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스승의 모습이란..
그대의 마음과 동조하는 사람이 그대에게 맞는 스승이다.
스승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에게는 평온한, 인내, 용서, 등의 덕목이 있어야 하며,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이 눈만 가지고서도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어야 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평등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덕목을 갖춘 사람이 진정한 스승이지만 그대가 스승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자 한다면 우선 그대 자신의 진정한 모습부터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스승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스승의 진정한 모습을 지각하고자 한다면 우선 우주 전체를 스승의 모습으로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가장 먼저 그대 자신의 진정한 모습부터 알도록 하라.
-마하리쉬(요가수행자, 팝가수 비틀즈의 스승)글에서-
*조선팔도 승려들의 목숨을 건 저항..
통도사에 있는 또 하나의 비가 '팔도승려비'다. 이 비석의 유래도 살펴보자.
풍수에서는 어떤 터에 들어 오는 주맥主脈, 이것을 입수맥入首脈이라고 부른다. 그 터로 인 풋(In put)되어 들어오는 땅의 지기를 가리킨다. 입수맥은 그 터의 병목과 같아서 이 지점에서는 건물도 세우지 않고, 묘도 쓰지 않고, 심지어는 농사도 못 짓게 했다. 명당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건물이나 묘를 쓰면 기운이 손상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울 경복궁 터도 마찬가지다. 경복궁 위의 입수맥에 해당하는 자리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농사를 지어서도 안 된다. 쟁기나 호미로 땅을 일구면 지기(땅기운)가 훼손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입수맥은 비워놓는 것이 관례였다.
그렇다면 통도사의 입수맥은 어디인가. 통도사 대웅전으로 들어오는 입수맥은 바로 지산마을이었다. 통도사의 주맥이 내려오는 지점인 이곳은 통도사 대웅전 뒤로 1킬로미터 정도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곳의 관찰사가 자기 아버지 묘를 이 입수맥 자리인 지산마을 언덕에다 썼다.
자리가 탐나니까 수백 년 내려오던 사찰의 관례를 무시하고 밀어 붙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조선 사찰들이 의승군 활동으로 불타고 승려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힘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이런 틈을 타 관官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사찰 경내에까지 묘를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불교 사찰이 전국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들을 욕심낸 유교의 벼슬아치들이 승려들을 탄압하고 사찰 경내에까지 묘를 쓰는 일이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던 유생들의 폭력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저항다하다가 승려들이 죽기도 했다. 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쓰려고 있던 절을 허물었다는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렇듯 많은 절에서 대부분의 승려들이 유생 권력자들에게 당하고 피해를 보았다. 그렇지만 통도사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여기서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다.
통도사 입수맥 자리에 관찰사가 묘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전국의 승려들이 통도사에 모였다. 팔도승려 대책회의를 한것이다. '묘를 파내자'로 의견을 모았다. 이는 목슴을 건 행동이었다. 여차하면 잡혀서 죽을 수도 있는 거사였다. 전국 승려들이 마침내 지산마을에 있었던 관찰사 아버지의 묘를 파냈다.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자리에 돌비석을 하나 세웠다. 그 비석이 지금도 전해진다.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八道僧之禁地石'<팔도의 승려들이 금지한 땅의 비석> 이라는 뜻이다.
팔도 승려들이 여기에는 묘를 못 쓰게 했으니 그리 알라는 의미다. 일반 백성보다 힘이 없었던 시절의 조선 승려들이 전국에서 모여 관찰사라는 권력자와 유생들에게 대놓고 저항을 했던 표지다. 이 비석을 보면 다른 데서 보는 비석처럼 잘 다듬어진 모양이 아니다. 반듯하지가 않다. 울퉁불퉁한 자연석 그대로를 가져다가 글씨를 썼다. 탄압받는 자의 정서가 그대로 묻어 있는 비석이다. 아마도 조선시대 승려들이 관군에게 직접적으로 저항했던 매우 드문 자료가 아닌가 싶다.
여차하면 이런 승려들의 집단행위는 관군에게 진압당하는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비석을 쓰고 난 후에 승려들은 어찌되었을까. 걸망 하나 메고 전국 산속으로 흩어져버렸다. 관찰사 측에서도 체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비석이 세워졌던 시기는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면서 사찰에는 각종 부역들이 과중하게 부과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종이 만들어 바쳐라, 차 만들어 바쳐라, 메주 만들어 바쳐라 하고 닦달하던 시점에 만들어진 비석이기도 하다.
정부의 과중한 부역에 대한 승려들의 불만도 담겨 있지 않았나 싶다. -조용헌님의 글에서-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곳곳에 안타까운 훼불입니다
호법선신의 위력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조선 유생들의 룅포는 사찰과 승려를 무기력하도록 권위를 추락시키는 탄압정책이었습니다
부처님 진리 무량 광명토록 애쓴 선사님들 가호로 여법하게 불법은 전승되어 행복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부처님의 법이 서토를 거쳐오면서 땅의 지세를 살피는 풍속과 습합된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땅이 살아 있다는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요...무처님의 법에는 동서남북이 없건만...
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 때까지 불교는 순탄한 길을 걸을 때 스스로 비대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했는데...지금도 그 당시와 별반 다름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니....
나무아미타불
고려말에 사찰의 사전이 너무 비대해지고 불교계의 행사에 너무 많은 지출이 되다보니 자연히 신흥 유교세력게 의하여 지탄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정을 하지 못한 불교계의 자업자득의 결과인것 같습니다.
다시는 이러한불행한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조 500년동안 불교계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쓰라린 교훈으로 삼아야 할것입니다. 통도사 뒷문이 바로 지산리 버스 종점이 있는 곳입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