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을 사람들이 가장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그래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목사님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 질러 알리고 싶다. 그 깨끗하고 반듯하고 아름다운 목사 이전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내 나는 삶을 말이다.
# 목사님과 반지
목사님 회갑 때 여전도회에서 금반지 하나를 선물해 드렸다. 주일 날 설교 시간에 금반지를 손에 들고 올라오셔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 반지를 낄 수는 없습니다. 한 달에 쌀 한 말이라도 교회가 사주어야 생활을 하는 가정이 50가정이나 되는데 그와 같은 교인들을 심방하는 목사가 손에 금반지를 끼고 목회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우셨다. 나는 그 눈물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 때 나도 결심을 하였다. “나도 평생 반지 끼지 말고 목회해야지...”
# 소시장의 소
청량리중앙교회가 2백 명 정도 출석할 때 8백 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으셨다. 어느 정도 목사님도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그 눈치를 채신 장로님들이 앞을 가로막고 못 가시게 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큰 교회로 가시면 생활비 많이 드리겠지요. 우리도 다음 달부터 당장 생활비 올려 드릴터이니 가지 마세요.” 그와 같은 장로님들의 말씀에 정말 평생에 듣기 힘든 명언이 목사님으로부터 나왔다. “소시장에 묶어 놓은 소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올라도 가고 내려도 가지만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닙니다.” 그 말씀을 하시곤 그냥 청량리 중앙교회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시고 은퇴시까지 흔들림 없이 목회를 하시었다.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니요.” 얼마나 근사한 말씀인가? 이제까지 목회해 오면서 손에 반지를 끼지 않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니요.”라는 말은 아직 까지 쉽지가 않다. 목사님은 정말 그렇게 사시다 하나님 품으로 가시었다. 목사님이 은퇴하실 때 교회가 원로목사로 추대하면서 명일동에 사드린 30여 평의 아파트에서 평생을 사시다가 하나님께 가셨는데 하나님께 가시면서 다시 그 아파트를 교회에 내 놓으시기로 하셨다. 사모님이 계시니까 사모님이 계시는 동안은 그 곳에서 사시다가 사모님까지 하나님께 가시게 되면 그 아파트를 자녀들에게 상속하지 아니하고 교회에 헌납하기로 하신 것이다. 이번 목사님의 장례식에는 입관식과 하관식이 없었다. 시신을 대학병원에 연구용으로 기증하셨기 때문이다. 돈이든 집이든 몸이든 살아계신 동안 빌려 쓰는 것이고 자신의 것이라고 욕심 부리시지 않으시는 목사님의 모습 속에서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닙니다.”라는 말씀이 그냥 말씀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감동한다.
# 잊을 수 없는 10초 은퇴사
한국 교회에 목사 장로 정년제를 제안하신 분이 임택진 목사님이시다. 목사님의 원안은 65세 정년이었는데 총회가 결의하면서 70세 정년으로 수정하여 채택하였다. 그러나 목사님 자신은 자신이 발의한 대로 65세에 은퇴를 감행하였다. 23년 동안 당신의 혼신을 다하여 목회하신 청량리중앙교회를 은퇴하시는 날 답사가 기가 막혔다. 그 기가 막힌 은퇴사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이니이다 할찌니라. 무익한 종은 물러갑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 말 없이 물러가시고 물러 나셔서도 두 말이 언제나 없으셨다. 은퇴 하신 후 교회가 음에 드실 때도 있었을 것이고 마음에 좀 들지 않으실 때도 있었겠지만 나는 한 번도 목사님이 교회와 후임자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씀 하시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참으로 앞과 뒤, 그리고 처음과 나중이 언제나 한결 같으셨던 분이셨다.
그런 목사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 것이 감사하고 그런 목사님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못내 섭섭하다.
목사님이 그리울 겁니다. 아니 목사님이 벌써 그립습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아버지 같은 내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