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세상에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다. 부자든 가난하든, 지위가 높든 낮든, 젊었든 늙었든 고통과 재앙이 닥쳐온다.
고통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 말씀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다.
먼저 딸이 죽게 된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기도와 교육과 집회를 하던 중요한 장소로, 신성시하던 모세의 율법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에는 회당이 480여 곳이 있었다고 한다. 회당장은 회당의 책임자로 존경받는 원로였다.
복음에 등장하는 회당장 야이로도 회당에서 유대교인들을 가르치며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던 원로였을 것이다.
그런데 딸이 죽어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전에는 타인의 고통이나 죽음을 위로했는데 이제는 자기에게 재난이 벌어진 상황이다.
아마 회당장은 딸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유대교 지도자들이 떠돌이 예언자라고 무시하던 예수님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한다.
남들 앞에서 근엄하던 종교 지도자였지만, 딸의 고통 앞에서는 체면을 벗어던지고,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겸손하게 간청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길을 가는 도중에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이르신다.
믿음이 죽음을 넘어서게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믿음을 지니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보여준다.
죽은 소녀에게 예수님은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 즉 ‘소녀야, 일어나라!’하고 이르시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고 한다.
믿음은 죽음마저 넘어서게 한다. 믿지 못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성경에서는
"목이 뻣뻣한"(탈출 32, 9; 33,3; 33,5; 신명 9, 6; 9,13; 집회 16,1 참조) 이들이라고 부른다.
목이 뻣뻣한 원인은 대개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이나 체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회당장처럼 땅바닥에 자신을 던지지 못한다.
체면이나 자만심에 매여 주님 앞에 엎드리지 못하는 목이 뻣뻣한 믿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 사건과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부인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하혈은 드러내기 부끄러운 부인병으로, 레위기(15, 19-30)에 따르면 하혈 병 환자는
나환자처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종교 예식은 물론 가족과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또한 성경에서 피는 생명력의 상징이기에 하혈은 생명력을 흘려보내는 위험한 상황을 의미한다.
완전 수를 의미하는 열두 해 동안 하혈을 했다는 표현은 기력을 다 써서 탈진한 상태를 말한다.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라는
복음 말씀이 이를 설명한다.
이 사건은 과거가 아닌 지금 우리가 겪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든 잘 살기 위해 노력한다.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자신들의 능력을 모두 소모한다.
그러나 탈진하도록 살아온 삶이 보람은 없고, 고생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병들고 노쇠한 겉껍질만 남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열심히 노력한 내 삶을 직장에서 몰라주고, 정성 들여 키운 자녀들도 부모의 헌신을 알지 못하고,
백년해로하겠다던 남편이나 아내도 문득 서로 낯설어질 때, 몸과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린다.
마치 오랫동안 하혈하듯, 탈진하고 소외된 이 처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하혈하던 부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믿었던 것이다"라고 복음은 전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보려는 시도가 모두 수포가 되자,
부인은 자신의 힘이 아닌 예수님께 모두를 맡기기로 한 것이다.
몰래 뒤에서 옷자락만 만지더라도 알아보시고, 탈진한 자신을 받아주시리라는 믿음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르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믿음의 실행이 인생을 바꾼다.
믿음이 하혈 병을 고치듯, 탈진한 삶에서 일어나게 한다.
이 상황에서 어찌하여 예수님은 오랫동안 하혈하던 부인, 즉 나이 든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셨을까?
하느님 눈길로 여인을 보셨기 때문이리라.
세상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불행 속에 지쳐버린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느님 눈에는 우리가, 특히 지친 이들 모두가 당신의 소중한 딸이고 아들이다.
오늘 내 삶이 정말 힘들어 탈진하였다면,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아무 효과 없이 기력은 소진되고 병든 몸만 남았다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일이다. 그냥 만져서는 소용이 없다.
자기 힘으로 살려던 계획을 내려놓고, 열등감이나 자만심도 깨끗이 비운 다음 땅에 엎드리듯 예수님께 나아가자.
저분이야말로 나를 알아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주시고 내 아픔을 고쳐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서 옷자락이라도 잡아야 한다.
그때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내 딸아, 내 아들아." 하고 우리를 부르시며
다시 일어나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첫 독서의 지혜서 말씀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떤 때는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듯한 재앙이 닥치고,
어떤 때는 우리 자신이 오랫동안 하혈하듯 지쳐가지만,
하느님에게 우리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회당장처럼 높은 지위에 있든, 하혈하는 여인처럼 미천한 상태이든 우리 본성에는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있다.
오늘날 회당장의 딸에게 하신 "일어나라!"는 말씀,
하혈하는 부인에게 하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주님의 옷자락을 어떻게 만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이 미사 중에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주신다.
진실한 믿음과 확실한 희망을 품고 말씀을 듣고 주님을 받아 모시면,
"일어나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이다.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딸로 대하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선언이 들릴 것이다.
참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모실 때
우리는 창조 때에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본성을 되찾고, 하느님의 딸, 아들로서 존엄성을 회복할 것이다.
[출처] 연중 제13주일 나해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작성자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