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민족통일의 꿈을 그려본다
信天함석헌
전제 조건
문제에 들어가서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이 내 하는 말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그 전제 조건이라 해도 좋고 서론이라 해도 좋은, 그런 것을 간단히 말씀하렵니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씨알의 자기교육입니다. 둘째는 국가관의 혁신입니다. 셋째는 정신주의의 강조입니다. 이것은 나의 신조요 주장입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대해 무슨 문제를 말해도 이 세 가지는 늘 그 생각의 밑바닥에 들어있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물론 완전하단 것도, 고정 불변 하단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달라질 때는 달라지더라도, 지금은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통일문제도 이 세 가지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씨알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십년 전부터,매우 초라하나마, 월간지를 내면서 말을 하고 있으니 새삼 설명할 필요도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민족의 통일을 생각해 보는 이 자리니만큼, 인간의 자기해방 없이는 그것은 있을 수도 없고, 또 설마 있다 해도 참 의미의 통일일 수는 없다는 것만을 말해 둡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하는 것이 생명의 근본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통일은 모든 씨알의 자주 독립과 창조적 생활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또 그것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통일은 씨알이 씨알 자체를 위해서 제힘으로 스스로를 통일하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의 말을 셋째번의 정신주의 강조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민족통일의 대사업은 거룩하고 높은 우주적 정신으로 뚫린 씨알 아니고는 성취될 수 없고, 또 그대신 그러한 위대한 정신의 역사적 실현이 만일 없다면, 통일은 겉으로는 아무리 굉장해 보이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단숨에 내리달아 수천 년 발달해 온 인간의 촌락을 무참히 다 밀어 무너뜨린 후 제 스스로도 맥없이 흩어져 녹아 버려 간곳을 모르게 되는 눈사태와도 같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는 큰일에서거나 작은 일에서거나, 오직 스스로 하는 씨알의 마음과 그것을 통해 실현되는 영원불멸의 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정신적 존재입니다. 물질 속에 나서 물질을 먹고 자라지만 나중에는 물질을 초월해 정신을 드러내잔 것이 사람입니다. 정신이란 것이 만일 없다면 삶도 죽음도, 분열도 통일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두더지에게 38선이 어디 있으며 승냥이에게 통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도무지 다 생각하는 마음의 장난입니다. 아닙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창조요 사람이지. 주관도 개관도 없습니다.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자기를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의미란 것이 무슨 연극의 각본처럼 미리 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씨알이 그렇게 역사를 붙잡아 보는 것입니다. 붙잡는 것도 나요 붙잡히는 것도 나 입니다. 그러나 나라 하는 순간 나는 벌써 없습니다. 없지만 그것을 내놓고 또 나란 것이 어디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나란 것이 문제꺼리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이것입니다. 이 생각하는 나란 것이 있게 되면서부터 진화의 과정에는 새로운 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정신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 진화의 전체 과정에서 보면 지극히 최근의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에 미친 영향은 지극히 큽니다. 글워리가 있기 전 시대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종교, 철학, 예술, 일용살림에 쓰는 기구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그 정신의 세계에 대한 목타는 찾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좀 다른듯 하지만 그 깊은 속에서는 여전히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세에 와서 과학이 발달하면서 잘못된 판단으로 거기 반대하는 사상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현실만이 참이고 보이지 않은 정신이란 허망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이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워져, 우리는 지금 그 정신세계 무시에 대한 잘못의 결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구폭발, 핵전쟁의 공포, 천연 자원의 고갈, 각종 공해가 다 그런 것들입니다. 통일의 꿈을 그리려면서 정신주의를 먼저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민족분열이 깊은 원인은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진정한 민족통일의 올바른 방안도 여기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밖에서 오는 세력 싸움에 못견디어 민족이 둘로 갈린 것은 남의 식민지가 됐기 때문인데 그 식민주의의 악한 정치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정신본위의 사상을 미신이라 밀어치우고 노골적인 약육강식을 당연한 진리로 숭배하는 서양식 정치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통일문제는 결코 정책이나 학력 문제만이 아니고 정신주의의 새로운 문명문제입니다. 그런데 민족의 분단이라는 이 인류적 죄악의 본고장인 서양에서는 근래에 차차 반성의 빛이 보이는 듯도 한데 그 악한 물길주의 정치에 희생이 된 우리 자체 속에서는 도리어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고 통일을 말해도 그저 정치적 외교, 경제, 군사 문제로만 알고 있으니 참 답답합니다. 우리 자신을 너무 싸구려로 팔아넘기려 합니다. 우리의 받은 치욕과 고난은 그저 한 정치적 주권 밑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도 크고 너무도 계시적입니다. 우리는 그저 휴전선만을 없애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나갈 새 길을 열어야 합니다.
국가관의 변혁
그러나 대가 오늘저녁 여러분 앞에서 정말 힘을 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둘째번의 국가관의 혁신입니다. 이것을 중가운데 넣은 것은 이 국가생활이 씨알과 정신 두 사이에 있어서 역사의 몸통 전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비유해 말한다면 하나의 피라미드와 같습니다. 씨알 피라미드의 밑바닥, 정신을 그 꼭대기라 한다면, 국가는 몸통 전체입니다. 깊은 뜻으로 한다면 밑바닥이나 꼭대기가 더 중요합니다. 그 둘만 결정되면 설계는 벌써 다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지로 볼 수 있게 현실 속에 실현하는 것은 실지 건축입니다. 그 의미에서 역사에서 실지로 문제되는 것은 정치적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관이 잘못되면 통일이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피라미드 그림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현실적인 입장에서는 보통대로 놓습니다. 그때는 국가의 주인인 씨알은 넓게 깔려있고 권력은 높아질수록 약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점이 되었다가 없는 지경에 가서 정신계에 통하게 됩니다. 반대로 정신적인 입장에서는 거꾸로 놓아 밑이 한점이고 꼭대기가 넓어야 합니다. 거기서는 정신이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터가 하늘에 가있고, 그 국가에서는 국민을 수로 보지 않기 때문에 한 점으로 표시됩니다. 하나의 씨알 속에서 나라 전체를 보기 때문입니다. 물질계에서는 밑이 넓은 것이 안전하지만 정신에서 보면 현실에 닿는 면이 점뿐입니다.
그러면 국가관의 혁신이라는 것은 무슨 뜻에서 하는 말입니까? 나는 현대국가는 강대, 약소, 공산주의, 자유주의 할 것 없이 다 같이 낡아버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어졌다, 그 말입니다. 왜 그런가? 인간은 훨씬 자랐는데 국가는 거의 태고시대의 그 국가대로 있단 말입니다. 무엇이 자란 것입니까?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를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완전하다 할 수는 없고, 깊은 의미에서 한다면, 일생 두고 찾아야 할 것이지만, 그러한 종교적 철학적 의미에서 하는 말은 그만두고, 아주 통석적인 말로해서, 자기도 하나의 인간이로라는 생각을 한다는 의미에서 입니다. 종족적·사회적으로 자라는 것도 개인의 자라는 것에 비해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 때에는 아직 자기라는 생각을 할 줄 모르나 차차 지각이 늘어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그 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의 민족으로도 그렇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사회적 본능에 따라 공동체의 살림을 했지만 어느 정도의 발달 단계에 왔을 때는 개인적인 자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긴 역사를 한 눈으로 굽어본다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지만, 결국 국가와 개인의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점점 더 개인의 이김으로 돌아가고 있는 싸움입니다. 개인이 이겼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해서 생각하는 인간이 습관으로 되는 제도를 깨뜨려 간다 그 말입니다. 국가관이 혁신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던 말을 잠깐 멈추고, 국가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국가라 할 때에 우리는 두 가지 말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國家)’고 또 하나는 ‘나라’입니다. 글자 뜻으로 한다면 한문과 국문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는 뜻을 본다면 나라라 할 때와 국가라 할 때가 서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나라는 보다 더 사회적인 대신에 국가는 순전히 정치적인 것 입니다. 나라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연발생적으로 발달해 온 것인데 대해 국가는 어느 때 어떤 특정인들이 생각해서 만들어내어서 전체 위에 씌운 것입니다. 사람의 사람 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되기 전에도,동물 식물에까지도, 어느 정도의 뜻이라, 감정 라 할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본능(本能)이라고 합니다. 그 본능은 놀라리만큼 목적에 꼭 들어맞게 되어있습니다. 그것도 어떤 마음, 혹은 생각에서 나온다고 해야 하겠지만,아직 우리가 알기로는 그런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생각은 숨은 생각이 유전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거기 대해서 사람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서 자기가 생각하는 주체인 것을 생각하면 서 생각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간단한 지능에서부터 오묘한 정신에까지 이르는 인간의 모든 심리적 발달의 근본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본능이라 하지 않고 사색(思索)이라 하며,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을 문화(文化)라고 합니다. 문(文)은 주어진 바탕(質)에 대해서 사람이 생각해서 그 바탕 위에 돋친 글워리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랑은 여기 있습니다. 자연에서, 혹은 하나님에게서, 받아가지고 나온 밑천에 제 생각을 더하여서 그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드러내어 그것을 더욱 빛나게 했다는데 그 보람을 느끼는 것 입니다. 그것을 우리 정치생활에서 말한다면, 인간은 나라에서 국가로 자라 올라온 것입니다. 만일 나라란 명사를 그대로 쓴다면, 신화적인 나라에서 이성적인 나라로 올라왔습니다. 물론 신화에도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어느 의미로는 신화는 태고시대의 과학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생각함으로 인해서 나온 것이기는 하면서도 감정이 주지 후대의 사람 모양으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주체의식을 넉넉히 가지지 못했다는 것과, 따라서 비판적인 이성의 작용이 아직 약했다는 점에서 원시적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말하던 본래의 줄거리인 국가관의 변혁 문제에 다시 돌아갈 단계에 왔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에 따라서 보면 인간이 나라 살림에서 국가 살림으로 들어간 것은 확실히 발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발달입니까? 인간은 신화시대의 고정된 전통의 권위주의적 제도에 대해서 눈이 떠서 나도 생각하는 인간이라 하는 생각을 갖게 한 점에서입니다. 인간이 만일 단체살림이 문제없이 원만히 돼가는 것만을 만족히 여기고 나도 생각하며 살아보련다 하는 생각을 할 줄 몰랐다면 꿀벌이나 개미는 되었을는지 몰라도 인간은 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문제없는 것으로 한다면 꿀벌이나 개미의 사회는 참으로 이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대신 거기는 발달은 없습니다. 인간은 왜 그랬는지, 그 넓고 평탄한 본능의 길을 버리고 ‘좁고 험한’ 생각의 길을 택했습니다. 오랜 후에 가서야 그들은 자기 속에서 그렇게 몰아처서 그길을 찾게 하던 그 목마르게 애타하는 그것이 무엇임을 어렴풋 짐작하게 됐습니다. 그 어느 먼 한 옛적 어느 축제날 밤에 흥분해 돌아가는 전체를 두고 외딴 구석 바위틈에 가 하늘의 별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젊은이 그러다가 어른들한테 끌려나가 호 되게 책망을 먹은담 욕지거리를 퍼붓는 군중 앞에 끌려나가 혹독한 벌을 받던 그의 모양을 상상해보며 그 흔적이 내 가슴 밑바닥에 있기나한듯 이따금 손을 넣어보기도 합니다. 국가의 시작은 아마 이렇게 해서 됐을 것입니다.
인류의 어떤 시절에 국가는 좋은 후견인 노릇을 했습니다. 그 덕택에 인류는 많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나가는 것을 따라 그 덕(德)은 점점 쇠퇴해가고 그 재주만 늘어갔습니다. 문명이 기술주의로 기울어짐을 따라 그 폐단은 점점 심해 갔습니다. 재주는 배울 수 있지만 덕은 스스로 닦지 않고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요새 와서는 정치와 도덕은 완전히 분리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는 것에 따라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여기 고민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수단은 많이 변할 수 있고,거기 따르는 행복감도 많이 더해질 수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생리적, 심리적, 영적, 인간구조입니다. 근래에는 과학이 발달되어 우생학을 이용해 인간 개조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생식세포에 무슨 영항을 주느니, 유전인자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느니,여러 가지 말이 많지만, 그런 것은 도저히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지극히 국한된 부분에서 능히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가정 하더라도, 그런 것은 한 사람의 몸 전체뿐 아니라 종류 전체, 인류전체, 나아가서는 생명 전체, 우주 전체와 우리가 추측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관련되어 있고, 그렇게 되기까지에 몇 억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야 되도록 큰 스케일의 변화를 통해서 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산전체를 이루어 온 것이므로 그 조그만 인간의 마음이라는 척도로 감히 그 변동을 꾀한다는 것은 너무도 경솔 교만하고 무책임하고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생명의 구조는 비밀입니다. 그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볼 때 기술 문명이 아무리 진보됐다 하여도 인간구조에 감히 이의를 품을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 진화의 유일의 통로인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씨알을 감히 건드릴 수도 없고, 따라서 그것이 모든 지식, 기술, 조직, 제도의 전제조건이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기성 국가가 다 낡아버렸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견지에서 하는 말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발달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개인의 생각하는 자유와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도 종자는 내놔야 하는 모양으로, 인간이 장차 어떤 다른 형식의 사회제도, 국가 조직을 취한다 해도 이 성역만은 침범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다른 인류가 나온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한은 이 인류가 생명진화의 선두에 서는 한은, 혼이라 했거나, 사이키라 했거나, 영이라 했거나, 그 이름이야 무엇이었던 간 이 진화하는 생명의 지성소가 되는 이 玄之又玄의 성역은 침범해서는 안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국가는 감히 거기 대해 망령된 행동을 하리만큼 교만해졌고, 인류는 그 때문에 고민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근본 체질에 있어서 태고시대의 유물인 국가지상주의를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계급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을 때 국가는 국민을 향해 희생되는 것이 미덕이라 하면서 강요했지만 이게 국가는 神이 세운 것도, 그가 보낸 성인 영웅이 세운 것도 아닙니다. 국민이 세운 것이고, 엄정한 의미에서 국가를 대표하기 위해, 그나마도 자칭하고 나온 정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희생적으로 봉사할 것은 국민이 아니라 국가라 자칭하는 정부입니다. 이것은 세계 어느 국가도 다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작업의 제일단계로 우선 이런 모순을 용감이 초월하고 벗어난 새 국가관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건지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화를 복으로 전환시킬 줄. 모르는 국민, 살 자격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혜와 용기는 自利利他의 대승적인 정신 아니고는 될 수 없습니다.
80년대의 의미
자, 이제부터 주어진 제목에 들어갑니다. 80년대라고 했습니다. 80년대의 뜻은 무엇입니까? 80이라는 숫자에 무엇이 있을 것은 아닙니다. 나는 점쟁이는 아닙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은 하도 점치러들 잘 다닌다고 하기 때문에 하는 웃음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만 아니라 목사들까지도 그렇다는 데는 웃어야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점은 누가 칩니까? 실력 없는 사람이 그럽니다. 실력이 없으면 가만있으면 되는데 욕심이 많기 때문에 가만있지 못합니다. 욕심이 많기 때문에 정치인이 되겠다는 것이고 정치할 실력이 없으니 목사라도 했으면 하는 것이고, 그것도 잘되지 않으니 점꽤라도 잘나오면 하고 처보는 것입니다.
80이라는데 의미를 부친다면 20세기의 끄트머리라는데 밖에 가닿을 데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리석게 돈을 쓰던 놈도 지전이 두 장밖에 아니 남는다면 좀 정신을 차려 아껴보려고 할 것입니다. 80년대 소리도 그런 정도로 들어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혹 70년이 될 때 “70년대 는……” 하고 60년 될 때 “60년대는……”했던 것은 그럼 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 그리 대수롭게 칠 것 없습니다. 그저 그래 보는 것입니다. 무슨 각오나 있는 듯, 무슨 예산, 무슨 내다봄이나 있는 듯이 저마다 그러지만, 그런 것 그저 그렇게 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놈이나 그런 말 뱉았다가 거기 책임지겠다는 놈 보았습니까? 세상이 왼통, 글줄깨나 쓰고 자리나 더러 얻어 앉는 사람은, 그저 그러는 것입니다. 그대는 1979년 10월 26일 못 보았던가. 나는 그러기에 그런 내다봄 일찍이 믿어본 일 없고,그런 예상 맞나보려 적어뒀던 일 없고, 그런 무책임한 소리 스스로 해본 일 없습니다. 나는 그런 것 싫습니다. 새해만 되면 신문장이 잡지장이는 팔아먹기 위해 그것으로 폐이지를 채우지만 결과는 며칠 있다가 쓰레기통에 가보면 다 압니다. 그런데 불법집회인 줄도 모르고 강당을 빌려주었다가 혼살난 사람들이 신물도 안나서 또 집회를 여는 것도 그렇지만, 꿈을 그려보자니 설마 꿈 책임이야 아니 묻겠지 하는 생각에 부담감 없이 말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80년대라는 것은 20세기의 끄트머리라는데 의미를 붙인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20세기에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통일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해 볼 때, 내 생각으로는, 국가주의 전성시대라고 붙일 것 밖에 없습니다.
나는 친구들과 나이를 비교할 때는 늘 20세기의 사람이란 것을, 젊은 여러분께는 별 신통한 맛이 없겠지만, 자랑삼아 말해왔습니다. 그것은 내가 1901년 3월 I3일에 났는데, 내 또래의 사람들을 만나면 그중에는 1900년 이전에 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19세가 사람이지만 나는 20세기 사람이요” 하고 뽐냈습니다. 사실은 그때에 난 것이 내 자랑이 될 아무것도 없지만,19세기라면 어쩐지 낡은 것 같고 20세기라면 새로운 것 같아 기분으로 한 말입니다. 사실 우리 어렸을 때는, 그때가 바로 망해가던 우리나라가 어떻게 한번 새로워져 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때 였기 때문에, 툭하면 20세기를 잘 거들렀습니다. 20세기 신문명이니, 20세기 청년이니, 20세기 무엇이냐.
이제 와서 생각하면 우스운 일입니다. 물론 서양에서 한다면, 그때가 새로 일어나는 과학문명의 청춘 시대라,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기한 기계와 날마다 편리하게 되어가는 세상 형편에 신이 나서 그러기도 했겠지만, 우리로서는 멋도 모르고 건성에 떠서 그런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볼 것을 다보고, 이제 남은 것은 나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을 그려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교적 기분에 뜨지 않고 차분히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다가 보니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저녁 하는 이 말과는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마는, 젊은 분들 꼭 해주고 싶은데, 있다가 해도 좋겠지만, 이제는 건망증이 아주 심해 금시 생각했던 것도 곧 잊어버리기 때문에 부득이 하던 말을 중단하고 그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오늘, 1980년 2윌 6일이 나의 생후 28,820일 되는 날입니다. 날짜 헤인다는 것이 괴상한 듯해 다들 웃지만, 웃지 말고 들어 두어야 합니다. 날짜를 왜 헤나? 될수록 빈틈 내지 말고 아껴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로부터 여러 어진이들이 이제, 즉 산 현재에 살자는 교훈을 남긴 것을 들었을 줄 압니다. 저 유명한 톨스토이의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하는 질문을 들어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톨스토이는 그 소설 중의 숨어사는 성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난 사람이요,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같은 현재주의의 교훈입니다. 롱펠로는 그의 ‘인생의 시’에서
“미래가 아무리 그럴 듯 해뵈도 그것을 믿지 말라. 죽은 과거로는 제 죽음을 장사케 해라. 그리고 하거라. 현재 속에서 하거라. 속에는 양심을 품고, 머리 위엔 하나님을 바라고”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제 실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날짜 헤기를 나의 30대에 선생님, 단 한 분으로 살아계시는 우리 유영모 선생님한데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한번은 자기의 돌아가실 날짜를 말씀하셨던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선생님은 자기 돌아가실 날을 미리 아신다고 하며 놀란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날이 오니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미리 아신다더니 못 맞혔다고 웃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돈을 쓸 때는 예산을 세워야 하지 않느냐? 예산 세웠다고 꼭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남으면 남기고 모자라면 추가해서 쓰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일단 예산을 세워야 하지 않느냐? 사는 것도 그렇다.”
다른 말은 다 잊더라도 이것만은 꼭 잊지 말고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국가 지상주의의 모순
돌아갑시다. 이제 살대로 다 살고 차분한 마음으로 80년대의 마루턱에서 지나온 것을 돌아볼 때, 그것은 한마디로 국가주의의 전성시대였다고 하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고 생각되고,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20년은 있는 힘을 다해 그 지긋지긋한 역사에서 탈피하고 나오는 것 이 우리 할 일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저 국가주의라기보다는 국가지상주의, 또 그보다도 정보지상주의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영어로 한다면 내슈낼리즘인데,nation이라는 말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민족이란 말도 되고 또 국민이란 말도 됩니다. 그것은 그때가 한창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강하던 때여서 각 나라들이 서로 다투어가며 부국강병, 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한 놈은 강한 놈에게 먹히게 마련이다 하는 소리를 외쳤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우리도 강대국이 되어간다” 고 자랑이나 되는 듯 떠들지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불쌍한 어린양새끼가 제 어미 잡아먹고 살이 쪄서 살기등등한 승냥이를 보고 부러워하고 절을 한다면 된 말입니까? 강대국이란 동류 잡아먹고 살찐 승냥입니다. 국가주의란 제 동류 잡아먹고 호화판으로 놀잔 주의입니다. 그것은 결코 전체 국민의 소리는 아닙니다. 일부 그러한 생각을 가지는 지배주의 집단의 정치인의 소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주의라기보다는 정부주의입니다. 영어로도statism 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내놓고 해서야 아무리 무식한 씨알인들 어찌 속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럴듯이 민족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말마디 우리 민족, 우리나라,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해서야 순진한 국민을 흥분시킬 수 있고, 국민이 흥분해야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적대심을 일으켜야 전쟁을 할 수 있고, 전쟁을 해서 이겨야 권세를 부리고 호화판 살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속임수의 말입니다. 씨알은 어디서나 하늘땅 사이에 서서 내팔 다리를 믿고 겸손하게,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기 때문에 남의 것 탐내는 일 없고, 싸워서 빼앗잔 생각도 없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정치가들입니다. 옳은 정치가 너도 나도 다같이 양심 가지고 서로 도둑질말고 살아가자는 정직한 정치가야 어찌 그런 생각하겠습니까마는, “받는 소는 씽하지 않고 받는다”고, 나라 사랑하는 사람은 애국 소리 아니하고 잠잠히 부지런히 일하는 것입니다. 남 융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습니다. 남의 집 제사에 가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사람, 제사의 정성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세상에는 누구도 다 알고 있는 일을, 부탁도 아니하는데, 나서서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아니 있습니다. 요 임금 때 백성이 “임금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어 (帝力何有於我哉)” 했다는 것 아닙니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긁어 부스럼”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 정치입니다.
옛날에 민족주의 없었습니다. 한 핏줄 한 말에 한 살림하는 민족이 없었다는 말 아닙니다. 민족은 있었지만 민족주의는 없었습니다. 민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민족주의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생긴 말이 아니라 일부러 만들어낸 말입니다. 단군시대, 동명왕시대, 고려, 조선까지도 민족주의란 것 몰랐습니다. 19세기 말에 와서 서양으로 부터 흘러들어 왔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전쟁하는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적대심, 서로 원수 같이 하는 감정이 일어나서야 싸움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애국심, 적개심에 불이 붙어서 목숨을 내던지며 전쟁을 해서는 소득이 무엇입니까? 나라가 부강해졌다 하지만 실지로 그 부와 그 귀를 가진 것은 씨알이 아니고 일부 귀족들이었습니다. 생각을 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이 터무니없이 우스운 일이란 것을 알기에는 세월이 들었습니다. 정치는 늘 교묘하게 씨알을 속여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 허울 좋은 국가주의 속에는 큰 모순이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노라지만, 사실은 나라 도둑입니다. 강하고 클수록 죄가 많습니다. 씨알은 순진한 것이어서 가르쳐 주지 않는 한, 서서히 해서야 겨우 깨달음에 이릅니다. 몇 천 년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대지에 뿌리를 박고, 하늘빛을 받아 사는 씨알인지라 속이고 지배하고 부귀 하던 놈들을 다 낙엽처럼 역사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어도, 씨알은 영원히 남았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국가주의 속에 들어 있는 속임수를 깨달아 아는 날이 왔습니다. 조국을 위해서라는 구호에 감동되어 일터에서 연장을 놓고 총 들고 전선으로 나가 참호 속에서 서로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총질을 하던 영국 군인과 독일 군인이 총대를 놓고 서로 “대체 너와 내가 무슨 원수냐? 왜 이러야 하지?” 하는 날이 왔습니다. 그것이 이날껏 인류역사에서 그 예를 볼 수 없이 참혹했다는,1914년에서 1918년에 이르는 4년 동안의 제1차 세계대전의 끝에 가서 일어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미국이 독립한 것이 1776년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것이 1789년입니다. 사회주의란 명사가 처음으로 나돌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초부터 입니다. 거기 이어 그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국가다, 국가가 전부다, 국가 밖에 없다, 국가를 위해 재산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의무라 하던 그 속셈이 무엇이던 것이 이제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세계 간 곳마다에서 자주독립이다, 민중의 해방이다, 인도주의다, 하는 소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 역사에서 한 큰 전환점이 되는 3.1 운동도 이 물결을 타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식민지 해방을 하고 군비축소회의를 하고 국제연맹을 조직했습니다.
그렇지만 죄악의 뿌리는 끈질긴 것이었습니다. 불과 20년에 국제 연맹은 해체되고 각 나라의 지배자들은 또 다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입니다. 이번은 전보다도 한층 더 악독했습니다. 인류를 행복케 한다던 과학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집단주의 자들의 계집종으로 돼버렸습니다. 원자탄이 나오고, 수소탄이 나오고. 독가스가 나오고 살인광선 소리까지 나왔습니다. 싸우던 저희들도 그 참혹한 해가 너무도 혹독한데 놀라 멈칫했습니다. 그것이 휴전이요 국제연합의 조직입니다. 그 기회에 우리도 해방을 얻기는 했지마는 이 몸뿐입니다. 인류역사에 처음 보는 괴물인 냉전이란 것으로 다시 전쟁은 계속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아닌 전쟁입니다. 대의명분상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인 줄 아는 세계의 지배주의자들은 서로서로 타협해가며 전쟁을 하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로 평화의론을 하는 척하면서 전쟁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제 전쟁조차도 타락했습니다. 옛날 전쟁은 툭탁해서 승부가 끝나면 곧 해결이 되어 평화에 돌아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 전쟁은 양편이 다 내 나라와 적국 국민을 시중으로 속이면서 영구히 피차 지배주의를 계속하기를 꾀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악질적이 됐습니다. 또 하나 그 악질적인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서 내 세운 것이 대규모의 기업입니다. 소위 다국적기업이라는 그 이름이 그것을 말합니다. 이러고 보면 국가란 내면에 있어서는 뒤죽박죽이 된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국민의 국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국가마다 다 스파이국가로 전락한 것은 이런 식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란 말밖에 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없는 것은 고등으로 발달한 학문과 기술을 한 손아귀에 다 넣어가지 고 표리양면으로 전쟁과 평화를 의논해 가면서 세계 도처의 씨알들을 지배 착취하는 지배집단들과, 그런 줄을 알면서도, 전면적저 혼란이란 것 하나가 무서운 생각에, 그 지배와 착취에 견디어가며 고민하고 있는 씨알들이 있을 뿐입니다.
자유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같이 의미 없습니다. 벌써 탈이데올로기 시대라고 내 놓고, 주인 인 씨알을 보는 눈앞에서 무시하면서, 갈보 질을 해온지 이십년도 넘습니다. 독수리 들끓으면 시체 그 골짜기에 있는 줄을 아는 모양으로, 그만하면 자유주의 국가도 공산주의 국가 도 다 인류를 이끌어갈 능력도 성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계의 씨알의 할 일은 어서 속히 그 과거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관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통일 방안이 문제 아니라 통일을 통해 새로 세우자고 하는 그 나라가 어떤 나라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먼저 분명치 않으면 안됩니다.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쓸데없는 정도가 아니라, 모처럼 나오려는 새 나라에 도리어 큰 방해물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이 경고를 해둡니다.
1980. 2. 6 YWCA 수요강좌
씨알의소리 1980. 3월 92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12-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