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산성 전투 >
북한산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비봉에는 오래된 비석 하나가 서 있지. 진품은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모조품이 서 있지만 그 비석의 역사는 1천4백년이 넘어. 원래는 무학대사비라고 여겨져 왔던 걸 추사 김정희가 그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 비문을 해독한 끝에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혔던 비지. 현재 우리나라 국보 3호. 이 비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의견이 분분한데 555년에 세워졌다는 설도 있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솥발처럼 정립하고 있던 6세기 중반. 수백 년 도읍지였던 한강 유역을 잃고 절치부심하던 백제는 한창 힘을 키워가던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게 칼을 겨눈다. 백제 역사상 유능한 임금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 성왕은 군대를 일으켜 꿈에 그리던 한강 유역으로 향한다.
기실 백제의 수도는 500년 동안 한성이었지. 공주나 부여는 일종의 피난 수도였다고. 오랫 동안 내분과 외침에 허덕이던 고구려는 기습을 당하고 물러선다. 아차산 고구려 유적지는 오늘날 기습을 당한 흔적이 역력한 채로 발견되는데 (무기를 정렬해 놨다거나 갑옷이 고스란히 발견된다거나) 아마 이때 고구려군은 백제군들의 복수에 삽시간에 전멸했을 듯 해. 성왕은 한강 백사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선조들에게 고했는지도 모르지.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강이란 옛날로 치면 고속도로이자 철도였어. 즉 한강을 타고 오르면 이천 거쳐 충주 지나 영월까지 갈 수 있었단 말이야? 바꾸어 말하면 이 한강 중상류 지역을 차지하지 못하면 그 지역을 장악한 세력이 얼마든지 편안하게 한강 하류를 노릴 수 있다는 얘기가 돼. 여기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고 성왕은 이쪽에도 군대를 보낸다. 얼떨결에 한강 하류를 잃은 고구려지만 충북 단양 어간으로 추정되는 도살성 등에서 치열하게 저항하지. 백제는 도살성을 함락시키지만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다시 빼앗는 등 일진일퇴를 벌여.
그런데 둘이 열나게 싸울 때 불쑥 나타난 군대가 있었어. 소백산맥을 넘어오느라 숨을 헐떡이던, 하지만 사기왕성한 신라군이었지. 신라 진흥왕은 막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직접 정치에 나선 첫해로 십대의 나이였지만 그 행보는 거침이 없었어. 신라군은 지칠 대로 지친 백제군과 고구려군을 쫓아내고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한다. 금현성을 다시 빼앗겠다고 덤비던 백제 장수는 완전히 삼국지의 한 장면을 연출했을 거야. 적벽대전 후 주유가 위나라 군대와 피튀기게 싸우고 성에 들어가려는데 조자룡이 나타나 “어찌 이리 늦으셨소?” 하는 그 장면 말이지. 이때 주유는 광분하는데 백제의 성왕도 그랬을 거다. 하지만 주유가 유비에게 그랬듯 성왕도 신라를 바로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어.
성왕은 어떻게든 신라를 동맹국으로 남겨 두고서 그를 이용하여 고구려에 맞서고자 했는데 아쉽게도 이건 늑대를 잡겠다고 어린 호랑이 끌어들인 격이 되고 말아. 나이는 어리지만 신라 진흥왕은 보통내기가 아니었거든. 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해.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무슨 뜻이게? “나는 고구려에는 관심이 없다. 고구려야 알아다오”라는 뜻이야. 이 말을 들은 고구려가 ‘감복’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고구려가 신라와 밀약을 맺었다고 해석되기도 하지. 고구려 입장에서도 “한강 유역은 너희가 먹되 임진강 넘어오지는 말아 줘.” 하면서 신라를 달래는 게 최고의 외교적 책략이었을 거야. 한때 고구려는 신라의 종주국 행세를 할 만큼 사이가 밀접했거든. “너희는 우리보다 백제 쟤들한테 볼 일이 더 많을 것 같은데.”라고 신라를 꼬드겼을 가능성이 커.
결심을 내린 건 진흥왕이었지. “아리수(한강)를 타고 바다까지 가자.”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을 선봉으로 신라군은 백제의 오백년 도읍지를 다시 빼앗아. 아마 성왕은 데굴데굴 굴렀을 거다. 이때 신라가 그 지역에 설치한 지명을 보면 신라 진흥왕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신주’(新州), 즉 신천지. 신세계.
성왕도 영걸이었어. 오히려 자기 딸을 진흥왕에게 후비로 보낸다. 일종의 화친책이었지. 결혼을 통해서 신라의 한강 점유를 인정해 주는 듯한 일종의 평화공세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성왕이나 진흥왕이나 전쟁을 염두에서 지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 결혼이 이뤄진 해에 성왕은 신라를 공격해서 커다란 인명 피해를 입혀. 분위기 알만하지?
신라는 백제의 원한을 알았고 백제는 신라의 의지를 알았어. 승부는 피할 수 없었지. 성왕은 일종의 반신라 연합군을 결성한다. 일본과 대가야까지 끌어들여서 말이야. 가장 앞장서서 전쟁을 주장한 건 일찍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태자 부여창이었지.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늙은이들 겁나시오?” 하는 식으로 몰아부쳤다고 해. 성왕으로서는 건곤일척의 승부. 가야군과 일본군까지 동원하고 백제 좌평이 4명 이상 참가한 총력전이 펼쳐져. 그게 오늘날 충북 옥천에서 벌어진 관산성 전투야.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를 봐야 해) 용맹한 태자 부여창은 신라군을 깨뜨리고 관산성을 함락시켜. 이 소식을 들은 성왕은 관산성으로 향하게 되는데 거느린 병력이 50여 명이었다는 걸로 봐서는 그야말로 마음이 급했던 것 같아. 대규모 병력을 인솔해서 가는 시간을 소요하느니 뭔가 화급하게 태자에게 합류하여 결정할 작전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 루트가 신라군에게 탐지되고 말아. 오늘날의 충북 보은에 있던 삼년산성 병력들이 야음을 틈타 급히 달려가는 성왕 일행을 덮친 거야. 성왕은 포로가 됐어. 일본서기에 나오는 성왕의 최후는 자못 극적이다.
삼년산성의 비장 , 그러니까 높은 신분은 아닌 도도라는 자가 성왕 앞에 섰어. 도도는 성왕에게 절하고 말하지. “청하오니 왕의 목을 내게 주십시오.” 고구려가 개로왕을 죽일 때에도 세 번 절하고 세 번 침을 뱉은 뒤 죽였다는데 당시 전쟁이 일상이던 삼국에는 왕을 죽일 때쯤 되면 뭔가 불문율 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닌지. 하지만 성왕은 이렇게 대답해. “왕의 머리를 어찌 너 같은 노비 (일본서기에는 도도가 노예로 기록돼 있어)에게 맡기겠는가.” 일종의 국왕으로서의 품위 있는 최후를 요구한 거지. 신라 왕이나 최소한 이찬 정도는 돼야 내 목을 칠만하지 않는가 하는 항변이었지. 그런데 도도는 이렇게 답한다. “저희 법에는 왕도 맹세를 어기면 노비 손에 죽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진흥왕부터 죽어야 할 테지만 도도는 아무래도 딸을 시집 보내 놓고 바로 뒤통수를 쳐 신라를 공격했던 일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 같았지.
모든 것을 포기한 성왕의 외침은 참 처절해. “돌이켜 생각하니 너무나 뼈 아픈 일 투성이였다.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가 고토 회복을 노리고 와신상담한 이래 미치도록 후회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겠지. 아차 그때 이랬더라면, 내가 왜 그랬을까, 이때 조금만 하늘이 나를 도왔더라면...... 거의 눈앞에 목표가 다다른 순간의 추락. 고지가 바로 저긴데 까마득한 산기슭으로 떨어졌다 싶었고 다시 기어 오르다보니 이젠 절벽. 최선을 다했으나 최악의 상황에 빠진 사람의 절규. 예순은 넘었을 백발의 성왕은 홍안의 신라 왕 김삼맥종 (진흥왕 본명)을 저주하며 숨을 거뒀을 거야.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관산성을 다시 공격했고 이제는 완전히 신라땅이 돼 버린 한강 하류의 ‘신주’ 병력들이 합세하면서 백제군은 대참패를 해. 삼국사기에는 꽤 숫자가 꼼꼼히 기록돼 있다. 2만 9천 6백명 전사. 좌평 4명, 국왕 전사. 이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는 다시 결정적인 흥성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좀 형편이 나아진 뒤에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신라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멸망하고 말지.
관산성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의 역사를 바꾼 전투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아. 이 일을 복기하면서 신라의 후안무치한 배신을 성토하는 것만큼 공허한 일은 없을 거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의리는 없어, 단지 생존과 이익이 있을 뿐이지.
자세히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이 즈음 벌어진 삼국의 머리 싸움과 기 싸움, 정보전과 암투는 아마 삼국 정립 이후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해. 한강 하류를 장악한 백제와 중상류를 거머쥔 신라. 그리고 물러났지만 발톱이 빠지지 않은 호랑이 고구려. 삼국의 정부와 신하들과 장군들은 머리를 쥐어짜면서 자국에 가장 유리한 정세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겠지.
숨가쁜 막후협상과 왕의 딸까지 동원한 평화 공세, 바다 건너 군대까지 끌어들이는 총력전과 적국 수뇌부의 야간 이동을 탐지한 신라군의 정보전까지.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지 않겠니?
관산성 전투(554년 음력 12월)는 그 모든 것의 일단 마침표였고 관산성에서 실려온 성왕의 머리를 궁궐 계단 아래 묻은 (일본서기 기록) 진흥왕은 벅찬 마음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을 타고 오늘날의 서울에 이르러 비봉에 올라. (555년 추정)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한강과 멀리 서해 쪽을 굽어보며 호령했겠지. “이곳은 신라 땅이다. 내가 다스린다.” 비봉을 갈 때마다 나는 진흥왕을 떠올리지만 성왕도 생각난다. 성왕 역시 저 자리에 올라 “우리 다시 돌아왔습니다!”를 외치고 싶었을 텐데.
< 계유정난과 정순왕후 송씨 >
세종대왕의 무덤은 경기도 여주에 있어. 왕릉치고는 서울에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하지. 세종이 죽은 뒤 처음 묻힌 곳은 그곳이 아니라 오늘날 서초구에 있는 헌인릉 서쪽이었어. 효자로 이름난 세종은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지관 하나가 딴지를 걸어. “이곳에 묘를 쓰게 되면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후손이 끊기고 장자를 잃는다.)하게 됩니다.” 이 지관 최양선이 얼마나 용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 간이 꽤 컸던 건 분명한 것 같아. 왕국에서 왕의 묏자리를 두고 “대가 끊기고 장남이 화를 입어요!”라고 말하는 건 보통 사람이 토할 소리가 아니니까.
당연히 예조에서 들고 일어났고 “저놈의 방정맞은 입을 벌하소서.” 소리가 근정전 지붕을 들었다 놨다 하지만 우리의 자애로운 임금 세종은 용서한다. “다만 이제 그를 나랏일에 쓰지 마라.”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이후 장자들의 운이 좋지 못해. 세종의 장남 문종은 왕위에 오른지 3년만에 죽었고 그 아들 단종의 생이야 우리가 아는 바이며, 단종의 왕위를 대신 차고 앉은 수양대군 즉 세조의 장자도 병으로 죽었고, 그 뒤를 이은 예종의 장남도 일찍 북망산에 갔단 말씀이야. 그래서 이거 안되겠구나 해서 세종의 묘를 이장하게 되는데 그게 여주 영릉이야.
조선 왕조 장자의 저주 가운데 가장 슬픈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역시 단종이겠지. 장자가 시원치 않자 셋째로 갈아 버린 아버지 덕에 왕이 됐지만 세종은 장자 상속의 원칙을 확립해 두고 싶었던 모양이야. 세종은 후일 문종이 되는 세자의 아들, 즉 원손을 무르팍에 앉히고 신하들에게 공공연히 뒷일을 부탁할 정도였으니까. 그거 알고 있니? 태어날 때부터 왕세자의 장자, 즉 ‘원손’으로서 할아버지 아버지 다음에 차례로 왕위에 오른 이는 단종 밖에 없어. 정조? 정조 아버지가 역적으로 죽었잖아.
1453년 음력 10월 10일 밤 결행된 계유정난, 즉 수양대군 일파가 김종서 황보인등 대신들을 척살하고 정권을 거머쥔 사건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을게. 뭐 드라마든 소설이든 영화든 골백번도 더 되풀이된 스토리일 테니까. 수양대군은 영의정 겸 이조,병조판서 겸 병마도통사 해서 권력의 핵심과 언저리 모두를 거머쥔다. 사실상 왕이었지. 매부 집에 가서 놀기를 좋아하던 소년이었던 단종은 졸지에 허수아비에 천덕꾸러기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수양대군이 단종을 만나 엉뚱한 얘기를 해.
“전하. 장가 가시오.”
아마 단종은 이 말을 들으며 몸서리를 쳤을 거야.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수양대군은 종친들을 거느리고 단종의 국혼을 청원했었거든. 일종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었던 거야. 나는 왕위 같은 데에 욕심이 없고 당신이 어서 커서 번듯한 왕 노릇을 하길 바라오. 그러려면 장가를 가야 하지 않겠소? 하는. 하지만 단종은 꽤 똑똑한 소년이었어. “혼인은 인륜의 시초인 부부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니, 그 예가 매우 중하오. 나는 또 나이가 어려 (장가갈 ) 때를 놓칠 것도 아닌데, 하물며 상중에 감히 대례(大禮)를 행할 수가 있겠소?” 아주 야무진 거절이었지. 그렇게 몇 번씩이나 거절한 일을 이번엔 영의정 겸 병조판서 겸 이조판서 겸 병마도통사가 된 삼촌이 다시 말을 꺼낸 거야.
대체 무슨 심사일까. 단종은 완강히 거부했지만 허수아비에게 무슨 옷을 입히는지는 권력 쥔 자의 마음. 세조는 왕의 상복을 벗게 하고 국혼을 치러. 상대는 수양대군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는 송현수의 딸. 나이는 단종보다 하나가 더 많았지. 단종의 머리 속도 복잡했을 거야. ‘정말 삼촌은 왕위에 욕심이 없나? 있다면 왜 날 장가를 들이지? 그것도 자기 친한 친구 딸에게? 나를 믿어 달라는 뜻인가? 정말 주공 (조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필했던 주 문왕의 동생)의 예를 따르려는 건가?’ 얼떨떨하기는 송현수의 딸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갑자기 내가 웬 왕비? 우리 아버지는 고관대작도 아니고 창고 책임자일 뿐인데. 가장 마음이 무거운 건 왕의 장인이 될 송현수였겠지.
그냥 드는 생각이지만 그 혼인은 수양대군의 페인트 모션이었던 것 같아. 자기랑 친분이 있는 이를 왕비로 삼아 나는 사심이 없노라 짐짓 폼 잡으면서 국구(임금의 장인)로는 공신이나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 아니라 언제든 제거하거나 걷어치울 수 있는 송현수를 택한 거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는 말은 나쁜 놈 옆에 있어서 벌받는다는 뜻만은 아니야. 똑똑하고 모진 놈들 옆에 있다가는 그 녀석들 욕심에 놀아나기 십상이니까.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와 단종의 신혼 생활은 그야말로 불안의 연속이었어. 수양대군은 친구의 딸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단종의 주변을 야금야금 죄어 들어갔어. 그렇게 좋아하던 누나와 매부도, 단종을 키우다시피 한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지. 어느 날 단종이 궁을 거닐다가 “세종대왕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결코 작지 않았을 텐데.”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해. 아버지도 아닌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할 할아버지를 끌어댄 이유가 뭐였을까. 이 소리에 단종을 따르던 궁녀들 전부 펑펑 울었다지. 이 외로운 왕에게 억지춘향으로 든 장가일망정 한 살 위의 아내는 (후궁도 둘 있었지만) 좋은 친구였고 말상대였고 동지였겠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가는 모습을 보면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과 비슷해. 슬슬 어르기도 하고 뺨을 치기도 하고 목줄을 잡고 던졌다가 받았다가 마침내 생쥐가 빨리 잡아먹어라 하고 포기하는 걸 기다리는 거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건넸을 때 오히려 왕과 왕비는 해방이다 싶었는지도 몰라. 증조부 태종의 형이었던 정종처럼 상왕으로 유유자적하게 지낼 수 있다 싶었는지도. 하지만 그러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고 그를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성삼문 등 사육신은 그들의 충성을 역사에 남겼지만 세조에게는 단종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가를 절감시켰지. “조카. 너는 존재만으로 내게 해롭다.”
결국 상왕은 노산군으로 떨어져 영월로 귀양을 떠나게 되는데 어린 대비는 따라가지 못해. 어린 대비는 남편을 모시게 해 달라고 울부짖지만 냉정한 숙부는 그마저 막는다. 모르긴 해도 그런 생각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왕자라도 태어나 봐라. 그건 또 무슨 화근이려고.”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넘어 아버지를 여의고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왕 노릇하다가 감옥살이 같은 궁궐살이를 하던 한 살 터울 남매같던 부부는 그렇게 헤어져서 평생 만나지 못해. 청계천에 놓여 있던 영도교는 이 부부가 이별한 다리라고 전해져. 다리 위에서 부부는 무슨 말을 서로 주고 받았을까.
이제는 노산군이 된 단종이 간 곳은 영월 청령포. 참 한양 땅에서 나고 자랐을 위인들이 어떻게 이런 곳을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절벽으로 이뤄진 고립된 지형의 고장이었지. 한 번 가 봤으면 금새 알게 될 거야. 단종의 심경이 어땠을지. 그 무렵 단종이 지은 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 하지.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 / 춘삼월 자규루에는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
슬픔은 더 남아 있었지. 친구의 선택에 따라 딸을 왕비로 보내야 했던 송현수는 바로 그 때문에 위험 인물이 돼서 친구에게 죽는다. 세조는 송현수를 죄 주라는 빗발같은 요청을 들으면서도 송현수를 붙잡고 “사람들이 네 얘기를 많이 하지만 나는 널 믿는다.”면서 술을 따라 주는 인자함(?)을 보이는데 이게 정말 친구에 대한 정이었는지 아니면 이조차 제스추어였는지는 모르겠어. 후자라면 정말 사이코패스. 결국 송현수는 하지도 않은 (내 생각) 역적 모의 때문에 목졸려 죽는다. 단종의 매형 정종이 능지처참당한 거에 비하면 시신은 온전하게 해 준 게 친구의 마지막 우정이었나 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송현수와 단종을 지지한 종친 금성대군이 죽음을 당한 후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 즉 역모가 있었고 일이 잘못된 것을 안 단종이 자결했다는 뉘앙스지.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모두 야사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임 여의옵고....” 시조를 읊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간 사약을 먹었다는 거나 통인이 목 졸라 죽였다는 거나..... 오래 전부터 이 야사가 진실처럼 돼 있었고 세조실록의 기록은 다 잡것들이 지어낸 것이라는 평이 조선 시대부터 있었지만 내막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나는 실록의 기록이 만에 하나 맞다는 전제 하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 자살은 아내를 보호하기 위한 단종의 마지막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거지. 아무 죄 없는 자신의 옛 친구 송현수마저 죽여 버리는 숙부의 살기의 다음 희생양은 자신의 아내일 수도 있지 않았겠어. 친동생도 죽이는 삼촌에게 조카 며느리 따위야.
단종의 죽음이 알려지자 어린 아내는 지금의 낙산 근처 동망봉에 올라서 통곡했다고 해. 얼마나 서러웠을까. 어려서 자신의 집에 놀러오기도 했던 풍채 좋은 아버지 친구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짧지만 정겨웠고 감옥 같았지만 그래서 애틋했던 궁궐에서의 남편과의 삶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영역에 들었고 그녀는 비구니가 되어 그로부터 근 70년을 더 산다. 그녀가 죽은 건 세조의 증손자인 중종 대의 일이었어.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등이 암암리에 도움을 주려 했지만 그녀는 완강히 받지 않고 몇 안되는 시녀들과 함께 염색을 해 내다 팔며 끼니를 이었다지. 이를 불쌍히 여긴 동네 아주머니들이 푸성귀라도 모아 주자 관에서 질색을 했고 이에 반발한 아주머니들은 아예 ‘금남’(禁男)을 내건 시장을 열었다고 해. 여자들끼리 시장 열어 물건 사고 파니 남정네들 출입금지. 물론 내막은 ‘왕비마마 돕기 아나바다’였지만.
그녀가 죽었을 때 중종은 대군 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러 주라 했고 그 무덤은 이후 단종이 복권되면서 ‘능’의 칭호를 얻는다. 그런데 그 능의 이름이 사뭇 슬프다. ‘사릉’(思陵) 뭐 여러 뜻이 있겠지만 상사병의 그 ‘사’자이고 보면 이름을 지은 사람들이 참으로 기구했던 한 여자의 생애를 그렇게라도 위로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강촌이나 대성리 MT 갈 때 지나치던 사릉역의 사릉이 바로 단종비의 능이다.
오랜 동안 비공개로 있다가 올해 1월부터 다시 유료 개방됐다고 하는군. 한 번 기회 닿으면 같이 들러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언젠가 얘기한 문경새재처럼. 기록에는 어떤 육성도 남아 있지 않은 왕비, 하지만 하고 싶은 말만큼은 태산만큼 많았을 왕비의 이야기를 바람결에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긴 사릉까지 갈 것도 없다. 낙산 동망봉 근처에만 가더라도 이리저리 그녀를 떠올릴 구석은 많이 남아 있으니.
< 진주성 혈전 >
임진왜란 3대 대첩이 아닌 것은? 하는 문제 기억나냐? 교과서 속의 3대첩은 행주,진주, 한산대첩이지만 행주 대첩의 지휘관 권율도 자신의 공으로 행주보다는 이치 전투를 들었고 그 외에도 ‘대첩’들은 많은데 꼭 그걸 3대첩이라고 정한 근거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물론 3대첩의 의미는 절대로 작지 않지. 한산대첩과 행주는 전번에 알려줬으니 생략하고 오늘 얘기할 진주성 전투로 들어가 보자고.
일단 충무공부터. 여기서 말하는 충무공은 이순신이 아니야. 역시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장군을 말하는 거지. 진주목사 김시민이야. 그는 오늘날 독립기념관이 서 있는 충청도 천안시 목천면 출신이야. 요즘 병천 순대로 유명.... 음 이 얘기할 때는 아닌 거 같고 아버지 김충갑은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퇴계에게서도 사사받았던 이름 높은 유학자였지. 그 형제들도 다 과거에 올랐다고 했으니 공자왈 맹자왈 소리와 먹 냄새가 집에 그득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집안에 좀 별종이 태어났으니 그게 김시민이야.
전설에 따르면 이 소년 김시민은 아홉 살 때 동네 가축들을 괴롭히던 큰 뱀 (이무기?)을 활로 쏘아 잡았다고 하고 수백년 뒤까지도 그 동네 사람들이 “김시민 장군이 활 쏘아 뱀 잡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하니 만만한 소년은 아니었던 것 같아. 이 소년은 문방사우보다는 활과 친했고 시를 쓰고 경전 읽기보다는 칼을 휘두르며 말 달리기를 더 좋아했어. 그래서 과거도 문과가 아닌 무과로 풀린다. 작가 김성한의 <임진왜란>에 보면 그 어머니가 노발대발하여 “문과 집안에 무과가 웬말이냐”고 하여 무려 10여년간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불 같고 칼 같은 성격을 자식에게 물려 준 모양이야.
군관으로 있던 김시민은 병조판서와 트러블을 일으키게 돼. 병조판서는 일도 일이지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면서 감히 판서 앞에서 하나도 기가 죽지 않는 군관에게 부아가 치민다. 그래서 아마 이런 류의 말을 한 거 같아. “대가리에 쓴 전립(조선 시대 군모)벗어 버려라. 너같은 넘이 무슨 군관이라고. 힘만 세고 미련한 놈은 장수 자격 없다.” 직장 생활에서 흔히 있는 깨짐이고 사후 욕 한 사발과 술 한 잔으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굴욕인데 김시민은 그야말로 하늘같은 판서 앞에서 깽판을 쳐 버린다.
그는 전립을 벗어 땅에 내동댕이치고는 밟아 버리면서 이렇게 부르짖었던 거야. “이 전립 따위가 아니라면 장부가 남에게 모욕 받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뭉개진 건 애꿎은 전립만이 아니었겠지. 병조판서의 위엄도 같이 짓밟힌 거지. 하늘같은 병조판서 앞에서 ‘배를 짼’ 김시민쯤 되면 판서에게 이렇게 얘기했을지도 모르지. “말조심하셔유 판서 나으리. 벼락이라는 게 하늘에서만 치는 게 아니우. ” 한동안 김시민은 백수가 된다.
그런데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고 전쟁 협박도 끊이지 않으면서 무관들의 남부 지역 배치가 이뤄지면서 김시민의 이름이 거론된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일으킨 난 때 참전했던 무장들은 거의 모두 기용된다. 이순신, 김시민, 원균, 이억기 등이 그 ‘니탕개 리스트’ 출신들이지. 그는 진주판관으로 임명돼서 진주로 내려간다. 그때 그의 부임 행차를 보고 모친은 김시민을 용서하고 만나 주었다고 해. “문관만 벼슬인 줄 알았더니 무관도 괜찮구나.” (김성한의 <임진왜란> 중)
즉 진주목사가 아닌 진주판관으로 진주에 온 김시민. 전쟁이 터지고 진주 목사 이경은 지리산으로 몸을 피했는데 판관도 그를 따라야 했지. 이경이 산에서 병사한 뒤 진주목사에 오른 그는 그때껏 쌓아온 무장으로서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 당시 왜군은 경상 좌도를 주로 장악하고 있었는데 점점 낙동강 넘어 서쪽으로 슬금슬금 발을 들이밀었지. 이들을 혼내 준게 경상 우도의 의병들, 즉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대였는데 김시민은 이들과 함께 연합작전을 펴며 고성, 창원 일대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격파해. 이런 일이 반복되자 경상도 주둔 일본군은 진주를 주목하게 된다.
“진주에노 조선군의 배후 기지이자 주력부대가 있다데스. 거기다 진주만 차지하면 젠라도로 진출하는 것도 대끼리 쉬워진다데스. ” 이렇게 돼서 진주성 공격을 위한 3만 원정군이 편성되게 돼. 지금까지 일본군이 소규모 선발대나 별동대의 낙동강의 잔물결이었다면 이제 대군의 쓰나미가 본격적으로 경상 우도를 덮치게 됐지. 이 부대를 이끈 왜장 호소가와 다다오키의 후손이 일본의 수상이었던 호소가와 모리히로라는 건 하나의 팁.
조선군의 주력부대가 있다는 건 일본군의 오버였어. 김시민의 휘하에는 3천 8백명 정도의 군대가 있을 뿐이었거든. 김시민이 꾸준히 훈련시키고 실전에도 여러 번 단련된 정예병이긴 했지만 일본군의 1/5에서 1/7 정도의 수였지. 일본군은 거침없이 진주로 쇄도한다. 그 와중에 창원에서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이끄는 조선군이 막아 봤지만 괴멸당해. 유숭인도 괜찮은 지휘관으로 이순신이 경상도 해역에 출동했을 때 유숭인이 1천여 기병대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난중일기에 남기기도 했지. 하지만 유숭인도 대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남은 군대를 이끌고 진주성 동문 앞에 이른 유숭인 부대는 당연하게 외친다.
“성문을 열어라. 경상 우병사 영감이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어. 군졸들이 경상 우병사 현신을 여러번 외쳐도 진주성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 마침내 경상 우병사 유숭인이 직접 나선다. “진주 목사 나오라. 나는 유숭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제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왜 성문을 열지 않는 거요?” 유숭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어. 이미 일본군은 뒷덜미를 움켜잡을 듯 다가서고 있었고 자신의 패잔병 부대는 더 이상 도망갈 힘도 없을 만큼 지쳐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시민은 성문을 열지 않아. “성은 제가 지킬 테니 밖에서 응원해 주십시오.” 병사는 종2품, 목사는 정3품. 벼슬도 병사가 위였고 특히 전시에는 병마절도사는 경상우도의 모든 병력의 총사령관이었어. 그러나 목사가 병사를 내쳐 버리는 순간.
만약 유숭인이 차후에 문제삼는다면 김시민은 전시 명령 불복종으로 참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어. 하지만 김시민은 고개를 젓는다. 유숭인이 거느린 1천 군대가 절실하기도 했지만 눈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려. 이유는 다양할 수 있겠지.
가장 큰 것은 자신이 조련하고 함께 싸운 군대의 지휘권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치명적이라는 계산이었을 거야. 창원성을 맥없이 잃은 유숭인의 역량도 미심쩍었을 게고, 유숭인 부대를 성에 들일 때 일어날 혼란 때 일본군이 들이닥친다면 싸우지도 못하고 성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도 감안됐을 것이고. 하나 더한다면 김시민은 일종의 시위를 한 것이지 않을까.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에 공황 상태에 빠졌던 성 사람들에게 “나도 목숨을 걸었다. 행여 성 사수에 방해될까 병사 영감을 내쫓았다.”는 메시지를 주려던 것이 아닐까. 유숭인 부대는 일본군에 포위돼서 전멸당한다. 일찍이 병조판서 앞에서도 배를 쨌던 김시민은 그 참혹한 최후마저 성 안의 사람들의 각오를 다지는 데에 이용했는지도 몰라. 이제는 싸울 수 밖에 없다.
임진왜란을 통틀어, 아니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현실주의자 곽재우, 후일 2차 진주성 혈전 때 지는 싸움은 안하겠다고 끝내 입성을 거부했던 그는 이즈음 진주성 지원에 나서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 마디 했다고 해. “온전히 성을 지킬 수 있을만한 계책이다. 진주 사람들의 복이로다.” 김시민은 용맹하고 불 같은 성격의 무장이었지만 곽재우의 현실 감각도 갖추고 있었어.
그는 화약 수백 근을 미리 만들어 놨고 심지어 일본군의 조총을 본뜬 개인화기도 만들어 놨으며 하다못해 끓는 물을 적에게 들이붓기 위해 물을 끓일 솥까지 걸어 두고 있었어. 행주산성은 사실 원치 않는 싸움터에서 어쩔 수 없는 싸움에 내몰려 악으로 깡으로 이긴 전투였다면 진주성은 임진왜란 중 몇 안 되는 준비된 공성전이었고 그 전투는 전쟁의 모든 양상을 다 보여 주게 돼. 마침내 1592년 음력 10월 5일 일본군이 진주성을 향해 치닫는다.
1592년 음력 10월 4일 진주성에 입성을 거부당한 유숭인 부대는 일본군과 성 밖에서 싸우다 전멸한다. 일종의 전초전이었다고나 할까. 성 안 사람들은 그 최후를 알았고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걸 직감했어. 진주는 경상 우도의 고을 가운데 거읍이기도 했고 호남으로 향하는 관문이었어 오늘날에도 남해고속도로가 진주를 통과하거니와 진주 다음은 하동, 하동 넘으면 바로 전라도 구례지.
일본군도 경상도 점령군 태반을 동원하거니와 조선군도 사활을 걸고 있었어. 일본군이 진격할 즈음, 일찍이 “일본이 쳐들어 올 리가 없습니다.”라고 장담했다가 죽음을 당할 뻔 했던 학봉 김성일은 경상도 초유사로서 사방에 전령을 띄워 의병들의 진주 집결을 호소해. 이에 곽재우를 비롯해서 경상도 의병은 물론, 최경회 등이 이끄는 전라도 의병들까지도 진주로 향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주의를 어지럽히고 기습으로 타격을 줄 요량이었지. 즉 진주성은 외로운 성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3만이라는 일본군의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
10월 5일 일본군의 주력이 진주성을 완전히 에워쌌다. 진주성 가 봤니? 남강을 해자로 삼고 쌓았고 평지성 같지만 지형을 잘 이용해서 공격이 그리 쉽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성이다. 물론 성벽 태반은 조선 시대 그 성벽이 아니지만 말이야. 일본군은 남강을 제외한 삼면에서 성을 바라보면서 칼을 갈았지.
아마 병졸들끼리는 내기도 했을 거야. 처음에는 “조선군이 도망을 간다 안간다.”로 내기했을 것이고 도망가지 않자 “함락하는 데에 하루 걸린다 이틀 걸린다.”가 이슈였겠지. 일본군 소부대가 아니라 작심하고 편성한 대규모 본대가 패한 적은 6개월 전 부산포 상륙한 이래 없었어. 그런데 일본군은 조선군이 예상 외로 많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김시민이 백성들에게까지 군복을 입혀 성 위를 돌아다니게 하면서 병력을 과장했거든.
대군 앞에서도 진주성은 조용했다. 일본군이 도깨비 가면을 쓰고 위력 시위를 벌여도 마치 사람 없는 성 같이 침묵을 지켰다고 해. 이건 그만큼 성민들이 긴장했다는 뜻도 되지만 성 전체가 일사불란한 통제 하에 있었다고 할 거야. 10월 6일 일본군은 읏쌰 읏쌰 거리면서 진주성 앞으로 쇄도해 왔어. 조선군은 고요히 있다가 적군이 가까이 왔을 때 화력을 퍼붓는다.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성능은 떨어지지만 근거리에서는 별 손색이 없는 승자총통이 불을 뿜었고 현자총통 등 대포들도 일본군을 한 번에 여러 명씩 날려 버렸지. 일본군은 간만에 뜨거운 맛을 보게 된다. 거기에 곽재우를 위시한 의병들이 계속 뒷덜미를 괴롭혔어. 자다가 모기 한 마리에게 당해 본 사람은 알지. 그 왱왱거림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 하물며 수십 명의 의병들이 이리 치고 저리 부수고 도깨비처럼 불쑥 나타나 칼질을 하고 도망을 하면 3만 명 전체가 피곤하게 되는 법.
또 한 바탕의 전투가 끝난 뒤 김시민은 준비시켜 뒀던 악사들을 문루에 올린다. 향수와 감정을 자극하는 구슬픈 가락을 왜군들에게 들려 준 거야. 사람이란 게 단순하다. 고향 생각 가족 생각이라는 건 마치 복병 같아서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사람 정신을 사로잡을지 모르는 거지.
진주성을 공격한 일본군의 지휘관 중의 하나였던 호소카와만 해도 대단한 애처가로 유명했다고. 그 아내는 대단한 역적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스히데)의 딸이었지만 끝내 이혼하지 않고 버텼고 전쟁 중에도 무수히 러브 레터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지. 장수도 그럴진대 병사들은 어땠겠어. 공성전을 준비하는 와중에 김시민이 악사들을 대기시켜 둔 이유였지. 심리전. 뭐 별 것 아닌 것 같다고? 심리전은 원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슬금슬금 힘을 빼는 권투의 보디 블로우 같은 거야. 북한이 삐라 풍선에 저렇게 악을 내는 거 보라모.
“제기랄 달이노 밝다. 마누라하고 애새끼들은 잘이노 있겠지.” “하 저 조센진들 음악은 내 마음 같소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일본군 지휘부도 당황한다. 이것들이노 지금이노 우리를 놀리고 있지 않소까. 하지만 산전수전 겪은 일본군들이 이 정도에 당황하진 않았어.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심리전으로 진주성의 피리 소리에 맞선다. “아이들이노 끌고 와라데스.”
포로로 잡힌 조선 아이들이 끌려왔어. 그들에게 경상도 사투리까지 구사할 줄 아는 일본군들이 나서서 할 말을 교육시켰지. “느그 무슨 말을 하나 하모 말이다. 조선 팔도가 다 일본군한테 넘어갔는데..... 따라해 봐라. 옳지. 조선 팔도가 다 넘어갔는데 새장 같은 성에서 지끔 뭐하십니꺼. 외아라. 빨리 나와 항복하이소. 이대로 하는 기다. 허튼 소리 하는 자슥은 바로 모가지 뗀다. 내가 조선 사람으로 보이재? 나는 대마도 사람이다. 내가 딱 듣고 있을 기니까 알아서 해라.”
그런데 왜 아이들이었을까? 어른 포로가 없어서? 그건 아니었을 거야. 일본군 또한 심리전을 편 거야. 주변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해도 애가 다쳤다고 하면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게 사람들 마음이야. 아직 변성기도 안 지난 아이들이 쨍쨍거리며 항복하세요. 다 끝났어요 외치게 하는 게 훨씬 더 성 안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고 여긴 거지. 아이들은 성문 밖을 돌며 울부짖는다. “항복하이소. 아저씨들 제발 항복하이소.”
당연히 성 위의 조선군들은 울컥할 수 밖에 없었어. 우선 아이들이 불쌍했을 것이고 그 마음이 넘어서면 화가 났을 거야. 아기들 울음에 젖 물리다가 결국은 짜증이 나듯이. “이 새끼들 확 고마. 그냥 칵 죽어뿌라. 택도 아인 소리 하지 말고!” 거친 욕설이 날았고 성미 급한 병사는 화살을 재기도 했어. 바로 일본군들이 노리는 상황이었지. 분노가 원칙에 앞서는 집단은 항상 패한다. 그래서 심리전이란 상대방의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정반대로 약을 올려서 분기탱천하게 만들거나 쌍방향으로 전개되지. 이때 김시민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다. “대답하지 마라. 소리치지도 마라. 어기는 놈이 있으면 목을 치겠다.” 명령은 구구전승으로 성벽을 돌았고 진주성은 다시 무거운 침묵에 빠진다. 대답 없는 선동만큼 무력한 건 없지. 일본군은 다시 총공격을 준비한다.
10월 8일 일본군은 벌떼같이 성벽에 달라붙는다 김시민이 단련했던 3800명의 조선군은 물론 돌 들 힘과 던질 깡이 있는 모든 조선 백성들이 성벽 위로 올라와서 일본군에 맞섰지. 여자들과 아이들은 쉴틈도 없이 싸워야 하는 병사들을 위해 나물과 밥을 비벼 일종의 전투 식량을 만들어서 성벽 아래로 날랐다. 진주 사람들은 이게 진주비빔밥의 원조라고 말하고 있지.
일본군과 조선군과의 혈투가 곳곳에서 펼쳐졌다. 이미 조선군은 전쟁 초기의 허술한 관군이 아니라 김시민 휘하에서 몇 번 전투를 치르며 승리를 맛보기도 한 군대였어. 총을 쏘고 포를 갈기고 화살을 퍼붓고 사다리를 밀치고 창으로 내리찍고 일본군은 악착같이 그를 피해 성에 달라붙었어. 조금도 밀리지 않고 싸우던 조선군이었지만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중 절망적인 외침을 듣게 된다. “화살을 아껴라. 화살이 부족하다.” 김시민이 가장 신경을 쓴 게 화약과 화살이었고 초유사 김성일로부터도 우선 지원받은 게 화살이었는데 워낙 대군을 상대하다보니 전투 며칠만에 화살이 바닥나기 시작한 거야.
김시양이라는 사람 (김시민의 서제(庶弟)라고도 하는데)이 쓴 자해필담이라는 책에서 김시민은 이렇게 개탄했다고 하네. “평화가 200년 계속되는 동안 백성은 군사를 알지 못하고 바람에 날리듯 무너짐에 감히 무기를 잡을 자 없도다.” 뭐 50년 동안 냉전 상태에서 대치하고도 잠항 능력 없는 잠수함을 사들이고 사격을 하는데 불발이 나는 대포로 전방을 지키고 있는 나라도 있지만 말이야. 어쨌든 200년 전쟁 없던 평화의 나라의 무장 김시민은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어.
그 가운데 으뜸은 역시 조선이 일본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던 화약 무기였어. 개인화기야 일본에 미치지 못했지만 일본군이 갖지 못했던 화포, 200년 전 최무선이 화약무기를 최초로 해전에 사용하여 왜구 함대를 불태운 이래 천자지자 현자 황자 등 다양하게 개량돼 왔던 그 화포. 김시민은 그 화포에 사활을 걸었고 무려 500근 (150근이라는 기록도)을 비축해 두고 있었지. 김시민은 화살이 떨어져 간다는 걸 알면서도 당황하지 않았어.
화살이 가장 많이 퍼부어진 건 왜군이 끌고 온 공성용 누각이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적이야 끓는 물 붓고 돌로 찍으면 되지만 누각 위에서 조총을 쏴 대는 적병들을 상대하려면 화살을 쏠 수 밖에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왜군은 누각에 물을 끼얹어 불화살도 먹히지 않게 만들어 놨지. 김시민이 필사적으로 긁어모으고 만들어 놓은 화약은 이때 빛을 발한다. “현자총통! 누각을 겨눠라. 누각을 부숴라. ” 일본군 조총병들도 아가리를 내민 화포를 움직이는 조선군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지만 조선군의 손이 더 빨랐어. 화살 수백 발을 쏘아야 불이 붙던 누각들이 현자총통 한 방에 산산조각나서 무너져 갔다.
진주성은 남쪽은 남강으로 그리고 너머지는 개천과 해자 (성벽 주위에 판 못)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일본군은 공격을 쉽게 하기 위해 해자와 개천을 짚과 송판으로 메우려고 했어. 김시민은 웬만큼 짚과 송판이 쌓여 일본군이 걸어서 건널 지경이 되자 또 다시 화약을 사용한다. 장작더미에 화약을 넣고 불을 붙여 그 위에 떨어뜨린 거야. 그냥 장작불로만은 타지 않을 젖은 송판과 짚들도 화약의 폭발에 이은 화기에는 활활 불타 올랐고 일본군들은 그대로 불바다 속의 탄 생선으로 죽어간다. 일본군이 사다리를 조밀하게 엮고 그 위에 그물을 촘촘하게 둘러친 산대를 과시하며 성을 위압하자 조선군은 자루가 긴 낫과 도끼를 동원해서 벼 베듯 해 버렸고 격전의 와중에 화살을 잡아당기는 모양의 인형을 성벽에 세워 놓고 일본군의 총알을 집중시키는 변칙(?)을 쓰기도 했다.
임기응변이라는 것도 준비된 사람이 할 수 있는 법이지. 컨닝도 실력이 있어야 하고 말이야. 진주성 전투에서 발휘된 조선군의 역량은 의로움이나 용감함에서 나온 게 아니라 철저한 준비에서 나왔어. 전투 와중에 짚으로 인형 만들 시간이 있었겠어? 만들어져 있었던 거야. 김시민은 그런 식으로 상대방의 총탄 소비를 유도하고 이쪽의 장비를 아끼려고 했었던 거야. 앞서 1에서 얘기했던 짚단 인형들이 병력의 많음만 과시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이런 준비가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상관을 내치면서까지 자신의 지휘권을 지키려고 했던 거 아닐까. 김시민은 격전의 와중에 곳곳을 누비면서 병사들에게 물을 먹이고 눈물 젖은 호령을 하면서 사기를 돋웠어. “죽을 땅에 빠지고서야 살 길이 열린다고 했다. 싸워라. 싸워라.”
일본군은 일단 물러선 뒤 주변의 의병 소탕 작전에 나서. 숫자는 얼마 안되는 의병대 같지만 하도 귀찮게 하니 일단 이들부터 일소하고 보자는 마음이었지만 원래 대군으로 게릴라를 공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그렇게 소규모 전투 외에는 소강 상태를 보이던 날 밤, 일본군 진영이 갑자기 부산해진다. 횃불을 켜고 짐을 꾸리고 천막을 거두고...... 그러나 진주성은 환호하지 않았어. “왜놈들이 물러간다!” 성벽 위의 조선군들은 펄쩍펄쩍 뛰고 성내가 조용하지 않아야 마땅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하지만 일본군은 철수하는 게 아니었지. 아득한 옛날 트로이 공방전에서 그리스군이 철수하는 척 하면서 트로이의 뒤통수를 친 방식으로 진주성을 기습하려는 거였어. 조선군은 그걸 알고 있었지.
그로부터 몇 시간 전 한 아이가 진주성 북문에 뛰어든다. 며칠 전에 항복하라고 울부짖던 소년 중의 하나였어. 하나 까먹은 게 있는데 일본군들은 조선 팔도에서 사로잡은 아이들을 다 데리고 있었어. 즉 조선 팔도가 다 넘어갔다는 걸 과시하려는 심리전의 도구였지. 그 중의 한 아이가 탈출해서는 온 진주성민을 살리는 정보를 준 거야.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일 새벽에 총공격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식의 현란한 페인트 모션 뒤에는 반드시 강력한 한 방이 있게 마련이야.
한창 부산하던 일본군들의 횃불이 꺼졌다. 하지만 조선군들은 눈에 불을 켜고 어둠 속을 지켜 봤다. 무시무시한 침묵과 어둠의 밤. 수만 명이 뒤엉킨 전장이었지만 사방은 조용했어. 조선군들끼리 속삭이는 소리만이 들리던 새벽 3시경. 동문 쪽에서 어느 조선군의 외침이 어둠을 찢었어. “왜놈들이다.” 그리고 불화살이 날았고 어둠 속 곳곳에 불이 지펴지자 마침내 일본군들의 악에 받친 얼굴의 윤곽들이 드러났어. 일본군 3만의 전원 돌격이었어. 마지막 전투라는 예감이 조선과 일본군 양쪽 모두에게 들었을 거야. “도쯔께끼!!!!” (돌격) 요쯔니 시데 즈가와스조! (토막을 내 주겠다) “막아라.” “온다!!!!!”
주공은 동문. 어둠 속에서 일본군은 새까맣게 성벽에 달라붙었어. 원래 공포와 위기감에는 날개가 돋는 법이야. 급박함을 직감한 성 안에서 잠자던 거의 모든 백성들이 성 위로 올라왔어. 김시민은 동문 근처 장대에서 목이 찢어져라 독전을 거듭했고 조선군과 백성들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싸웠어. 이제는 화살을 아낄 것도 없었고 화약도 있는 대로 불을 붙여 던졌다. 인해전술로 성벽에 달라붙는 일본군에게는 화포도 무용지물. 결국은 백병전으로 화할 수 밖에 없었어. 준비한 돌이 떨어지자 백성들이 관아와 민가의 기왓장을 벗겨 올라왔고 끓일 물을 대다 보니 성 안의 우물마저 말라 버리는 그야말로 결사항전.
그렇게 동문 쪽에서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북문 쪽에서도 변고가 생겼어. 성동격서. 동쪽에 집중하던 것 같은 일본군의 또 다른 본대가 북문으로 기어오른 거야. 대규모 병력의 기습이었고 동문에 집중하던 조선군의 허점을 찌른 탓에 조선군의 전열이 무너져. 마침내 진주성 성벽에 일본군이 오르는데 성공한다. 성벽에 적병이 오른다는 건 하나의 점이 성벽에 찍힌 거야. 그 점들이 많아지면 선이 되고 선이 모여서 면이 된다. 그리고 그 면이 점점 넓어지면서 성문이 뚫리는 거야. 절체절명의 상황. 북문의 조선군들이 흩어져 도망하기 시작해.
하지만 아직은 진주성이 일본의 것이 될 운명이 아니었지. 도망가는 병사들 사이에서 비명과 호령이 동시에 울려 퍼졌어. 북문 수비대장 최덕량이 칼을 휘둘러 도망병의 목을 쳐 버린 거야. 그리고는 호령을 했겠지. “어디로 도망갈 거냐. 진주 남강에 고기밥이 될 거냐. 촉석루에 목을 매달 거냐. 나는 차라리 왜놈 몇 명을 죽이고 죽겠다.” 그렇게만 했으면 대세를 바꾸기 어려웠을 거야. 최덕량은 군관 이눌 , 윤사복 등을 거느리고 성벽을 점거하기 시작한 일본군에게로 단신으로 뛰어든다. 이에 병사들의 발길도 돌아서. 맞다 씨바 이왕 죽을 거. 성벽 위에 올라 반자이 부를 기세이던 일본군들은 별안간 돌아서서 덤비는 조선군에게 삽시간에 썰려 나간다.
그 시간 김시민에게 운명의 시간이 닥치고 있었지. 북문과 다름없이 육박전이 벌어지던 동문 근처에서 분투하던 그를 노리고 쏜 저격병의 총탄에 이마가 뚫리고 만 거야. 당시 일본군에는 이런 임무의 특수부대가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 2차 진주성 전투 때 지휘관 황진도 똑같은 방식으로 전사하니까. 김시민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곤양 군수 이광악이 대신 독전하며 버텼지.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성 밖을 내닫으며 그악스럽게 도쯔께끼를 외치던 일본군 장수 하나가 이광악의 눈에 들어왔어. 이광악은 남은 화살을 그에게 집중했고 쌍견마 (쌍으로 끄는 말)을 타고 달리던 일본군 장수의 심장에 화살이 꽂혀 버린다. 후일 진주성에서 죽은 일본군 장수만 수백 명이라고 일본군 스스로 떠벌였지만 그 중에서도 꽤 중요한 장수였음은 분명해.
마침내 진주성에서 일본군은 물러선다. 하지만 조선군은 추격하지 못했지. 이쪽도 지칠대로 지친 데다가 김시민이 총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야. 달포 후 김시민은 끝내 세상을 등진다. 진주 사람들은 어버이를 잃은 듯 통곡했다고 해. 먼 훗날 김시민의 조카가 진주 지역을 찾았을 때에도 진주 노인들은 김시민 장군을 그리워하며 눈물지었다고 하니 사람들의 소회가 어떨지를 알 수 있겠지. 그 마음이 수백 년에 걸쳐서도 격세유전이 된 걸까. 얼마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지. 어떤 경로로 흘러들어갔는지 모르되 김시민에게 내리는 공신 교서가 일본 동경의 경매물 목록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어. 진주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사람들이 돈을 모아 이 공신 교서를 국내에 들여왔던 거야.
배알이 뒤틀이면 병조판서 앞에서도 “네가 판서면 판서지!” 하는 양 자신의 군모를 짓밟아 놓는 배짱이 있었고 그 불같은 성미와 더불어 물같은 침착함과 준비성이 있었던 또 하나의 충무공 김시민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일본으로 건너가 있던 자신의 공신 교서를 다시 받아들고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네. 오늘날 진주 시민의 날은 10월 10일이다. 1592년 음력 10월 10일 진주 전투가 끝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