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사 창원지회에서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읽기 4회차를 진행하였습니다.
■ 일시 : 2023.12. 12 화요일 PM.6:30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명량관
■ 읽은 부분 : 권3. 장계2(300~362쪽) 계사년 장계 부분
■ 참석자 : 내이포판옥선, 동자갑선, 상유, 진해중부장, 선격, 백의종군로악양, 손자병법, 진해현감, 웅천현감, , 미신불사, 소완구, 진중음, 남명손서, 가덕첨사, 둔전 총 15명 (부산지회에서 3분이 함께 하였습니다.)
■ 다음 모임 안내 : 2024. 1. 16 화요일 PM 6:30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 읽어올 분량 :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권4(364~끝까지) 갑오년 장계 부분
■ 가까운 지역에 계시는 다른 지회 분들도 참석하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이번 모임에는 부산에서 남명손서 회장님과 가덕첨사님, 둔전님이 오셔서 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석하신 분들 모두 의미있고 알찬 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추워서 움츠러들기 쉬운 계절에 학습열기로 따뜻하게 데워지는 분위기였습니다. 새로운 것 하나라도 듣고 알게 되면 그 기쁨은 배가 되지요. 매번 김밥 한 줄로 저녁을 대신하며 지냈는데 처음 시작할 때 웅천현감님과 했던 약속을 처음으로 지키게 되었네요. 스터디 마친 후 음주의 시간. ㅎ ㅎ 스터디 후 삼겹살을 구워 저녁식사와 음주를 겸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더해졌답니다. 사람은 먹으며 정이 드나 봐요~ㅎㅎ
스터디 후 질의 응답 내용을 정리해보았습니다. 혹시 잘못 알아들어 기록이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부족한 요약이지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장계 제목 앞에 붙인 번호는 원래 없는 것입니다. 편의상 제가 붙인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券3, 장계狀啓2
(1권 300~ 362쪽)
1. 유황을 내려 주시기를 청하는 계본(1593.1.26)
이전까지의 전쟁으로 화약을 다 소모하였으므로 군관인 훈련주부 이봉수가 염초 1,000근을 끓여내었으나 석류황이 나올 곳이 없으니 100여 근쯤 내려주시기를 청함.
2. 의승병을 나누어 보내 요충지를 지키는 일을 아뢰는 계본(1593.1.26.)
영남에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이 본도를 침략하려고 수륙으로 엿보고 있어, 여러 절에 숨거나 명부에서 누락된 중들과 병적에 올리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자를 남김없이 적발. - 400여 명
의병장 성응지(순천), 승장 삼혜(순천)는 시호별도장, 의능(흥양)은 유격별도장, 성휘(광양)는 우돌격장, 신해(광주)는 좌돌격장, 지원(곡성)은 양병용격장으로 임명 ⇨ 모두요충지를 지키고 관군과 협력하여 사변에 대비하도록 전령함. 의병장 성응지과 승장 삼혜•의능 등에게 전선을 나눠주어 수선해서 나누어 타고 함께 바다로 나가도록 명령.
3. 피란민에게 돌산도에 들어가 살면서 농사짓도록 명령해 주시기를 청하는 계본 (1593.1.26.)
■ 영남 피란민 200여 호를 목장지인 흥양 돌산도로 입주케 해 농사를 짓게 함(둔전)
영남의 피란민들로 본영 경내에 들어와서 살도 있는 자들이 200여 호나 되어 임시로 거처할 수 있도록 하여 간신히 겨울을 나게 함. 비록 변란이 끝난 뒤에는 제 고장 경상도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당장 눈앞에서 굶어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둔전을 만들 수 있도록 청함.
상략 - “지금은 국사가 어렵고 위태로우며 백성이 살 터전을 잃었습니다. 비록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이 들어가서 농사짓게 하더라도 말을 먹여 기르는 일에 해로움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말도 기르고 백성도 구제하는 데에 양편으로 다 편리할 것입니다.”
⇨ 비변사가 보낸 공문 “이번에 여러 섬 중에서 피란할 만하며 또한 둔전을 만들 수 있는 지역에 피란민이 들어가 살기에 편리한 여부를 참작하여 시행하라”란 부분을 보면 당시 비변사가 섬 목장에서 백성이 정착해 농사를 짓는 것을 추진했음을 보여줌.
4. 수륙의 여러 장수에게 웅천을 바로 공격하라 명령하신 것에 대한 장계(1593.2.17.)
상략 – 이달 2월 초2일에 출발하여, 초 7일 거제도 견내량에 도착하여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났고, 초8일에는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그곳으로 뒤따라왔으므로 함께 모여 약속하고, 초 10일 웅천 앞바다에 도착하였습니다. - 하략
⇨ 질문 : 이달 2월 초2일 ⇨ 이충무공전서 3권 46쪽 『난중일기』에는 6일로/ 적을 무찌른 일을 아뢰는 계본(1593. 4. 6)에도 ‘2월 초 6일에 출발하여’ 라고 기록(308쪽)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봐야 하나요?
5. 적을 무찌른 일에 대한 계본(1593.4.6.)
■ 2월 10일~3월 6일 : <강화교섭기> 웅포에 의병과 승병 부대를 상륙시켜 수륙합동 공격 작전 시행
1593년 1월 9일 이여송이 이끈 명나라 원군 4만 3천명이 조선 관군과 합세하여 약 7개월간 일본군의 수중에 있던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남하하여 한성에 집결하고 있었다. 1593년 1월 하순 경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평양성에서 물러난 일본군이 남하하여 도망가므로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내용의 지시를 받았다. 조선 수군이 부산 쪽으로 진출하려고 할 때 웅천에 적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적들은 깊숙한 포구에 배를 감춘 채 굳은 방비를 설치하고 소굴을 많이 만들어 둔 채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이순신이 모집하여 거느린 의승병과 3도의 정예부대 사부들을 태운 10여척의 전선을 동으로는 안골포에, 서로는 제포에 상륙시켜 결진하였다. 우리 군졸의 부상자는 없었다.
-상략- 당장 농사철을 맞이하여 비가 두루 흡족하게 내렸는데, 연해안 각 진이 모두 출전하였으니 좌•우도의 수군 4만여 명이 모두 농민으로 농사를 전폐하면 다시 가을에 수확할 희망이 없습니다. --- 비단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라 군대와 나라에 쓸 물자마저 의뢰할 곳이 없을 것이므로 매우 답답하고 걱정됩니다. ----전염병이 번갈아 번져 사망하는 자가 연달았는지라----그러므로 먼저 번갈아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고, 겸하여 병든 군졸을 간호하며 군사훈련과 군량을 준비하고, 배를 정비하여 명나라 군사의 소식을 자세히 듣고 기회를 타서 달려가 적을 차단하고자, 이달 4월 초3일 이억기와 약속하고 본도에 돌아왔습니다.
6. 통선 1척이 전복된 뒤에 죄를 기다림을 아뢰는 장계(1593.4.6.)
7. 수군에 소속된 고을의 수령들은 해전에만 전속시켜 주시도록 청하는 계본(1593.4.6.)
8. 광양현감 어영담의 유임을 청하는 계본(1593.4.8.)
-상략- 현감은 성품과 도량이 차분하고 신중하여 의심하거나 미혹됨이 없고, 성을 지키는 것과 해전에 방비하는 책략에 상세히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여러 번 출전할 때마다 제 몸을 잊고 앞장서서 왜적을 섬멸한 공로가 이미 월등하여---현감도 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한 뒤 물자와 양식을 대기 어려울 것을 민망히 여겨 수량 외의 백미 60석과 다른 잡물을 함께 배에 실어 올렸는데, 그것을 사사로이 쓴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것이 여기에 더욱 나타났습니다. --- 비록 그 수량에 가감이 있더라도 실상은 어영담이 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설사 조금 과실이 있었다 하여도 이같이 몹시 어려운 때를 당하여 충의에 분발하는 장수 한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은 적을 방어함에 해로움이 있습니다. ---하략
9. 일족을 침해하지 말라는 명령을 취소해 주시기를 거듭 청하는 계본(1593.4.10.)
10. 충청도 수군이 계속 후원하도록 해 주실 것을 청하는 장계 (1) (1593.5.10.)
상략- 웅천의 적들이 여전히 웅거하고 있는데 부산 바다 어귀를 차단하러 가는 데는 웅천이 요충지 길목이 되므로, 부산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적이 앞뒤에 있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군만으로는 끌어낼 길이 전혀 없으므로 부득이 육군과 합공하여 쫓아내어 수륙에서 섬멸하기 위해서는---충청도의 모든 수군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후원하여, 적을 무찔러 하늘에 닿은 치욕을 씻을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11. 충청도 수군이 계속 후원하도록 해 주실 것을 청하는 장계 (2) (1593.5.14.)
12. 왜선을 쫓아낸 일을 아뢰는 장계(1593.7.1.)
13. 왜군의 정세를 아뢰는 계본(1593.8.19.)
충청수사 정걸이 6월 초1일 도착해서 역시 합세하여 진을 쳤습니다. ---15일 수로의 적선으로 대•중•소의 것을 아울러 무려 700~800여 척이 부산•양산•김해로부터 웅천•제포•안골포 등지로 옮기고 연일 잇대어 이르는 것이 현저히 수륙으로 나누어 침범할 양상이 있으므로 ---- 견내량과 한산도 등지에 진을 합하여 길을 지켜 막고 겸하여 안팎의 사변에 대응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수군은 3도의 판옥전선이 겨우 100여 척이고 각각 소선을 거느리고 있을 뿐. 8월 초 10일에 살펴보니 적의 배들은 대•중•소선을 아울러 200여척이 그 웅포의 좌우편에 나누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중략--
‘웅천의 세 곳과 거제의 세 곳에 성을 쌓고 집을 짓는다.’라는 말은 포로가 되었다 도망해 온 봉사 제만춘의 문초 내용과 거의 일치할 뿐 아니라----겨울을 지낼 기색이 분명하게 있으니....
---수군들은 먼 해상에 머물며 주둔한 지 이미 5개월이 되어 군사들의 마음이 이미 풀어지고 날랜 기운도 꺾였는데, 전염병이 크게 번져서 진중의 군졸들이 태반이나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신이 거느린 수군만을 헤아려 보아도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 원래의 수가 6,200여 명 중에 작년과 금년에 전사한 수와 2~3월부터오늘에 이르기까지 병사자가 600여 명이나 되는데, 무릇 이들 사망자는 모두 건장하고 활을 잘 쏘며 배에 익숙한 토병과 보자기들이었습니다.---하략
14. 화포를 올려 보내는 일을 아뢰는 계본(1593.8 )
군관 정사준과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이 정철로 만든 조총(정철총통) 5자루를 올려 보냅니다.
15. 해전과 육전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아뢰는 계본(1593. 9. )
• 해전 같은 경우는 많은 군졸이 모두 배 안에 있으므로 적선을 바라보고 비록 도망해 달아나려 해도 그 형세상 그럴 방법이 없다 – 해전의 쉬운 점.
• 조정에서는 연해안 각 고을 괄장군(백성들 중에서 군역에 동원되는 장정)과 군량 등은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전적으로 수군에 소속시키고, 수군의 여러 장수들도 또한 이동시키지 않고 해 주십시오.
• 물자가 고갈되어 조달할 길이 없다. 본도의 순천과 흥양 등지에 넓고 비어있는 목장과 농사지을 만한 여러 섬에 관둔전 혹은 민간에 주어서 병작을 시키든지 혹은 순천과 흥양의 ‘방비하고 있는 군사’들로 하여금 들어가 농사짓는 데 전력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 출전한다면 싸움이나 지킴에 방해됨이 없고 군량에는 유익할 것이다.
•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감사와 병사의 예에 의하여 수령을 아울러 지휘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16. 사로잡혔던 이가 보고한 왜군의 정세를 아뢰는 계본(1593. 8. )
고성에 사는 훈련원 봉사 제만춘을 불러 심문한 내용
17. 조총을 올려 보내는 일을 아뢰는 장계(1593. 윤 11.14)
왜의 조총 30자루를 올려 보냄
18. 본영으로 돌아가는 일을 아뢰는 계본(1593. 윤 11.17)
‘3도 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10월 9일)
1년이 다하도록 해상에 오래 머무르니 굶주린 군졸들이 점점 병들고 극도로 지쳐서 겨우 숨만 붙어 있으며, 사망자가 거의 반이나 되니 장차 구제하고 어려운 형편입니다. --오래도록 해상에 머물러 굶주림과 추위는 점점 박두하는데 전염병이 봄•여름보다 더욱 심하게 번져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이 연달아 죽게 되니 군사의 수는 나날이 줄고 병력이 날로 외로운 형편이라 앞날의 일이 참으로 염려됩니다. ----군졸 중에 특히 오래 머물러 야위고 병든 자들은 교대하여 거느려서 우선 본도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다가 단속하여 진으로 돌아오게 할 계획입니다.
⇨ 겨울에는 해상작전이 어려워 전부 본영으로 돌아감
19. 왜인 포로가 고한 왜군의 정세를 보고하는 계본(1593. 7. 17)
견내량의 중요한 곳에 매복. 11월 3일에 군관 주부 나대용이 왜인 1명(망곳지, 25세)을 사로잡아 심문한 후 도원수 권율에게 목을 매어 압송함.
20. 어영담을 조방장으로 임명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1593. 윤 11. 17)
21. 쇠를 거두기 위한 공문과 유황을 내려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1593. 윤 11.17)
• 화약의 제조(염초, 유황, 목탄을 혼합)
사변이 발발한 이래 염초는 넉넉히 만들었으나 부족한 유황 200여 근쯤 채취하여 보내주길 청함.
22. 문신으로 종사관을 임명해 주시기를 청하는 장계(1593. 윤 11.17)
정경달을 요청함.(갑오년 1월에 부임)
⇨ 통제사종사관 제도가 시작됨
23. 연해의 군병•군량•병기를 수군에 전속시켜 주시기를 요청하는 계본(1593. 윤 11.17)
24. 둔전을 설치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청하는 계본(1593. 윤 11. 17)
25. 수군에 소속된 고을은 육군에 배정하지 마시도록 청하는 계본 (1593. 윤 11. 21)
26. 진중에서 과거보는 일을 청하는 계본(1593. 12. 29)
12월 27일 전주부에 과거 시험장을 개설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므로 해상의 진중에 있는 사졸들이 달려갈 수 없는 처지. ---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은 경상도의 예에 의하여 진중에서 시험을 보아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도록 하되 규정 중에 있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 쏘는 것’은 먼 바다에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라 말을 달릴 만한 땅이 없사오니,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 쏘는 것‘은 그 대신 ’편전을 쏘는 것‘으로써 재능을 시험 보면 편리하고 유익할까 생각됩니다.
27. 연해의 군병 군량 무기 등을 옮겨가지 말도록 명령해 주시기를 청하는 계본(1593. 12. 29)
상략 – 수군에 소속된 제색군(여러 가지 병종에 종사하는 군인들을 총칭하는 말)과 군량과 군기 등을 육군의 여러 곳에서 차츰 옮겨가므로, 연해안의 백성들은 수군과 육군의 침해를 번갈아 받아 동서로 명령을 따르느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길에서 떠돌기 때문에 열 집 중에 아홉 집은 비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라우도 수군 소속의 연해안 14고을 중에서 장흥•해남•강진•진도• 영암 등 5고을은 다시 수군에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 9고을은 육군에 소속시켰으므로 전선을 더 만들던 것 역시 중지하게 되었습니다.---
계사년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1>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으로 힘든 시기였다.
2> 돌산도 등 둔전을 활용하여 수확한 곡식의 반은 군량으로, 반은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니 수군 차출도 가능해졌다.
3> 조정에서는 출전해서 싸우거나 도망가는 적을 한 척도 못 돌아가게 하라는 지시만 내렸지 지원은 거의 없는 정도여서 자력으로 해결해야 할 현실이었다.
4> 수군을 유지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5> 병력징발 문제는 통제사에서 파직될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질의 응답>
1. 당시 수군을 확보할 시스템은 안 되어 있으면서 전쟁만 하라고 명령만 내리는 행정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 이순신 장군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장계 올리는 것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슬프기만 하다.
2. 지금의 합동참모본부 같은 총지휘부는 없었나요?
체찰사가 있었는데 합참기능은 없고 도원수가 있었다. 정유재란 때 도원수 권율은 수군까지 관할하였다.
3. 당시 유황이 어느 정도 생산되었나요?
우리나라에서 유황이 거의 생산되지 않아 중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전량 수입해왔다. 그러다보니 국가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지급해주는 방법을 취했다. 염초는 자체적으로 생산이 가능했다.
4. 화약을 만드는 비율은 어떻게 되나요? 화약 만드는 기록은 없었나요?
⇨ 화약제조과정의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화약전문가가 있을 것이다. 이전에 해군 해양발굴단에서 과거의 기록을 보고 흑색화약 만드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흑색화약의 강도와 순도가 임진왜란 때와 달랐다. 임진왜란 때 썼던 양은 매우 많아서 그 양대로 적용해서 만들면 총통이 폭발할 것 같았다. 기록대로 만든 화약을 넣어 신기전을 연병장에서 발사해봤는데 발사한 위치로 다시 돌아와서 사람들이 대피하곤 한 경험이 있다. 화약양이 과하게 많아 위험한 지경까지 가서 그 이후에 시험발사를 중단하게 되었다. 천자총통에 들어가는 대장군전은 크므로 바로 날아가 육사 교정에서 쐈을 때 스탠드에 꽂히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화약을 조선시대 방법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현대에 흑색화약은 만들어졌으나 위험하기도 해서 해군에서도 시험발사는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5. 1593년 1월 9일 이여송이 이끈 명나라 원군 4만 3천명이 조선 관군과 합세하여 약 7개월간 일본군의 수중에 있던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고 하였는데 일본군이 스스로 철수한 것 아닌가? 왜군 18,700명이 큐슈에서 출발해 올라갔다가 6,600명이 살아서 돌아왔다. 1만 명 이상의 왜군이 추워서 죽은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봐야 한다. 일본군이 왜 남하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궁금하다.
⇨ 평양성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극렬하게 전투를 한 것은 맞다. 명나라 전사자가 1,000여명이 되고 사상자가 3,000명 정도 나온다. 명나라 원군 43,000명 중에서 실제 써먹을 수 있는 전투병은 2만 명이 채 안되었다고 본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고니시부대가 평양성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다면 양측이 다 죽었을 것이다. 명군은 명군대로 평양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일본군은 일본군대로 방어해야 한다는 명분이 없었다. 명군이 대포를 쏘자 고니시가 협상을 요구했고, 고니시 부대와 밀담을 나눠 퇴로를 열어주기로 했다. 일본군이 후퇴할 때 체찰사였던 유성룡이 황해병사한테 후퇴하는 고니시 군대를 공격하라고 지시를 했다. 유성룡은 일본군을 몰살시킬 좋은 기회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황해병사가 유성룡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직속 상관 이야기만 듣고 공격을 하지 않았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한성으로 왔을 때 평안도로 갔던 고니시 부대는 35%가 남았고, 함경도로 갔던 가토 부대는 65%정도가 살아남았다.
부산포해전에서 보급품을 실은 배를 다 깨뜨려서 일본군의 한강과 대동강 진출이 차단당해 남하했지 않을까?
(가덕첨사님 의견)
6. 둔전에서 군사들이 농사지으면서 소출된 농산물의 전부를 군량미로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난중일기에는 둔전을 경영하면서 노인과 아픈 사람, 민간에게도 맡겨 5대 5로 나눈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 둔전이 임진왜란 시기에 여러 곳에 만들어졌다. 돌산도는 큰 섬이었고, 고흥반도 내, 우수영 근처에서도 둔전을 했다. 고금도도 원래 둔전을 했던 곳이라고 했다. 전쟁시기에 유휴지에 대해서 수군이 점령해서 농사지은 것이다. 군사를 보내서 직접 경영한 둔전이 있고, 일부 둔전은 일반 백성들한테 맡겨 병작반수제로 활용했다.(농사지은 것의 반은 내고, 반은 자신들의 식량으로 사용). 나누는 비율을 잘 지키기만 해도 땅의 소유주뿐만 아니라 농사짓는 작인들도 의미가 있는 제도다. 농사를 잘 지어 생산량이 많아지면 자기가 갖는 게 많아지니 열심히 일하게 할 수 있다.
7. 신의 군관 훈련주부 정사준이 묘법을 생각해 내어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삿집 종 안성, 피란하여 본영에 사는 김해 시노寺奴 동지, 거제 시노寺奴인 언복을 데리고 정철로써 두들겨 만들었는데, 몸체[총신]도 매우 공교롭고 포환의 맹렬함이 조총과 똑같습니다.(332쪽)
시노(寺奴)를 조선시대 각 관서 소속의 노비를 일컫던 말이라고 하셨는데 (332쪽) 충민공계초에는 시노(侍奴)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논문에도 시노(侍奴)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있었다. 전쟁 중이긴 했지만 중앙부서에 있는 노비가 김해나 거제에 와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부서에 소속된 노비라기보다는 그 지역에 소속된 노비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일반인들이 볼 때는 사노(寺奴)로 보고 절종으로 해석할 것 같은데 어떤 것이 맞는지 확실하게 알려 달라.
⇨ 중앙관서에 군기시(寺)라고 쓸 때도 寺를 쓴다. 각 기관에 딸려있었던 공노비를 시노(寺奴)라 불렀다. 쓸 때는 寺를 쓰는데 절종이라고 보는 것은 오독하는 것이다.
사람인변이 들어가는 侍는 집에서 데리고 부리는 종, 즉 몸종을 의미한다.
충민공계초에서 시노(侍奴)로 표현되어있는 것은 집안에서 부리던 종을 생각해서 쓴 것일수도 있다. 공노비도 사노비와 똑같다. 사노비가 외거노비와 솔거노비가 있듯이 공노비도 관에서 직접 소속되어 일하는 관노비도 있고, 공노비로 소속을 되어 있는데 신공만 내면 되는 관노비도 있었다. 군기시 등 관청을 운영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8. 지금까지 장계를 볼 수 있도록 보존될 수 있었던 과정이 궁금하다.
⇨ 장계의 대부분이 계본이다. 계본은 현장지휘관이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형식이다. 직접 보고하는 문서는 원본이 있다. 계본은 녹사에게 글씨를 정성스럽게 정서체로 쓰게 한 후 좌수사 도장을 찍어 왕에게 보냈다. 왕에게 보내기 이전에 똑같은 써놓은 것을 모아 문서형태로 모아 보관해 둔 것이다.
이순신이 정유년에 감옥에 간 사이 일기, 장계가 전부 압수당했다가 다시 돌려준 적이 있다. 임진년, 계사년, 갑오년 것만 돌려준 것 같다. 아니면 다 돌려주었는데 일부는 후손들이 분실했을 수도 있다. 장계 원본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 베껴 쓴 것만 남아있는데 그것을 등초장계라고 부른다.
현존하는 등초장계 중 그 시기가 가장 앞선 것은 현재 국립해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충민공계초이다. 임진장초는 종가에서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남아있는 것이 여러 개 있다. (이충무공전서 1권 207쪽 참고)
9. 우리가 이어갈 가치를 집중적으로 알려주면 감사하겠다.
⇨ 모임의 의미를 충무공 이순신의 훌륭한 점, 강조해야 할 점을 얘기하신다.
상황과 조건이 너무 안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겨나간 충무공의 모습을 배워야겠다.
10. 제안 : 314쪽 – 경적필패(輕敵必敗)
“적을 가볍게 여기면 반드시 패한다.”
우리 지역에 이런 정도의 상징물 한 개 정도는 세워야 하지 않을까?
지역주민들이 너무 아는 게 없어서 안타깝다. 예) ‘약무호남시무국가’
반론 : 꼭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웅포해전, 부산포해전, 제포나 육상에서 조선 사람들이 이순신과 협력해서 승리를 거둔 건 아니지 않은가? 이순신은 바다에서 보급로를 차단하는 정도의 혼내준 것뿐인데 굳이 웅천에 기념물을 만들어야 할까?
전라남도는 점령당하지 않았으니 전남 도민들이 협력해서 이순신을 도왔지 않나? 그건 이해가 된다.
⇨ 지자체 중심으로 각 지역별 기념관등이 많이 생기고 있다. 얼마 전 가톨릭대 박사과정 학생들과 고금도 충무사에 갔더니 입구에 이순신 기념관이 생겼더라. 박사과정 논문 쓸 때 놓쳤던 것을 보았다.
기념관에 제1차, 2차 고금도 전투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더라. 그런데 그 내용이 이충무공전서나 난중일기 등에는 없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므로 사실이다. 다만 역사학자가 놓치고 지나갔던 부분인데 그 지역주민들이 전시관을 만들어 부각시켜 놓으니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창원도 아이디어를 발휘해 추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1. 충청도 수군 지원 요청에 대해 조정이 어떤 답변이 왔는지 궁금하다.
⇨ 충청도에서 지원하라는 조정의 지시가 내려졌다. 충청수사 이계정이 명령을 받고 내려오다가 화재사고로 죽게 된다. 충청도 수군이 준비가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아서 전투에 나가거나 하기 어려웠던 듯.
삼도수군통제사도 충청도 관할, 삼도수군통어사도 충청도를 관할하게 되어 있었다. 충청도는 두 군데 다 소속되어 있어서 반은 통어영, 반은 통제영에서 활동하는가 싶었다. 만기요람에 보면 정확하게 역할을 적어놓았다. 중국과 대결할 때는 통어영으로, 일본과 대결할 때는 통제영으로 활동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충청•전라•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공식 직함에 들어가 있었다. 통제사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상황에 맞춰 활동했지만 임진왜란 당시는 병력이 워낙 부족하던 터라 군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계속 하게 되었다.
<참고>
■ 삼도수군통어영은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수군을 관할하기 위한 수군 최고 사령부.
후금, 청과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도성의 길목인 한강 하류 수로와 유사시 왕의 피난처인 강화도 지역의 해양방어를 위해 신설한 수영.
■ 삼도수군통제영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관할.
■ 만기요람 ; 1808년에 서영보, 심상규 등이 왕명에 의해 만든 책. 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이 집약되어 있음
12. 이정암의 연암성 전투 승리에 대해 설명해 달라.
⇨ 연암성에 의병으로 들어가 조선의병 1400명으로 일본군 5천명의 공격을 막고 5일간에 걸친 전쟁에서 이겼다. 우리나라가 수성전을 잘 한 것 같다. 고지식한 분이었던 것 같다. 당시 전투에 참여한 장수들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의 양은 만만치 않을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이정암은 “ 적이 8월 28일 성을 포위했다가 9월 2일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라는 한 줄짜리 장계를 올렸다. 처음에 장계를 받았을 때는 당황했다가 후에 3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싸워 이겼다는 자세한 사항이 알려지자 조정은 이정암의 겸손함을 칭찬하였다.
선조는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은 선참후계(군율을 어긴 자를 먼저 처형한 뒤에 임금에게 아뢰는 일)하라는 지시를 내리지만 강화해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사람이 이정암이다. 자신의 소신이 있다면 왕명도 어길 정도의 대쪽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연암성 전투의 공으로 선조는 이정암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꼿꼿하고 훌륭한 선비였지만 이정암이 전라도 관찰사로 오면서 이순신과는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관찰사가 수군소속 지휘관들을 자기 보좌관으로 허락 없이 데려가곤 했기 때문이다.
관찰사는 수사와 병사를 겸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였다. 통제사도 관찰사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이므로 조정에 장계를 올리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해안에 있는 장정들을 전부 수군으로 소속시켜버리면 육군자원이 없으므로 내륙 방어가 어렵기 때문에 부족한 인적 자원을 빼갔다고 볼 수 있다. 굶어죽고 병들어죽고 하며 사람들이 워낙 없으니 관찰사 입장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는 수군마저 부족한 상태라 뺏기지 않으려했을 것이다.
이상입니다.
첫댓글 지회장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늘 적극적으로 학습 분위기를 돋우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젤 공부 열심히 하는 분은 진해현감님!..복습하며 글을 올리려면 신경이 보통 쓰이는 게 아니거든요?..
덕분에 가물거리는 기억에 흔적을 보태고..또 잊을지언정 복습을 합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짧은 배경지식에 들은 내용 정리하자니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을까봐 조심스럽긴 해요. 정리하면서 복습이 되어 좋습니다~^^
지회장님 언제나 노고가 많으십니다.
감사드립니다.
장계를 읽고 이민웅교수님의 강의를 들어면서 당시가 매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장군님께서 조정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을 알수 있는 좋은 시간이 었습니다.
둔전 제도를 활용해 피난민에게는 살길을 마련해주고 아울러 군인들의 군량을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모습에서 장군님의 탁월한 리더십을 배웁니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화포를 제작하고 전선을 구축하여 전쟁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이 돋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행정체계나 전시 작전 지휘체계가 일관성이 없어 곤란을 겪는 모습은 답답하였습니다.
그런 애로를 해결하기위해 문관 종사관 제도설치를 건의해 초대 종사관으로 정경달이 와서 둔전과 지휘체계를 보좌하에 성과를 거양한것에서도 장군님의 혜안을 후학들이 본받고 실천해야하는 가치라 생각됩니다.
장계에 나타난 정신과 가치를 잘 정리 강의 해주신 이민웅교수님과 후기작성에 정성을 다하시는 지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장군님의 모습에서 배워야 할 정신과 가치를 잘 표현해주셨네요. 읽으면서 모두 비슷하게 느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장군님의 정신과 실천력을 잘 배워 현실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숙제겠지요. 정성가득한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지회장님 고생했습니다
지회장님 노고에 감사하며, 차곡차곡 곱씹으며 읽었습니다
덕분에 오늘 분량 공부는 다한 것 같습니다~ㅎ(뿌듯)
사정으로 참여 못했지만 확실히 공부하신 것 같네요. 뿌듯하다니 다행입니다.
ㅈ
진해현감님 아니지회장님 읽는내내 이렇게나 긴글하면서도 글을올리는지회장님 정성을 생각하여도 꼼꼼히 다읽었습니다
공부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꼼꼼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수사님의 정성 가득한 마음 또한 감사드립니다.
ㅇㅇ 열심히 하는 모습 참 좋습니다
회장님 응원도 가시고...
감사합니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처럼 벌써 4회차까지 읽었네요. 이읏지회에서 동참해주시니 더없이 감사했습니다.
점차 참여 인원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좋사옵니다.
이번에 부산지회에서 원정오셔서 인원이 조금 는 것이지요
"변해야 산다"
창원지회 가족들의 향학열과 지회장님의 희생적인 리더십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자주 참여토록 하겠습니다.
귀한 시간 지도해 주신 웅천현감님 ! 그리고 진해현감 지회장님 감사드립니다.
멀다면 먼 길인데도 마다않고 달려오시는 열정을 존경합니다. 웅천현감님의 정성에 감동해 회원들이 더 적극적인 것 같습니다. "배워서 남주자"를 실천하시는 웅천현감님께 감사하고, 적극 참여하는 우리 회원님들도 감사하고, 이웃 마을이지만 한달음에 달려와주신 남명손서님, 가덕첨사님, 둔전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자주 뵐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죠. 이배사는 한 배를 타고 좋은 방향을 위해 함께 가죠~😊
웅천현감님, 진해현감(창원지회장)님 많은 가르침과 정보 공유에 감사드립니다.
둔전님
먼 길 와 주셨는데 도움되는 시간이었는지요? 웅천현감님께 배우는 시간이 저도 귀하게 느껴져요. 깊이 연구하시는 학자분이라 저같은 일반인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일 것 같아요..예리한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었지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야 잘 모르는 부분이지만 당시의 객관적 제도를 넓게 살펴보면 둔전님의 질문을 더 깊이 연구해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감사합니다 진해현감님!
😊😊😊
이렇게 정성어린 기록을 나누어 주셔서 , 멀리서나마 함께 스터디 하는 마음으로 정독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외에 나오니 책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 입니다. 격군님이 챙겨주신 충무공 이순신 책 한권을 신주단지 모시듯 소장 하고 있습니다. 충분할때는 몰랐던 귀함과 소중함을 배웁니다. 다시한번 소중한 기록을 남겨주신 진해현감님께 감사드립니다.
멀리서도 열공중이군요.
끝없는 열정 소녀 지기지피....
또 어떤 변신한 모습을 보일지 궁금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