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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 스크랩 창덕궁 후원의 끝자락 봄
一波 추천 2 조회 115 11.06.06 14:57 댓글 12
게시글 본문내용

 

가세. 소풍 가듯 세월 속으로 소풍가세. 우리 유년 시절, 엄니 아버지 손 잡고 갔던 기억 챙기세.

함께 모인 우리 벗님. 대강 살살 보던 여기 저기 다시 보세.

우리 뿌리 찾아 제사 지낼 일 없겠으나, 뿌리 없는 나무 없듯이 우리 묵은 뿌리 찾으니

옛님은 간 곳 없되 궁궐 옛터에 남은 봄 자취를 어떠하던가.

 

문을 보세. 돈화문 (敦化門: 보물 383)일세.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에 처음 지어졌다네. 지금의 돈화문은 1609(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지. 敦化中庸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네. 조선 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는군.

 

 

 

경복궁이 위엄 가득 아버지라면 창덕궁은 섬세 가득 어머니일세. 태종 4년에 시작한 창덕궁 공사를 만 1년만에 완공하고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지.

13927, 태조 이성계께서 왕위에 올라 조선이 문을 열었다네. 창덕궁은 1405년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세워졌지.

이로써 조선은 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 이렇게 양궐 궁궐체계를 갖게 되었어.

 

 

태종 11년에 이르러서는 진선문 석교(금천교)를 시축하고 태종 12년에는 돈화문을 건립함으로써, 창덕궁은 완전한 궁궐로서의 틀을 갖추었다네.

 

그 뒤로 대부분 왕은 창덕궁에서만 머무셨어. 어엿한 궁궐로서의 창덕궁은 임진왜란까지 약 180여년간 별로 큰 재난이나 큰건물의 신축은 없이 다만 인정전 후원 담장 증축과 수문당과 대조전의 중수등이 있었을 따름이었어.

임진왜란을 거치며 거의 궁궐들이 불타고 창덕궁도 그 때 텄지.

임진왜란 후 폐허의 궁궐을 광해군 5년경 완전히 재건하였다. 그후 인조반정때 큰불로 인정전만 남는 수난을 당하였으나 다시 여러 전각들을 재건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네. 그때 새로 진 건물을 말해봄세.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 집상당, 보경당, 옥화당, 태와당,등일세.

 

1610년 광해군께서 창덕궁을 세우고 그후, 270년동안 창덕궁은 조선후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기까지 조선의 법궁이었다네.

 

 

 

철종 14(1863)12월 철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시니 고종은 인정전에서 즉위하셨다네. 그후 대원군은 경복궁을 세워 왕이 경복궁으로 이어하고서 창덕궁에 별로 수리나 영건이 없었지. 고종 10년 겨울 경복궁 자경전에서 불이 나서 왕은 다시 창덕궁으로 어어하시매 10년간 이궁에 머무시면서 고종1314년에 걸쳐 쿠게 고쳐 궁궐의 모습이 새롭게 되었다네. 하지만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치르고 난 왕은 22년 봄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셨지. 그 뒤로 창덕궁에 왕이 잠깐 둘렀을 뿐, 이따저따할 일 20년간을 지났네.비로서 융희 원년 10월에 순종 이하 왕실 일행을 맞이하여 왕궁이 아니라 황궁으로서의 역할이 시작되었지.

 

어찌하는가. 이미 이때는 일제의 점령 세력이 궁중을 잡고 있으니 황궁은 허깨비였을 뿐. 광무 118월 경운궁에서 즉위한 순종은 그해 10월에 이어를 위하여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 11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지만 궁중은 일제 침략자들이 무상 출입터가 되었으니. 인정전, 의정당, 주합루,등 건물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이토히로부미 이하 저들의 접견 향응에 넘기고 후원에는 학생들의 운동회가 열리니 궁중의 위엄은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드디어 융희 48월에는 매국노 이완용등이 총감 데라우치마사타케의 지시에 따라 우리나라를 일본에 합병하기로 정했지. 이 창덕궁에서 마지막 어전 회의를 열렸다네. 그들은 황제를 핍박하여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한다는 조서에 옥새를 빼앗아 누르니 오백년 왕조의 창덕궁은 사라졌네. 순종이 "창덕궁 전하"라는 이름으로 여생을 보내는 비운의궁이 되고 말았으니.

 

 

우리 건축물들은 자연의 흐름에 따르니 창덕궁 역시 주변 지형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네. 유네스코에서 창덕궁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니 조화로움이 주는 미학이 한 몫을 했으리 .

 

 

 

 

금천교 (錦川橋)

 

금천교는 1411(태종11)에 축조된 돌다리야. 조선의 궁궐에는 공통적으로 초입부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지.

특히 창덕궁의 돌다리는 그 아래 비단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비단()에 내 천()자를 사용하는 錦川橋일세.

다리 아래에는 남쪽의 해태상, 북쪽에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네.

다리 중간에는 잡귀를쫓는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벽사의 의미가 새록새록하네그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아름다운 난간석과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이 돋보이니 살펴보시게나.

 

600년의 세월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아름다운 금천교-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린 미학이 드러나있는 다리라네.

 

 

 

 

인정문 (仁政門: 보물 813)

 

인정전 (仁政殿: 국보 225)

 

인정문에서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지.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었다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으니 위엄이 장관이지 않았겠나.

 

 

인정전은 어떤 곳인가.

 조선시대의 왕이 즉위식을 치르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 장소를 정전(正殿)이라고 해. 이곳에서 외국 사진들이 오면 접견하기도 하고. 인정전은 그 아름다움이 대단하여 우리 후손은 국보 제 225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지. 인정전 앞뜰에는 인정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관리하는 관청들이 늘어서있네. 이 관청들은 일제시대때 모두 허물어지고 사라졌다가 최근에 복원된거라는군. 일제는 인정전에 많은 아픔을 남기고 상처는 여전하다네. 자연미 그대로 인정전 바닥 박석들을 다 걷어내고 일본식 정원으로 바꿔버린거야. 한나라의 왕이 정치를 하던 존엄한 궁궐을 저들이 여흥을 즐기는 정원으로 꾸몄다네. 나중에 인정전은 다시 복원되나 인정전바닥에 박석 대신에 인공석으로 깔렸다네.

인정전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되어있어서 마루바닥, 커튼, 유리창등을 볼 수 있지.

마루바닥은 일본식건축양식이야. 개화기이후 일본의 영향이 그대로 보여주네. 인정전 동쪽에는 왕실 관청인 궐내각사가 위치했었지. 그 중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의 회의장소로 사용되었던 빈청건물을 눈여겨보게.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다수리던 삼정승의 회의장소인 빈청건물이 일제시대때는 순종황제의 차고가 되고말고. 빈청에 있던 순종황제의 자동차는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갔지. 그러니 지금 그 터는 매점건물이라니.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네.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으며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지.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

 

조선의 궁궐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의해서 조성되었네.

부용지도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네.

연못의 동남쪽 모퉁이 돌에는 뛰어오르는 형상의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지.

부용정(1792년 건립)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라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네.

 

 

 

영화당(暎花堂)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18(1692)에 재건한 것일세.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하며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일세.

 

 

'기오현'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4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네.

 

 

의두합과 궐 안에서 가장 작은 운경거로 추정되는 건물

 

 

바로 옆의 운경거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로서 아마 책이나 악기 등을 보관하던 부속 건물로 알려져 있다네. 의두합에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사색을 하며 책을 즐겨 읽었던 장소라고 전해지지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지. 이때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할아버지인 정조였으므로 주합루 뒤쪽에 집을 짓고 이곳을 나라 일을 생각하는 장소로 삼았지.

 일반 민간 한옥에 비해서 아주 작고 서민들이 사는 초가 주택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며 외부 장식이 거의 없는 특징을 보면서 왕실의 겸손이 보여지네 그려.

효명세자는 1830년 대리청정 3년 만에 2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니 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네.

 

 

 

  불로문(不老門)

 

불로문은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네.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숙종18(1692)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일세.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히고 있지.

 

 

연경당(演慶堂)과 선향재(善香齋)

 

궁궐지에 의하면 1828(순조28) 왕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120여칸 민가형식의 집일세.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은 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이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주인대감의 일상거처인 사랑채와

 

 

안주인 등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로 나뉘어져 있다네.

 

 

 

관관람정(觀纜亭)

 

관람정은 평면이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정자일세.

관람정 앞 연못은 대한제국 말기나 일제 초기에 현재와 같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며 관람은 닻줄 즉 배 띄움을 구경한다는 뜻이라네.

 

이 돌을 밟고 가세.

8자걸음 양반 체통을 한 번 지켜 봄이 어떠한가.

 

하늘에 떠있는 달은 오직 정조 하나뿐이니 신하들은나를 따르라는  존덕정 현판  글씨 에는  왕권강화에 힘썼던 정조 의 각오가 지금 시절까지 서릿발 같구료. 

 

 

숲길 따라 가세. 마치 삼림욕하듯 정신이 맑아지네 그려.

 

 

언덕길을 올라오면 취규정일세

 

.

취규정은 '학자들이 모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네. 생각건대 취규정은 휴식과 독서를 위한 공간이었을까.

 

 

 

벗님들이여. 각각 생각이 다른 눈빛이네 그려.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을 가리키지.

 

.인조 14(1636)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옥과 같이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지. 임금과 신하들이 여기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네.

근처의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亭) 등과 함께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여 많은 임금들에게서 특히 사랑받았던 곳이라네.

소요암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으니 보게나.

 

 

 

飛流三百尺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두고 가세.

 

옥류천에 있는 태극정일세.

 

옥류천을 떠나면서 자꾸 뒤를 보네.

 

옛시절, 상감께서 걷다가 멈추셨으리.

 

750여년 세월을 살아온 향나무가 우리를 보네.

덧없는 인생들아. 내 곁을 스쳐간 인생들이 태어 나고 슬어졌음이 덧없어라.

하느니

 

 

규장각은 어떤 곳일까?

 

규장각하면 정조를 떠오르네. 정조임금은 당색을 초월하며 노론, 소론, 남인등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들이라 할지라도 학문의 깊이가 깊고 인품이 훌륭하면 그들을 정조의 사람으로 만드는데 힘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 정조는 이 규장각에서 당색을 초월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썼던 군주였지.

 

벗님들 잘 보셨는가. 그러나 이 사진 속에 없는 전각일랑 다음을 기약하세.

그때 그대들이 볼 이러 저러한 전각과 옛터를 아래에 소개하네.

 

 

 

대궐내각사를 보세.

궐내 신하들이 왕을 보필하며 업무를 맡아보던 공간일세. 창덕궁에는 규장각, 내의원, 예문관과 같은 궁궐관청들이 있다네.

 

선정전을 보세. 

선정전은 왕의 집무실이야. 편전(便殿)이라고도 했어. 왕은 여기서 신하들과 국사를 논했지. 선정전은 조선의 궁궐중 유일하게 청기와가 얹어져있는 겸손한 느낌이 드는 화려한 건물이야. 광해군은 청기와를 인정전에도 얹으려 했으나 사치를 금하는 유교적 논리로 신하들이 아니되옵니다를 해대니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는군.

선정전 뒷쪽 공터롤 동궐도에서 살피면 과거에 보경당과 궁궐의 장독을 보관하던 장고가 있던 자리라고 하네.

관광객들은 대부분 발걸음을 하지 않는 여기 공터에 우리는 와 있고 드라마 동이에 등장하는 숙빈 최씨가 살던 보경당이 바로 이 장소에 있었다네.

 

희정당을 보세.

 여기서 왕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소야. 원래 왕의 침전이었으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이 아주 좁아 다른 용도로 돌리고 편전의 역할을 희정당이 대신하였다네. 그런데 희정당을 살펴보다보면 조금 이상한 점이 있어. 단정하고 단아한 느낌의 창덕궁 건물들과는 달리 희정당은 아주 웅장한 느낌으로 웬지 조화롭지 아니한 모습으로 오밀조밀한 창덕궁을 꽉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 나네. 따져보니 희정당 건물이 원래는 경복궁의 강녕전 건물이기 때문이야. 일제시대때 희정당에서 불이났는데 일제는 궁궐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드니 새로운 자재를 구해다 궁궐을 지을 수는 없고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다가 지금의 희정당을 새로 짓게 했다네. 그러니 희정당은 창덕궁 건물이나 창덕궁과는 어울리지 않게 웅장하고 꽉 찬 느낌이 나는 건축물이야. 안타깝네. 이곳 희정당은 내부 인테리어는 서양식으로 바꿔 카펫이나 샹들리에같은 오늘날 익숙한 장식으로 꾸며져있으니 나중에 이곳을 방문하면 놓치지 말고 구경하세. 개화기의 궁궐건축을 엿볼 수 있으니까.

 

대조전을 보세.

대조전은 왕비의 침전이니 아주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원래 왕비들은 궁궐에서도 아주 깊은 구중궁궐에서 살았다네. 왕비의 삶이 화려하고 좋지만 않으니 답답한 궁궐의 담장에 갇혀 한 세월을 보내야하니 그 세월이 어떠하겠는가. 창덕궁의 대조전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중 하나인 경술국치가 결정된 장소라서 그 아픔이 크다네. 경술국치는 1910년 그러니까 경술년에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양도하게된 가슴아픈 일이지. 조선의 마지막황제인 순종황제는 경술국치의 뼈아픈 통한을 안고 대조전에서 생을 마감하셨어. 대조전에서 '을사오적'이라 불리우는 친일파들에게 끝까지 옥새를 내놓지 않으려고 치마폭에 감춰두고 저항했던 순정효황후의 이야기는 지금도 창덕궁 대조전에 전해져오고 있단다.

 

 

선정전 (宣政殿: 보물 814)을 보세.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일세.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네. 사관들의 기록을 사초(史草)라고도 하며 이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일세.

 

희정당 (熙政堂: 보물 815)을 보세.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으나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 되었네.

1917년 큰불로 소실되어 지금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지은 것이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지. 상방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총석정절경도>가 걸려 있고. 남행각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네.

 

대조전 (大造殿: 보물 816)을 보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지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하지.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셨다네. 경훈각은 대조전의 부속 건물로 원래는 이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이후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 단층으로 옮겨 지었지. 수라간은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내부는 조선 말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네.

 

 

주합루(宙合樓)를 보세.

주합루는 1776(정조 즉위년)에 지은 2층 누각이네. 아래층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 서고이고 위층은 열람실일세.

초기 왕실도서관으로 출발한 규장각은 점차 정책연구기관으로 기능하여 정조의 개혁 정치와 조선 중기 문예 부흥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이덕무 등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다양한 인재들이 여기서 활동하였지.

주합루라는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라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에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고. 어수문은 임금이, 그옆의 작은 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했네.

 

 

성정각 (誠正閣) -또는 내의원(內醫院)을 보세.

 성정각은 세자가 서연(書筵 : 학자들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곳일세.

성정각 뒤의 관물헌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며.

원래 내의원은 인정전 서쪽에 있었으나 1910년 대부터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이용하였지.

내의원은 궁중의료기관으로 왕과 왕족의 병을 치료하고 약을 조제하던 곳으로 내국(內局)이라고도 불렀다네.

내의원에는 의녀도 있었는데 이들은 남자의관에게 진찰받기 어려운 궁중 여성들의 치료를 담당하기도 하였지.

 

 낙선재(樂善齋)를 보세.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네.

낙선재는 1847(헌종 13)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지. 이 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네.

  

빈청(賓廳)을 보세.

정승들이 편전에 들기 전에 대기하며 국사를 의논하던 장소였네.

1910년대 이후부터 이 곳을 어차고로 이용하였으며오랜 기간 순종 황제와 황후가 사용하던 자동차(현존하는 세계유일의 모델인 1918년도 캐딜락, 1914년도 다임러) 와 조선 시대의 교통 수단이 전시되기도 하였으며 이들 교통수단들은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현재 이곳은 빈 건물로 남겨져 있지.

 

금호문(金虎門)을 보세.

 창덕궁의 서문(西門)이며 서쪽은 음행오행에 따르면 금()이고 동물로 볼 때는 호랑이()이므로 금호문이라 칭하였네.

정문인 돈화문이 임금과 외국 사신, 사헌부 대사헌 등이 출입했던 문이라면 금호문은 승정원의 승지나 홍문관 등 궁내 관서에 근무하는 벼슬아치들이 출입했던 문일세.

 

존덕정(尊德亭)과 폄우사(?愚?)를 보세.

 존덕정(1644년 건립)은 육각정자 형태로 겹지붕이 특이하네. 내부에는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정조의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지.

옛날에는 다리 남쪽에 일영대(日影臺)를 설치하여 시각을 측정했다고도 하네.

폄우사는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가 독서하던 곳일세. '?愚'란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고쳐준다는 뜻이네.

 

 벗들이여. 때때로 한가할 적에  후원의 숲 속, 이 한 때를 기억하세.

세상일이 오늘도 내일이면 추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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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6.06 15:31

    첫댓글 정말 아름답습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이야기인데..지미 카터 미대통령이 70년대말 우리나라를 방한해서 창덕궁과 비원을 (그 아름다움과 자연과의 조화로움에)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둘러보다가 이후 일정을 망쳤다는 일화를 읽은적이 있습니다.올려주신 사진들과 글들을 보니 탄복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합니다.

    올려주신 사진 중에는 구름한점 없는 푸른하늘과 대비(?)되어 750여년을 살아온 향나무가 가장 인상에 남습니다.

    저또한 지금(?)막 창덕궁에 다녀온듯합니다.^^

  • 작성자 11.06.06 18:46

    향나무가 대단하였습니다.궁궐 안의 가장 고령자입니다. 마주 보면 지난 세월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여 줍니다. ^&^

  • 11.06.06 18:14

    창덕궁은 예전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지만, 일파님께서 써 놓으신
    글을 가지고 다시 한번 갔다와야겠습니다 ^^ 잘 봤습니다~

  • 작성자 11.06.06 18:47

    그러셨군요. 보통은 예약을 하여야 하나, 예약을 취소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언제나 볼 수 있더라고요.

  • 11.06.06 18:39

    오늘 창덕궁에 가려 했었는데, 하필 월요일에 휴궁을 한다고 해서 덕수궁에 갔다 왔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창덕궁에도 다녀와야겠습니다. ^^

  • 작성자 11.06.06 18:47

    정말 볼만 합니다. ~^

  • 11.06.06 19:42

    저는 가을이 막 시작될 무렵의 창덕궁을 참 좋아하는데, 일파님께서 저리 짚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갑자기 가고 싶어 지네요... 함께 가신 친구분들도 다들 玉骨이십니다....

  • 작성자 11.06.07 10:11

    한 번 가니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한 번으로 보기는 역부족이더군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1.06.08 17:35

    그러면 가족이 아주 좋아할 것입니다.

  • 11.06.07 12:31

    정도전이 한 말이 생각나네요, "궁궐은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고, 소박하되, 궁상맞지 말아야 한다"는... 자금성같은 궁궐은 너무 거대하고 위압적이어서 그 안에 사는 사람이 답답하게 느껴졌을 듯 한데 창덕궁은 참 인간적인 느낌이 듭니다. 신기한 것은 연경당 안의 합판(?) 지붕인데요, 그 유래가 궁금하군요.

  • 작성자 11.06.08 17:36

    주합루 말씀인가요. 아래는 규장각, 위는 열람실이라네요.

  • 11.06.09 14:54

    아... 연경당이 아니라 낙선재네요, 사대부 양식으로 지은 집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은데 기와가 아닌 합판 같은 것을 얹은 지붕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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