 전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실과 행위를 묘사하면서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예술은 간접적인 표현에서 더 효과를 얻습니다. 직접적인 설명은 예술이 아니고, 철학이거나 과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필은 때로 사상을 직접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문학은 다른 예술보다 사상을 문장 안에 깊게 묻고 있습니다. 그 사상이 빈약하거나 없을 때 독자는 수필에서 신문 기사와도 같은 껍데기만 얻습니다.”라고 말함으로서 사상을 문장 안에 깊게 묻고 있는 수필이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사상(철학)이 빈약하면 독자는 수필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필이 21세기에는 또 어떻게 문학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의 특징은 속도(스피드)이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뭐든지 즉시이고, 빨라야 한다. 즉각 반응이 와야 한다. 따라서 그만큼 빨리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간단해야만 한다. 복잡하고 긴 것은 밀려날 수밖에 없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다음은 지나칠 만큼 자기애(自己愛)가 강해진다는 점이다. 수많은 조직 속에 속해 있으면서도 최종적으로는‘나’하나로 귀착되는 자기 위주, 그래서 모든 것이‘나’의 이익으로 연결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문학에서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우선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나타내고 싶어 한다. 자기가 드러나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 소설은 너무 길다는 결론에 이르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 시처럼 짧아야 하느냐 하면 지나친 함축의 짧음은 오히려 독자의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이 되니 자연스럽게 21세기의 주도 문학 형태는 에세이류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꼭 길이 때문에 에세이를 선호한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내용이 이 시대 독자들의 모든 선호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작가가 이제는 독자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문학의 시대를 여는 것이고 독자가 거기 합류하는 것이지 독자의 취향에 따라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21세기는 속도의 시대라는 것이다. 뭐든 빨라야 하는데 수필은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시대적 경향을 따라잡거나 선도해 갈 수 있을 것인가. 시대상황이 긴 글은 읽지 않고 짧은 글이면서 무언가 감칠맛 나는 지식을 주는 그런 글을 바란다고 할 때 그것이 수필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런 요구와 수요를 수필이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 그러나 시대적 요구 내지 이 시대를 사는 구성원들의 성향이 길이나 내용 면에서 수필을 원한다고 하는 것이 분명한 일이라면 수필의 시대적 경향 또한 그에 따라 변화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이 아니고 세계적인 추세인 것이다.
미국 에세이스트 필립 로페이드는
우리가 이 시대에 수필의 존재 방식을 진단하고 예측하는 그런 상황에 대해 ‘미국의 personal essayists들은 개인적인 주제보다는 다른 것을 통합하는데 더욱더 많은 모색을 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좁은 자신의 세계를 넘어선 것들을 수용하는 논쟁과 교훈을 담고자 하고 있다. 나와 나의 가족의 상처에 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상당히 지루할 수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묘기는 고양되고 객관화된 방법으로 개인의 경험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보다 큰 의미를 나타내거나 보다 큰 의미로 융화하는 것이다. 그 배경으로 전문분야(종교, 정치, 역사, 과학, 예술 등)를 끌어내는 것이 그렇게 하는 한 방법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곧 에세이스트들은 자신의 좁은 세계를 넘어서서 보다 큰 의미를 나타내거나 보다 큰 의미로 융화하는 방법을 취하는 데, 그 배경으로 종교, 역사, 정치, 과학, 예술 등 전문 분야를 끌어들이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개인적인 에세이 속으로 개인적인 에세이가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경향은 예전에 학술적 논문의 형식으로 표현되던 것들이 가볍고 주관적인 에세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경향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 “최상급 수필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성 어거스틴이 시간에 관해 한 말을 언급하고 싶다. 즉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 사람이 없을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모르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색의 깊이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목소리를. 나를 놀라움과 정신적 모험으로 인도해 줄 그런 내용.” 이라고 말한다.
5. 새 시대 새로운 수필문학의 방향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원 개념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상황과 여건이 달라지면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순리일 수도 있다. 그래선 지 음식이 퓨전이 되더니 문학도 퓨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퓨전은 일종의 재구성이다. 생산적인 모방에 창조적 변형을 가미한 형태다. 그래서 파격이며 새로운 조화이다. 하지만 기존의 틀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대폭적인 보완인 셈이다. 모방과 변형, 다양하고 특별한 첨가를 통한 새로운 이미지의 구현인 셈이다.
새 시대 새로운 수필문학의 형태라고 해서 전혀 새롭게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해도 수필은 수필일 수밖에 없다. 수필문학은 ‘정겨운 벗과 나누는 담론과도 같고 가까운 친구에게 띄우는 편지와도 같은 문학이다.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어도 오히려 더욱 진한 멋과 여유를 지니고 여운과 방향을 드러내는 문학이다.’ 또한 수필가는 ‘지나간 사건이나 앞으로 다가올 유형무형의 존재에서 새로운 존재를 탐색하는 존재의 탐구자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가는 우주 전체의 어떤 모습까지도 정신의 영토 안에 이식하는 사색적 접목술을 지닌다. 현세를 중심으로 과거세, 미래세 까지를 일시에 수용하는 혜안을 갖는다’ 그래서 ‘수필의 특성인 사색의 깊이와 글의 기본이 되는 문장수업과 문학이 무엇이며 문학을 형성하는 언어가 일상어와 어떻게 다른가의 기본적인 생각’들은 근간으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어느 한 순간 다른 시각에서 보거나 생각을 달리함으로써 전혀 다른 심상을 얻게도 되고, 또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들을 뒤집어 봄으로써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열린 눈의 시각으로 전혀 예상치 않았던 감동과 감격과 충격을 몰아오기도 한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런 것들을 모두 무시한 전혀 새로운 뭐가 생겨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대적 상황이 급박하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다. 특히 인터넷의 보급이 21세기를 ‘문학도 인터넷’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현실이라면 그것도 수용해야 한다.
뿐 아니라 이제 문학 특히 수필문학은 인터넷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활용도를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수필문학의 활로가 트인다. 인터넷 문학의 중심은 시보다도 소설보다도 수필일 수밖에 없다. 활자매체에서 전파매체로의 전환기에 음악, 미술, 연극 등 다른 예술 장르는 재빨리 뉴 미디어에 접목을 했으나 문학은 활자매체의 치마폭만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광대라고 업신여김을 받았던 장르는 시청자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팬클럽까지 생겨날 정도의 스타로 떠올랐지만 문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문학이 영상과 음악을 외면하고 고집스럽게 활자에만 의존했던 까닭이었다. 또 문학은 시와 소설로 대표되는 것처럼 인식되고, 상대적으로 희곡은 소외되고, 동화는 아이들 몫으로 분류되고, 수필은 시와 소설 사이에서 서자취급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덕택에 뉴미디어, 인터넷, 사이버의 시대라는 21세기에 문학은 오히려 타 장르의 약진에 형편없이 눌리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문학은 예나 지금이나 빈약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21세기에도 문학이 또 다시 그런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장르의 특성상 다른 문학 장르가 활자매체에 안주해 있는 동안 수필문학만이라도 발빠르게 변화된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그 길만이 문학 그리고 수필문학이 문학의 자리, 문학의 서자를 벗고 으뜸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장백일은‘수필은 마음의 표현이다. 내 자신을 진심으로 말해준다. 표현을 통해 무엇인가 구하고 호소하고자 하는 마음이 거기에 있어서이다.’라고 했다.
수필은 나를 문학화하는 문학이고, 개성이 유달리 강한 고백적 자조문학이요, 겉으로부터 속속 나를 드러내는 문학이요, 참말인 넌픽션(비 허구)을 밝히는 데 특징이 있는 문학이다. 이런 수필문학이 어떻게 21세기라는 변화된 시대를 수용하며 문학의 발전을 도모하는 거대한 파도타기를 감행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을 수용하며 보다 발전적 미래를 불러올 수 있는 문학의 길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치열한 작가정신이다.
인터넷 시대로 대표되는 21세기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 및 구분이 모호해 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작가의식이 결여되기 쉽다. 작품은 나돌아도 그 작품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 마치 공동 소유 같아진다. 우주공간을 떠다니고 있는 우주 미아처럼 사이버 공간에 던져진 무수한 글들은 누가 읽어주면 읽히고 지워버리면 지워지는 주인 없는 떠돌이가 되어 떠다닐 수 있다. 그 속에서 정말 좋은 글을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실명보다는 닉네임이 더 낯익고 결국 작가가 드러나는 수필의 특성인 생명력이 정체성을 잃을 수 있다. 진정 한 편의 수필을 위해 목숨을 거는 수필정신, 작가정신이 필요해 진다. 그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작가정신이 수필가에게 있어야 한다. 좋은 소설, 좋은 시를 쓰겠다는 치열성보다 좋은 수필을 써야겠다는 작가적 치열성과 실명의 치열한 작가정신 속에서만 좋은 수필은 태어날 것이다.
둘째는 수필문학의 허구(虛構)성과 상상(想像)성 문제이다.
허구와 상상을 작가적 양심으로 독자에게 펼쳐 보여야 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독자를 의식하다 보면 허구가 개입할 수 있다. 좋은 작품, 많은 네티즌이 좋아하는 인기 있는 작품,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길 수 있다. 수필에서 허구의 수용은 일종의 영역 넓히기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수필이 자조(自照)의 문학이요, 개성(個性)의 문학임을 상기할 때 허구는 소설의 영역은 될지언정 수필의 영역은 될 수 없다. 뿐 아니라 허구와 상상은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네티즌의 클릭 횟수가 실시간으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자칫 멋과 맛을 재미로 혼동하고 만들어 내는 글은 수필의 생명력을 잃게 하기에 이른다. 진솔(眞率)의 맛과 멋을 잃으면 이미 수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에서는 상상은 허용될 수 있으되 허구는 허용되지 않는다. 허구가 개입된다면 수필은 생명력을 잃게 된다. 그것은 도한 수필작가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셋째, 짧은 수필의 도입이다.
수필은 15매 내외를 일반적 표준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선 이것도 길다고 느껴진다. 일찍이 장편수필(掌篇隨筆)이 시도되고, 최근 5매 수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물론 이 5매라는 기준은 2매에서 7매 정도의 길이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격월간《수필과 비평》이 ‘촌감단상(寸感斷想)’이란 명칭으로 1,000자(200자 원고지 5매) 정도의 수필을 게재하고 있고, 2002년에《월간문학》출신 수필가 모임인 ‘대표에세이문학회’에서 세미나의 주제를 <5매 수필의 개척과 방향>으로 하고, 연간집을 <5매 수필>로 발간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수필작가회 가 2007년《빛을 건지는 나무》(선우미디어), 2008년《내 마음의 섬 하나》(선우미디어) 등 5-7매 짧은 수필집을 내고 있는 것은 본격적인 짧은 수필에 대한 관심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짧은 수필은 단순히 길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의 맛과 향기, 소설의 맛과 재미를 두루 갖춘 감칠맛 나는 짧은 수필에의 요구로 이는 상당히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짧다는 것은 그냥 길이가 짧다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분재(盆栽)와 같이 작은 것에서 산과 강을 누리고 싶다는 함축의 욕망이다. 그런 만큼 5매 수필은 더욱 전문가가 되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수필의 문학적 활성화, 수필의 질적 향상이 이뤄지지 않고는 문학성 있는 참다운 짧은 수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동(童)수필 및 젊은 수필의 도입이다.
20대엔 시를 쓰고, 30대엔 소설을 쓰고, 40대에 가서 수필을 써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어찌 20대라고 수필을 쓸 수 없겠으며, 20대가 쓴 수필이라고 좋은 수필이 못 되랴. 따라서 불필요한 선을 그어놓고 불필요한 제한을 하는 것은 문학적 낭비라고 생각한다. 물론 20대에 시를 쓰고, 30대엔 소설을 쓰다가 인생의 경륜과 문학적 성숙도가 완숙해진 40대 이후에 수필을 쓴다면 더욱 좋은 수필을 쓸 수 있겠기에 더할 나위 없겠지만, 수필가가 20대에 쓴 수필, 30대에 쓴 수필, 40-50대에 쓴 수필, 60대에 쓴 수필을 보며 그의 수필관과 문학관의 변화 및 시대적 작품 경향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유독 수필에만 40대 이전을 없애는가 말이다. 또한 어린아이도 읽을 수 있는 수필은 왜 없단 말인가. 어린아이가 읽을 수 있는 소설은 동화이고, 어린아이가 읽는 시는 동시인데 유독 수필은 왜 어린아이 몫이 없다는 말인가.
21세기는 청년시대와 노년시대로 양분 될 것이다. 사회 주도는 젊은이들이 할 것이다. 젊은이들의 주무대는 사이버 공간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을 위한 문학에서 수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젊은 수필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아니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유경환, 정진권 등이 동(童)수필론을 일찍부터 제기하고 있었으나 아직은 미미하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의 주류인 젊은이와 아이들을 위한 ‘젊은 수필’, ‘동수필’에 대한 작가들의 관심과 적극적 작품 참여가 절실히 요구된다.
다섯째, 비평성 및 주제성이다.
대개 하나의 주제가 되지만 때로 각기 다른 주제의 글들이 모여 하나의 일괄된 큰 주제를 이루고 그것들이 독자에게 큰 울림으로 감동을 여는 것도 수필이다. 주제성은 모든 문학에서 다 중요하지만 수필에선 특히 중요하다. 주제가 약한 수필은 그야말로 맛이 없다. 거기에 비평성이 없으면 맥이 풀린다. 맛과 멋은 주제감과 비평성에서 온다. 작품을 읽을 때 톡 쏘는 글맛이 없다면 특히 사이버 공간에선 그냥 입질(클릭)도 않고 떠나버릴 것이다.
새 시대의 문학을 주도하는 장르를 수필이라 한다면 그만큼 수필의 영역이 확고해 져야 한다. 위에서 든 몇 가지 조건 외에도 생존력을 갖출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여러 힘들이 필요하다. 변화와 다양성의 한 시대를 맡아갈 문학 장르로서의 수필은 그만큼 길이 험하고 멀 수도 있다.
6. 나가며 - 21세기 수필문학의 방향성
지금까지 21세기의 변화와 문학의 경향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의 수필문학은 어떤 방향성을 확보해야 할 것인가.
첫째, 수필작가의 좋은 수필에 대한 사명감이 우선 되어야 한다.
문학의 생명은 좋은 작품 곧 작품성이다. 아무리 수필의 홍수시대요, 사이버 공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떠다닌다 해도 뛰어난 좋은 작품은 금방 눈에 띄기 마련이다. 문제는 작가가 매 한 편 한 편의 작품을 쓸 때 진정 처음이고 마지막일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사명감과 각오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2003년에 창간된 《선수필》(選隨筆) 창간사에서 정목일은 ‘좋은 수필의 발굴과 보급’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수필들에서 좋은 수필을 만나지 못한다면, 독자들로부터 수필에 대한 감동과 신뢰를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좋은 수필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시킬 수 없다.’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정목일은 ‘인생 경지가 높아야 수필 경지가 높아지며, 좋은 인생이어야 좋은 수필을 쓸 수가 있다. 좋은 수필 찾기는 곧 좋은 삶과 인간을 발견하는 일’이라 했다. 그 말은 곧 ‘문학(수필)은 궁극적으로 인생 표현이되, 그 표현을 통한 감동으로서의 문학이다. 지식의 문학이 아니라 감동으로 깨우치는 문학으로서의 인간학이다. 문학성은 그 감동으로부터 빚어진다.’ 따라서 ‘수필은 감동을 전제로 하되 언어를 통해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시키는 창조의 세계에서 정서화 된 사상(지식)의 전달(교시)이어야 함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수필이 범람해도 좋은 수필로 드러날 수 있는, 아니 여타 문학의 바다나 산에서도 저것이다 하고 발견될 수 있는 뛰어난 좋은 작품을 생산해 내는 것이 무엇보다 급한 일인 것이다.
둘째, 보다 참신한 등단제도의 활용과 새로운 등단 제도의 확보이다.
요즘의 등단제도는 신인 발굴의 근본 목적보다는 출판비 확보라는 상업적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은 인상이다. 마치 상업 잡지가 판매를 통한 수익확보 보다는 광고비로서 제작비와 출판 제 경비를 충당하는 것과 같이 등단자의 등단지 기본 부수 구입으로 기본 출판비를 해결하고, 나아가 수익성 확보까지 가능케 하려 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수필가를 발굴해 내고, 그가 작품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해주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좋은 문학지, 사보고 싶어지는 책을 만들어야 할 텐데 몇 몇 수필지를 제외하곤 돈을 내고 사고 싶다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몇 몇도 다른 잡지들에 비하면 경쟁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구매력이 생길 리 없다. 사보지 않는 잡지를 만드니 거기에 글을 실은 작가의 글은 누가 읽어볼 것인가. 결국 서로의 글을 나눠 읽어보는 정도이다. 명함 하나 만드는 것처럼 이름을 올리는 등단제도, 확실히 검증하여 배출시키는 책임감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작가적 생명력을 키워줄 질 높은 문학지의 생존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특히 사이버 공간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고려하여 좋은 신인을 발굴해 내는 제도적 장치도 요망된다. 기존의 종이책 잡지들도 변화에 대응하기보다 기득권을 내세우며 현행 체제에 머무르거나 이를 고수한다면 필시 얼마 못 가 큰 난관에 부딪힐 것은 자명하다. 또 좋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한 방법도 기존의 방법만이 아니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여 두 공간을 유효하게 활용하며 훌륭한 작가를 발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한국수필문학가협회’와 월간 <수필문학>의 2003년 하계세미나에서 조병무는 ‘세상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사이버 공세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구의 모든 매체는 인터넷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자구책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히 변화이며, 개혁적 요소입니다. 외면할 수 없는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정립하고 있습니다. 문화의 영역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고 많은 문학인은 사이버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라고 하며 인터넷 시대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들의 글쓰기를 눈여겨보아야 하는데 이들은 ① 무척 짧고 간결한 글쓰기 ② 개인의 문제를 글쓰기의 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③ 글쓰기를 단독이 아닌 공유의 형식을 갖고 있고, ④ 게시판을 통하여 즉각적인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등단제도 또한 이러한 시대적 성향을 무시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 그들을 수용하고 변화에 대응하는 힘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무대에서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무대 체질이 있는 능력자를 찾아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셋째, 개인주의와 다양한 개성의 존중이다.
21세기는 개인주의가 강하고 또한 다양한 개성이 드러나는 시대이다. 이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존중해 주면서 안정된 문학풍토를 조성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에 대해 고임순은 "미래 첨단과학시대는 만져보아도 못 믿는 불신시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개성이 중시되는 시대는 사람들의 사고방법도 다양한 개성의 문학인 수필문학을 요구한다고 볼 때 다음과 같은 수필 쓰기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임순에 의하면
1) 기계의 일부가 되어 생활하는 피곤한 독자를 위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길이가 짧고 서정성 짙은 감성적 수필(글씨 그림 사진 그래프 등을 곁들여도 좋음), 작가의 육성을 포함한 영상수필.
2) 시간에 쫓기는 고속화 시대, 지식의 증가로 머리만 있고 가슴을 잃어버린 독자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알맞은 자연과 인간 사랑을 주제로 한 잔잔한 감동을 수반하는 명상수필, 마음을 훈훈하게 적시는 정겨움이 담긴 인생 체험수필.
3)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고도의 지적 탐구의 독자들이 보다 폭넓은 지식을 원하기 때문에 그 수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지성적인 중수필, 또는 사회 종교 철학 역사 시사 기행 등 주제가 있는 장편수필, 그리고 비평에 가까운 포멀 에세이(formal essay)등이 선호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미래사회의 독자층을 젊은 층과 중노년층으로 나누어 볼 때 인쇄매체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독자의 상상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으므로 나름대로 독자를 확보하게 되리라고 본다. 그러나 컴퓨터의 통신망 속에서 생활하는 젊은층 독자가 늘어나는 미래에는 지적 관심의 중수필 쪽으로 관심과 비중이 커지리라’는 견해다. 물론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다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자기만의 전문적 수필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 분야에서 권위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짧은 글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자들에겐 지적 중수필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자칫 편식으로 문학의 영양을 잃을 수 있다는 면을 생각한다면 고임순의 주장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어찌하든 다양성 속에서 개성 있는 전문가적 프로정신을 길러가도록 해 줘야 한다.
넷째, 미래문학으로서의 새로운 독자층 확보이다.
수필을 미래문학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수필은 작가의 과거 경험을 현재화시킨 과거형 수필이나 현재의 사건을 시사적이거나 개인적 이야기로 표현한 현재형 수필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상호 대비 또는 조합시켜 본 과거 현재 접속형 수필들이 주를 이뤄왔다. 그러나 21세기의 문학으로 수필이 주목을 받으려면 ‘미래수필’에 대한 장르적 시험도 요구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목일은 미래수필로 독자의 사랑을 받기 위한 몇 가지 요건을 제시하고 있다.
1) 참신성 : 영상시대는 보편성, 일시성, 표준성을 띄게 되므로 평범한 소재는 눈길을 끌기가 힘들기 때문에 참신성이 있어야만 돋보인다는 것이다.
2) 독자성 : 작가의 독자적 세계의 개척과 확보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3) 전문성 : 보다 전문적인 깊이와 탐구세계가 필요하며,
4) 흥미성 : 영상매체 시대엔 흥미성이 독자와 대면할 수 있는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5) 개성 : 그 작가만의 독특한 색깔, 서정, 관습, 시각, 상상력, 문체 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6) 실험성 : 타장르와 결합한 새로운 형태, 시․소설․평론․동화의 기법수용, 분량 조 절, 허구수용, 1인칭 시점이 아닌 3인칭 시점의 사용 등 실험적 작품도 등장해야 하며,
7) 영상성 : 영상시대인 만큼 동적, 음악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영상성을 추구하는 작품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나 과거에도 다 요구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수필을 추구할 수 있으며 미래수필의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 새로운 독자층의 확보는 그들의 보는 맛, 느끼는 맛에서 그들이 이것이다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맛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다섯째, 인터넷 시대에 맞는 수필 쓰기이다.
결국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맞는 수필 쓰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학은 ‘인터넷 시대의 수필이 독자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다음 여덟 가지를 참고로 하여 창작에 임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1) 수필의 길이가 원고지 5매 안팎으로 짧아졌으면 한다.
2) 재미와 감동을 주는 수필이었으면 한다.
3) 시청각적인 효과를 염두에 둔 수필이었으면 한다.
4)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과 관심을 끄는 주제를 선정했으면 한다.
5) 환경 친화적 소재를 발굴했으면 한다.
6) 미래를 예견하는 안목을 수필작품에 담았으면 한다.
7) 정(情)의 미학을 수필작품에 듬뿍 담았으면 한다.
8) 아름다운 이야기를 수필작품에 많이 담았으면 한다.
21세기라는 첨단과학시대 내지 인터넷 시대를 맞는 수필가들의 임무는 막중하다 하겠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수필 쓰기로 수필 장르를 구축해야만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수필의 대중화와 수필 인구 증가로 관심이 커진 미래문학으로서의 수필문학은 그만큼 지성적이면서 문학예술적 시대의 반영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미래문학으로서의 장르적 특성에 작품의 질적 향상이 따라 주어야 할 것이고, 거기에 그 시대에 맞는 장르를 위한 제도적 보완도 따라 주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제도적 보완이 젊은 수필, 동수필에 대한 지원도 될 것이고, 수필정신을 드높이는 결과도 가져올 것이다.
물론 장르의 위치와 성격은 시대에 따라 역사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래서 크게는 현대 사회의 문화적 지형이나 작게는 한국 현대 문학의 지형 속에서 수필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라는 다변화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문학 특히 수필문학은 개인적인 에세이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공간에 대한 변화를 주시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은 ‘살고 쓰고 사랑하였다’ 는 묘비명을 남겼다. 그는 사후에야 올바른 평가를 얻게 되었지만 생전에도 매우 자부심 있는 삶을 살았다.
21세기는 단순한 변화의 시대가 아니라 어느 문학 장르보다 수필문학이 확실한 방향성을 확보해야 하는 시대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독자가 있어야 생명이 있다. 독자를 확보해야 한다. 수필인구 확대가 수필가의 양산만 되어서는 안 된다.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늘어날 때 제품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처럼 수필가의 증가보다 수필독자의 확대책이 시급하다. 수필문학 인구의 저변 확대는 수필문학의 생명력 확보이다. 21세기는 작품이 작가에 의해서라기보다 독자에 의해 탄생된다 할 수 있다. 평가도 작가의 몫이기 보단 독자의 몫이다. 평론가도 고급 독자일 뿐이다.
21세기의 독자 취향에 맞는 수필 쓰기, 그리고 그 수필을 읽어줄 독자를 생각할 때 읽기보다 보고 듣는 것을 즐겨하는 21세기의 새로운 독자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로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도 역시 21세기를 사는 작가의 삶일 것이다. 스탕달처럼 ‘살고 쓰고 사랑한’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어야겠지만 21세기 수필문학의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 선두에서 개척자의 길을 가는 것은 21세기 수필가들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수필문학의 생존력은 한 배를 탄 독자와 작가가 끊임없는 발전적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새로운 방향성을 확보해 갈 수 있어야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하며,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수필문학의 특성상 오히려 큰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기에 문학적 사명감을 갖고 힘을 합한다면 훨씬 쉽게 새 시대의 주된 문학으로 자리할 수 있으리라 본다.
■ 최원현
수필가.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조선문학》2009년 8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