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신 사건을 전한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에 놀라며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마르코복음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자주 전한다.
병자를 고치고 악령을 쫓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고향 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놀라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르거나 오해한다(1, 21-45; 3, 7-10 등).
예수님을 적대시했던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2, 3-6)은 물론,
제자들(4, 41)과 친척들(3 ,21)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당신의 신원을 제대로 고백하는 경우에는 함구령을 내리신다(1, 25, 34; 3,12).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오해하고 거부했을까?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하고 경탄하면서,
동시에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자기들이 알고 있던 지식과 자신들이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예수님을 판단한 결과,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거부한다.
자기 방식 대로의 판단이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첫 독서에서 에제키엘이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이라고
질책한 이들이 바로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믿지 못하는 이들이다.
내가 안다고 자만하는 순간 주님의 가르침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내 판단을 우선하는 곳에 주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는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에 주님이 들어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나를 주장하는 한, 믿음은 공염불이 되고, 그 상황에서 주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떠나신다.
예수님은 왜 당신을 오해하는 이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의 신원이 분명히 드러난 표현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 39)라는 구절이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보며 백부장이 토로한 고백이다.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신지는 십자가상 죽음의 순간에 드러난다.
주님의 신원은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신비였기에,
평소 기적에 놀라는 이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셨던 것이다.
죽어야 알게 되는 신비를 죽지 않고 말하면 오해만 초래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하여 드러나는 주님의 신원은 우리도 죽어야만, 자신을 버려야만 알 수 있는 신비다.
그러기에 주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4)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버리는 일은 자기 생각이나 경험, 이기적 자아에 죽는 일이다.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
이렇게 자신을 내려놓는 일은 자신이 부서지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이 부서지는 것이 두려워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이나 경험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 수도 없다.
세상살이에서는 자신이 부서지면 파멸에 이르지만,
신앙생활에서는 자신이 부서져서 약하게 된 후에야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성경 전반에 걸쳐 하느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린 사람들이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과 다른 하느님의 말씀에 꺾이고 부서지기보다 하느님을 내 마음에 맞게 설득하려 한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하느님 앞에서 부서지지 않으면 하느님은 그들을 떠나신다.
나이 많은 한 수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수사가 다가왔다.
젊은 수사는 많이 배우고 능력이 뛰어나지만, 교만한 성품을 지녔었다.
경험 많은 수사는 후배 수사에게 말했다.
"이 단단한 흙 위에 물을 좀 부어주겠냐?" 젊은 수사가 물을 부으니 옆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러자 나이 많은 수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 놓고 젊은 수사에게 다시 한번 물을 부어 보라고 말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 든 수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자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얘기한다네."
신앙인은 자신의 주장을 하느님께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자신이 깨어지는 사람이다.
자신의 주장과 경험을 버리고 부서지면, 파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라는 주님 말씀을 전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실수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강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삶의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몫의 고통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을 찾노라고" (캐롤 위머)
참된 신앙인은 자만심에 취해 깨어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만 하는 사람도 아니다.
자신이 이렇게 부족하니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기를 청하는 사람이다.
지신을 낮춘 겸손함에 하느님의 영광이 비쳐온다.
이를 체험한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 10)라고 고백한다.
[출처] 연중 제14주일 나해 -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작성자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