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지은 서양식 근대 건축물을 따라 걸으면 360년 전부터 우리나라 한약재 시장의 중심인 약령시장에 닿는다. 여기서부터 지하철역 두 정거장 거리에 펼쳐진 대구 봉리단길까지 걷는다면 대구의 신구를 모두 만난 것이다.
김해 회현동(옛 봉황동)에 봉리단길이 있다면 대구에도 봉리단길이 있다. 대구 대봉동에 이태원 경리단길을 벤치마킹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봉리단길은 대구 대백프라자 뒤편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을 지나 대봉성당, 대봉도서관, 공무원연금공단 대구지부까지 연결된다. 골목 여행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구 근대골목길과도 가까워서 스케줄을 잘 짜면 대구의 신과 구를 하루 만에 패스할 수 있다. 대구는 2016년 SRT의 개통과 신세계백화점 대구점 오픈으로 한층 친밀한 도시가 되었다. 최근엔 대구 음식을 맛보기 위해 일부러 찾는 이도 늘어 덩달아 대구 골목 탐방기가 활기를 띠고 있다. 누군가는 대구를 고지식한 도시라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건 역사와 문화가 켜켜이 쌓이고 중첩된 골목을 따라 이 내륙 도시를 걷다 보면 여행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상화, 현진건 등의 유수한 문인을 배출한 문학 도시이자 박태준, 현제명, 김광석 등의 음악가는 물론 이인성 같은 당대 최고의 미술가를 배출한 예술 도시가 바로 대구다. 우리가 이미 즐기고 있는 교촌치킨이나 서가앤쿡, 토끼정, 모나미카레 같은 맛집의 원조가 대구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음식에 대한 믿음도 생긴다. 가보지 않았어도 익숙한 곳,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찾아야 하는 도시가 바로 대구인 것. 따뜻해진 계절, 그곳으로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는 법
서울에서 출발하면 동대구역까지 KTX, SRT 모두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된다.
부산에서는 50분이 채 안 걸린다. 가까운 데 비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많은 곳이 대구다.
서울 출발 : 서울역(KTX) 혹은 수서역(SRT) 승차 → 동대구역 하차
부산 출발 : 부산역(KTX, SRT) 승차 → 동대구역 하차
대구 근대골목길 1호선 동대구역 승차 → 중앙로역 하차(4번 출구) 후 약 400m 도보 이동
대구 봉리단길 401번 버스 승차(동대구역 건너편) → 대봉도서관 건너 정류장 하차(지하철역은 대봉교역 1번 출구)
대구 근대골목길
진골목을 시작으로 약전거리와 청라언덕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자리한 역사 공간들.
3·1운동 계단
대구 시민이라면 가장 뿌듯해할 장소가 아닐까. 청라언덕으로 이어지는 90개의 계단 길은 대구의 만세운동이 시작된 의미 있는 곳이다. 당시에는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있어 독립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일본 순사의 감시를 피해 오가던 길이다. 숲이 없는 지금도 계단 초입에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는 친절한 안내판이 부착돼 있을 만큼 아름다운 전경을 자랑한다. 계단 길 옆으로 펄럭이는 태극기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은 당시 분위기를 전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매년 ‘대구근대路야행’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행사에서 뉴미디어 영상 쇼가 펼쳐지기도 하니, 낮에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다면 방문 전 미리 일정을 확인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
주소 대구시 중구 동산동 3·1운동 계단
청라언덕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를 거슬러 온 듯한 곳. 우거진 나무와 제일교회의 높은 첨탑, 1986년에 건설된 오래된 동산맨션과 옛 선교사들의 고택을 복원한 붉은 벽돌의 근대식 건물들(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 스윗즈 주택)은 도심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근대 역사를 느끼게 한다. ‘대구 최초의 사과나무가 있는 곳’, ‘대구 최초로 제왕절개 수술을 성공시킨 동산병원의 터’라는 설명 없이도 청라언덕은 아름다운 풍광만으로 충분히 빛을 발한다. 대구의 몽마르트르라 불리는 것도, 박태준 작곡가의 가곡 ‘동무 생각’의 배경이 된 것도 모두 같은 이유에서다. 아름다우니까! 대구의 옛 중심지로 언덕 위에서 대구 시내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것도 좋다. 힐링이 필요할 때마다 청라언덕을 찾는다는 대구 시민들이 부러울 정도.
주소 대구시 중구 달구벌대로 2029
이상화 고택 / 서상돈 고택
대구는 이상화, 이육사, 현진건, 이장희 등의 문인을 배출한 문학 도시다. 대구 근대골목길에는 항일 문학가 이상화 시인의 고택이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고택으로 향하는 골목 벽에 새겨진 시구다. 이상화 시인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마지막 작품을 썼다. 바로 옆으로는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작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두 고택은 한때 도로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역사의식이 투철한 대구 시민들의 노력으로 위기를 넘기고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덕분에 높은 고층 아파트 단지 사이로 아늑하게 자리한 고택이 도심의 아이러니한 멋을 더한다.
주소 대구시 중구 서성로 6-1 문의 053-256-3762
계산성당
우뚝 솟은 쌍탑과 세련된 아치형 내부 구조는 이곳이 우리나라 3대 성당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 100년간 울려 퍼졌을 따뜻한 종소리가 마음을 다독인다. 성당 바로 옆에는 대구 시민의 역사의식을 대변하듯 100년이란 세월을 꿋꿋이 견뎌온 감나무가 있다. 대구 출신의 천재 화가 이인성의 작품 ‘계산동 성당’에 등장하는 나무다. 이상화 시인의 ‘나의 침실로’라는 작품도 계산성당에서 영감받아 지은 시다. 아름다운 외관 덕분에 예술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유명인의 결혼식이 진행되기도 했다. 계산성당의 아름다움은 직접 감상해야 진가를 알 수 있다. 감나무가 새싹을 내밀면 봄이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이인성 나무’가 새싹을 돋운 바로 지금이 계산성당의 진가를 확인할 때다.
주소 대구시 중구 서성로 10 문의 053-254-2300
대아약업사 이철로 대표
대형 백화점이 들어오면서 임대료가 치솟아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인들 덕분에 약전시장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과거 서울의 경동시장보다 큰 한약재 시장이었다. 40년 넘게 약업사를 운영 중인 대아약업사의 이철로 대표는 살아있는 역사로 향만 맡고도 한약재 종류를 단번에 알아맞히는 베테랑. “오래전 약재 썰기의 기인으로 TV에 출연한 적도 있어요. 여기에서 판매하는 당귀, 오미자, 산수유 등 200여 가지의 재료가 다 제 손을 거쳤으니 가능한 일이죠.”
이철로 대표는 한의사도 의사도 아니지만 사람들의 건강을 지킨다는 마음이 들 때 뿌듯하다고 말한다. 일본, 중국을 비롯해서 유럽에서 오는 관광객도 늘었다. “오히려 한국 사람보다 호기심이 더 많아요. 얼마 전에는 야관문을 찾는 유럽인도 있었죠(웃음).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약재는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찾더라고요. 3대째 이곳을 찾는 손님도 있어요. 종종 여든을 넘긴 할아버지와 대학생 손자가 함께 방문하죠.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어려워도 버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약전거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야말로 이곳을 지켜내는 힘이다.
주소 대구시 중구 남성로 34 문의 053-253-0971
염매시장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현재 대구시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지역이다. 인근에 대형 백화점과 쇼핑센터 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발길은 염매시장으로 향한다. 전통시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과 넉넉한 인심 덕분일 것이다. 이름마저도 염가로 판매한다는 의미로 붙여졌으니까.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떡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장소여서 더욱 의미 깊다. 혼수와 폐백용 떡집이 유난히 많이 보이는 이유다. 오래전 튀밥을 사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적도 있다. 튀밥도 60년대 염매시장에서 시작됐다. 지금도 여전히 시장에는 정겨운 뻥튀기 기계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뿐만 아니다. 대구의 대표 맛집인 ‘빵장수단팥빵’부터 코끝에 닿는 숯불 향이 일품인 ‘꼬지짱’의 닭꼬치까지 모두 염매시장에서 맛볼 수 있는 유명 먹거리다.
주소 대구시 중구 종로 11
대구 봉리단길
대구시 중구 대봉동 일대의 이른바 핫한 봉리단길에서 만난 문화 예술 공간들.
리안갤러리
까다롭기로 유명한 아트바젤 홍콩 갤러리 부스에 이름을 올리며 국내 톱10 갤러리로 자리매김한 리안갤러리는 대구 현대미술을 활성화한 입지적인 곳이다. 여기에는 안혜령 대표의 노고가 있었다. 2007년 앤디 워홀 추모 20주년 기념전을 비롯해 알렉스 카츠의 국내 첫 전시도 그녀가 기획했다. 그 밖에도 데이미언 허스트, 짐 다인 등 해외 유명 작가는 물론 권부문, 이교준 등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국내 작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공간 한쪽에 전시된 백남준 작가의 작품 ‘볼타(Volta)’가 안혜령 대표의 안목을 증명하듯 방문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방 갤러리로는 흔치 않게 서울 서촌에 분점이 있다. 리안갤러리는 국내외 유망 작가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데 멈추지 않고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현대미술 애호가라면 리안갤러리의 행보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소 대구시 중구 이천로 188-1 문의 053-424-2203
대봉도서관
만세운동과 항일 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옛 경북중고등학교 터에 자리 잡고 30년 동안 봉리단길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공간이다. 대구인들은 봉리단길 하면 대봉도서관을 먼저 떠올린다. 광복 1년 전 세워진 일제강점기 건물과 70년대 지어진 체육관이 여전히 남아 있어 더 의미가 깊은 곳. 학교 건물을 그대로 사용한 덕분에 익숙한 페인트 색감과 교실 창문 배열, 건물을 잇는 통로 등이 정감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캘리그래피 강좌, 영화 상영 등의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봉동 주민들의 커뮤니티를 책임져왔는데, 아쉽게도 올해 말 이전을 계획 중이다. 다만 이전하는 장소도 지난해 10월 문을 닫은 신암중학교 자리로 폐교를 리모델링해 활용하는 전국 최초의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현재 16만여 권의 도서 자료와 총 768석의 열람실을 보유하고 있다.
주소 대구시 중구 대봉로 210 문의 053-231-2877
갤러리 분도
매년 신진 작가를 발굴해 기획하는 프로모션 전시가 열린다. 갤러리 분도는 장르에 관계없이 오로지 작가의 잠재력에 기준을 두고 전시를 기획한다. 아트, 설치, 사진, 아카이브 등의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큰 문이 달린 입구에 부담을 느껴 들어서길 망설이는 관람객이 많았던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대부분 쉽게 이곳에 들어선다. 대구 봉리단길이 떠오르면서 인근 갤러리를 찾는 것도 하나의 문화가 된 덕분. 김지윤 수석 큐레이터는 세계 미술 시장의 감각과 흐름을 놓치지 않고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갤러리 분도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베니스 비엔날레, 스위스 아트바젤, 카셀 도큐멘타 등을 다니며 다양한 기획 전시와 페어에 참여하고 있다.
주소 대구시 중구 동덕로 36-15 문의 053-426-5615
릴 33
셀프인테리어의 유행과 함께 대구에 처음 문을 연 라이프스타일 편집매장.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대구의 라이프스타일을 깨고 클래식한 취향 대신 북유럽의 새로운 감각을 선도한다. 김민주, 김미나 자매가 운영하는 릴33은 봉리단길이 뜨기 전부터 이미 ‘디자인 좀 아는’ 사람들의 아지트로 통했다. 단골 고객은 주로 감각 넘치는 신혼부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건축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 깐깐하고 꼼꼼한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으로 입소문을 타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봉리단길을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어쩌면 봉리단길의 유행도 여기에서 시작됐을지 모른다. 북유럽을 대표하는 헤이, 무토, 노만 코펜하겐 등 취향을 뛰어넘는 60여 개 브랜드의 디자인 가구와 소품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금세 흐른다.
주소 대구시 중구 명덕로 315 문의 053-425-3113
스페이스129
규모에 비해 알찬 기획을 선보이는 공간들이 있다. 스페이스129가 그 예다. 문화 예술은 어느 하나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작은 공간들이 모여 이끌어가는 것. 스페이스129는 대구현대미술협회에서 설립한 대안 공간으로 대구의 문화 예술이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다양한 전시와 행사를 기획한다. 이를테면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는 신진 작가의 동양화, 유화, 판화, 소묘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며 작품을 저렴한 가격에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게 기획한 ‘함께하는 A4’는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국내 및 해외의 다양한 지역과의 레지던시와 교류전도 준비하고 있으니 문화 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기억해두자.
위치 대구시 중구 봉산문화길 14 문의 053-422-1293
석주사진관 이석주 대표
대구 봉리단길에서 봉산문화의 거리로 이어지는 곳에 자리한 석주사진관. 거리는 붐비지 않고 한적하며,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표정도 느리다. 예쁘게 치장한 식당과 카페 대신 오래된 화방과 갤러리, 표구사가 더 많아서일까. 이석주 대표는 ‘지킨다’는 거창한 개념보다는 언젠가 잊히더라도 이 거리처럼 좀 천천히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흑백필름 사진관을 열었다. “요즘 학생들은 필름이 뭔지도 모르더라고요. 제가 디지털과 필름의 중간 세대였으니 그럴 만도 하죠.” 흑백필름 사진은 암실 작업을 거쳐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3~4주가 걸린다. 당연히 보정도 어려워서 거울을 볼 때조차 표정을 매만지며 꾸미던 ‘나’가 아니라, ‘진짜 나’의 모습과 마주해야 한다.
“처음에는 갸우뚱하던 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이 점점 마음에 든다고 연락을 해와요. 흑백필름의 진가를 비로소 느끼는 거죠.”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얼마 전 다녀간 한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촬영이 끝난 뒤 아버지가 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는 얘기를 했어요. 아버지의 단독 사진도 찍었는데 얼마 후 영정 사진이 필요하다며 따님이 찾아가셨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한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담는 일이었으니까요.” 그 후로 그는 사진을 찍는 일에 좀 더 진지해졌다고 말한다. 셔터를 누르는 짧은 순간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소 대구시 중구 봉산문화길 17 문의 053-621-6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