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곰실 공소 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듯이, 춘천 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경우 역시 천부적인 종교심성을 지닌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인 청년의 이름은 엄주언 말딩이었다. 엄주언(嚴柱彦)말딩은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 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우연히「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이태 후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거기서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 영세한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는 나머지 가족이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쫒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너부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한다. 엄주언 일가는 이처럼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나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한다. 마침내 주경야독 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른다. 윗너부랭이에서 여러 해 땀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너부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춘천·화천·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50명 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된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외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 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면서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3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숙한다. 곰실 본당의 춘천진출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엄회장이 풍수원과 서울 명동을 수년간 거듭하면서 상주사제 파견을 거듭 간청한 결과 마침내 곰실이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1920년 9월 초대 김유용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활기 넘치는 곰실 공동체는 춘천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회와 계조직,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품품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고개 현 죽림동 성당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그후 4대의 방인 사제가 1938년까지 주임을 맡다가 같은 해에 강원도 지역의 사목 책임이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고, 곧 이어 원(Larribeau)주교가 맡고 있던 서울(경성 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1939년 4월 25일자로 분할되면서 새 지목구의 명의상 서리로는 당시 광주 지목구장 오원 맥폴린(Owen McPolin)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러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구인환(Quinlan)토마스 신부가 춘천 감목대리로 임명되면서 제6대 춘천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얼마 후 약사리 고개 언덕에 있는 어느 있의 도토리 밭을 사서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로부터 골롬반회가 춘천 교구를 1994년에 장익 요한 주교가 부임하기까지 모두 55년간을 사목하면서 초대 구 토마스 주교와 2대 박(Stewart)토마스 주교가 교구를 사목하였고 도합 7명의 외국인과 12명의 본방인 주임 사제를 지냈다. 이렇게 자립한 춘천 교구가 1999년 4월 25일에 60주년을 맞았다.
엄주언 말딩(1872-1955)회장과 말딩회관 건립 죽림동 본당이 창설되고 자리잡게 되기까지에는 참으로 신앙심이 돈독하고 성실과 열정을 지닌 엄주언 말딩(1872-1955)회장님의 숭고한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춘천지역에 본당이 생기기까지 공로자로서 이지역 전교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시다. 그는 생활이 곧 신앙이었던 모범적 사도로서 칭송되어야 마땅한 분이시었다. 그는 1872년 12월 10일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심성이 착하여 동리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고, 한문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그가 열아홉 살이 되던 1891년 그는 자기집 건너방에 세들어 사는 채장수의 권유로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는다. 그는 "세상 부모도 공경 못하면 불효의 죄를 짓는 것인데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지으신 부모보다 더 높으신 대부모 천주님을 모르고 미신을 섬기며 살아왔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하는 깨달음의 탄식을 하면서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그는 곧 한국 천주교 발생의 요람인 광주 천진암을 방문하고 돌아와 신앙 생활을 위해 그곳으로 이사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맏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극구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반대하던 가운데 두형이 우연이 죽게 되자 1893년 맏형과 둘이서 천진암에 가서 한달을 지냈다. 추수를 위해 집으로 돌아 온 이들은 추수를 마치고 그 해 늦가을에 가족(7인)을 모두 데리고 다시 천진암으로 떠났다. 움막에 기거하며 어려운 생가운데 이듬해에 형과 자신이 불란서인 목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1896년에는 온 가족이 영세를 받았다. 광주생활 중 자녀가 1명 더 출생하여 모두 8명이 되었다. (엄주언은 20세에 14세인 윤씨와 결혼하였다.) 3년간의 광주생활을 마치고 그들은 곧 전교의 사명을 띠고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처음 그들은 집안이 살고 있는 서면 월송리로 갔으니 천주학쟁이라 냉대를 해 동면 장학리로 갔으나 역시 정착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외가 친천인 윤가택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 너부랭이 폐가를 사서 이주하게 되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낮선 곳에 맨주먹으로 돌아온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쌀 1가마와 콩 2가마를 빌려 떡갈나무 잎을 따 죽을 쑤어 연명하며 화전을 일구었다. (그 당시 그곳 떡갈은 엄씨 일가가 씨를 말린다는 말이 이었다.) 처음에는 배타적인 이웃으로부터 놀림과 수모를 당하며 살았다. 그는 약주 한잔 안하는 근검한 생활을 했으며 밤이면 글을 아는 사람을 모아 교리와 성서를 가르쳤다. 원래 학문의 바탕이 있는 데다 신앙생활이 몸에 밴 그를 마주 대하면서 차차 사람들은 존경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 큰일 할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늘어나게 되었다. 윗 너부랭이에서 4, 5년간 열심히 노력한 결과 아래 너부랭이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땅을 늘려 재산도 모으게 되었다. 심는 것마다 잘 돼 당시 조이삭은 어른 허리를 동일 정도였다 한다. 신자가 늘어감에 따라 집과 함께 강당을 지어 공소예절을 갖춰나갔다. 풍수원 정규하 신부님을 모셔 일년에 한번씩 40-50명씩 영세를 하였다. 정신부는 말을 타고 다녔는데 마부를 통해 순방날자를 미리 알려오면 그 날자에 신자들이 홍천으로 가서 신부님을 영접하고 짐을 옮겨왔다. 일년에 몇회씩 이루어진 순방은 홍천 물구비 공소를 시작으로 춘천, 화천, 양구 순으로 이어 졌다 한다. 그 당시 장티푸스가 유행하고 마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는 그 환자들 틈에서 열심히 장례일손을 도우며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신을 혼자 어깨에 메고 뒷산에 묻어주곤했다. 그러나 그 역시 전염되어 사경을 헤메다 살아나기도 하였다. 그는 신앙생활에 엄격하여 마을에서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권장하였으며 금주, 금연을 권했고 규율을 어길 때는 불량자 취체령을 발동하여 양대인(당시의 외국신부에 대한 지칭) 앞에서 벌을 받게 하고 50전의 벌금을 내게 하였으며 말 꿇임(사각 됫박 속에 무릎을 꿇게함)이라는 벌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성서를 읽을 때나 교리를 논할 때에는 식사들을 잊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교우들이 증가함에 따라 1920년에는 공소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의 마을 직각(현재의 구장)인 양참봉과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직접 성당짓는 일을 도맡다시피 했으며, 사제관도 짓고, 우물도 팠다. 그들은 회장을 세사람두어 제1구역인 윗 너부랭이는 양 마두 회장, 제2구역인 중간너부랭이는 양 말구 회장, 제3구역인 신촌리 일대는 최 도마 회장이 맡았다. 초창기의 주일 참례 때는 30-40명의 교우가 모였으며 주일과 대재(단식재), 소재(금육재)를 아주 철저히 지켰다. 공소가 건립될 즈음에는 250-300명의 신자로 늘어났다. 1920년 9월 초대 신부님을 모시기까지 그는 풍수원 본당과 서울의 명동본당을 여러차례 왕래하였으며 그러기를 수년,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신부님을 모신 후에는 신앙의 뿌리도 더욱 든든히 내려지고 교회 모습도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김유용 신부와 뜻을 같이 해 본당의 시내 진출을 도모하였다. 시내 진출의 바탕이 된 것은 애련회(사랑을 훈련시키는 회)였다. 15세 이상된 신자는 모두 이 회에 가입했으며 회원은 종신회원으로 1인당 50전씩을 거두었고, 계를 조직하여 새 성당 건축기금 마련에 노력했다. 또한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당시 한컬레당 5전)로 기금을 마련하여 애련회소유 농토를 늘리고 이에서 나온 쌀을 장리로 주기도 하여 (한 가마당 세말)기금을 늘려 나갔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을 몇 년 기울인 끝에 이들은 지금의 죽림동 본당 아래 골롬반 병원터에 있는 김영식의 집(당시 약사리 41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성당으로 쓰게된다. 당시의 땅값은 평당 30전으었고, 애련회의 기금외에 엄주언은 자신의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새 성당터를 사는대 보탰다. 현재의 수녀원 사택, 아랫마당, 병원자리는 그의 땅이었다고 하며, 현재의 본당자리는 당시 도토리 밭으로 이씨라는 사람의 소유였으며 구인란 신부가 땅을 샀다한다. 이밖에도 엄주언은 현재의 동내 초등학교(고은리)부지 1000여평을 기증한 바 있으며 집에 데리고 있던 일꾼을 11명이나 영세시켜 장가들여줬다. 죽림동으로 이전하면서 신자수는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가 뿌린 한 알의 밀알이 큰 결실을 거둔 것이다. 죽림동 이전 후에도 그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고, 몸소 실행하는 종교인으로서의 귀감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시키고, 전교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일가만도 5대째 이어지면서 외손까지 합하면 80여명의 신앙가족을 이루고 있다. 천주 앞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올곧은 신앙을 보여 온 엄주언은 1955년 4월 30일 83세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본당에서는 춘천지역 복음의 못자리인 이곳 약사리 언덕에 엄주언(말딩) 회장을 기념하는 말딩회관을 건립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회장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말딩회관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말딩회관은 장차 교구평신도 회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상되었으나 공사비 조달 관계로 1층은 가톨릭 신협에 임대할 것을 미리 생각했으며 2, 3층은 사무실로서 임대하기로 결정되었다. 4층은 본당 회의실로 사용하고 4층 일부와 5층은 식복사방과 손님신부방 사제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착공준비에 들어가 주교님이 지정한 "건축사무소 원 광장"에서 파견된 설계실장(채욱진)을 1996년 10월 17일에 만나서 말딩회관 건립설계에 대한 설명회가 있었다. 사실은 대우 경남 아파트 건설회사와 대지문제 해결과 사제관 성당 균열 피해 보상문제가 해결되고 주교좌 성당의 앞으로 건물 배치 구상에 따라 말딩회관 건축과 성당주변 토목 계획은 1996년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다. 새로 부임한 (96. 8. 29) 제22대 주임 이정행신부가 주도하여 건축계획이 현실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교구장님의 뜻을 받들어 말딩회관 건축설계의뢰(96. 9)와 건축비 모금 운동을 시작하여 1차 신립을 시작하였다. 말딩회관 건축설계도면은 96년 12월 완료되어 1997년 4월 15일에 삼양건설산업주식회사(대표:이진기 안드레아) 공사계약을 체결하였다. 착공하기까지 죽림동 교우들의 건축비 신립은 계속되었으며 드디어 1997년 7월에 작업이 시작되어 8월 13일 오전 11시 30분에 "말딩회관 및 사제관 기공식"을 기관장과 주교님을 모시고 거행하였다. 처음 계약시에는 총공사비 22억4천9백5십만원으로 계약되었으나, 설계변경 추가공사비로 3억8천만원이 추가되었다.(97. 10. 25), 또한 처음에는 계획이 없었으나 토목 공사 5억8백5십만5천7124원이 더 추가되었으며, 설계,감리비로 1억2천8백6만1천600원이 소요된 공사이다. 이리하여 총 공사비만 3십2억6천6백6만7천314원이 든 셈이며, 추가 부대시설비만 2억 이상이 또한 소요되었다. 함께 주교님의 적극적인 관심과 도우심으로 성당 수리에 돌입하여 가톨릭미술가협회의 저명한 미술가들의 협조와 주변 본당 교우들과 죽림동 본당 교우들의 헌신적인 협조로 주교좌성당이 40여년만에 새롭게 단장되어 중창식을 갖게되므로 한국천주교회 성당 건물중에서도 전례적면이나 예술적 면에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은 주교좌 성당으로서 중창식을(98. 9. 14) 갖게 되었다. 아름답고 전례적 의미로 새롭게 성당이 태어나기까지는 장익주교님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저명한 교우 조각가 미술가들의 협조와 봉사정신으로 이루어졌다. 성당에 모셔진 성물과 조각품, 스테인글라스, 전례용 의자와 신자장궤틀 고해실 문 등등 전부 의미있고 정성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임을 부인할 수 없는 귀중품이다. 말딩회관 및 서제관건립 성당 중창식 그리고 주변 환경 정리와 주교좌 성당으로서 면모를 고루 갖추기 위해서 1997. 9 - 2000년도까지 잔디밭 가꾸기, 나무심기등에 죽림동 교우들의 땀이 베어있음을 말하고 싶고 성당주변 정리정돈과 성당 관리 말딩회관 관리는 조금이라도 소흘히 할 수 업슨 것이므로 항상 교우들에게 관리 정신과 주교좌 성당을 잘 보호 보전 하는데 긍지를 갖도록 권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관심을 갖어야 할 것이다. 교구설립 60주년을 맞이하여, 감사제를 지내면서 1999년 4월 24일 말딩회관 및 사제관 축복식을 주교님 주례를 거행하고 60주년 감사제를 말딩회관에서 개최하였는데 음악제, 감사미사, 전시회 등으로 25일까지 거행하였으며, 25일 60주년 감사미사는 김수환 추기경님 주례로 죽림동 성당에서 오후3시에 거행되었다. 미사후 60주년 기념 리셉션은 말딩회관 3층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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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도드립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