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실버라이닝
기획 PD를 하고 있는 인정(29)은 올해 초 들었던 연기 수업에서 알게 되었다. 밝은 갈색 주황빛 머리를 한 그녀는 수줍어 보이지만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수업을 진행하며 인정의 연기를 접하고 그녀의 감상을 알아갈수록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인생의 같은 순간 같은 지점 연기라는 것을 처음 배우는 두 여자라는 공통점 이외에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나는 그녀의 삶이 궁금해져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녀는 신이 난다며 흔쾌히 인터뷰를 수긍해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동안 떠나온 장소들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찬찬히 옮겨왔던 그리고 살아왔던 장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대학교 2학년을 마친 뒤 8월 말, 가을이 시작될 즈음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좋아하는 선배 언니가 프랑스에 위치한 학교를 다녀왔는데 추천을 해주었다는 이유, 어학을 위해서 가는 건 아니니까 유럽 주변으로 가면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 교환학생을 도전했던 학기에는 아쉽게도 원하는 학교에 떨어졌다. 인정은 너무 속상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교양수업으로 프랑스어를 수강하면서 어떻게든 가겠다는 마음을 다잡으며 프랑스에 가야만 하는 동기를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두 번째 학기에 합격하여 그토록 원하던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인정이 살던 르발루아라는 동네는 파리와 굉장히 가까운 근접지역이었다. 수업은 샹젤리제와 르발루아를 번갈아 다니면서 들었다. 학교가 끝나면 시간이 남아서 살았던 집과는 지하철을 타고 10분 정도 거리에 있던 생마르탱 운하를 걸었다. 생마르탱 운하에서 물수제비 뜨기가 취미인 파리지앵 아멜리에의 모습을 떠올리며 걷던 인정은 여름이 되면 프랑스 사람들이 노천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곤 했다고 회상했다. 생마르탱 운하는 그녀가 제일 많이 산책을 다닌 곳이었다.
프랑스, 낭만적인 도시이지만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 인정의 삶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프랑스파리테러사건이 발생한 2015년 11월 13일, 인정은 파리 중심부에서 약 6km 떨어진 르발루아페레에 있었다. 밖을 나설 때는 늘 테러 생각을 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로 목적지를 정해서 다녔다. 학교에 가기 위해 타던 지하철은 한국의 출근 시간 지하철과 느낌이 똑같았다. 본디 여행자는 호기심이 많은 법이라 생각했던 인정은 여행자인 티를 내기가 싫어 항상 튀어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헐렁해보이지 않으려고 힘을 계속 주었다. 실제로 지하철 안에서 한 무리들에게 맥북을 소매치기 당할 뻔 했던 상황도 겪어본 인정은 안전에도 위협이 될 수 있던 상황이기 때문에 항상 날카롭게 발을 세우고 있었다. 집 안에 있을 때는 엄청 웃어도 밖에 나와서는 인상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을 그녀는 파리의 사람들을 흉내낸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인정은 2주간 주어진 가을방학과 주말을 이용해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자주 떠났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부다페스트, 체코, 벨기에, 영국, 스페인. 23살의 유학생 신분이다 보니 정해진 생활비 안에서 여행을 해야 했다. 여행 중에는 이상한 일이 진짜 많았다. 인종차별을 당하면 그때부터 그 나라와 나라 사람들이 싫어져 앙심을 품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 교통권 티켓을 담배 가게에서 구매하여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담배 가게 주인은 인정에게 티켓이 없다고 말했다. 혼란스러운 찰나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아저씨가 자신과 같이 다시 가자고 했고 가게 주인은 그제야 교통권 티켓을 팔았다. 그것은 마치 너한테 팔기 싫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대놓고 손가락 욕을 받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손가락 욕을 했다. 그녀를 경멸하는 표정이었다. 인정의 뒤에 있는 오스트리아인이 같이 뭐라고 욕을 해주었기 때문에 이것이 인종차별이 맞다고 확신했다. 인정은 기분이 불쾌했고 동시에 너무 놀랐고 얼었다. 독일의 맥주 축제에서는 테이블이 없어 초대받은 곳에서 성적인 뉘앙스의 농담을 들어도 너희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졸린 것이라는 가스라이팅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상대가 한국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소통이 되는 건지 의심이 되어 의도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머물던 프랑스 역시 오히려 언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있었는데도 모르고 지나갔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인간은 소통을 통해서 교류하는 관계여서일까.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인정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이곳에서 살 수 있을까? 연말에는 프랑스에 대학교 동문회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프랑스 한인 1세대 분들을 만났다. 가게를 하시는 분, 연구원을 하시는 분, 결혼을 해서 프랑스에 머무는 사람도 있었다. 한인회의 여러 삶의 모습들을 보며 태어난 것은 선택한 건 아니니까 직업은 진취적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나라까지도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영어로 소통은 할 수 있지만 깊고 밀도 있는 이야기까지 하기에는 통하지 않을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소통이 안되는 외로움이 너무 커서 인정을 덮칠 것 같았다.
결국 어떤 문화권 안에서 살았느냐가 밖에 나와야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밖에 나와서 한 번쯤 보는 것이 그녀 자신과 여러 방면을 알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 그녀를 스쳐지나는 사람들은 그녀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답을 내려주진 않아도 그에 대한 화두를 스스로에게 던지게 했다. 아시아계의 젊은 여성이 유학 또는 여행을 경험하며 겪어야 하는 시선들은 평등하지 못한 대우들과 부조리함도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한 번쯤 밖에 나와 개인적인 위치와 사회적인 위치를 경험해봤을 때 우물 안에 갇혀있던 시선을 넓힐 수 있었다.
당시 그녀와 같이 프랑스 교환학생을 같이 준비한 친구는 떨어져서 함께 프랑스에 가지 못했다. 근황을 물으니 캐나다에서 프랑스인 남자친구를 만나 같이 살면서 정착하려고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인정은 신기하다고 말했다. 몇 년 전 자신보다 프랑스를 더 나가고 싶어 했던 친구였지만 결국에는 친구가 해외를 나가는 길을 찾아냈다는 것이, 어딘가로 향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간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셈이었다.
무언갈 간절히 원하면 그 길로 가게 돼. 론다 번이 쓴 시크릿이라는 도서에 나오는 카피라이터 문구 같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 빛을 쫓아 흘러가 간절히 열망해봐. 너의 삶에 뛰어들어 주어지는 기회를 잡아봐. 그녀의 이야기가 흘러 내 안에 닿았다. 너무도 당연한 문장이라 쉽게 무시했었지만 그녀의 프랑스 기행을 듣다 보니 이 문장이 진리처럼 느껴진다. 최선의 삶이란 무엇일까? 프랑스에 있던 그녀도 현재의 그녀도 모두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경험하기도 의도치 않게 불행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경험해 본 자만이 지난날을 회상하며 더 나은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최선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 프랑스파리테러사건
: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 파리 시내 여섯 곳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 및 대량 총격 사건으로,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자행하였다. 사망자는 130명 이상, 부상자는 3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테러의 총책임자는 18일 프랑스 경찰 특수부대에 사살되었다.
첫댓글 헉 제 후배이자 친구인 인정이를 여기서 글로 만나다니 ㅎㅎ
신기한 인연이네요! 저는 프랑스 유학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물어본적 없어서 몰랐는데, 실버라이닝님의 시선으로 들려주시니 제 친구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되어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런 모습(당시의 외로움, 그곳에서의 성장 등)을 발견해주지 못했나? 묘한 자책도 하게 되네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