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매운맛, 임춘애의 헝그리 정신
1963년 국내 첫 탄생 라면
전국민과 함께하는 ‘환갑연’
‘오무라이스 잼잼’ 등의 음식 만화로 일가를 이룬 인기 만화가 조경규(49)씨가
한국 라면 60년의 굵직한 순간을 그림으로 맛깔나게 구현했다.
라면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현대사였다. /일러스트=조경규
“라면 먹고 갈래?”
이 말에 담긴 구애(求愛)의 속뜻을 모르면, 한국인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넷플릭스 보고 갈래?”(미국)보다 정겹고 “가려운데 좀 긁어줄래?”(홍콩)보다 간접적이며 “새벽에 같이 커피 마실래?”(일본)보다 푸근한 사랑의 대사. 양은 냄비에서 목구멍을 지나 비로소 한국인의 몸과 마음의 일부가 된 라면. 라면만큼 우리를 살 찌운 소울 푸드가 있으랴. 라면을 부숴서 과자로도 먹는 유일한 민족 아니던가.
라면의 생애 주기가 올해로 60갑자 한 바퀴를 돌았다. 라면 전문 사이트 ‘라면 완전 정복’에 따르면, 현재 국내 시판 중인 라면 종류만 555개. 이젠 한국을 넘어 세계까지 살 찌운다. 즉석 면류 수출액은 지난해 처음 1조원(1조1400억원)을 돌파했다. 작년에 해외로 뻗어나간 라면은 26만톤, 면발 길이만 약 1억㎞다. 지구를 2670바퀴나 감을 수 있다. 배고파서, 심심해서, 즐거워서, 먹고살기 위해서, 오늘도 라면을 끓인다. 먹는다. 다음 60갑자를 향하여.
◇라멘 아니고 ‘라면’입니다
국민소득 104달러 시절, 63년생 토끼띠 ‘삼양라면’이 태어났다. 서울 남대문시장에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사람들이 긴 줄을 늘어서던 때였다. 그 가난의 행렬에서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은 일본 출장길에 먹어본 인스턴트 라멘(Ramen)을 떠올렸다. 만들기 쉽고, 국물까지 있다! 가난한 나라의 기업인은 일본 묘조식품을 찾아가 매달리다시피 라면 기술을 배웠다. 정부를 설득해 5만 달러를 지원받아 1961년 묘조식품에서 라면 기계 두 대를 들여왔다. 1963년 9월 15일, 라면 생산이 시작됐다. 중량 100g, 가격은 10원이었다.
시대가 라면을 원했다. 흉작이 이어지며 해마다 쌀 300만~600만석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혼식·분식 장려를 추진했다. 1969년 서울에 ‘종합분식센터’가 들어섰고, 각 도마다 라면과 빵 공장을 1개씩 세우도록 했다. 생산이 늘자 소비도 늘었다. 그해 3월 16일 자 조선일보에서 확인되듯, 신문에서 ‘라면 판매 급증’이라는 구절이 나오기 시작한 게 이 무렵이다.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속을 확 풀어주는 한국인의 매운 맛, 라면의 기본 소양이다. 본지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20~60대 성인 5025명을 조사한 결과, 라면이 생각날 때는 ‘출출할 때’(54.87%) ‘술 먹고 나서’(20.44%) ‘스트레스 쌓일 때’(14.03%) 순이었다. 후루룩, 시뻘건 국물이 땀을 쫙 빼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라면은 일본 라멘처럼 닭 육수 기반의 흰 국물이었다. 라면의 진화를 불러온 결정적 순간은 삼양식품 관철동 사장실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비롯된다. 1966년 가을이었다.
“대통령이 찾으십니다.” 청와대였다. 곧 박정희 대통령이 전화를 이어받았다.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에 공헌하는 삼양라면을 치하한 뒤, 예상 밖의 제안을 내놓는다. “한국 사람들은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니 라면에 고춧가루를 좀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해장을 라면으로 하곤 하던 박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 이 일화는 삼양식품 사사(社史)에 기록돼 있다. 국가가 나서 라면의 본색을 찾은 것이다.
◇라면 먹고 금메달 땄다
그 시절 인생 역전 스토리에는 늘 라면이 함께했다. 한국 축구 레전드 차범근은 “대학 다닐 때만해도 라면 먹고 볼을 찼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 야구 레전드 박찬호는 라면 때문에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부는 운동장에서 큰 솥에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다”는 것이다. 배 곯던 체육인에게 라면은 은혜와 같은 에너지원이었다.
163㎝에 43㎏의 깡마른 17세 소녀, 1986년 한국 육상 사상 최초로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에 오른 임춘애 선수는 라면의 상징이다. 부친은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떴고, 모친은 성남 달동네에서 월 15만원으로 노모와 2남2녀를 건사했다. 임춘애는 달렸다. 이를 악물고 가장 먼저 골인했다. 우승 직후 “라면을 즐겨 먹는다”고 임춘애는 말했다. 이것이 ‘인생 드라마’에 과몰입한 어느 기자의 욕심으로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로 와전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춘애는 은퇴 후 용인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해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판매 1위, 딱 세 번 바뀌다
20년 넘게 부동의 1위를 달리던 삼양라면이지만, 1989년 ‘우지(牛脂) 파동’이 운명을 바꿨다. 공업용 소기름을 라면에 썼다는 이유로 관계자가 검찰에 구속된 것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까지 철저한 수사를 촉구할 정도의 대형 스캔들이었다. 삼양은 당시 유통 중이던 100억원어치의 라면을 수거·폐기해야 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13일 후, 식품위생검사 소위원회 결론은 “이상 없음”이었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것이었다. 1997년 대법원 판결도 무죄였으나, 삼양의 시장 점유율은 곤두박질친 뒤였다.
농심이 기회를 잡았다. ‘안성탕면’으로 1987년 판매 1위에 올라 1990년까지 왕좌를 지켰다. 한국인의 혀는 더 뜨거운 것을 원했으니, 그 결과가 1991년부터 1위를 놓치지 않은 ‘신(辛)라면’이다. 우주선에서 먹는 ‘우주 신라면’ 등 별별 파생 상품이 쏟아졌다. ‘신라면’은 농심 신춘호 사장이 지은 이름이다. 단순하고 명료하지만, 표지에 넣을 큼지막한 글자 ‘辛’이 골치였다. 당시 식품위생법은 “식품 상품명 표시는 한글로 해야 하고 외국어를 병기할 때에는 한글보다 크게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 농심은 비합리적인 규정이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결국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건의를 받아들여 1988년 법 조항을 개정했다. 라면이 법을 이긴 것이다.
◇라면이 쌀을 위협하다
대한민국 주식(主食)도 변화를 맞이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이후 라면 소비가 쌀 소비를 위협한 것이다. 1998년 우리나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99.8㎏을 기록, 처음 100㎏ 이하로 떨어졌다. 반면 그해 국내 라면 매출 실적은 1조966억원으로 전년 대비 16.5% 늘었다. 라면 가격은 변동이 없었으므로, 1인당 라면 소비도 16.5% 증가했다는 게 업계의 추정이다.
이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쌀 소비량은 56.7㎏이었다. 2030년(45.4㎏)에는 이보다 10㎏ 넘게 줄어들 것으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전망했다. 세계라면협회에 따르면 한국 1인당 라면 소비량은 73개, 전 세계 2위 규모다
첫댓글 수업시간에 삼양라면 스프타서 뿌셔먹던...
의좋은 형제가 나오면서 맛도 더 맛있어지고...
신기한 맛에 이끌려 지금까지 왔는데
그때 그 맛이 아닙니다
라면 봉지보다 작은
10원 짜리 '라면 땅' 과자를
맛있게 먹었던 시절이 회상됩니다.
밪지요...맞아요..."라면 땅" 많이 먹었지요...ㅎㅎㅎㅎㅎ!
어휴~ 라면..하하하
삼양라면이 63년 토끼띠라면 저하고 띠동갑이네요..
그래서 저도 60년대부터 라면을 좋아했는가 봅니다..ㅎㅎ
고등학교 때 동기생들끼리 모여서 라면 먹던 기억은 잊지 못하지요..
지금은 아무리 비싼 고급 라면이라도..그때 삼양라면 맛을 못 따라옵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라면을 빼놓고 무슨 말을 하리오..
지금도 가끔씩 즐기지만..정말 괜찮은 먹거리입니다..*)*
라면의 역사 "짱"입니다. 라면에 막걸리 한 잔 하고 자야 겠습니다. 내일 붓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