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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옛 한국 사진 5
Gahoe-dong, 嘉會洞 Seoul 1954
1954년 가회동 지금의 북촌 서울, 사진 오른편 삼청공원,
9시 방향 경기고등학교(현 정독 도서관)강당이 보인다.
사진 임인식 종군사진가 항공사진
(옛날 이황렬이가 가회동에 살았는데....)
Gwanghwamun 光化門 Seoul, 1954~1956
광화문 앞 전차, 뒤에 보이는 인왕산, 오른편 중앙청 담이다.
1954년 3월부터 1956년 7월까지 전북 군산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했던 영국인 의사 존 쉘윈 콘스(John Selwyn Cornes) 박사가
촬영한 사진을 모은 ‘콘스가 본 1950년대 한국’을 발간.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때 저 전차를 타고 다녔던 생각나네요..)
남대문로 [Namdaemun-ro, 南大門路] Seoul, 1954
1954년 3월부터 1956년 7월까지 전북 군산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했던 영국인 의사 존 쉘윈 콘스(John Selwyn Cornes) 박사가
촬영한 사진을 모은 ‘콘스가 본 1950년대 한국’을 발간.
왼편 한국은행, 상업은행 오른편 중앙우체국(경성우체국 건물)
전후 어느 정도 정비된 모습
[Jongmyo Shrine, 宗廟] Jonro, Seoul 1954
1954년 종묘 부근 항공 촬영사진 임인식
Yongsan, Seoul, Korea, 1954
용산龍山 1954년 우측이 남산
용산은 한강의 사주였던 곳이다.
용산구와 마포구의 경계를 이루며 한강과 만나는 봉우리로서,
용두봉・용머리라고도 한다.
지명은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백제 기루왕 21년(97) 4월
한강에 두 용이 났다고 해서 용산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형이
용이 서리어 있는 형국이라한 데서 생긴 이름이다."라고 한다.
고려 말 과주(果州, 시흥군)에 속했던 곳으로 한양부로 불리었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말에는 용산방 지역이
되었다. 1896년 한성부 용산방으로 시작하여 191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1911년 용산방이 용산면이 되었다. 1914년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
→영등포출장소 이속, 경성부 용산출장소(치소-신계동, 청엽정1~3
정목, 원정1~4정목, 금정, 미생정, 경정, 대도정, 영정, 청수정,
산수정, 암근정, 도화정, 강기정, 삼판통, 한강통, 마포동, 이촌동),
용산면의 일부는 고양군 용강면으로 개편되었다.
1751년(영조 27)의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서부 용산방에 속한
계를 보면, 마포계 · 청파1~5계 · 만리창계 · 맹덕리계 · 상정리계
등 21계가 있었으며, 오늘날 용산구 일부와 마포구 일부를 관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864년(고종 2)에 반포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이때 용산방
은 서부에 속하여 20계를 관할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용산구
지역인 한강방과 둔지방은 남부 성외에 속하였다. 이후 1911년
용산방은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이 되었고, 한강방과 둔지방은
한지면이 되었다.
1913년 용산면과 한지면은 서부에 편입되었다. 나머지 지역은
고양군 관할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경성부와
고양군 지역이 되었고, 1936년 고양군 한지면의 이태원정 · 한남정
· 보광정 · 주성정 · 동빙고정 등이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43년
용산구가 되었으며, 1944년 용산구 일부와 서대문구 일부를 갈라서
마포구를 신설하였다.
1975년 한남동 동북쪽 일부 지역을 중구 신당동에 이관하고,
서대문구 만리동1가 · 만리동2가 일부, 중구 동자동 · 도동
일부를 편입하였다.
*
을지로 [Euljiro, 乙支路] Seoul, 1950's
1950년대말 시청에서 바라본 을지로 입구
여기 저기 건물 공사 중이다. 1973년 롯데호텔이 들어선 자리에
작은 점포들이 모여 있다. 1979년 롯데백화점이 개관하면서
이곳은 서울의 중심로 자리잡았다.
혜화동 [Hyehwa-dong, 惠化洞] Seoul, 1954
사진 임인식(林寅植 1920-1998)
혜화동 로터리와 대학천이 흐르는 동숭동 카톨릭 의대
흥인지문 [興仁之門] Seoul, 1954
사진 임인식 1920-1998
(동대문 옆에 전차가 뚝섬까지 연결되어있어 국민학교때는
가족과 함께 전차를 타고 뚝섬에 가서 배를 타고 봉은사절에 가서
절밥을 먹고 온 기억이 납니다.)
흥인지문 [興仁之門] Seoul, 1954
사진 임인식
동대문 우측 전차 차고
신촌 [Sinchon, 新村] Seoul, 1950's
사진 김한용
이화여대 입구
Seoul 1950's 1950년대 서울
서울역 광장 Seoul, Korea, 1950's
선유봉 [仙遊峯, Seonyudo] Seoul, 1950 's
강건너 편은 성산동, 가시철조망을 보면 암섯채취가 꽤 진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제의 선유도 공원자리, 1900년 이전까지는 육지였다.
2002년 선유도 공원으로 개장.
신선이 놀랄정도로 빼어난 경치라는 뜻이다. 관악산과 청계산의
서뽁 물과 광교산 수리산 소래산의 북쪽 물을 몰고 온 안양천이
산자락을 휘감으며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솟아난 산봉우리였다.
이 산자락 강변에 서울로 가는 큰나루와 안양천으로 가는 작은
나루가 양화나루이다. 당시 지명이 양천현 남면 양화리였기
때문이다. 선유봉은 두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었고, 중국
황하의 저주봉과 비슷하다고하여 저주봉이라고도 불리웠다.
양년대군은 만년에 이곳에 영복정을 짓고 한가롭게 지냈다고 한다.
1900년 이후 여의도 비행장과 한강 홍수 예방을 위한 둑을 쌓기
위해서 돌을 채취하였다. 1925년 한강대홍수 이후 치수관리를
위해 둑을 쌓는다고 선유봉 주민들의 이주, 1945년 이후 서울
서남부에 수돗물을 공금하는 정수장이 있었다. 광복이후 미군이
인천가는 도로를 만든다고 골자재를 채취하였다.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마을로서, 선유봉 근처에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선유봉은 양평동4가 한강 변에 위치
하였던 봉우리로 산의 형국이 고양이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일명
고양이산・굉이산으로도 불렀다.
선유봉에는 용화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었는데 한국동란때 붙나서
소실, 그곳에 남은 미륵부처는 미군에 의해서 노량진의
극락정사로옴겨졌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여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1962년
양화대교를 건설할 때 깎아 허물어뜨렸기 때문에 지금은 그 옛
모습을 볼 수 없다.
1968년 시작된 한강개발로 골자재를 또다시 채취 현재의 옹벽으로
두른섬의 모양이 되었다.
Seoul, 1950's
1950년대 한국은행 앞 로터리 전경
청계천 [淸溪川, Cheonggye creek] Seoul 1950's
(어렸을때 종로 5가 효제동에 살아서 청계천에 갔던 기억과
청계천 복개공사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필동 [筆洞, Pil-dong] Seoul, 1950's
남산에서 바라본 주변
조선 시대에 이곳에는 남부의 부사무소(部事務所)가 있어
부동(部洞)으로 불렀다. 그것이 와전되어 붓골로 바뀌었고,
이 붓골을 한자로 표기하여 필동이 되었다.
1954년 3월부터 1956년 7월까지 전북 군산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했던 영국인 의사 존 쉘윈 콘스(John Selwyn Cornes) 박사가
촬영한 사진을 모은 ‘콘스가 본 1950년대 한국’을 발간.
Seoul. 1954
사진 임인식(1920~1998)
(중앙청, 효자동에 있는 도상 도 보입니다.)
영등포 [永登浦區, Yeongdeungpo] Seoul, 1954
photo Jack Willams
Seoul, 1954
photo Jack Willams
서울역 앞 남대문이 보인다.
여의도 [汝矣島] Seoul, 1954
photo Jack Willams
여의도 가는 다리, 오른편이 여의도 방향이고 왼편이 강북
정면이 지금의 강남방향이다.
명동 [Myeong-dong, 明洞] Seoul 1954
사진 임응식 [林應植, 1912 ~ 2001]
동작동 [Dongjak-dong, 銅雀洞] Seoul , 1955
1955. 6. 9 국군묘지 건설 모습
사진 국립서울현충원
조선시대에 용산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나루터의 하나였는데,
'동재기나루터'라고 불린 데에서 동 이름이 유래.
1953년 9월 29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군묘지 설치 확정
1954년 3월 국군묘지 착공 시작 3년에 걸친 묘역 조성, 1968년
말까지 공원화
1957년 준공되었으며 처음에는 국군묘지였다가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하였다.
자연마을은 크게 동재기와 정금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재기는
흑석동에서 현충원으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검붉은 구릿빛을
띤 돌들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재기 나루터는 서울에서 과천·수원·평택을 거쳐 호남지방으로
내려가거나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던 교통의
요지였다. 이수로터리를 지나 사당동 방면으로 정금마을이
있었는데, 정씨(丁氏) 성을 가진 감사(監司)가 살던 마을이라고
하여 '정감몰' 또는 '정가우'로 불렸다.
현충원 내에 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昌嬪安氏神道碑附墓所:서울
유형
지장사(護國地藏寺) 내에는 지장사철불좌상(地藏寺鐵佛坐像:
서울유형문화재 75)이 있다.
여의도 [汝矣島] Seoul, 1950's
비행장으로 사용되던 여의도 1945년 이후
조선시대에는 양화도·나의주 등으로 불렸다.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은 홍수에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 되어
여의도가 되었다고 한다.
1916년 이 곳에 간이비행장을 건설함으로써 섬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36년 김포비행장 건설 후에도 여의도비행장은
그대로 존속되어왔고, 광복 후에는 미군이 한때 사용하였다.
1968년에 서울시에서 윤중제(輪中堤)공사를 착공한 뒤 오늘날과
같이 상업·금융업무·주거지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의도공항 Youi-do Aerodrome - 한국 최초의 공항
1916년 일본에 의해 공사 착공 활주로와 격남고 공사 완료 10월
개장
1924년 조선비행학교, 일본 육군 비행장으로사용
1929년 4월 증설 한궁, 일본 만주 연결로
1945년 해방 직후 군용 비행장, 국제 공항등으로 사용
1953년 국제공항 승격
1958년 국제 공항 김포 이전 - 군전용 비행장으로 사용
1971년 폐쇄
1968년에 이르러 서울특별시에 의한 윤중제(輪中堤) 축조 및
신개발 사업이 착수되었다. 착공 반년 만에 윤중제가 완성되었고
이 섬의 복판을 가로질러 마포와 영등포를 직결한 6차선의 마포
대교가 1970년 5월 개통함으로써 신시가지 발전이 한층 가속화
되었다
압구정동 [Apgujeong-dong, 狎鷗亭洞] Seoul, Korea 1950's
강건너 금호동과 옥수동, 왼편 능선 나무숲 위치가 한명회 정자터와
압구정 느티나무
조선시대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韓明會)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붙은 이름이며, 옛 압구정이 있던 곳에서 북쪽의
옥수동과 금호동 일대를 바라보면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
(楮子島)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멀리 북한산 봉우리들까지
한눈에 들어와 중국 사신들의 접대자리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마포구 [Mapo-gu, 麻浦區] Seoul, Korea, 1950's
서강천에서 바라본 밤섬
마포구 [Mapo-gu, 麻浦區] Seoul, Korea, 1950's
서울 화력발전소, [ Danginlee Power Station ]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화력발전소로 설비용량 388MW이다.
1969년 이전에는 당인리(唐人里) 발전소라고 하였다.
1929년 6월 당시의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건설에 착수,
1930년 11월 1호기(1만kW)를 준공하여 발전을 개시한 이래
1936년 10월 2호기(1만 2500kW), 1956년 3윌 3호기(2만 5000kW)
를 완공하였다.
이후 수도권 전력 공급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전국적으로
전력사정이 안정권에 들어섬에 따라 노후시설인 1~3호기를
폐지하였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1971년 4월 4호기
(13만 7500kW)를, 1969년 4월 5호기(25만 kW)를 준공하였다.
한국 최초로 열병합발전을 시작하였고 2002년에는 배연탈질설비를
준공하였으며 도심의 매연 발생을 줄이기 위하여 LNG를 연료로
사용한다.
서울역 [Seoul station] Seoul, Korea, 1954
photo Bob Ferrer
밤섬 Seoul. 1954
사진 임인식(1920~1998)
인사동 [Insa-dong, 仁寺洞] Seoul, 1954
사진 임인식(林寅植 1920-1998)
북쪽으로는 관훈동(寬勳洞), 동쪽으로는 낙원동(樂園洞),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積善洞), 서쪽으로는 공평동(公平洞)
과 접해 있다. 조선 초기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
(堅平坊)에 속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당시 행정구역
개편 때는 원동(園洞), 승동(承洞), 대사동(大寺洞), 이문동(李門洞),
향정동(香井洞), 수전동(水典洞) 등이 인사동에 해당하는 지역
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사동,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승동, 원동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인사동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출장소 제도 신설로 경성부 북부출장소 인사동이 되었다가
1915년 6월 경성부 인사동이 되었다.
1936년 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됨에 따라 인사정이
되었으며, 1943년 4월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 인사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이 동(洞)으로 바뀔 때
인사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인사동은 행정동인 종로1·2·3·4가동
관할하에 있다. 인사란 지명은 관인방과 대사동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댓절골, 향우물골, 이문동, 원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댓절골은
큰 사찰인 원각사(圓覺寺)가, 향우물골은 우물 옆에 향나무가,
이문동은 순화궁의 이문(里門)이 있었다는 데 명칭이 연유한다.
149번지는 중종반정 때의 정국공신 구수영(具壽永)이 살던 곳으로,
조선 후기에 김흥근(金興根)의 소유였다가 헌종의 후궁 경빈이씨
의 순화궁(順化宮)이 되었다.
3·1운동 당시 33인이 모인 태화관(泰和館)이 있었으나 재개발사업
으로 헐리고 12층의 태화빌딩이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상가가 밀집되어 있으며, 축제로는 관훈동과 함께 1988년
부터 해마다 '관훈·인사동 전통문화의 마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종교기관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승동교회가 있다.
주요기업으로는 성신양회공업(주)의 본사가 있다.
Seoul, 1955
사진 김희중 (동양인 최초로 ‘내셔널 지오그래피’ 편집장을
지냈던 사진가 )
봉은사 가는 길 - 귀로(歸路)" 동아일보 특선작
현재의 경기고등학교교문 근처
당시 경기고교 1학년 이었던 김희중군이 지금 서울 삼성동
코엑스빌딩 앞 영동대교로 언덕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촬영
서울 숭례문 [Sungnyemun Gate, -崇禮門], Seoul, Korea, 1950's
여의도 [汝矣島,Yeouido] Seoul, Korea, 1955
여의도 비행장
조선시대에는 양화도·나의주 등으로 불렸다.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은 홍수에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 되어
여의도가 되었다고 한다.
1916년 이 곳에 간이비행장을 건설함으로써 섬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36년 김포비행장 건설 후에도 여의도
비행장은 그대로 존속되어왔고, 광복 후에는 미군이 한때
사용하였다. 1968년에 서울시에서 윤중제(輪中堤)공사를 착공한
뒤 오늘날과 같이 상업·금융업무·주거지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1968년에 이르러 서울특별시에 의한 윤중제(輪中堤) 축조 및
신개발 사업이 착수되었다. 착공 반년 만에 윤중제가 완성되었고
이 섬의 복판을 가로질러 마포와 영등포를 직결한 6차선의
마포대교가 1970년 5월 개통함으로써 신시가지 발전이 한층
가속화되었다
여의도공항 Youi-do Aerodrome - 한국 최초의 공항
1916년 일본에 의해 공사 착공 활주로와 격남고 공사 완료 10월 개장
1924년 조선비행학교, 일본 육군 비행장으로사용
1929년 4월 증설 한궁, 일본 만주 연결로
1945년 해방 직후 군용 비행장, 국제 공항등으로 사용
1953년 국제공항 승격
1958년 국제 공항 김포 이전 - 군전용 비행장으로 사용
1971년 폐쇄
여의도 [汝矣島,Yeouido] Seoul, Korea, 1955
여의도 비행장
조선시대에는 양화도·나의주 등으로 불렸다.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은 홍수에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나의 섬’ ‘너의 섬’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 되어 여의도가 되었다고 한다.
1916년 이 곳에 간이비행장을 건설함으로써 섬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36년 김포비행장 건설 후에도 여의도비행장은 그대로 존속되어왔고, 광복 후에는 미군이 한때 사용하였다. 1968년에 서울시에서 윤중제(輪中堤)공사를 착공한 뒤 오늘날과 같이 상업·금융업무·주거지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1968년에 이르러 서울특별시에 의한 윤중제(輪中堤) 축조 및 신개발 사업이 착수되었다. 착공 반년 만에 윤중제가 완성되었고 이 섬의 복판을 가로질러 마포와 영등포를 직결한 6차선의 마포대교가 1970년 5월 개통함으로써 신시가지 발전이 한층 가속화되었다
여의도공항 Youi-do Aerodrome - 한국 최초의 공항
1916년 일본에 의해 공사 착공 활주로와 격남고 공사 완료 10월 개장
1924년 조선비행학교, 일본 육군 비행장으로사용
1929년 4월 증설 한궁, 일본 만주 연결로
1945년 해방 직후 군용 비행장, 국제 공항등으로 사용
1953년 국제공항 승격
1958년 국제 공항 김포 이전 - 군전용 비행장으로 사용
1971년 폐쇄
여의도는 섬 아닌 섬이다.
여의도 [汝矣島,Yeouido] Seoul, Korea, 1955
여의도 비행장
여의도 [汝矣島,Yeouido] Seoul, Korea, 1955
여의도 비행장
Seoul, Korea, 1954
남대문 시장 대화재 현장 1954. 6. 23일 밤에 발생, 사진 중앙의
숭례문은 다행히 무사했다. 원표시 숭례문
1954년 1000여 개의 점포를 홀랑 태워버린 대화재가 났고, 68년에
도 775개 점포가 화재로 전소됐다. 68년 화재는 현재와 같은
남대문시장을 만든 계기가 됐다. 현재 남대문시장의 중심인
3층짜리 상가 세 개 동(C·D·E동)을 새로 지었던 것이다.
Seoul, Korea, 1950's
장통교 [長通橋]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長橋洞)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貫鐵洞)
11번지 사이의 청계천(淸溪川)에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
조선시대 5부 52방 가운데 하나인 장통방(長通坊)이 있던 자리라
하여 장통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리 근처에 긴 창고가 있었다
하여 장창교(長倉橋) 또는 장찻골다리라고도 하고, 장통교를
줄여서 장교로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의 장교동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480년 이전에 설치되었고,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
造)’와 ‘기해개조(己亥改造)’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차례
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리에는 교각이 없었고, 1929년
홍수로 인해 붕괴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하였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중앙과 지방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보던 경주인
(京主人)들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개화파의
선각자적 역할을 수행한 유대치가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다.
남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르는 창동천(倉洞川)과 중구 회현동
(會賢洞)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가 소광통교(小廣通橋)에서
만난 뒤, 다시 남산동천의 물줄기와 합해져 청계천의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이 장통교가 있던 자리이다.
Seoul, Korea, 1950's
사진 김천길
1963년 2월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숭례문 옆)에 근로자식당
‘보리싹’이 문을 열었다.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가 마련한 30평 규모의 이 식당에는
하루 2000명의 노동자가 찾아와 국수로 주린 배를 채웠다.
‘빵과 영혼을 아울러’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곳에서는 일반 식당에서
파는 양의 2배 정도 되는 100g의 국수를 3원에 제공했다.
오전 10시와 오후 3시, 배식 시간이 가까워오면 서울역 인근에서
일하는 지게꾼과 손수레꾼 등 영세근로자 수백 명이 식당 앞에
길게 줄을 섰다.
이 국수를 먹기 위해 영등포 등 변두리에서 일하던 근로자들도
서울역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이곳에서는 남루한 근로자들에게
옷도 나눠주고, 일자리까지 알선해줬다.
Seoul, Korea, 1950's
사진 김천길
1950년대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 아래에는 뱃놀이를 할 수 있는
보트클럽이 즐비했다. 당시 한강변 유원지는 이곳과 광나루교
(현 광진교) 아래 두 곳뿐이었다.
한강인도교 아래 보트클럽이 처음 개장한 것은 1924년. 그해 7월
31일자 한 일간지에 ‘조선 유일의 보트클럽 본부를 한강인도교
아래에 두고, 보트 애호가들의 편의를 돕는다’고 나와 있다.
당시에는 보트를 ‘뽀트’라는 된소리로 표기했고, 영어 ‘클럽
(club)’을 일본식 음역어인 ‘구락부(俱樂部)’로 써 ‘뽀-트 구락부’
라는 간판들이 붙어 있다.
Seoul Korea, 1954. 1955
Photographer Jack Willams
중앙청...(지금은 광화문이 있는 자리)
Seoul Korea, 1954. 1955
Photographer Jack Willams
용산 龍山 Yongsan Seoul, Korea, 1955
용산구 이촌동에서 인도교를 건너 노들섬(중지도)에 닿으면
아래로 계단이 있어 내려가면 유원지가 보였다.
유원지에는 보트장과 수영복을 빌려주는 노점이 많았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언덕이 흑석동이다.
한강의 중앙부에 뚝섬·중지도(中之島)·여의도·난지도(蘭芝島)
등의 하중도(河中島)가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1960년대까지
는 모래땅이었으나 1970년대에 대부분 도시화되었다.
한강대교 북쪽, 한강변 좌우에 위치한 이촌동은 조선말까지도
모래벌판이었다. 여름에 큰 장마가 지면 강 가운에 섬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홍수를 피 해 강변으로 옮겼던 관계로 동명도 이촌동
(移村洞)으로 불려지다가 일제때, 二村洞으로 개칭되었다.
이촌동도 조선초에 한성부의 城저십리에 속했으나 영조27년
(1751년)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사촌리계·신촌리계로
칭하다가 갑오개혁 때 서서 용산방(성외) 사촌리계의 사촌리,
신촌리계의 신촌동으로 되었다.
1911. 1. 4일, 일제는 이촌동 지역 중에서 신초리를 경기도
경성부 한 지면으로 편입하고 나머지는 용산면에 소속시켰다.
1913.12.11일(부령 제11 호)에 경성부 서부에 편입하고, 1914.
4.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경성부 이촌동 으로 하였다. 1936년에
이촌동은 이촌정으로 개칭되고 1943. 6.10 용산구에 속했다가
1946. 10. 1일 이촌동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촌동에서 양율으로 이어지는 한강대교 중간에는 노들섬
(구 중지도)이 있다. 이 섬은 전에 납천정리라고 했는데, 이는
이 마을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어서 이 우물을 관중에 상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한강대교가 가설되 면서 폐동되고 우물도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노들섬은 체육공원으로 가꾸어져 있고, 한강에서
낙하산 훈련중 동료를 구하고 추락사한 이원등 상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여의도 [汝矣島] , Seoul Korea. 1950's
여의도 [汝矣島] , Seoul Korea. 1950's
Seoul, Korea, 1954
Photographer John Star
Gimpo International Airport (김포공항)
Seoul, Korea, 1954
Gimpo International Airport
압구정동 [Apgujeong-dong, 狎鷗亭洞] Seoul, Korea, 1950's
압구정동의 변화는 강남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도성은 한강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기에 매년 반복되는
물난리로부터 안전했고, 도성에서 한강에 이르는 성 아래 십리에는
금산제도가 실시되어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쉬운 지역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구릉지 몇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다.
따라서 겸재 정선에 나타난 압구정동 일대의 풍경은 1970년대
강남개발을 본격화하기 전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압구정의 첫 번째 변화는 한강변에 건설된 강변도로에서 시작
되었다. 강남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매년 반복되는 홍수 피해를
막는 것이 필요했고, 이는 곧 한강변 제방 건설로 이어졌다.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건설된 제방위에 건설된 도로가 강변도로
였다.
1971년 8월 15일에 개통된 제1한강교에서 압구정동에 이르는
강변5로와 압구정동에서 천호동에 이르는 강변6로 구간이
건설되면서 해마다 반복되던 강남의 홍수피해가 사라지고 영동
지구 개발이 촉진되었다. 이 때 압구정이 위치했던 구릉이
사라지고, 저습지는 매립되고, 제방 안쪽에 위치한 공유수면도
매립되었다.
1968년 현대건설에서 52,920평에 대한 매립허가를 받았고,
이 부지에 오늘날 강남 아파트의 대명사가 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토석이 필요했고, 인근에서 토석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언덕을 깎았고, 압구정동 건너편에서 중량천이
한강으로 합류하는 곳에 위치했던 저자도가 파헤쳐져 압구정동
매립공사에 사용되었다.
영동대교에서 성수대교와 한남대교에 이르는 지역이 오늘과 같은
강남을 대표하는 아파트 단지로 구성된 것은 1976년 서울시가
강남 지역에 대한 토지투기를 막고 아파트 건축을 장려하기 위해
이 지역 50만 평[1652892.56㎡]을 아파트만 지을 수 있는 아파트
지구로 지정하면서 부터이다.
한편, 성수동과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는 한 때 제2잠수교
로 건설될 계획이었으나 착공 후 계획이 변경되어 오늘과 같은
여느 한강 다리와 같은 모습으로 건설되었다. 동시에 압구정이
위치했던 언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흥인지문 [Heunginjimun Gate, 興仁之門] Seoul, Korea, 1954
Photographer Peter Schenberg
흥인지문 [Heunginjimun Gate, 興仁之門] Seoul, Korea, 1954
Photographer Peter Schenberg
흥인지문 [Heunginjimun, 興仁之門] Seoul, Korea,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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