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이 높다하되
덕유산 삿갓골 대피소를 향해 황점(경남 거창군 북상면)을 출발하여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1시간이 지났건만
비탈만 점점 가팔라질 뿐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은 끝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산꾼들이 지나간 외줄기 눈길을 벗어나면 정갱이까지 푹푹 빠지는 곳이 있기에 마땅한 쉼터를 찾지 못해 잠시의
머뭄도 갖지도 못하고 쟁기끌며 밭갈이 하는 황소마냥 거친 숨 몰아쉬며 뚜벅 뚜벅 무거운 발걸음만 옮깁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 이 없건마는>
안다구요 알아. 초등학교 시절부터 듣고 또 들어 온 격언성 시조이고 노력하면 모두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가슴에 새겨진 금언 아니냐구요.
420여년 전 가르침을 주신 양사언님의 말씀 하나 믿고 지금 온힘을 다하고 있답니다.
30여km의 덕유능선중 아직 걸어보지 못한 삿갓재 무룡산 동엽령구간을 걸어보고자 했습니다
그것도 환상의 겨울 눈꽃산행을 겸하는 즐거움을 맛보는 야심찬 꿈을 가지고.
연신 쏟아지는 땀방울이 안경창을 흐리게 하여 귀찮기는 하여도 이렇게 흘려내는 땀방울에 섞여 몸안의 온갖
노폐물이 배출된다하니 귀찮아 할 일만도 아닙니다.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과 달리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체내의 지방질을 태워 생기는 열로 인해 흘리는 땀이라니
두꺼워진 뱃살이 쑥쑥 빠지는 기분입니다.
황점마을에서 삿갓대피소(1,280m)까지 4.4km의 눈길오름을 1시간 20분에 올랐으니 심장이 터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행동식(찰떡 2개)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후 13시 무룡산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며칠 전 T.V에서 보던 환상의 설화는 찾아볼 수 없고 앙상한 가지의 회백색 나무들만이 햇빛반사로 눈부신
하얀 설원의 산비탈을 가득 채우고 서 있습니다.
삿갓대피소보다 200여m 더 높이 눈앞에 빤히 보이는 무룡산까지 2.2km이지만 전반부 오버 워킹때문인지 발걸
음이 무겁습니다.
1시간 걸려 도착한 무룡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오게 합니다.
뒤돌아 남쪽으로 삿갓봉과 남덕유 그리고 서봉이 날카롭게 솟았고 진행방향으로 멀리 백암봉 중봉 그리고
덕유산 제일봉 향적봉이 줄을 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가을하늘보다 겨울하늘이 더욱 푸르른 날이 많습니다.
흰구름 살포시 떠있는 파란 하늘 저 멀리로 첩첩이 산줄기의 흐름이 이어지고 아스라한 곳에 지리산 천왕봉
에서 반야봉까지의 마루금도 시야에 잡힙니다.
하늘 저 멀리 검은색의 가스층이 두껍게 깔려있는 모습이 나를 우울하게 하기도 합니다.
디카를 2대나 가지고 왔으나 추운 날씨 탓으로 사진 몇 장 담고나니 작동을 멈추어 버리네요.
해발 1492m의 봉우리이니 산 아래 마을 보다 10여도 낮은 온도 일겝니다.
고도 100m당 0.5~1도씩 온도가 낮아진다 하니 걸을 때는 비록 땀이 난다하여도 잠시만 멈추어 있으면 온 몸이
오슬오슬해 집니다.
무룡산에서 동엽령까지 4.4km 구간이 겨울 덕유능선과의 외로운 전투였습니다.
오늘은 밝은 햇빛 내리쬐는 최상의 날씨이긴 합니다만 해발 1,300m 이상의 높고 낮은 이름없는 봉우리를 반복
하여 오르내리는 길에 40여명의 일행은 모두 어디쯤 걷고 있는지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 크고 끝없는 덕유능선의 대자연 속에 된땀을 흘리며 걷고 있는 나 하나 쯤이야 한강 백사장에 꼬물거리
는 볼품없는 한 마리 벌래와 다를 바 없겠지요.
북쪽 경사면의 무릎까지 빠지는 푸석거리는 눈길을 헤치기도 하며 동엽령까지 2시간의 고독한 행군을 하는
동안에는 힘이 들다 느껴질 때 마다 자기최면이라도 걸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처럼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즐기기 위해 산행을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싸움이 아니라 사랑이라고,사랑은 외롭고 고독한 것 이라고.
지금 이 덕유능선은 무채색의 하얀 도화지이지만 서서히 연두빛 세상으로 바뀌기 시작하다가 화려한 들꽃
화원으로 바뀌인 모습을 상상하며 동엽령에 이르렀고 한 여름 차가운 계류 우렁차게 흐르던 칠연계곡으로
들어섰습니다.
쵸콜렛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보지만 산행시간 5시간이 경과했을 즈음에는 거의 무아상태에서 기계적으로 발걸
음이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두껍게 쌓인 눈밑에서 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옵니다.
구멍 뚫린 얼음장 사이로 맑은 물비늘을 일으키는 물결이 정다워 보입니다.
온통 눈으로 뒤덮혀 하얀 개울가에 버들강아지가 피었습니다.
겉으로는 아직 동장군이 활개를 치는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부터 봄이 오고 있나 봅니다
드디어 안성매표소(전북 무주군)에 이르러 5시간 40분간의 길다란 겨울 덕유능선산행이 끝났고 몸은 힘들어도
해냈다는 성취감에 가슴 뿌듯하였습니다.
2008. 1.29
첫댓글 드디어 금강석님의 산행기를 접하게 되는군요.느림보 초창기 시절,얼굴도 모르는 금강석님의 글이 좋아 찾아 읽곤 했었습니다.일테면 오래된 독자라고나 할까요?ㅎㅎ..산행기를 올리시는 님들의 면면을 보면 지성과 감성이 어울려 정감있는 분들입니다.격조 높은 글들을 대할때마다 존경심이 생깁니다.그런 분들이 많을수록 느림보의 위상이 올라가는게 아닐까요?ㅋ..앞으로도 좋은글,정다운 글,많이 부탁드립니다.고맙습니다.
제가 느끼지 못하는 부분들을 자상하게 적어주시니 그 날의 산행을 다시 생각케합니다. 느낌을 글로 적어 전달하는 멋은 참 아름답습니다.....
금강석님을 저는잘모르는데요 느낌은 sannary님과같은데요~~~영혼의 양식을 얻고갑니다...종종 산행기부탁해도 될까요?
한라산길에 소개 인사드리지요.
ㅎ ㅎ동행한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