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12대 (순종 順宗)1046~1083 성릉(成陵)
4개월 단명한 순종의 협소한 무덤 성릉(成陵)
고려 12대 순종(順宗)은 고려 전체를 통틀어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다. 그는 문종(文宗)의 장남으로, 원래 이름은 왕휴(王烋)였으나, 뒤에 왕훈(王勳)으로 고쳤다. 순종은 1047년(문종 1)에 태어났고,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였다. 그가 왕태자로 책봉된 것은 8세 때인 1054년(문종 8년) 2월이었다.
문종은 왕훈의 태자 책봉을 거란 등에 사신을 보내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고 공인받았다. 문종은 대내적으로도 왕훈의 위상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 1056년(문종 10) 9월에는 왕훈에게 여러 종친들 및 신하들과 함께 하는 잔치를 주관하도록 했고, 10월에는 태묘(太廟)에 배알하도록 했다. 신하들과 잔치를 열 때에도 태자와 동석했다는 기록이 다른 왕대와 비교하여 유독 자주 등장한다. 1078년(문종 32)에는 송(宋)에서 온 사신단을 인도하는 임무를 명하기도 하였다.
순종의 태자 활동은 문종의 오랜 재위 기간으로 다른 왕 때보다 상대적으로 길었다. 왕훈은 이렇게 오랫동안 태자로 있으면서, 어려서는 문종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고, 장성해 부왕(父王)을 보필하며 정치 경험을 쌓았다.
문종은 1083년(문종 37) 7월에 병이 심해지자 왕위를 태자에게 넘기고 곧 사망했다. 마침내 왕훈은 고려의 12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순종은 젊어서부터 병이 있었고, 부친의 상을 치르며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결국 즉위한 지 4개월만에 동생 왕운(王運)에게 왕위를 전하고 사망한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른 죽음이었다. 오랜 세월 태자로서 국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지만 그의 재위기간은 너무 짧았다.
순종의 능호는 성릉(成陵)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순종은 나성(羅城) 남쪽에 장례 지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진봉산(進鳳山) 남쪽 양양현(壤陽峴)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개성시 진봉리다. 무덤이 있는 곳은 ‘왕릉골’이라 부르며 낮은 능선 위에 있고, 진봉산 남쪽 능선에 있는 고려 5대 경종(景宗)의 영릉(榮陵), 6대 성종(成宗)의 강릉(康陵)의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재위기간이 짧아서 일까. 성릉의 묘역은 협소하고 조선시대에도 관리가 잘 되지 않은 듯하다. 봉분의 높이는 약 1.6m이고 직경은 약 8m이다. 현재 봉분이 있는 1단에는 2개의 석수(石獸)만 확인된다. 2단은 석축이 무너져 내려 원래 형태가 남아 있지 않고, 머리 부분이 잘려나간 1쌍의 문인석(文人石)만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조사 때 문인석이 넘어진 채 방치된 것을 북한이 묘역을 정비하면서 좌우에 세워놓은 것이다. 조사과정에서 위쪽에 큰 도굴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고, 정자각터에서도 초석 몇 개만 있었다고 한다.
별다른 업적없이 붕어하여 그의 동생인 국원공 왕운이 왕위에 오른다. 자식에게 물려준 것도 아니고 자식에 대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봐서 병약한 몸 때문에 후사도 낳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남아있는 기사도 짧다.
부인으로 정의왕후 왕씨, 선희왕후 김씨, 장경궁주 이씨가 있다. 정의왕후 왕씨는 정간왕의 딸로 순종과 사촌지간인데 보통 이렇게 가까운 친척이면 혼인할 때 외가의 성씨를 택하므로 그녀의 모계를 따라 인주 이씨, 또는 친고모를 따라 안산 김씨를 자칭할 수 있지만 그녀는 왕씨로 적혀 있다.
장경궁주 이씨는 이호의 딸이다. 이호는 이자겸의 아버지기도 하니 이자겸과 순종은 처남 매부지간이 되는 셈. 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후궁이 되었지만 순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과부가 되었다. 이후 외궁에 거처했고, 장경궁주에 봉해졌으나 자신의 노비와 간통하다가 발각되어 궁주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훗날 복권되지 않았다. 이 때 이자겸도 그녀의 오빠라는 이유로 축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