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에 세워진 백선행 흉상
* 평양 대동강변에 위치한 3층건물 "백선행기념관"
* 백선행 장례식관련 당시 신문기사, 아래는 백선행 기념비
★ 제2화 - 충남예산의 임 과부이야기 ...★
또 충남 예산에도 꽃다운 처녀가 있었지요
이 꽃다운 처녀가 열일곱살에 연지곤지 찍고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지 2년만에 서방이 갑자기 죽어 채 피지도 못한 열아홉살 나이에 과부가 되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볼때마다
" 불쌍해서 어쩌노 ~ 나이가 아깝네!! " 하면서 위로해 주었지만
열아홉살 과부는 죽은 서방이 너무도 원망스럽고 서러워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마음을 다잡아 먹고 거울 앞에 앉아
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잘라 버렸어요
그러면서 젊은 과부가 마을 어르신들로 부터 듣는 동정의 말들이
너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헤처나갈 방도를 곰곰히 생각했지요
서방도 없고 자식도 없는 시댁에 더 이상 머므를수도 없었지만
무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어요
친정으로 돌아간들 뾰족한 수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래서 무조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지요
낯설고 물설은 서울 생활이 그리 녹녹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치만 이를 악물고 닥치는대로 일을 했지요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남의 집 빨래도 하며
차츰 차츰 서을 물정에 눈을 떴을때
지인의 소개로 어느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가게 되었지요
그녀는 그 집에서 밤낮으로 죽기살기로 일을 했어요
그러자 맘씨 좋은 주인 어르신께 인정을 받았지요
어느날 주인 어르신께서 나이도 젊은데 무언가 하고싶은 일이 있으면 말하라 해서
어렵사리 조심스럽게 두가지를 말씀 드렸어요
하나는 "야간 학교에라도 가서 늦었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고
또 하나는 "주일날이면 꼭 교회에 갈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맘씨 좋은 주인 어르신께서
정말 기특한 생각을 했다며 젊은 과부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지요
그래서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입학을 했는데
주인어른의 후광도 있었지만 일하고 잠자는 시간에 틈틈히 보아온
신학문이 큰 도움이 되었지요
또 주일날에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갈수 있었어요
그녀는 주인 어른의 큰 은혜에 감흡하여
낮에는 집에서 가정부일을 두배로 더 열심히 일했고
밤에는 학교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보니 최우수 학생이 되었고 장학생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실력과 성품을 인정받아 그때는 일제 강점기때라
학교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주었지요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가게된 젊은과부는 너무도 기뻤고 감사했어요
주인 어른께도 감사했고 학교에도 감사했어요
도쿄여자 사범대에 들어가 밤낮없이 공부에 전념하여
영광된 졸업장을 들고 귀국 했으며 그때 젊은과부 나이가 30세 였지요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포구에 내린 젊은과부는 몰라보게 달라 졌어요
예산땅 젊은 과부가 영화배우 윤심덕처럼 멋쟁이가 되어 돌아 왔지요
그는 서울에 돌아와 모교인 숙명여고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치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하며 후배들을 가르첬어요
그러자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지요
교수로 임용된지 6년만에 그는 교장이 되었어요
전공은 우리나라 한복과 양장을 가르치는 의상 재봉이었지요
해방과 함께 숙명여자 전문학교가 대학교로 바뀌면서
열아홉살 젊은 과부가 초대 총장이 되었어요
그가 바로 숙명여자대학 임숙재 초대총장 이지요
그분은 숙명여대를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19세 젊은 과부가 총장이 되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운명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사람이었지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성공하기를 원하나요? 그럼 자신의 환경을 다스리세요!!"라고 늘 가르쳤다 하네요
임숙재(任淑宰 1891년7월 22일~1961년6월 8일)는
숙명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으며 본관은 풍천이지요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으로 1913년 숙명고등여학교를 졸업했으며
1917년에는 일본으로 유학,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귀국했어요
이후 모교인 숙명여고 교사, 대구 경북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지요
감리교 신자인 그는 숙명여전 교수를 지내며
기독교 조선감리교회의 부인연합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지요
광복후 1945년 11월 숙명여전 교장이 되었고
1955년 이 학교가 숙명여자대학교로 종합대학 인가를 받자 그해 초대총장에 취임했어요
그뒤 1958년 숙명여대 명예 총장이 되었다가
1961년 6월 8일에 향년 71세를 일기로 작고 하였지요
어때요?
두 과부의 인생역전이 드라마틱 하지 않나요?
평양의 백과부는 많은 돈을 벌어 사회에 환원 했으며
예산에 김과부는 열심히 공부하여 후학을 양성 했어요
그래서 이들 과부를 보고 "아름다운 과부"라 한다 하네요
▲ 임숙재 총장사진
▲ 초창기 숙명여자 대학교 (제1캠퍼스)
▲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숙대초대총장 임숙재(任淑宰) 묘 전경
첫댓글 ^^ 두분의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이야기를 다 읽고나니 두 과부라는 지칭 보다는 두 여성분이 좋았을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아침에 돈 아끼다 똥된다..이런 글이 있던데 이분들이 실천 하신분들 이군요^^
네,,그런 생각도 드네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좋은 결과를 성취한 두 여성이야기. ㅎ
안녕하세요
읽느라 한참 걸렸네요 ㅋ
조아님, 좋은 글, 사진 매번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 .
잘 읽으셨다니 제가 고맙습니다.
좌절하지않고 목적을 세우고 살았던 삶이 고난속에서 아름답게 꽃을 피워냈군요.
또 엉뚱하게도 이 두분이 남편이 곁에 일평생 살아계셨다면 어떠했을까하는 의문도 갑자기 드네요.ㅎ
조아님 좋은글 좋아요.ㅋㅋ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갔다면 ... 아마도 필부필부의 삶이겠지요.
훌륭한 여성이네요. 이런분들은 존경해야겠지요. 정치인들중에도 이런 분들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백년후에 ? ㅋㅋㅋ
김제동의 토크처럼 정치가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잘 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아무래도 백년하청 이겠지요.
@지성조아 그쵸..사기기질이 없으면 정치모태요. ㅎㅎㅎ
좋은 글을 보니 힘이 샘솟습니다. 요즘 정체기가 오나 했는데... 뭔가 도모해 볼 일이 있나 생각해 봐야 겠어요. ㅎㅎ
요사이는 틈새사업이 유망한거 같습니다. 특화된 사업...ㅎㅎ
좋은 아이템 발굴하시기 바랍니다.
'벌 때는 거지처럼 쓸 때는 정승처럼'을 몸소 실천하신 분들 존경합니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돈을 모으고 써야 아름다워요. 홀로 사는 여인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셨어요
나비누님. 안녕하세요
감상적인 표현입니다.
*나비누님, 항상건강하십시요*~..
내게 처해진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극복하고자하니 결국 복을 받았다는...
중요한 건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에 방점 입니다.
모르던 이야기를 배웠네요. 그런데 기억력이 얼마나 갈지... 지성조아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넵...그저 가볍게 읽어주시면 되죠..손주 손녀 승원이 승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죠?
@지성조아 네. 승원이, 승아 잘 크고 있습니다. 제일 큰 즐거움입니다.
감동적인 이야기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오늘도 날씨가 참 좋네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진정 마음이
따스한 분들 이십니다....!!!
그렇지요. 특히 백선행이란 분이...
두 분 모두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타산지석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