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217C4B4F58F6F26121)
피사로 <빗속의 브알디외 다리> 1896년, 캔버스에 유채, 73.7 x 91.4 cm, 캐나다 온타리오 미술관
Pont Boieldieu in Rouen, Rainy Weather, (1896), Art Gallery of on tario
피사로와 루앙의 브알디외 다리: 간추린 교량공학의 역사
Pissarro’s Pont Boieldieu in Rouen: An Abridged History of Bridge Engineering
“내가 특히 흥미를 갖는 것은 그림의 주제로서의 젖은 다리란다.
붐비는 차량들, 마차들, 행인들, 부두의 노동자들, 선박들, 연기와 아득한 안개, 전체 풍경이 아주 생동감과 삶으로 가득하다.” [1]
철제 아치 다리가 화면을 가로지르고 전면의 부두에는 증기선 한 척이 정박해 있다. 하역이 한참인 듯 부두에 세워진 증기 거중기의 조그만 굴뚝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가 다리 위로 솟구치고 있다.
다리 건너의 부두에도 바지선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강변, 다리, 어디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강 건너 도시의 모습 사이사이로 보이는 공장 굴뚝에서도 연기를 쉼 없이 뿜어낸다. 하늘은 온통 하얀 연기로 차있다.
산업으로 꿈틀대는 부두 주변의 분주한 일상이 포착되어 있다.
1896년, 피사로는 13년 전에 방문했던 루앙으로 다시 온다. 모네가 발표한 루앙 대성당 연작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터였다. 루앙의 ‘파리호텔’ 3층방에 임시화실을 꾸미고 센 강을 내려다보며 다리 풍경에 몰두한다.
눈에 문제가 생겨 밖에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앙에서 한 달쯤을 머물던 피사로는 2월 26일 아들 뤼시앙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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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로 <안개 낀 석양의 브알디외 다리> 1896년, 캔버스에 유채, 54 x 65 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3월말 루앙을 떠날 때까지 호텔에 머물던 피사로는 무려 15점의 풍경 그림을 완성했다. 도시와 센강을 주제로 한 피사로의 최초 연작이다. 그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다리 그림을 하나 더 보자.
이 그림은 지난 2014년 여름 서울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던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파전’ 에 전시되었던 작품이다. 전시회 타이틀에 비해 빈약했던 전시품 중 그나마 볼만한 몇 점 안된 유화중 하나였다.
앞서의 그림과 유사한데 다리 주변의 부두보다는 다리 너머의 산업현장에 더 주목한 그림이다.
피사로가 애정을 가지고 화폭에 담던 이 다리는 ‘브알디외 Boieldieu 다리’ 다.
피사로가 루앙을 방문하기 불과 8년 전에 완공된 근대식 주철 아치다리다. 강 북쪽의 고색창연한 고딕 도심과 남쪽의 새로운 산업단지를 연결하는 루앙의 새로운 동맥은 늘 활기로 가득 차있다. 이 다리가 서있는 장소엔 아주 오래 전부터 다리가 있었고 흥미로운 도시의 역사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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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르리외 <분수의 책> 표지 그림. 1521년의 루앙 풍경 [2]
500년을 함께한 돌다리 마틸드
이곳 루앙의 센 강에는 이미 9세기부터 목조 다리가 있었다. 그리 견고하지 못한 나무 다리인지라 파괴와 복구를 반복하면서 12세기 중반 석조다리가 건설되기까지 그곳에 서있었다.
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영구적인 다리는 ‘돌다리 Pont de Pierre’다. ‘마틸드 다리 Pont Mathilde’ 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정복왕” 윌리암의 손녀이자 헨리1세의 딸인 마틸다 여제 Empress Matilda(1102-1167)가 루앙에 지어줬기 때문이다. 1151-1167년 사이에 건설되어 1661에 헐리기까지 무려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루앙과 함께 했다.
위의 그림은 프랑스 작가 르리외 Jacques Le Lieur(1480-1550)의 <분수의 책 Livre des Fontaines>이라는 책 표지 그림으로 사용된 ‘루앙 대풍경 Grande vue de Rouen’이다. 1521년의 루앙을 파노라마로 그린 그림인데 오른 편에 다리의 모습이 제법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13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이 다리는 당시의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교량공학의 기념비로 여길 만하다. 북쪽(우안)에 위치한 도심의 방어를 위해 좌안의 쌍둥이 섬 바르비캉을 요새화하고 두 섬 사이를 도개교로 연결했다. 도시 방어를 위한 전략상으로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흥미롭게도 강 북쪽 다리 위에는 성벽 위로 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다리 중앙부터 램프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인해 다리는 점차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도시의 방어를 위해 자주 다리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특히 1418년의 ‘루앙 포위’가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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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 다리 부분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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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 포위를 묘사한 15세기의 그림 (출처 Britannica on line)
백년전쟁과 루앙 포위
15세기 초 루앙은 인구 7만의 도시로서 ‘백년전쟁’의 노르망디 캠페인에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415년부터 프랑스 군은 루앙을 요새화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영국군이 함락시키기 가장 어려운 요새가 된다.
1418년 7월 영국군이 루앙에 도착한다. 프랑스 군은 성벽 곳곳에 대포와 궁사들을 배치하고 물샐틈없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영국군은 병력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성을 공략하기가 만만치 않았으므로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기다리는 작전을 쓰기로 한다. 굶어 죽거나 항복하거나 양자택일의 길 이외엔 없었다.
12월이 되자 루앙 시민들은 고양이, 개고기, 말고기뿐 아니라 심지어는 쥐까지도 잡아 먹을 정도였다. 믿거나 말거나 프랑스 요리가 다양한 이유가 이런 잦은 전쟁과 성의 포위작전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루앙은 “입을 줄이기” 위해 만 이 천명에 달하는 가난한 백성들을 성밖으로 내쫓는다. 그러나 영국의 헨리 5세는 이 난민들이 포위선을 통과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러니 이 불쌍한 사람들은 성 바깥에 웅덩이를 파고 기거하며 추위와 기아에 허덕이다 속절없이 죽어갈 뿐이었다.
영국군 조차도 이 불쌍한 난민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프랑스군은 성밖으로 나가기 위해 몇 번의 공격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힘겨운 대치상태가 지속되자 프랑스군은 결국 6개월만인 1419년 1월 20일 항복한다.
이 일이 있고서 루앙 시민들은 프랑스 왕과 왕세자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영국 왕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헨리는 기세를 몰아 노르망디 전체를 장악한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루앙이 프랑스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무려 30년이 지난 1449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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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로슈 <감옥에서 윈체스터의 추기경에게 심문 받는 잔> 1824년, 캔버스에 유채, 277 x 218.5 cm, 루앙 미술관. Joan of Arc being Interrogated, 1824, Mus?e des Beaux-Arts, Rouen, France. Paul Delaroche
일곱 번도 좋으니 내 목을 베다오
루앙을 이야기하면서 잔다르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루앙은 “오를레앙의 처녀” 잔다르크가 감금되고 재판 받고 화형에 처해진 곳이기 때문이다.
1429년, 9일만에 기적적으로 ‘오를레앙 포위’를 풀어버린 잔다르크의 이야기는 잘 아는 이야기니 생략하기로 하자. 아무튼 루앙이 함락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431년 잔다르크는 루앙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화형에 처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잔다르크는 “불에 태우지 말고 차라리 일곱 번도 좋으니 내 목을 잘라다오”라 고 애원했다고 한다.
“루앙이여! 루앙이여! 내가 여기서 죽어야 한단 말이냐? 아, 루앙이여, 내 죽음으로 장차 네가 고통 받을까 두렵도다!”
결국 화형대에 올라간 잔다르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언대로 루앙은 잔다르크가 처형된 도시로 영원히 기억되게 된다.
잔다르크의 스토리는 지난 600년 가까이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어 수많은 작품으로 만들어 졌다. 그림과 조각뿐 아니라 많은 노래가 생겨났지만 필자에게는 캐나다 출신의 시인이자 싱어송 라이터인 레너드 코헨 Leonard Cohen의 노래가 기억에 남는다.
대학시절 어두침침한 홍대앞 카페에서 즐겨 듣던 그의 “Joan of Arc”의 3-4 연을 여기 옮긴다.[3]
“그래, 넌 누구니?” 그녀가 진지하게 물었다 연기 아래에 있는 그에게 “나, 나는 불이야,”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난 너의 고독을 사랑해. 너의 자부심마저도”
“그럼, 불아, 네 몸을 차게 만들렴 날 안을 수 있도록 내 몸을 주마” 그리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하나가 되기 위해, 그의 단 하나의 신부가 되기 위해
마침내 한줌의 재가 된 그녀는 마틸드 돌다리 위에서 센 강에 뿌려진다.
종교재판에 의해 그토록 끔찍한 죽음을 맞은 잔다르크는 훗날 교황청이 잘못을 인정하고 성인으로 추서된다. 현재 다리의 우안 강둑에는 잔다르크의 재를 센 강에 뿌렸던 장소를 기리는 기념패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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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옆에 붙어있는 잔다르크의 기념패. 하류 쪽에 살짝 보이는 다리는 1953-1956년에 건설된 ‘잔다르크’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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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의 루앙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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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7년의 루앙 지도. 끊겨진 돌다리 우측으로 배다리가 보인다. (메리안 지도)
돌다리가 무너져 왕이 배로 강을 건너다
위의 그림은 1572년의 루앙 지도다. 루앙 시 중앙에 보이는 높은 건물이 노트르담 대성당과 뵈르첨탑이다.
모네가 훗날 연작을 그리며 빛의 인상과 씨름했던 바로 그 성당이다.
지도 왼편에 이미 아치가 최소 두 개 이상 소실된 돌다리가 보인다. 17세기가 되자 낡고 병든 다리는 더 이상 제구실을 못하게 된다. 이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루앙은 1562년 종교전쟁 때 또 한차례 “루앙 포위”를 겪었기 때문이다.[4]
기록에 의하면 1603년 루앙을 방문한 앙리 4세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고 하니 다리의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 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다리의 재건을 위해 여러 가지 안이 논의되지만 실현되지 못한다. 그러자 결국 다리의 바로 상류쪽에서 나룻배가 운영되기 시작한다. 방치된 다리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아치는 하나 둘 강으로 떨어져 나간다. 다리는 결국 1661년에 헐리게 되는데 나중 새로 지을 다리를 위해서 교각의 기초는 남겨두게 된다.
끊겨진 돌다리는 그대로 방치되고 상류의 나룻배 서비스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돌다리 재건이 성사될 기미를 안보이자 1626년 돌다리의 바로 상류 쪽에 돌연 임시 다리가 생겨난다. 배다리(주교)가 건설된 것이다.
두 번째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다리는 19척의 배를 이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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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베르 로베르 <루앙의 배다리> 1773년 (부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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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의 설계도 [7]
200년 이상을 버틴 최첨단 배다리
그러나 배다리의 유지보수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데다 통행료 수입도 변변치 않아 시의 재정이 나빠진다. 잘 알다시피 배다리는 돌다리처럼 견고하지 않다. 더구나 홍수시나 결빙기에는 매우 위험해진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다리를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해야만 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다리는 200년이나 그 자리에서 버틴다. 이런저런 기술의 혁신이 끊임없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의 그림은 배다리의 설계도다. 배를 고정시키는 구조물과 배 위에 설치하는 다리의 상부구조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고안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배다리는 유럽전역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고 당시 발간된 백과사전에 소개되기도 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배다리의 형식과 다르다.
밧줄로 배를 이어 붙이고 위에 상판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임시 교량의 형식이 아니다. 배의 외측에 견고한 지지 구조물을 건설하고 그 사이에 배를 끼워 연결하는 특이한 형식이다. 세척의 배를 동시에 결합하고 분리할 수 있는 연결장치가 고안되어 사용되었다고 한다. 상당한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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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의 통행을 위해 가동 구간을 작동시키는 모습 [8]
18세기 초 이 배다리에 또 한차례의 기술 혁신이 도입된다.
니콜라스라는 사제가 양안에 가동식경사 상판을 설치하여 다리의 편의성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것이다.
더 나아가 우안 끝 부분에는 기발한 가동식 개폐장치을 설치했다. 두 척의 배다리 구간을 필요 시 쉽게 다리의 종방향으로 이동시켜 배가 지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위의 그림은 이러한 설비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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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의 현수교 “철사 다리”
현수교의 대부 세겡의 “철사 다리”
무려 200년간이나 사용하던 배다리는 19세기가 되면서 좌안의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더 이상 제구실을 못하게 된다. 선박의 통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탓이다. 1836년이 되자 배다리를 헐고 새 다리를 건설한다.
배의 통행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현수교를 선택했다. 다리의 설계는 당시 프랑스 현수교의 선구자로 잘 나가던 세겡[9]이 맡았다. 무려 99년간의 운영권과 함께.
1846년에 완공된 이 현수교의 모습이 위의 그림에 담겨있다. 두 개의 케이블로 지지된 경간 중앙에 15미터의 정사각형 주탑이 있는 독특한 구조다. 주탑은 강 중앙에 네 개의 석재 교각으로 지지되어 있다.
다리의 폭은 7.3미터이며 도로의 폭은 겨우 5미터에 불과했다. 영국의 현수교에 사용되던 아이바 Eyebar 체인 링크가 아니라 세겡 형제가 개발한 와이어 케이블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용된 케이블이 가늘고 빈약해 보여 주민들은 이 다리를 “철사 다리”라 불렀다.
그러나 이 다리는 99년이라는 보장된 운영기간을 반도 채우지 못한다. 다리가 세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낡고 위험해졌기 때문이었다. 다리 상부구조가 너무 가벼워서 마차만 지나가도 심하게 흔들렸다.
“철사다리”라는 별명이 괜히 붙었겠는가.
사람들이 불안에 떨게 되자 결국 1884 년 루앙 시가 다리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32FDD4E58F7018D05)
건설 중인 브알디외 다리와 임시 보행교
피사로가 그린 주철 아치 “브알디외 다리”
1888년, 이 가볍고 위험한 “철사다리”는 마침내 근대식 주철 아치교인 ‘브알디외 다리’로 교체되었다.
루앙이 배출한 “프랑스의 모자르트”라 불리는 작곡가 브알디외 Francois Boieldieu (1775-1834)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 그림은 브알디외 다리가 건설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편에는 보이는 목조 임시 보행교는 “철사다리”의 주탑 기초를 활용한 것이다.
폭이 20미터인 이 다리는 세 개의 주철 아치로 이루어졌다. 아치의 이맛돌에는 투구를 쓴 여인이 조각되어 있었고 두 교각의 상부에는 반원 형태의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당시로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의. 이 주철다리가 피사로가 연작으로 남긴 바로 그 다리다.
1883-1898년 사이 총 네번 루앙을 방문한 피사로는 총 47점의 루앙 풍경을 남겼는데 그 중 이 다리 그림이 무려 16점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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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 아치교 브알디외 다리의 모습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40년, 멀쩡한 다리를 프랑스 공병대가 폭파해 버린다. 거침없이 밀려오는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다. 전후에 다리 복구가 개시되고 1955년에 현재의 다리가 개통되었다.
이 다리는 날렵한 현대식 강철 거더교다. 거더의 아래 부분을 곡선으로 처리해 이전 주철 아치의 모습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 같다. 특히 스팬드럴을 수직의 리브로 장식해 단조로움을 피하면서 나름 조형성과 리듬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도시의 맥락과 동떨어진 이 교량은 경관적으로 그리 후한 점수를 받기 는 어려울 듯하다.
간추린 교량공학의 역사를 지니다
아래 사진에 담긴 다리가 현재의 브알디외 다리다.
다리 위로 보이는 붉은 조형물은 2010년 벨기에 출신의 ‘개념미술가’ 캥즈 Arne Quinze가 설치한 <카미유 Camille>라는 작품이다. 제목을 “카미유”로 한 것은 아마도 브알디외 다리를 즐겨 그렸던 카미유 피사로에 대한 오마쥬일 것이다.
(피사로가 그림으로 남긴 다리는 직전의 주철 아치교다.) 제법 날렵하긴 하지만 역사적 맥락도 개성도 없는 강철다리 위에 세운 붉은 형광빛의 가로수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카미유 피사로의 물감인가? 루앙 포위로 죽은 시민들의 피인가? 혹 잔다르크를 태운 화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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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브알디외 다리
루앙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생겨난 도시다. 9세기에 노르만족이 점령했고 15세기 초반에는 영국이 지배했다. 1431년에 잔다르크가 처형된 곳이며,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1562년에는 신교도 위그노에게 빼앗겼던 도시다. 1870년 에는 보불전쟁으로 프러시아가 점령했던 곳이다.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또 한차례 점령했었다.
루앙처럼 역사적인 도시는 오랜 과거를 갖고 있다는 이유에서 다른 도시보다 다양한 문화적 유물들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13세기에 지어진 ‘루앙 대성당’은 루앙의 역사를 지켜보며 스카이라인을 지배해왔다.
수많은 프랑스의 성당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당이다. 뵈르 첨탑은 한때 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루앙 대성당보다 수세기 전에 시작된 ‘브알디외 다리’의 역사가 필자에게는 훨씬 더 흥미롭다.
“나무다리”로 시작된 이 다리의 역사는 지난 9세기 동안 “돌다리”에서 “배다리”로, 그리고 “철사다리”에서 “쇠다리”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다리의 역할도 주민들의 통행로와 삶의 공간에서 도시 방어를 위한 구조물로, 그리고 운송과 교역의 통로에서 제의의 공간으로, 산업혁명의 핏줄에서 자동차 도로로 끝없이 변환되고 진화되어 왔다. 이 “역사의 도시”에서 도시의 역사를 품어왔던 다리들은 그러나 센 강의 물줄기와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흘러가버렸다. 늘 새로운 형태로 거듭 태어났을 뿐 남아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진정한 역사는 새로운 형태 속에서 신선한 삶으로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복될 수가 없는 것이다.”
멈포드가 <역사 속의 도시 The City in History> [10]에서 한 말이다.
이제는 “강철 다리”로 남은 이 파란만장한 “역사 속의 다리”는 오늘도 센 강의 물줄기와 함께하고 있다.
1 J. Rewald, Camille Pissarro: Letters to His Son Lucien,New York, 1943, pp. 282-83 http://www.sothebys.com/en/auctions/ecatalogue/2013/impressionist-modern-art-evening-sale-n09035/lot.58.html에서 재인용 2 그림의 출처 http://onditmedievalpasmoyenageux.fr/gothique-neogothique-revival-medieval-a-rouen/ 3 레너드 코헨의 노래는 그가 1970년 발표한 앨범 <사랑과 증오의 노래들 Songs of Love and Hate>에 실려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지난 해의 남자 Last Year’s Man”라는 노래에도 잔다르크 이야기가 등장한다. 4 종교전쟁 중이던 1562년 9월 28일부터 10월 26일까지 약 한달간 계속된 루앙의 포위. 캐톨릭이 전투에서 승리해 위그노로부터 루앙을 탈환한다. 5 Braun and Hogenburg 가 1572년에 제작한 지도http://historic-cities.huji.ac.il/france/rouen/maps/braun_hogenberg_I_9_1.html 6 위베르 로베르가 1773년에 그린 이 그림은 루앙 주교궁 Le Palais Archi ´episcopal 에 있다. J. Tanguy & T. Boivin, “Rouen: Insolite et Secret,” Edition Des Falaises. pp.30-35 7 자크 탕기의 루앙 역사 사이트에서 옮김 http://www.rouen-histoire.com/Ponts/Pont_Bateaux.htm
8 LES PONTS DE ROUEN, UN PEU D'HISTOIRE pp.10 www.apra.asso.fr/APRA/Articles/30-pontsDeRouen.pdf 9 프랑스 현수교의 선구자인 마크 세겡과 그의 형제들은 교량회사를 차려 프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유럽 전역에 최소 65개 이상의 다리를 건설하고 운영했다. 10 루이스 멈포드 <역사 속의 도시> 김영기 옮김, 명보문화사, 1990.pp.378
글 :: 이종세 | Jong-Seh Lee | 한양대학교 건설환경공학과 교수, 우리 학회 공공인프라디자인 위원장
WRITER INTRODUCTION
이종세 교수는 미국 프린스톤대에서 구조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클락슨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종신교수를 취득했으며,1995년에 귀국한 이래 한양대학교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파동역학, 구조물의 다물리학적 상호작용, 지진공학 등이며, 공공시설물의 미학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 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공공인프라 디자인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The Story of Bridges LII 다리스토리 52
제64권 제7호 2016년 7월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Lacia ch'io pianga - 헨델 리날도 중 "날 울게 하소서"
Ensemble Pla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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