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 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허인회의 지시에 따라 연무장은 비워졌고, 호장 무인들은 연무장을 넓게 둘러쌌다. 아무리 팽 가주 팽현무의 말에서 호탕함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가주 주인들이었고, 알려야 할 것과 감춰야 할 것은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리 높지 않은 담장이 둘려져 있었지만 연무장이 비어있는 것 정도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비록 호장 무인들이 기세 있게 연무장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팽 가주 팽현무가 몹시 기대된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오호단문도를 잡아가자, 제갈 세가주 제갈문도가 팽현무에게 포권을 하며 양보를 말했다.
"본인의 무공이 이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떨어지니,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 장로들과 함께 연수를 하고자 하니 팽 가주께서 양보해 주셨으면 하외다."
팽 가주 팽현무는 문제 될 것 있느냐는 듯 선선히 뒤로 물러섰고, 팽현무가 서 있던 자리에 허인회가 들어섰다.
"천하제일인 이시다. 모두 전력을 다하거라."
"예"
마치 한사람의 소리인 양 들린 복창 소리에 서문자숙과 용형호도 더 뒤로 물러섰고, 제갈 세가주 제갈문도의 명이 이어졌다.
"'육합천괘멸살진'을 펼치거라."
제갈 세가의 장로들은 제갈문도의 명에 따라 신속하게 지리를 잡아갔다. '육합천괘멸살진'은 제갈 세가를 대표하는 진형으로 제갈 세가의 제자들도 능숙하게 펼쳐내지만, 지금과 같이 절정에 오른 장로들이 펼치면 천하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진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제갈 세가의 무인들은 소천신공을 바탕으로 제갈세가의 신공을 익히지만, 일정한 수준에 오르면 대천신공으로 익혔고, 가주와 소가주만이 헌원전단신공으로 세가의 무공을 익혔다.
같은 절기라 해도 그 심법에 따라 위력의 차이는 컸는데, 제갈문도의 무에 대한 재능은 떨어져 헌원전단신공으로 절기를 익히고서도 대천신공으로 익힌 장로들과 차이를 벌리지 못했다.
세상이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나마 세가원 모두의 존경과 신뢰 속에서 세가를 이끌고 있었지만, 제갈문도는 오늘 자신의 재능이 없는 것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제갈문도는 장로들을 일일이 돌아보고서야 다시 각오를 다지고 외쳤다.
"발진."
'육합천괘멸살진'은 모두 같은 무공으로 진영을 꾸린 것이 아니라, 장로들 각자 익힌 무공으로 진영을 운영했는데, 일곱 방위를 점하고 있는 장로들 각자 자신들의 절기를 한꺼번에 뿜어냈다.
대장로가 천기미리보로 스쳐 지난 자리를 이 장로의 칠현무령검이 따랐고, 순서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진형의 꼬리에서 소리도 없이 비도가 날아들었다.
허인회를 가운데 두고 진형은 끊임없이 돌았는데, 어느 순간에는 역팔자로 방향을 바꿔 머리와 꼬리의 구분조차 없게 만들곤 했다.
밖에서 지켜보던 서문자숙은 연신 중얼거리는 용형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상황을 판단했고, 팽 가주 팽현무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팽 가주 팽현무는 '육합천괘멸살진의 변화에 따라 허인회가 아닌 자신이 들어선 것처럼 몸을 꿈틀거렸는데, 가끔씩 침음성을 흘리는 것이 그때마다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밖에서 바라보며 놀라는 것을 진형을 이뤄 다투고 있는 제갈 세가의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지만, 지금 '육합천괘멸살진'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제갈문도와 장로들의 놀라움에는 미칠 수가 없었다.
암기도, 지공도, 수공도, 겉으로 드러난 일곱 개의 검이 내뿜는 검기도, 허인회 곁으로 가면 오리무중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는데, 허인회를 감싸고 돌며 무수히 공격을 하고 있는 제갈 세가의 가주 제갈문도와 장로들은 이 상황이 끔찍하기만 했다.
진형을 풀고 물러서고자 눈길이라도 마주치려하면 어느 사이 허인회의 연검이 눈길을 막았고,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목이 달아날 지경에 이르자, 감히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공세에 공세를 이어갔다. 허인회의 검이 비록 날카롭지만 제갈 세가주 제갈문도는 자신들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조금은 여유를 가졌다.
그토록 천하제일인이라 하더니 소문은 허인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무슨 무공이 얼마나 강하냐 하는 것이 강호의 강함이었는데, 허인회에게는 아무런 강함도 찾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허인회의 기공 가운데 무언가가 모든 공세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허인회를 공격하는 것이 동정호에 조약돌을 던져 메우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어쩌면 허인회의 장담대로 현경의 고수와 겨뤄도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물러서라."
제갈문도가 크게 소리치며 진형에서 떨어져 나가자 장로들도 크게 물러섰지만 똑바로 서서 숨을 쉬는 장로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호흡을 다스리시오."
제갈문도는 장로들에게 말하고 즉시 그 자리에서 좌선에 들었다.
팽 가주 팽현무는 곁에서 지켜봤지만 무엇이 그 정도의 비무로 이들을 지치게 했는지 알지 못했다. 팽현무가 보기에 제갈 세가주 제갈문도와 장로들은 한 줌의 진기도 남지 않은 듯 보였다.
허인회가 걸음을 옮겨 팽 가주 팽현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팽 가주께서도 확인을 하셔야지요?"
팽현무는 비록 제갈 세가의 사람들이 모두 좌선에 들 만큼 지쳤는데, 허인회가 조금의 지친 기색도 없이 말하자 그래도 되겠냐는 듯 물었다.
"비무를 마치고 바로 가능하다는 말씀이오?"
"최선을 다하셔야 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음~"
팽현무는 허인회를 가만히 보다가 오호단문도를 거두고 헌원벽력신공을 돋구었다.
얼마나 전력을 다해 공력을 돋구었는지 장삼이 부풀어 펄럭거렸고, 전신의 혈관들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꿈틀거렸다. 미허신보로 들어서더니 삼류 제자들이나 휘두를 철혈십팔퇴로 공세를 열었고, 순식간에 혼원벽력장으로 바뀌었다.
두 번 이어진 공세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오호단문도를 뽑아 들고 전광도법으로 쾌속하게 내려치고, 녹우도법으로 길게 베어가더니 빙그레 미소마저 지으며 혼원벽력도의 일초 혼원벽력파, 이초 혼원벽력풍, 삼초 혼원벽력붕을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이어갔다.
제갈 세가의 '육합천괘멸살진'과 허인회의 대결이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이 던져진 것처럼 평온했다면, 팽 가주 팽현무의 공세와 허인회의 방어는 천둥과 번개 그 이상의 굉음으로 천군만마의 발굽 소리와 공성하는 대포 소리를 합친 것만 같았다.
팽 가주 팽현무는 공세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입술을 깨물었는지 주루룩 피를 흘리고는, 혼원일기공으로 전신 내공을 일주하고는 팽가의 성문도법인 오호단문도를 한초식 한초식 고함 소리를 내며 연이어 펼쳐냈다.
'백호도강' '일소풍생' '천막자여' '웅패군산' '복상승사' '부자도하' '중절수의' ‘왕자사도' '맹호하산'
팽가주 팽현무의 공세는 참으로 거칠었다. 이기고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고자 싸우는 사람처럼, 상대의 공세는 무시하고 오로지 칼끝을 상대에게 향한 채 밀어대더니, 종래는 칼마저 던져버리고 몸통으로 부딪쳐갔다.
몸통으로 부딪쳐갔다 해서 무모한 것이 아니라 팽가의 비전 권법인 '파갑추'였고, 마지막 수단이라 여겼는지 파갑추를 끝으로 팽가주 팽현무는 그대로 연무장을 구르더니 몇 번 씩씩대며 호흡을 고르고 좌선에 들었다.
건곤장 대전에 다시 모여 연회가 벌어졌는데 비무의 격렬함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강호의 시름을 모두 잊은 듯 화기애애한 가운데 담소를 이어갔다.
"서문 군사께서 활강시를 염려하지 말라시는 것은 천사루를 정상련이 도모하면 해결된다는 것이지요?"
제갈문도의 물음에 서문자숙은 그동안 파악한 정보를 근거로 대답했다.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활강시의 출현과 사황 대제 담천무가 천사루를 나온 것에는, 넓게 보아서 천사루의 무인들이 사항 대제 담천무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를 그동안 천사루의 움직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천사루의 힘에 비해 천사루 무인들의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었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그 정도의 무력을 갖고도 움직임이 크지 않았으니 내부에 불만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제갈 세가주님께서 바로 보셨듯이 천사루가 갖고 있던 무력이면 충분히 강호를 도모할 만했다 여겨지는데, 아마도 사황 대제 담천무는 이것을 막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불만이 쌓여 갔을 것이고, 차마 현경의 고수를 거역하지 못하고 활강시를 만들어 천하를 혼란에 빠뜨려, 사황 대제로 하여금 강호에 나서게 하려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황 대제 담천무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시오?"
"그런 듯합니다. 주공께서 말씀이 계셨지만 사황 대제는 세사에 초월한 듯 보입니다. 언제든 마음이 일면 원하는 대로 되리라 했겠지요. 사실 그때가 멀지 않았다 여기고 주공께 말씀드리고 대책을 논의하고자 했었는데, 주공께서는 사황 대제의 무위라면 말씀드린 대로 세사에 달관할 것이라 하셨고, 돌이켜보면 주공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변했으니 달리 방책은 두셨지 않겠소이까?"
"하하, 그것을 주공께 여쭈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소생이 아무리 말씀 올려도 기다리라고만 하시니 소생도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팽 가주 팽현무가 재미있다는 듯 허인회를 바라보자 허인회가 말을 받았다.
"사실 별것 아닙니다. 사황 대제의 무공이 현경에 이른다 했지요. 소생은 사황 대제와 손을 겨룬 적이 있었습니다."
허인회의 말에 모두들 크게 놀라 허인회를 바라보며 어서 말을 이으라는 듯 눈을 빛냈다.
"건곤장이 불타고 황궁에 들었을 때는 천하를 지우고자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건청궁의 황제를 그대로 묻으려 했지만, 그때 안락궁에서 건곤장에 들었던 놈들의 흔적을 찾았고, 안락궁을 멸하는 과정에서 황묘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았지요."
대전 안에는 긴장한 듯 마른 침을 넘기는 소리로 가득했는데, 모두 입이 바짝 말라가는데 허인회가 말을 멈추자 조바심이 났다. 입 밖으로 말을 내지 않았지만 모두는 어서 말을 이으라 온몸을 움질거리며 재촉했다.
"통로의 끝에 무슨 대법을 행하고 있던 자와 조우했는데 그가 사황 대제였습니다. 그 당시 사황 대제라 여겨지는 그 사람의 무공은 화경은 분명히 넘어섰고 아직 현경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 같았는데, 소생 역시 그런 강자를 상대하는 게 처음이라 긴장하며 공방을 이어가던 중에, 사황 대제의 수하로 보이는 자의 계교에 그만 무저동이라는 곳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허인회가 다시 말을 멈췄지만 그다음 이야기는 대부분 아는 이야기였다.
허인회의 말을 돌이켜 생각하니 사황 대제가 그때 현경에 이르지 못했다면 아직 현경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과 같았다.
대법이 행해지고 대법의 결과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다시 대법을 행하기 전에는 경지를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두 가주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천사루에서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수십 년을 이어 온 대법과는 차이가 클 것이 분명했다.
사황 대제 담천무를 허인회에게 일임한다면, 아무리 사파가 사술을 부린다 해도 정파의 깊은 무공과는 차이가 큰 것을 알고 있으니, 두 세가주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허인회는 두 세가주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디 호생지덕을 생각하시고 계책을 내신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세가에 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호생지덕이란 말씀이시오?"
제갈문도가 나직하게 되뇌며 묻자 허인회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파라 해서 모두 치려 들면 정파의 힘이 미친다 해도 손실이 크지 않겠습니까? 본진만 멸하고 지금까지 부려오신 것처럼 사파를 이용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은 그리하셔도 지금까지 정파가 행한 위선을 탓하시는구려, 하지만 허 장주의 말씀대로 모두를 드러낼 수는 없으니 정상련의 방향을 허 장주의 말씀대로 하겠소이다."
"제갈 가주님이시라면 충분히 공론을 이끄시리라 믿습니다."
제갈 세가주 제갈문도는 허인회의 말이 끝나자 서문자숙을 보며 의견을 물었다.
"군사께서 좋은 방안을 내주시는 것은 어떻겠소이까?"
"소생이 어찌 제갈 가주님 앞에서 재주를 논하겠습니까? 지금 말씀하신 대로 개봉만 가두시면 되리라 여겨집니다."
"절강은 그대로 두어도 되겠소이까?"
"모두 모인 듯하니 개봉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허인회도 서문자숙의 말에 동감했다. 지금 천사루를 지우면 남은 사파는 뿌리없는 나무와 같아질 것이니 개봉만 봉쇄하라는 말은 천사루만 지우면 된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