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찬 2024, 갑진년 청룡의 해!
김노성회장, 윤민석총장과 함께하는 첫 산행!
낙산 성곽길 함께 걷다.
o 일 시 : 2024년 1월 13일(토) 10시30분
o 산행지 : 낙산 성곽길(1시간 30분 내외)
o 출발대기 : 동대문역 1번 출구(1, 4호선) 대합실
o 점 심 : 12시 30분, '대통령 삼겹살'(T02 766 4405) / 혜화역(4호선) 1번출구
* 혜화역(4호선) 1번출구 → 100m
* 김상주 전회장 찬조 (고맙소!)
한 겨울속의 '2024 갑진년 첫 산행은 1.13(토) 10시 30분 동대문역 1번 출구에서 출발, 흥인지문을
시작으로 이화마을→ 낙산공원→혜화동 대학로로 하산, 약 1시간 반 정도 걸었다.
흥인지문에서 부터 한양 도성길 성곽을 따라 오르니 과거속으로 들어가는 듯 하다.
낙산공원 전망대에 올라서니 서울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남산, 인왕산, 북악산이 경복궁을 감싸는 형상을 드론으로 내려다 보는 듯,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
한양도성의 풍수지리적 최고의 입지를 찬찬히 살펴 보았다.
건너쪽 창신동 산 마루에 밀집된 낡고 작은 많은 주택들은 예전의 모습을 유지, 어려운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어 풍족치 못했던 옛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겸손해진다.
2024 '청룡의 해'에 한양도성의 좌청룡 낙산을 밟았으니 우리 모두 청룡의 기를 받아 올 한해 무탈하고
할력이 넘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드린다.
● 참석 25명(남18, 여 7)
권우택, 김노성, 김동규, 김상주, 김용기, 김명재, 김형준 김형환, 나상봉, 남철석,
문성우, 박대한, 박진억, 신완옥, 이남희, 정준호, 조규상, 한형호
김귀임, 김실림, 김영순, 문연순, 박복순, 이영애, 한연옥
➡ 대학로 거리 & 대학로 커피
★ 권우택 박사, 대학로 대형 커피 하우스로 안내하다.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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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공원과 태조 이성계 ①
시사매거진 | 2023.03.06 |
[시사매거진297호] 동족이나 겨레 외에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성곽(城廓)은 위치에 따라 산성과 도성과 읍성이 있고, 재료에 따라 토성과 석성과 전성(벽돌), 목책이 있다. 특히 한 국가의 수도를 방어하고 경계하는 도성(都城)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왕조의 권위를 나타내기도 하고 사회적 신분 질서를 표시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한양도성(漢陽都城)은 고려 기득권 세력을 뛰어넘는 신진 개혁 세력의 상징이기도 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나누는 정치적·사회적 구분이기도 하다.
1392년 7월 17일, 신 왕조를 개창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처음 즉위 당시 '고려(高麗)'의 국호를 그대로 계승한다. 하지만 점차 기존 질서와 고려 기득권층의 막강한 영향력이 부담스러워지면서 이를 극복할 대안과 타개책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명나라 정벌을 기치로 내건 명령을 어기고,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 왕위를 찬탈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발목을 잡았다.
이로 인해 이성계는 멸망한 지 1500년이나 지난 '고조선(古朝鮮)'의 국호를 차용해 새 왕조 '조선(朝鮮)'을 천명한다. 고려가 과거 고구려의 정통성을 확보하듯 조선도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다. 이후 고려의 수도인 '개경(開京)'에서 벗어나 '한양(漢陽)' 천도를 명령하고 새로운 세력이 독자적으로 개혁 의지와 정치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도성을 건설한다. 고려 수도 개경이 이미 지덕을 상실했다는 이유가 대두되었다.
사진_안나겸 기자
한양도성 둘레길을 걷다 보면,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벽을 축성한 돌덩이에 새겨진 글자와 시기별로 다른 모양의 돌을 통해 축성 시기와 기술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사진_안나겸 기자)
1392년 8월 13일, 태조 이성계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옮기라고 명령한다. 당시 고려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당나라 '장일행(張一行)' 선사에게 전수받은 음양오행설의 '장풍득수(藏風得水, 풍수지리)' 유행을 받아들여 새 수도의 터를 알아보도록 한 데 따른다. 먼저 풍수지리적 길지가 되려면 조종산(祖宗山), 주산(主山), 청룡(靑龍), 백호(白虎), 안산(案山), 조산(朝山), 내수(內水), 외수(外水), 산수역(山水逆) 등이 두루 갖춰져 있어야 한다.
서울의 경우 한양 북쪽의 삼각산이 조종산, 백악산이 주산이다. 여기에 낙타산이 좌청룡, 인왕산이 우백호다. 또한 목멱산(남산)이 안산이 되고 관악산이 조산이 되며 청계천은 내수, 한강은 외수가 된다. 한편 청계천이 서쪽으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도성 한가운데를 통과하여 중랑천에 합류되어 한강과 만난 후 반대편 서쪽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산수역에 해당하는 좋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도선국사는 "한양(漢陽)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두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王城)이 들어설 것이며, 왕성의 주인은 이씨(李氏)가 될 것이다"고 예언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있던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無學大師)와 정도전(鄭道傳)에게 새로운 땅을 알아보게 하였다. 무학대사는 궁궐터로 인왕산(仁旺山) 아래를 주장했고, 정도전은 북악산(北岳山) 아래를 주장했다.
1395년 11월 27일 북악산 아래 남향으로 배치된 경복궁이 가장 먼저 창건되었고, 1405년 창덕궁이 완공되었다. 이후 1484년 다른 전각으로 쓰이던 창경궁이 완공되었고, 1620년 10월에 경희궁이 완공되었다. 1907년에는 이전에 지어진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5대 궁궐이 완성되었다.
장자를 뜻하는 좌청룡 '낙산'은 길게 뻗어나가 종로구와 성북구를 나누면서 삼청터널 위에 숙정문, 동소문로 위에 혜화문을 남기고 남쪽으로 동묘와 흥인지문에 이른다. 백두대간에서 뻗은 한북정맥의 한 지맥 끝에서 불쑥 솟았다가 청계천으로 마감하는 산세를 형성한다.(사진_안나겸 기자)
장자보다 차자가 왕위 등극한다는 '좌청룡 낙산'
조선의 수도 '한양도성'은 4개의 큰 외사산 안에 4개의 작은 내사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의 용마산과 서쪽의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과 북쪽의 북한산이 그것이다. 또한 내사산은 동쪽의 우백호 인왕산과 서쪽의 좌청룡 낙산, 남쪽의 주작인 남산과 북쪽의 현무인 북악산이다.
특히 동쪽의 우백호 인왕산은 차자를 상징하고, 서쪽의 좌청룡 낙산은 장자를 상징한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는 도성을 정하면서 큰 고민에 빠졌다.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은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해 높이가 낮고 산세가 부드러워서 지기(地氣)가 약하므로 조선왕실에서는 장자보다 지차자가 득세할 것'이라는 것이다.
<용재총화>의 이러한 기록 외에도 <어우야담>에는 당대 최고의 명리학자 격암 남사고와 이산해가 길가에서 만나 이야기 나눈 부분이 있다. 도성 서쪽의 안산과 동쪽 낙산의 명칭을 파자로 풀이하며 '낙(駱)' 자가 '말 마(馬)'와 '서로 각(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종말에 가서는 제각각 흩어질 징조라고 대화한다. 그리고 '안(鞍)' 자가 '고칠 혁(革)'과 '편안할 안(安)'으로 이뤄져 있기에 개혁과 변혁이 있고 난 뒤에야 편안할 징조라고 풀이했다.
실제 조선왕조 518년 동안 27명의 왕이 배출되었고 그중 적장자 출신 임금은 5대 문종,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2대 인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7대 순종이 있으며 추가로 서장자 출신이나 적장자로 보는 20대 경종(장희빈의 장자)이 있다. 특히 조선왕실 정통 적장자는 문종, 단종, 연산군 3명뿐이고, 그나마 제대로 나라를 다스린 왕은 숙종 1명이다. 또한 적장자 출신 왕의 재위 기간을 모두 합해 채 20년도 못 된다.
또한 1547년 선조 당시 서쪽 낙산 밑에 살던 김효원(金孝元)과 동쪽 정릉 쪽 경운궁 인근에 살던 심의겸(沈義謙)이 인사권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결국 동서 붕당으로 이어진 신진 사림과 기존 사림의 갈등으로 확산되어 조선시대 최초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동인(낙산)'과 '서인(경운궁)'으로 나뉘는 것 외에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다시 분열된 후 다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사색(四色) 재편되었다. 이후 조선은 급격한 국력 소진과 외척 세력의 득세로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장자를 뜻하는 '낙산'의 지형과 명칭
한양도성은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중심으로 서쪽의 낙산(낙타산), 남쪽의 목멱산(남산), 동쪽의 인왕산 등 내사산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평균 높이 약 5~8m이고, 전체 길이가 약 18.6km에 이른다. 무엇보다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 성곽(城廓)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그 역사만 해도 무려 514년이다. 태조 이성계 당시인 1396년부터 일제강점기인 1910년까지다.
한양도성 둘레길을 걷다 보면,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벽을 축성한 돌덩이에 새겨진 글자와 시기별로 다른 모양의 돌을 통해 축성 시기와 기술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양도성에는 사대문(四大門)인 흥인지문(동대문, 보물 제1호), 돈의문(서대문, 소멸), 숭례문(남대문, 국보 제1호), 숙정문(북대문, 사적 제10호)이 있다.
또한 사소문(四小門)으로는 혜화문(동소문), 소의문(서소문, 소멸), 광희문(남소문), 창의문(북소문)이 있다. 하지만 1915년 일제강점기 때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 공사로 철거되어 서쪽의 돈의문과 소의문은 사라지고 없다. 1975년부터 시작된 서울성곽 복원사업에 의해 2014년까지 한양도성 전체 구간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었고 숙정문, 광화문, 혜화문 역시 복원되었다.
룡 '낙산'은 길게 뻗어나가 종로구와 성북구를 나누면서 삼청터널 위에 숙정문, 동소문로 위에 혜화문을 남기고 남쪽으로 동묘와 흥인지문에 이른다. 백두대간에서 뻗은 한북정맥의 한 지맥 끝에서 불쑥 솟았다가 청계천으로 마감하는 산세를 형성한다.
그러한 낙산의 구역은 종로구에 혜화동, 이화동, 동숭동, 창신동, 숭인동을 아우르고, 성북구에는 보문동, 삼성동에 이른다. 과거 낙산의 또 다른 지명은, 산 해발고도가 125m 모양으로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아올라 있다고 하여 낙타산이라고 불렀다. 또한 조선시대 궁중에 우유를 공급하던 젖소가 있던 산이라고 해서 우유의 한자어인 타락(駝酪)을 차용해 타락산이라고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