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가장 오래된 한글활자 인사동서 유물 쏟아져 신문1면 1단 기사입력 2021.06.29. 오전 11:56 최종수정 2021.06.29. 오후 2:37
희소성 높은 금속활자·시계·화포 등 서울 인사동 유적에서 무더기 발견 “세계적 사건이자 고고학 최고 성과 세종시대 과학기술 복원 실마리 마련”
서울 인사동 유적에서 매우 희귀한 조선 전기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하던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부품과 물시계 옥루 혹은 자격루의 부속품인 ‘주전’(籌箭)으로 추정되는 동제품까지 한꺼번에 출토됐다고 문화재청이 29일 밝혔다. 사진은 인사동에서 나온 금속활자. [연합]
[헤럴드경제=조용직 기자] 서울 도심 종로구 인사동 유적에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를 포함해 15∼16세기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문화재청과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은 탑골공원 인근 ‘공평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인 인사동 79번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을 비롯해 물시계 부속품 ‘주전(籌箭)’,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화포인 총통(銃筒) 8점, 동종(銅鐘)을 찾아냈다고 29일 밝혔다.
서울 인사동 유적에서 매우 희귀한 조선 전기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하던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부품과 물시계 옥루 혹은 자격루의 부속품인 ‘주전’(籌箭)으로 추정되는 동제품까지 한꺼번에 출토됐다고 문화재청이 29일 밝혔다. 사진은 발굴 당시 인사동 유적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한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455년 무렵 제작된 한글 활자 약 30점만 전해져 왔는데, 이보다 앞선 시기의 조선 전기 활자가 무더기로 나온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다양한 크기의 한글 금속활자가 출토됐다”며 “아직 금속활자 분석이 끝나지 않았는데, 종류가 다양해 인쇄본을 찍을 때 사용한 조선 전기 활자의 실물이 추가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1434년 갑인자(甲寅字) 출현에 학계 '발칵'
시계방향으로 천문시계 ‘일성정시의’, ‘주전’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동종(銅鐘), 화포인 총통(銃筒). [문화재청 제공]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발굴이 구텐베르크 인쇄술보다 앞선 우리나라 금속활자 기술의 실체를 알려주고, 매우 부족했던 조선 전기 과학유산 실물이 대거 발견된 ‘세계적 사건’이자 ‘올해 고고학 발굴의 최고 성과’라는 평가가 나왔다. 땅속에 있던 ‘과학박물관’이 지상 위로 출현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구텐베르크 이전부터 우리나라가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전기 금속활자 실물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많은 금속활자가 불에 탔을 가능성이 크고, 기존 금속활자를 녹여서 새로운 활자를 만드는 경향이 있어 현존하는 유물이 매우 적은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010년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보다 이른 시기에 만든 고려시대 금속활자라는 주장이 제기된 이른바 ‘증도가자’(證道歌字) 101점은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결정했고, 이후에도 여전히 학계에서 진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계에서 두루 공인된 금속활자 중 가장 이른 시기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한글 활자 약 30점이다. 이 활자들은 1455년 무렵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는 임진왜란 이전 금속활자가 사실상 전무한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443년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를 비롯해 한자 활자인 1434년 갑인자(甲寅字), 1455년 을해자(乙亥字), 1465년 을유자(乙酉字)로 추정되는 유물이 무더기로 나오면서 서지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1403년 계미자(癸未字)로 시작해 1420년 경자자(庚子字), 갑인자 등을 거치며 발전했다.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15세기 금속활자는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고, 국내에 있는 조선시대 금속활자도 대부분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다”며 “이번에 확인된 조선 전기 활자는 발굴조사를 통해 나왔기 때문에 출처가 명확하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고 주장했다.
이야기만 전한 세종의 ‘과학혁명’ 소산 실물로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재위 1418∼1450)은 이상적 유교정치를 펼치고 한글을 창제한 성군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업적 중 빠지지 않는 것이 과학기술 진흥이다.
물시계 자격루나 천문시계 일성정시의는 세종 시기 대표적 발명품으로 거론되지만, 실물은 없고 이미지만 복원한 상황이다. 국보로 지정된 자격루는 중종 31년인 1536년에 만든 유물로, 청동으로 만든 물그릇만 남아 있다. 인사동에서 나온 일성정시의 부품은 시계에서 바깥쪽 테두리를 구성하는 원형 고리 3점으로 판단된다. 바깥쪽부터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으로 불린다.
물시계 관련 유물은 ‘주전(籌箭)의 일부로 보이는 동제품이다.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부분과 시간을 알리는 부분이 구분되는데, 주전은 시간을 알리는 시보(時報) 장치를 작동시키는 부품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세종 시대 과학유산이 이야기만 전할 뿐, 유물은 거의 없었다”며 “세종 시대 과학기술을 복원할 실마리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엄청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1588년 이후 한꺼번에 폐기한 듯, 왜?
문화재청에 따르면 금속활자와 물시계 부속품 추정 유물만 도기 항아리에 담긴 채로 발견됐고, 상대적으로 큰 나머지 유물은 주변에서 출토됐다. 모두 금속유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활자를 제외하면 모두 일정한 크기로 부러뜨린 채 묻은 것으로 확인됐다. 활자 중 일부는 불에 타 엉겨 붙어 있는 상태였다.
전문가들은 유물 매장 상황을 봤을 때 누군가가 금속품을 모아 고의로 묻었고, 나중에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재활용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한 관계자는 “구리는 조선시대에도 비싼 금속이었다”며 “유물을 재화, 즉 값나가는 물건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서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직 기자 Copyright ⓒ 헤럴드경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