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 문화의 생성과 전개
제1장 효 문화의 배경
어버이는 생명의 숲이요, 흙이다. 그 숲 속에는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이 흘러 내를 이루고 강으로 흘러 바다로 이른다. 잎이 지면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 무수한 나뭇가지마다 철따라 잎이 나면 꽃이 피고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다시 땅에 떨어져 생명의 보금자리를 튼다. 흔히 까마귀 새끼들이 자라면 늙고 병든 어미 까마귀를 먹여 살린다 하여 이를 반포의 효라고 이른다. 그 흙에서 자란 내 마음이 숲과 흙 내음은 몸과 우리의 영혼을 길러준다.
효행을 힘쓰는 이 쳐놓고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여 삼국유사의 마지막 부분에 효선편이 마련 된 것도 우연한 배열은 아닐 것이다. 우리 겨레를 한마디로 드러내 주는 말 가운데 하나가 고맙다라고 생각한다. 말에는 그 말을 쓰는 겨레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이 정신세계가 담겨져 있다. 이를 일러 언어의 문화투영이라고 한다. 그러면 고맙다에는 우리들의 문화와 역사, 경로효친의 효 사상이 깃들어 있을까.
고맙다의 고마(용비어천가 3:15)는 곰의 옛말이며 이는 경건하게 흠모해야할 대상(敬 -虔-欽, 신증유합)임을 이르고 있다. 용비어천가에서는 공주(公州)를 고마라고 하였다. 고마를 곰 웅(熊)이라 하였다. 거기에 같다는 뜻의 -ㅂ다가 붙었으니 이는 ‘당신의 은혜가 나의 어머니와 같고, 나의 조상신의 은혜와 같고, 나의 하느님의 은혜와 같다’는 문화기호론적인 풀이를 할 수 있다. 고맙다의 뜻을 우리의 역사와 함께 고려하면 단군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어머니가 웅녀(熊女)로 나오니 그렇게 상정한 것이다. 당시는 모계사회 중심이었음을 떠올리면 어머니-고마(곰)는 어버이의 얼굴이라고 보아야한다.
백두산을 달리 웅신산(熊神山, 삼국사 고려본기)으로도 부른다. 백두산의 백(白)은 곰(고마)을 뜻하는 맥(貊)으로도 읽는다. 하나의 한자를 몇 개의 소리로 읽는 것을 복성모라 한다. 예맥의 맥이 바로 곰의 다른 형태다. 일본의 자료를 보면 고구려나 고려를 모두 고마(熊, koma)라 이른다. 흔히 백제라 하지만 복성모 이론으로 보면 이 또한 맥제라 읽어야 옳다고 본다. 말하자면 백제-맥제-고마의 나라란 말이 된다.
이러한 고마 곧 어머니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은 우리겨레의 민족 정서의 샘이 되고 숲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어머니라 함도 단군시대의 어머니가 고마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그러하다. 고물고물(구물구물)-호물호물(후물후물)-오물오물(우물우물)에서처럼 기역(ㄱ)의 소리가 약해서 떨어지면 ㄱ-ㅎ-ㅇ의 과정을 거쳐 소리 값이 달라진다. 그럼 고마(곰)-호마(홈)-오마(옴)이 된다. 오마(옴마)는 방언으로 어머니를 뜻한다. 모음의 소리가 조금씩 다르게 쓰이면서 오늘날의 어머니(엄마)로 굳어져 쓰게 된 것으로 본다.
전래해 오던 효행에 뿌리 깊은 우리의 유전자에 불교가, 유교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적인, 다시 유교적인 질서로 재구성된다. <삼국사기>의 효녀 지은 설화나 <삼국유사> 효선편에 나오는 빈녀양모를 비롯한 몇몇의 효행사례를 통하여 그 절절한 효심의 정서를 체험할 수 있었다. 효녀 지은(知恩)이나 빈녀(貧女) 이야기가 조선 시대로 오면서 심청전(沈淸傳)으로 진화했다고. 다시 근대로 오면서 이해조가 지은 번안소설인 강상련(江上蓮)으로 개작되기에 이른다. 적어도 4세기 이후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불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전래해 오던 우리의 효행 설화들은 불교적인 통섭 과정을 통하여 불교적인 질서의 옷을 입게 된다. 그 상징적인 설화가 심청의 이야기다. 효녀하면 심청이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효도하면 심청을 떠올린다.
최근 들어 심청전의 근원설화가 곡성의 관음사사적기에 실려 전하는 홍장(洪莊) 설화에서 비롯하였음을 곡성군과 연세대 연구소 팀이 밝혀낸 바 있다. 이러한 설화소를 살려 고성의 심청 마을을 만들고 심청 축제를 열어 곡성군 문화산업의 밝은 내일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켜주는 버팀목의 뿌리가 효행이다. 그게 바로 고맙다로 대변되는 조상숭배의 효행문화의 얼굴이라고 하겠다.
유교문화의 덕목이 인의예지며 충효열(忠孝烈)로 대변된다. 지금도 한가위 추석이면
온 나라가 귀성(歸省) 행렬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인이 집으로 돌아와 부모를 보살핀다(女嫁歸省父母曰寧)는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엽에 토인비는 집에 먹을 것도 없는 이들이 추석 때면 쌀되박이라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의 문화는 인류문화의 보고라고 하였다. 부모와 조상에게 감사할 줄 문화 전통이 어만 아름다운 것이다.
조선 왕조 아니 일제 강점기에도 지방의 수령들이 가장 골치 아픈 일 조상의 삼 문제로 벌어지는 산송(山訟)이었다고 한다. 조상의 무덤 자리를 놓고 대를 이어가며 송사를 벌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조상을 숭모하고 부모의 은공을 생각하는 문화 전통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 앞으로 효행문화 관련의 자료와 통시적인 흐름의 사례들을 살펴보고 나아가 효행문화의 교고서이며 이정표라 할 효경(孝經)의 위상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제2장 효행 관련 사료 및 설화
1. 효행 관련 사료
1) 삼국유사(三國遺事) 효선편
왕력(王曆)으로 시작하여 효선(孝善)으로 끝나는 <삼국유사>는 매우 인상적이다. 효행과 선행을 아우르는 효선편에는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 빈녀양모(貧女養母), 향득할고(向得割股), 손순매아(孫順埋兒)의 다섯 가지 실례를 들어 효선을 강조하고 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선사의 꿈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민족의 자존감과 정기를 되살려 하나 되는 일연(一然)을 효행으로서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삼국유사 효선편은 매우 짧지만 삼국시대의 효행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국학의 교과서 효경(孝經)
신라 신문왕 2년(682)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할 목적으로 세웠던 설총이 중심에 섰던 국학(國學)의 교과서로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춘추, 문선, 논어,효경등이 있었다. 이를 석독 구결을 활용하여 학습의 새로운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교육 효과를 올림을 물론 귀족 자제들만의 인습적인 등용을 차단하고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의 사람들에게 골고루 공평한 교육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 이른바 서라벌 중심의 이두(吏讀)를 교육의 도구로 삼았으니 아주 획기적인 교육 혁신이었다.
한당 유학과 함께 새로운 교육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귀족 중심의 정국 운영을 왕권 중심의 새판을 짜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중국의 큰 학자라도 신라의 이두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이두로서 효경을 학습하자면 얼마나 힘겹게 공부를 하며 정력을 쏟았을까. 효치의 질서는 곧바로 충치로 이어지니까 왕권의 강화가 지상의 과제였던 신문왕 이후 군왕들로서는 교육을 통한 효치를 강조하고 유교 경전을 총한 충치의 질서를 강조함은 아주 자연스러운 통치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시험과목 가운데 오경, 삼사,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 논어, 효경및 제자백가서등이 주교재로 하여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실려 전한다. 그러면 고려에서는 어떠했던가.
고려시대 나온 효경으로 국내에 알려진 본은 홍무 6년(1373)의 발문이 있는 목판본 효경이었다. 이 판본은 이재영이 처음 소개하였다. 현전하는 판본 가운데 간행시기가 가장 이른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원본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3) 효경언해(孝經諺解)
조선 선조 무렵 홍문관에서 효경대의(孝經大義)를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을 붙여 언해한 책이다. 불분권(不分卷) 1책. 경진자본(庚辰字本)으로 간기가 없다. 다만 임금의 명으로 관료나 기관에 서적을 나누어줄 때 이를 나타낸 기록인 내사기(內賜記)에 따라서 선조 23년(1590) 간행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은 일본 동경의 손케이가쿠문고(尊經閣文庫) 소장본 가운데 선사지기(宣賜之記)라는 붉은 색 인장과 만력18년(1590) 구월일내사운운의 내사기가 있어 간기를 대신할 수 있다.
아울러 책 끝에 선조 22년(1589) 6월 유성룡의 효경대의 발(跋)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효경대의와 효경언해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효경을 가르침이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음을 개탄하여 선조의 어명으로 효경대의와 함께 간행하였다고 적었다. 효경대의는 원나라 동정(董鼎)이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에 바탕을 두어 다시 짓고 주석을 붙여 효경의 대의를 풀이한 것이다.
언해는 효경대의를 곧이곧대로 뒤친 것은 아니다. 즉, 주자간오의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본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대의와 주석 부분은 모두 줄였다. 언해방식은 경과 전의 본문에 한글로 독음과 구결을 달고 이어 번역을 실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동정의 대의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223자를 빼버려서 교육용으로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줄였다고 볼 수 있다.
발문에서는 임금이 홍문관 학사들로 하여금 언해하도록 하였다. 언해의 양식과 책의 판식, 경진자로 된 활자본인 점 등이 교정청의 사서언해와 거의 같다. 이 책도 교정청의 언해사업의 한 부분이다. 뒷날 이본은 모두 이 원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방점과 정서법 등만 약간 손질할 뿐 크게 다를 게 없다. 널리 보급된 후대의 이본으을 통하여 원간본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중종실록을 보면, 효경언해는 당시의 역관이던 최세진(崔世珍)이 소학언해(小學諺解)와 함께 지어서 임금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으나 최세진 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구결이 함께 적힌 효경이 전한다. 이 책의 판식과 지질·구결표기로 보아서 16세기 초엽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세진의 효경언해와 어떤 점에서 상관이 있는 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결이 적힌 그 책의 원전은 효경언해의 원본이라 할 효경대의와 같지 않다. 장절 형식만 보더라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이 상친장(喪親章)의 18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효경대의는 경 1장과 전 14장 모두가 15장으로 구성되었다.
실상 효경은 전래적으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같은 초학자의 교재로 쓰였다. 효경은 유학사는 물론 교육사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그 밖에 원간본이 경진자로 간행되어 활자 연구에도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현재 일본의 존경각문고에 원간본이 전하며 국내에는 여러 개의 이본이 전한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광해군 9년(1617)에 왕명에 따라서 유근(柳根) 등이 편찬한 충신과 효자와 열녀에 대한 행실을 그림과 함께 적어놓은 책이다. 광해군 6년(1614)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속편의 성격으로 간행되었는바, 충신, 효자, 열녀 등 충효열의 삼강의 윤리에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으로, 모두 18권 18책이다.
행실도류의 얼굴인 삼강행실도의 언해는 비교적 원문에 기대지 않고 원문 내용의 의역과 우리말글의 표현미를 추구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중간본의 경우 다소 원문에 가까워지려는 흐름이지만 원문이 줄거나 원문에 없는 사연들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원문에 가까운 직역하는 역어체의 문체적인 보람을 보이고 있다. 축자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5)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은 흔히 부모은중경 혹은 은중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버이의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어놓은 불교식 효경이다.
조선 단종 2년(1454) 평양의 대성산 광법사에서 새긴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3.5㎝, 가로 901.3㎝이다. 처음에는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었다가 병풍처럼 펼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바꿨다. 현재는 처음의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접혔던 부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이 심하다.
은중경의 본문은 어버이의 열 가지 너무나 소중한 은혜를 한시처럼 엮어서 읊었다. 아울러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다 여덟 가지 어버이 은혜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풀이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경우와 갚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상황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은중경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며 판화가 고려본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6) 심정전(沈淸傳)
우리나라의 효행 관련 주제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의 하나가 바로 심청전이다. 이 소설의 작자나 지은 연대는 미상이며 사람을 신에게 바로 바치는 인신공희설화(人身供犧說話)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효녀 심청(沈淸)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심봉사(본명 심학규)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지금의 연평도에 이웃한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 바다의 용왕이 구출하여 마침내 왕후에 오르게 된다. 심청은 황제에게 청을 하여 아버지를 찾기 위한 맹인 잔치를 연다. 심청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네가 청이냐. 어디 좀 보자며 아버지의 눈이 뜨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효행을 강조하고 유교 사상과 인과응보의 불교 사상이 작품에 배어 있다.
현재 공개된 심청전의 이본은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다. 그밖에 이해조가 1912년 광동서국에서 강상련(江上蓮)이란 제목으로 개작하여 신소설로 만들어 간행한 것을 비롯한 4종의 구활자본이 더 전한다. 판매용으로 만든 방각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해 간행한 완판본 계와 판소리의 기반 아래 새롭게 적강의 구조를 토대로 해 적극적으로 고쳐 지은 경판본 계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7) 구운몽(九雲夢)
조선 숙종 무렵에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귀양지에서 지었다고 하며, 그가 중국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중국 소설을 사왔으면 하는 어머니의 부탁을 깜박하고서 잊고서 돌아와서 급히 지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영웅의 일생을 그린 영웅소설이지만 남녀의 애정 행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천상계에서 죄를 지은 주인공이 지상으로 떨어져 귀양 가는 적강소설이다. 그 여정이 꿈으로 처리된 점이 눈에 뜨인다. 일종의 –몽자류(夢字類) 소설이다. 꿈속에서 이룬 일들이 오히려 허망하고 꿈에서 깨어나 진정한 삶을 산다는 점이 일반적인 몽유소설과 다르다. 작품의 구성이 정밀하며, 성격묘사라든가 심리묘사 등이 소설의 기법으로 적절히 갖추었다. 유·불·선 3교의 요소가 두루 들어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불교적 의미를 바탕에 깔고 있다.
8) 효불효교(孝不孝橋) 설화
조선 성종 무렵 왕명에 따라서 노사신 등이 지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전하는 효불효교 이야기다. 경주부 동쪽 6리쯤 되는 곳에 있는 다리 설화다. 신라 때 일곱 아들을 둔 홀어머니가 그 아들들이 잠자고 있는 겨를에 외간 남자를 만나러 다녔다. 어머니 몰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아들들은 서로 의논하였다.
“어머니가 밤에 찬 냇물을 건너다니시니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
마침내 그들은 어머니를 위하여 돌다리를 놓았다. 어머니는 자식들 보기가 부끄러워 부정한 밤길 나들이 버릇을 고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다리 이름을 효불효교라고 불렀다. 일곱 아들이 놓았다고 해서 일명 칠성교라고 부른다. 더러는 일곱 개의 돌로 만든 다리라 하여 칠성교 또는 칠교라고도 부른다. 어머니에게는 효성스러우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라 하여 효불효교라고 한다는 풀이도 있다.
다리 관련한 민간 설화에는 자식 없는 여인, 젖이 적은 여인이 이 다리의 다리발에 빌면 반드시 효험이 있고, 더러는 짝사랑으로 고민하는 여인이 이 돌에다 정성으로 빌면 정인에게 그 뜻이 전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상의 효행 관련 사료와 설화를 동아리 하면 다음과 같다.
순번
사료
출전
비고
1
삼국유사효선편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 외 4편의 효행록
2
효경
삼국사기
신라 설총이 국학에서 이두로 교수
3
효경언해
경진자본
효경을 훈민정음으로 풀이하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중심의 충효열 사례를 도해
5
부모은중경
광법사목판본
부모의 은혜를 기리라는 불교 경전
6
심청전
관음사사적기
맹인 아버지를 위한 심청의 효행
7
구운몽
서울대학본
김만중이 과부 어머니를 위해 짓다
8
효불효교
동국여지승람
과부 어머니를 위해 다리를 놓다
2. 효행의 사례
1) 설총의 아버지 소상(塑像) 만들기
고려 현종 때 설총(薛聰) 선생은 홍유후(弘儒侯)로 추증되어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신라 십 현에 들며 모든 향교에 위패가 맨 윗자리에 모셔 있다. 설총은 유교의 가장 으뜸되는 덕목으로 인정되는 효(孝)를 스스로가 몸소 실천하였다. 삼국유사 원효불기 조에 따르면, 원효가 돌아가자 그의 아들인 설총이 아버지 원효의 해골을 부수어 진흙에 섞는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芬皇寺)에 모시고 옆에서 예배를 하니 원효의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다고 한다. 삼국유사가 지어질 때까지도 분황사에는 원효가 아들 설총을 돌아보던 모습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해골을 부수었다 함은 아마도 화장으로 다비(茶毘)를 모신 뒤 유골을 거두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설총의 집터가 원효가 머물던 혈사(穴寺) 옆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원효와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나 아버지 살아생전에 가까이 살면서 아버지를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아버지를 따라 출가하지는 않았으나 설총이 아버지가 살았을 때는 가까이 살면서, 돌아갔을 때는 소상을 만들어서 정성껏 모신 효자임을 말해 주고 있다(삼국유사 의해 원효불기 참조).
2) 성덕대왕 신종(神鍾)
이 종은 국보 제29호 보물이다.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거룩한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고자 하였지만 완성은 혜공왕(771)에 가서 이루어졌다. 이 종은 봉덕사(奉德寺)에 달았으나 수해로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에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에 종각을 짓고 보호하였다. 1915년 8월에 종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고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 이전됨에 따라 이 동종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되었다. 일명 봉덕사종·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최대의 큰 종으로서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각 부의 양식이 풍요 화려한 동종의 하나이다.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범종의 얼굴이다.
3)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신라 경덕왕 무렵 재상이던 김대성(金大城)은 전생의 어머니를 위하여는 국보 24호인 석굴암(石窟庵)을, 현생의 부모를 위하는 국보 20-23호와 26-27호인 불국사(佛國寺)를 지었다. 말하자면 석굴암과 불국사는 김대성의 효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국립 경주박물관에 가면 야외 전시장에 그 많은 석불상의 발전적인 조상 예술품이 석굴암이라고 하겠다.
4) 효녀 지은설화(孝女知恩說話)와 홍장 설화(洪莊說話)
(▲)효행설화의 하나로 삼국사기 권48과 삼국유사 권5 효선(孝善)편에 수록되어 있다. 지은은 연권(連權)의 딸인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나이 32세가 되도록 출가를 하지 않았으나, 결국은 살림에 쪼들리게 되어 쌀 여남은섬에 자기 몸을 종으로 팔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통곡을 하였고 지은도 함께 울었다. 마침 이 장면을 목격한 화랑 효종랑(孝宗郎)은 그 효성에 감탄하여 곡식 100섬과 옷을 보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낭도들도 각각 곡식을 보냈으며, 왕도 이를 알고 곡식 500섬과 집을 하사하여 잘 살도록 해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내용은 약간의 변이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제목이 ‘빈녀양모(貧女養母)’로 되어 있고 이야기를 들은 장소인 포석정(鮑石亭)이라는 배경도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서는 효종랑이 직접 목격한 것으로 서술되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간접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듣는 것으로 나타나며, 전자에서의 지은이라는 인명이 후자에서는 그냥 빈녀(貧女)로 변화되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이야기 말미에 사찰연기설화(寺刹緣起說話)의 기능으로, 모녀가 희사하여 나라에서 상으로 내려준 집을 절로 삼고 이름을 양존사(兩尊寺)라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편찬자인 승려 일연(一然)의 의식이 바탕에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뒤로 오면서 심청전으로, 다시 심청가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 그러나 최근 들어 곡성에 자리한 관음사사적기(觀音寺事蹟記)에 올라 있는 홍장(紅莊)의 고사가 심청전의 근원설화임이 밝혀지고 있다. 그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대흥이라는 고을에 홍장(洪莊)이라는 장님의 딸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원량(元良)은 어릴 적에 눈이 멀었다. 비록 눈이 멀었으나 양반의 후예로써 행실이 청렴 강직하고 기개가 고상하여 언어범절이 조금도 경솔하지 아니하니 인근의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바였으나 불행은 겹치는 것이라고 한다더니 성품이 현숙하고 민첩하여 바느질과 품팔이로 앞 못 보는 자신을 봉양하던 부인이 그만 산고 끝에 먼저 세상을 뜨니 앞도 못 보는 장님의 처지로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이집 저집 젖동냥으로 키운 딸이 홍장이었다. 홍장 또한 성장하면서 성품이 현숙하고 민첩하여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부축해 드렸으며 그의 봉양이 극진하여 모든 범절에 있어 비범(非凡)한데가 있었다. 홍장의 효성이 이러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하늘이 낸 대효(大孝)라 칭송해 마지않았다. 나라 안은 물론이고 멀리 중국 땅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곡성군에서는 그 동안 이 고장이 심청의 고장이라고 전해 오던 이야기를 모아서 그 타당성을 모색하고 그 역사적 사실을 실증하기 위하여 1999년 7월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에 연구용역을 의뢰하였다. 연구팀은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에 자리한 관음사의 역사인 "관음사사적기" (송광사박물관 소장)를 바탕으로 국내는 물론 중국 절강성 주산군도 일대를 조사하여 이 시대 효의 대명사인 만고효녀 「沈淸(심청)」이 실존 인물임을 밝혀냈다. 마침내 KBS의 역사스페셜에서 2000년 4월 1일 오후 8시부터 1시간 동안 "역사추적! 심청의 바닷길"이라는 화두로 방영함으로써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렸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곡성군은 2000년 11월 30일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관계자 및 학생과 곡성 군민 등 30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곡성 출신 실존인물 효녀 『심청』 학술발표회"를 열어서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논증하고 발표하였다.
5) 의현 스님의 갓바위 불상 만들기
경북경산시 와촌면에 자리하여 예부터 많은 내방객이 찾는다. 갓 바위는 찾아가는 이들의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믿는다. 2015년 국립공원연구원에 따르면, 한 해 동안 약 250만 명(경산 쪽에서 오르는 사람 178만 명, 대구 쪽에서 오르는 사람 72만 명)이 찾아온다는 거다.
외모로 보아 9세기 불상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게 불교미술사가들의 짐작이다. 이 불상은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군위 부계의 삼존 석굴 본존불(아미타여래좌상)과 국보 제24호이자 불국사와 함께 석굴암의 본존불(석가여래불상)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 진 것으로 가늠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선본사 사적기'를 발굴하여 그 내용을 불교신문에 게재한 기사(2013년 5월 15일)를 보면 이러한 추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라 선덕왕 무렵 의현(義玄) 화상이 전국의 명산을 찾아 돌아보던 중 갓방위를 지나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관봉에 모여 있는 바위에 부처의 모습을 조상하여 세운 불상이라고 한다. 돌부처를 만드는 동안 밤마다 학이 날아들어 기도하는 의현 대사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대사는 원광법사의 문하생으로 전해 온다. '선본사 사적기'에서 의현 대사의 실명이 사실로 밝혀져 갓바위 불상 조성 시기를 다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이제까지는 불상이 9세기에 조성되었고 불상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갓 모양의 평평한 돌은 후대인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는 게 알고 있는 통설이다. 그런데 선본사사적기의 기록과 최근에 밝혀진 갓 모양의 바위에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보상화 무늬를 하였다고 한다. 불상 머리에 얹혀 있는 갓모양의 돌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불상은 통일신라 이전에 만들어졌어야 한다.
6) 손순, 아이를 묻다
희생효행설화(犧牲孝行說話)는 희생되는 대상을 따라서 자기희생-자식희생-아내희생 등으로 갈래를 둔다. 손순의 경우, 자식희생에 들어간다. 아이를 희생하여 어머니에게 효행을 하는 아들의 갈등이 주제가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이가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는 드실 밥이 넉넉지 않았다. 마침내 아이를 버리기로 결심한 부부는 아이를 지게에 지고 땅을 파서 묻으려 하니 흙속에서 돌종이 나왔다. 아내의 제안을 따라서 나누 가지에 돌 종을 걸어서 종을 치니 그 소리가 월성 궁의 임금까지 듣게 되어 효행 장려로 나라에서 집과 논과 밭을 마련해 주었다.
같은 자식희생설화라 할지라도 부모가 손자를 실수로 죽게 한 것을 용납하는 그런 희생설화와는 달리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기 자식을 직접 희생시키려 하는 행동은 현실성이 의심되고 윤리성도 문제가 되지만, 부모를 위한 가장 귀한 것의 희생이라는 점은 더욱 감동적이다.
7) 진정사의 효행과 선행
신라 때 진정(眞定)은 승려였다. 출가하기 전에는 군에 적을 두었다. 집이 가난하여 결혼도 하지 못했다. 군대의 부역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품을 팔아 양식을 마련, 홀어머니를 이바지하였다. 재산이라고는 다만 다리가 부러진 무쇠 솥 하나가 전부였다.
언젠가 어떤 스님이 문 앞에 와서 절 지을 철물을 구하자, 진정의 어머니는 무쇠 솥을 시주하였다. 아들의 동의도 없이... . 진정이 일을 마치고 밖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걱정 어린 모습으로 그 일을 아들에게 말하였다. 진정은 기뻐하며 말하길,
“불사(佛事)에 시주하였으니, 잘 하셨습니다. 비록 무쇠 솥이 없다한들 또 어찌 근심이겠습니까?”
그 뒤로 질그릇 동이로 솥을 삼아서 음식을 만들어 어머니를 받들어 모셨다. 진정은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사람들로부터 의상법사(義湘法師)가 태백산에서 불법을 설하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듣자 곧 태백산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가 어머니께 알려 말하길,
“어머니 봉양을 마친 뒤에는 마땅히 의상법사의 문하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불도를 배우겠습니다.”
하였다. 어머니는 말하였다.
“불법은 배우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속절없이 빠르니, 내가 죽을 때면 너무 늦지 않겠느냐! 어찌 내가 죽기 전에 네가 불문에 들었다는 것을 듣는 것만 하겠느냐. 근심하여 미루지 말고, 어서 빨리 가거라.”
진정이 말하였다.
“어머니의 노령에 오직 저만이 옆에 있을 뿐입니다.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함이 어찌 감히 그리 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대답했다.
“아, 내가 너의 출가에 방해가 된다면, 나를 쉬이 지옥으로 밀어 넣음과 다름이 없구나. 오직 살아서 진수성찬으로 나를 대하는 것만이,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느냐! 나는 남의 문에서 옷과 음식을 하더라도, 또한 타고난 목숨을 이을 수 있으니, 정말로 나에게 효를 하고자 싶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말라.”
진정은 오랫동안 골똘하게 생각하였다. 어머니는 즉시 일어나, 곡식 주머니를 모두 털어내니, 쌀 7되가 있었다. 곧 바로 밥을 짓고, 또 말하길,
“네가 음식을 해먹으면서 가노라면 늦을 게 걱정된다. 마땅히 내 눈 앞에서 그 하나는 먹고, 여섯 개는 싸서, 어서 빨리 가거라.”
하였다. 진정은 눈물을 삼키면서 거절하며 말하였다.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하면, 그 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며칠 동안의 먹을거리를 다 싸서 가면, 세상이 저를 뭐라 하겠습니까?”
하며, 세 번 사양했으나 세 번 권하였다. 진정은 그 뜻을 거듭 어기다가, 밤이 되어 먼 길을 떠났다. 삼 일만에 겨우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 하였다. 머문 지 3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이르렀고, 진정은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어가 명복을 빌고 7일 만에 깨어났다.
8) 향득, 다리의 살을 베다
향득(向得 일명 상득)은 오늘날의 공주인 웅천주 판적향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선(善), 자는 반길(潘吉)인데 천품이 온순하고 착하여 마을에서 그의 덕행을 높이 기렸다. 어머니는 이름이 전하여지지 않는다. 향득도 효성 있고 공손하기로 널리 알려졌다. 경덕왕 14년(755) 을미(乙未)에 혹심한 흉년이 들어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고 나아가 전염병까지 돌았는데 향득의 어버이가 주리고 병들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 또한 등창이 나서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향득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지만 먹을거리가 없었다. 마침내 향득이 자신의 볼기 살을 베어 먹였고, 또 어머니의 등창을 입으로 빨아서 모두 살아나게 되었다. 웅천 고을의 관원이 이러한 선행을 웅천주에 알려 주에서는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경덕왕이 벼 3백 석과 집 한 채와 얼마간의 밭을 내리고, 임금의 명령으로 돌비를 세우고 향득의 선행과 효행에 대한 사적을 새겨서 기념하였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그 곳을 이름하여 효자의 마을이라 한다.
9) 정조대왕의 효행, 부모은중경 탑
경기도 수원에 가면 수원화성과 융건릉(융릉과 건릉)이 있다.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너무나 비차하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하여 만든 능침이다. 정사에 시간이 날 때마면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다고 한다. 한번은 정조의 어가 행렬이 능제를 올리기 위해 화성(수원)으로 가다 야트막한 고개에서 멈춰 섰을 때였다. 멀리 사도세자의 능침이 손에 잡힐 듯 보이자 정조 임금은 눈물이 그렁거리며 한탄하였다.
“아버님께 가는 길이 어찌하여 이리 더딘가.”
그 뒤로부터 이 고개를 지지대(遲遲臺) 고개라 했다. 오늘날 의왕시와 수원시의 살피가 되는 고개가 된다. 한번은 정조가 아버지의 융릉을 성묘할 때였다. 능침 인근의 소나무들이 한창 자라날 초여름인데 솔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를 보게 되었다.
“이 놈들아, 아버님 무덤의 솔숲을 갉아먹느니 차라리 내 불효한 창자를 갉아먹어라.”
드디어 정조가 송충이들을 잡아서 그대로 씹어 삼켜버렸다. 그 뒤로 융릉에는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는 용주사 절을 짓기로 하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옮긴 뒤 사찰을 다시 짓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부모은중경에는 열 가지 부몽의 은혜가 나온다.
첫째,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준 은혜, 둘째, 해산 때 산고를 견디시는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 넷째, 쓴 것은 본인이 삼키고 단 것은 자식에게 먹이는 은혜, 다섯째,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는 은혜. 여섯째, 젖을 먹여 기르는 은혜, 일곱째, 손발이 닳도록 씻어주시는 은혜, 여덟째, 먼 길을 떠나 있을 때 걱정해 주시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당하는 은혜, 열째, 끝까지 간절하게 자식을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다
화성시 용주사 대웅전 옆 잔디밭에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탑이 서 있다. 정조는 수원성을 특별히 새로 쌓고 한성(漢城)에 못하지 않게 화성(華城)이라 했다. 주민들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잘 보살펴 달라는 성심을 잊지 않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0) 일연선사의 노모 봉양
일연선사는 고려 충렬왕 무렵 78세의 선사는 국사의 자리도 마다하고 인각사로 내려와 95세 된 병든 노모를 봉양하였다. 그 뒤 한 해만에 어머니 낙랑군부인 이씨는 병이 깊어 돌아가시고 인각사에서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하였다. 삼국유사의 마지막 편복이 효선(孝善)편인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마무리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선사가 입적한 뒤에도 어머니 산소가 보이는 곳에 자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普覺國尊碑銘 참조). 오늘날 군위군에서는 삼국유사사업의 일환으로 선사의 부도에서 이씨부인의 산소까지를 ‘일연 효행길’로 콘텐츠화 하였다. 선사는 살아생전에 국보 306호인 삼국유사와 국보32호이며 유네스코 기록누화유산에 등재된 고려대장경 마무리 증의(證義)를 남해 정림사에서 수행 완성하였다. 그 증거로 보각국존비명에 나오는바,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이 이름만 전하다.
일연의 생애를 통하여 보더라도 구십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의 자리도 내어놓고 인각사로 내려와 본인의 꿈이었던 <삼국유사> 집필을 마무리 하면서도 어머니 낙랑부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드리려 했던 효행의 길을 걸으면서 눈물 어린 효선편을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를 모신 묘소가 건너다 보이는 곳에 당신의 무덤 곧 부도를 세워달라고 했던 기록들이 그의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실려 전한다.
11) 세조대왕과 석보상절
세조 대왕이 어머니이자 세종대왕의 왕후였던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경도감에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언해본으로 펴냈다. 1446년에 세종의 정실인 소헌왕후가 돌아가자 어머니의 죽음을 절절하게 슬퍼한 수양 대군이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중국 양(梁) 나라의 승려 우(祐)가 지은 석가보(釋迦譜)와 당(唐) 나라의 도선(道宣)이 지은 석가씨보(釋迦氏譜) 등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들을 고려하여 모은 뒤 갈래를 지어 처음 석보를 제작, 어머니의 제단에 올리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세종이 수양 대군에게 석보를 완성하라는 명을 내리자, 신미, 김수온 등과 함께 기존 석보에 증수석가보, 아미타경, 무량수경, 지장경, 법화경 등의 내용을 더하고 원문들을 한글로 뒤친 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석보상절이다. 이후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어본 후 이에 대한 찬가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짓게 되고, 수양 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쳐 월인석보를 엮어내게 된다. 인쇄에 사용된 한글 활자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점, 석보상절의 한국어 문장이 다른 언해 자료와 다르게 한문을 직역한 문체가 아닌 점, 최초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부기한 점, 이 책의 표기법이 그 이후의 한글 표기법의 전범이 된 점 등을 볼 때 우리 나라 15세기 중엽의 한글과 한자음 번역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또한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산문 작품이며, 문장 또한 세련되고 유려하여 후대의 한글 고전소설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상의 효행 사례를 동아리 하여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순번
효행의 주체
출전
내용
1
설총
삼국유사
아버지 원효 명복기원 소상 조상
2
경덕대왕
삼국유사
성덕대왕 위해 신종 주조
3
김대성
삼국유사
전후생 부모, 석굴암, 불국사 세움
4
지은-홍장
관음사사적기
맹인 아버지 원량 득안
5
의현대사
선본사사적기
모친 명복기원 갓바위 조성
6
손순
삼국유사
아이를 묻고 어머니 봉양
7
진정사
삼국유사
모친 생전사후 봉양
8
향득
삼국유사
다리 살을 베어 부모 봉양
9
정조대왕
정조실록
융건릉-화성-부모은중경탑 축조
10
일연선사
보각국존비명
노모 간병, 삼국유사 찬술
11
세조대왕
세조실록
석보상절 간행
제3장 효 문화의 교과서 효경의 위상
1. 조선 전기의 효경
춘추전국의 말엽, 전한(前漢) 초에 지은 효경은 유교 윤리 사상의 알맹이라 할 효(孝)의 원칙과 규범을 실은 책이라는 점에서 유자들의 전범이 되었다. 황제 같은 통치자들에게 효경은 효치가 곧 충치로 이어지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구실을 하였기에 가장 적합하고 가정윤리에도 부합하는 절묘한 길이었다. 효경이야말로 엄청난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경전이었다.
그림 고문효경
이 같은 효치(孝治)란 한당 대의 정치·사회를 이끌어 감에 있어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주희(朱熹)는 생각이 달랐다. 본디 효경이 갖고 있던 존엄성과 효경의 정치이념인 효치론(孝治論)을 단호히 부정하고 이를 쇄신하고자 효경간오를 재구성했으며, 효경간오는 그 뒤 동정(董鼎)의 주석을 통하여 효경대의로 그 명맥을 더욱 튼실하게 다져 갔다.
신라 신문왕 때 설총(薛聰)이 앞장을 서 처음으로 당나라에서 도입한 효경은 과거 시험의 필수 과목
은 물론 그 뒤로 조선시대까지 유학 교육의 주요 경서 중 하나로서 중시되었다. 특히 왕 세자들의 교육의 디딤돌이 되었으니 교육적인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 그런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별 유학의 주류적 흐름은 한당 유학에서 북송 유학으로, 다시 주자의 성리학 등으로 계속 그 성격이 바뀌면서 영향관계가 달라졌다.
사대부들의 필수 경전이었던 효경은 삼국시대 처음으로 도입된 이래로 조선전기까지 계속 변화하다가, 16세기 후반에 들어서 실용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효경대의가 들어온 뒤로는 효경대의로 뿌리를 내리는 흐름을 보였다.
이렇게 시기에 따라서 유학의 성격 규정과 경전의 변모는 당대인들이 효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관점에 상당한 변모를 가져왔다. 따라서 각 시기별로 효경을 이해하는 양상이나 경전이 갖는 학문과 사회적인 자리매김도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효경 텍스트가 효경대의로 고쳐지는 16-17세기 초엽까지로 한정하여 조선전기의 효경의 자리 매김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의 효경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먼저 신라와 고려의 효경 학습에 이어 조선 전기의 효경 학습을 대조해가면서 각 시기별 효경의 자리매김의 차이와 그 배경을 동아리 하였다. 이어서 조선전기에 효경텍스트에 대한 변화 과정과 그에 따른 조선조 학자들의 효경에 대한 인식의 면모를 살펴보고 이어 조선시대 효경교육의 한 보기로써 세자 교육에 효경교육과 그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한다(강문식(2012) 참조).
2. 조선전기 이전 효경의 자리매김
1) 국학(國學)의 필수 교과
고대 시기의 효경에 관련한 기록은 거의 영성하다. 해서 당시의 효경에 대한 인식의 실상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백제의 석학이었던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이 논어와 효경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태자를 가르쳤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이른 시기에 효경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효경의 사회 교육전인 비중을 얼마만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다. 경덕왕 2년(743) 당 나라 현종이 주석을 한 어주효경(御注孝經) 한 부가 당으로부터 들어왔다. 이어 경덕왕 6년(747)에는 국학 교육과정에 세 가지를 강좌를 설치하여 국학의 학생들을 교육했는데, 이때 효경이 논어와 함께 과정의 대들보라 할 필수 과목으로 교습되었다.
그림 효경
다시 원성왕 4년(788)에 설립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에서도 효경은 상·중·하품의 모든 과거 시험 과정에서 변함없는 필수 과목으로 학습을 요구하였다. 국학과 독서삼품과의 운영 내용을 볼 때, 효경은 통일신라의 국립 교육 과정과 인재 등용 과정에서 논어와 함께 가장 근간이 되는 필수교재였고, 따라서 통일신라 유학의 중심 경전 중 하나였다.
국학의 중심 교과인 효경의 자리매김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이어졌다. 그렇다고 고려 초엽 효경교육의 실상을 보여주는 실증 자료가 없다. 한데 문종 10년(1056) 서경 유수가 진사과나 명경과를 준비하기 위하여 서경 안에 자리한 여러 학교에 마련해주기를 요구한 서책에 효경이 들어 있다. 효경이 국자감 교육과 인재 등용의 주요 과목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또 고려 인종 무렵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는 국학을 동아리 하여 국자학, 태학, 사문학의 3 학을 설치하고 다음과 같은 학식을 제정 공포하였다.
경전은 주역(周易)과 상서(尙書), 주례(周禮)와 예기(禮記), 모시(毛詩)와 춘추(春秋)의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을 각각 1경(經)으로 삼았으며 효경과 논어는 반드시 배우도록 하였다. 학생들의 수업 연한은, 효경과 논어 두 교과는 1년을 기한으로 한다. 많은 교과가 있으나 모든 학생은 먼저 효경과 논어를 읽고, 다음에 다른 경서와 함께 산(算)을 읽고 시무책(時務策)을 배운다. 여가가 있으면 반드시 서(書)를 겸하여 익히는데 하루에 한 장씩 하도록 한다.
마침내 효경은 3학 모두에서 논어와 함께 국학의 생도들이 가장 먼저 학습해야 하는 기초 필수 과목으로 비중 있게 다루었다. 한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고종 때 기록을 살피면, 국자감에서 매년 섣달에 학생들에게 논어와 효경을 시험으로 인재를 뽑아 이부에 보고하면 이부에서는 이들에게 공직을 주었다. 이는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여 약식으로 보는 시험인바, 이 경우에서도 논어와 효경이 취재 시험 과목으로 특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왕조에서도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효경이 논어와 함께 국학 교육과 인재 선발의 저울이 되었다. 해서 고려의 학자들은 효경을 여러 경서 중 가장 먼저 학습해야 할 교과로 인정했으며, 이는 고려 후기까지도 이어졌다. 이규보가 자제들에게
“백가와 천사를 모두 연구해야 하지만 효경을 먼저 읽어 깊은 뜻을 깊이 알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충목왕에게 효경과 사서(四書), 그리고 오경(五經)의 순서로 학문의 단계를 밟아 나갈 것을 촉구한 것으로 보아 효경을 학문 수련의 첫 번째 길목으로 인식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곡·이색으로 대표되는 고려후기 학자들이 효경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효경은 당시 학자들의 학습의 기둥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효경이 국학 교육과 인재 등용의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중시되었던 근본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통일신라와 고려 모두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국왕 중심의 관료체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정치 개혁이 추진되었던 시기와 국학에서 효경교육이 강화된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통일신라에서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후반까지의 신문왕대를 거치면서 국학 설치와 유교 교육 강화, 지방행정체제 확립, 중앙관제 및 군제 개혁, 관료전 지급과 동시에 녹읍 폐지 등을 추진함으로써 귀족을 억제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또 고려에서도 예종-인종 조에 왕권의 회복과 정치기강의 확립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학제와 과거제 개혁을 통해 정치개혁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들을 길러내고자 하였다.
2) 아동의 필수 교과, 효경
여말선초의 성리 학자 권근(權近, 13521409)은 효행록후서(孝行錄後序)에서 효경을 다음과 같이 의미부여를 하였다.
“예전에 공자가 효경에서 위로는 천자의 귀함으로부터 아래로는 서인의 천함에 이르기까지, 털끝 하나 살 한 점 상하지 않음에서 시작, 마지막 산소에 편안히 안장하는 데까지 빠뜨리지 않고 모두 말하여 후세를 훈계했으니,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권근은 이 글에서 효경이 공자의 저술이며, 효경 안에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선연히 하였다. 또 권근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첨(李詹, 13451405)도
“효경의 전질을 익힌 뒤라야 어버이를 섬기는 처음과 끝이 갖추어졌다.”
라고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실온 누리기 위해서는 효경 학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여말 선초의 학자들은 효경을 어버이 섬기의의 도리가 담긴 경서로 인식하였다. 마침내 효경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조선전기 내내 이어졌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효경의 자리매김이 인재 등용의 과거 과목에서 빠짐으로써 그런 변화가 초래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세종 때 판부사였던 허조(許稠, 13691439)는 효경이 중시되지 못하는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판부사 허조가 계하였다.
“효경과 소학은 모두 처음 배우는 자가 마땅히 먼저 탐독할 서책입니다. 하지만 소학(小學)은 과거를 볼 때 필요하기 때문에 선비들이 열성으로 소학을 읽지만, 효경은 세상의 초학자들이 전혀 읽지 않습니다. 청컨대, 경연에서 자구를 풀이한 효경을 간행하여 초학들을 가르치게 하소서.”
그림 소학
여기에서 허조는 효경의 자리매김이 낮아진 중요한 연유로 효경이 과거의 시험과목에서 제외된 점을 들고 있다. 다만 유학의 기초학습서라는 점에서 효경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소학은 과거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학자들이 좋든 싫든 공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조도 그의 장계에서 효경 경시에 대한 대책으로 효경의 간행과 보급 및 교육의 강화를 주장했을 뿐이다. 허조의 장계 이후에도 효경의 자리 매김은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이러한 효경의 잘못된 인식에 대하여 본질적인 비판을 한 사람은 백운동서원을 세운 학자 주세붕(周世鵬)이었다. 주세붕은 송인수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당시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효경을 가장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에 소-대학을 가르치기 때문에, 마침내 효경을 소아지서(小兒之書)라 하여 소홀히 하게 되었고 심지어 경연에서도 효경을 중시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다시 주세붕은 공자가 엮고 정리한 6경 가운데 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책은 효경이 유일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효경이 공자의 저작이며 육경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경서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 현실의 효경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육경이나 사서와 나란히 서지 못함으로써 효경의 지덕(至德)·요도(要道)는 사대부들이 존숭하는 바가 되지 못함을 비판하였다. 이상과 같은 주세붕의 비판은 당시 사람들의 효경 인식에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세붕은 효경의 핵심어를 효제(孝悌)로 규정하였다. 효제는 화목의 근본이 되며 이 도의를 실천한다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듦은 손쉬운 일임을 강변하였다. 해서 주세붕이 제기했던 효경에 대한 인식 전환의 방향은 효경을 효치를 통하여 나라를 다스림의 경서로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세붕의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조선 전기 효경의 위상은 더 이상 이전 시대와 같은 정치사회적 중요성을 회복되지 못 하였다.
3) 조선 시대 효경의 변화
(1) 효경 판본의 변화
조선전기의 효경 판본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계기는 주희의 효경간오(孝經刊誤)가 들어온 뒤라고 볼 수 있다. 효경간오에서 주희는 이른바 효치론(孝治論)으로 일컬어지는 한당의 효경을 비판하고 나서 효경의 원문을 빼고 정리하여 경 1장 전 14장 체재로 재구성하였다. 성리학 성격의 효경 인식의 중심에 서는 판본이다. 김인후(金麟厚)는 명종 1년(1546) 효경간오를 간행하면서 그 발문을 지었다. 발문에 따르면, 김인후는 옥과(玉果) 현감으로 있을 무렵 효경을 간행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칠 계획을 세웠다. 마침 언관에서 물러나 낙향하던 유희춘(柳希春)이 옥과에 들렀다가 효경간오 진강본(進講本) 한 질을 줌으로 하여 이를 저본으로 간행했다.
특히 유희춘이 김인후에게 준 효경간오는 진강본, 즉 경연이나 서연에서 진강되던 책이었다. 이로 보면 명종 원년 이전에 벌써 효경간오가 들어와서 왕실교육의 교육용으로 활용되었음을 알겠다. 이 판본은 왕실은 물론 사대부가와 민간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효경간오 발문에서 김인후는 우선 효경이 공자 문중에서 전해온 책이며, 선비들이 초학을 가르칠 때 논어와 함께 가장 비중 있게 다루었던 경서였다는 것, 한대 이후 본의가 흐려지고 체재가 흐트러진 효경을 주희가 손을 보아 효경간오를 엮은 사실 등을 책의 발문에서 밝혔다.
“송나라 주자에 이르러 비로소 그 잘못된 것을 줄이거나 다시 정리하였다. 또 주자가 일찍이 그에 대한 외전(外傳)을 지으려 했다가 결국에는 전을 세우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뜻이 있는 듯하다. (중략) 경신(敬身)은 어버이를 공경함이니 효경에서 말하는 효지시(孝之始)가 이것이다.”
효경의 의미를 소학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함은 김인후 혼자만의 견해는 아니다.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이이(李珥)의 성학집요(聖學輯要)이다. 성학집요의 내용은 통설(通說)·수기(修己)·정가(正家)·위정(爲政)·성현도통(聖賢道統)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정가 제 2장 효경 부분에 효경이 많이 인용된다. 성학집요에서 효경의 인용 사례를 들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우리 몸의 살과 터럭은 어버이로부터 받은 것이매 감히 상하게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효도의 비롯됨이다. 세상에 나아가 출세를 하고 사람의 도리를 행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남김으로써 그 어버이를 드러냄은 효도의 마침이 된다. 무릇 효라 함은 어버이 섬김에서 시작하고 임금을 섬김을 가운데로 하며 도덕적인 인간으로서의 구실을 완성함을 마침으로 한다. -효경(하)와 같다. 오씨가 말하였다. 사람이 되어 어버이가 낳아주신 몸을 스스로 아끼매 감히 일그러지게 하랴. 이는 효도의 비롯됨이 되기에 때문이다. 능히 출세를 하고 도리를 행하면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날림으로써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내야 한다. 이는 효도의 마침이 되기에 그러하다.”子曰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孝經下同 吳氏曰 人子之身 父母之所遺 自愛而不敢虧 所以爲孝之始也 能立身行道則己之名揚於後世 而父母之名 亦顯矣 所以爲孝之終也(효경).
그림 격몽요결
보기에서와 같이 율곡은 효경의 원문을 먼저 기록하고 끝에 세주로 효경이라고 써서 인용의 출전을 밝혔다. 그 다음에 줄을 바꾸어 해당 구절에 대한 주석을 함께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바는 위 인용문 가운데 나오는 오씨(吳氏) 주석이 효경 관련 주석서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다. 소학집주(小學集註)에 실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성학집요에 원용된 모든 효경 구절에서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조선전기의 효경 판본은 효경대의가 들어옴으로써 그 자리매김에 변화가 왔다. 효경대의는 원대의 학자 동정이 주희의 효경간오에 바탕을 두고 주석을 덧붙인 책이다. 효경대의는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보급된 효경 판본이라 하여 지나침이 없다.
동아리 하건대, 조선전기의 효경 판본은 금문효경(今文孝經)-> 효경간오-> 효경대의로 성리학적인 교본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위와 같은 효경 교본의 변화가 실제적인 효경 파악에는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2) 왕실 교재로서 효경
효경에 대한 소극적인 인식의 상황에서 부분으로나마 조선 전기 효경에 대한 인식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왕실에서의 효경 학습 기록이다. 이에 이 절에서는 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왕실 교육에서의 효경 인식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효경이 아동들의 기초 학습서로 사용되기는 왕실 교육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찍부터 왕실 교육의 중요한 교본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왕실에서 효경 교육은 주로 세자를 비롯한 대군이나 공주 등을 대상으로 수행되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더러 국왕을 대상으로 하는 경연에서 효경이 강론되기도 하였다.
서연(書筵)에서 원자나 세자에게 효경을 강론해야 한다는 제의는 조선초기부터 있었다. 태종 2년(1402) 6월 사간원에서는 당시의 시무(時務)를 정리해서 태종에게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자의 입학에 관한 안이었다. 사간원에서는 원자가 제2의 임금이므로 어릴 때부터 학문을 통해 바르게 길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학덕이 높은 학자를 가려서 시학(侍學)의 책무를 맡기고 날마다 서연을 열어 효경을 강습할 것을 건의하였다.
다시 세조 3년(1457) 9월에 왕세자가 돌아가자, 의정부는 같은 해 11월에 뒤에 예종이 되는 해양대군(海陽大君)의 왕세자 책봉을 청원하는 사신을 명에 보낸 다음 해양대군에게 본격적인 왕세자 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그 때 우선하여 학습한 교본이 바로효경이었다.
성종 13년(1482) 7월 홍문관 부제학 유윤겸은 원자 교육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도 원자 교육의 출발점으로 효경과 소학이 떠올랐다. 명종 10년(1555) 11월에는 여러 재상이 원자의 교육 방법에 대한 건의를 올렸다. 이에 대해 명종은,
“원자가 비록 요즈음 천자문과 효경 읽기를 마쳤지만 아직 큰 병을 겪지 않았으니 마땅히 더 고려하여 결정하겠다.”
라고 하였다. 당시 원자의 나이는 5세, 원자가 어린 나이에 효경을 학습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원년(1608) 2월 임금이 즉위한 뒤 4월부터 세자의 서연에서 효경대의를 공부하기 시작, 같은 해 11월에 강론을 끝마쳤다.
왕실에서의 효경 공부는 원자·세자뿐만 아니라 대군이나 군 등의 왕자들과 공주·옹주·현주 등에게도 학습을 하도록 하였다. 세조는 대군으로 책봉되기 전인 5세 때에 효경을 외웠다. 또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졸기(卒記)에도 어려서부터 학습에 힘써 효경, 소학사서삼경 등에 두루 밝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럼 서연에서의 효경 강론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내용이 가르쳐졌을까. 광해군 때 활동한 학자 최현(崔晛)의 인재집(訒齋集)에 실린바, 서연강의(書筵講義)는 효경대의 강론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 전기 왕실에서의 효경 학습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강론의 내용을 보면, 서연에서 하루에 강론하는 효경의 범위가 상당히 짧았음을 알 수 있다. 강론은 흔히 서연관이 먼저 본문을 두 번 정도 읽은 다음 세자가 따라서 두 차례 본문을 읽고 난 다음 이어서 서연관이 본문의 의미를 풀이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강의내용으로 들어가서 효경을 축자적으로 자구에 대한 세밀한 풀이보다는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와 군왕이 실천해야 할 덕목을 강론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제왕의 학업은 단순히 읽고 외우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며 읽는 정독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학습자가 성심을 다하여 학업에 임할 것을 강조한 것(4월25일), 군주가 효행을 솔선하면 백성의 교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군주는 좋고 나쁨의 가름을 잘 함으로써 못된 소인배를 물리쳐야 한다(이상 5월 12일). 이렇게 보면 서연에서의 효경학습이 단순한 기초 교육이 아니고 세자가 앞으로의 국왕이라는 점에서효경 교육 역시 제왕 교육이라는 데 초점이 놓여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자·원자의 효경 학습은 다른 왕족의 효경 학습과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한편 효경은 명종 무렵 국왕의 경연장에서 강론되기도 하였다. 경연에서 효경을 진강해야 옳다는 제안은 명종 대 이전에도 간간히 나타났다. 성종 1년(1470) 1월 정척은 효경한 부를 성종에게 올리면서,
“효경은 공자께서 가르치신 말로 어버이를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좌우에 두고서 성상의 관람에 대비하게 하소서.”
말하자면 국왕의 효경 학습을 강조하였다. 또 주세붕은 송인수에게 보낸 편지에서효경이 경연에서 진강되지 않음에 대해 작은 결함이 아니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적어도 그는 효경을 경연에서 반드시 강론해야 하는 서책으로 인식했음을 드러낸다. 명종 원년(1545) 7월 영경연사 윤인경(尹仁鏡)은,
“효경은 간단하지만 의리가 갖추어져 있고 말은 예사스럽다 하여도 의미는 심원한 서책이므로 군왕을 교육하는 성학(聖學)에서 빠뜨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저녁 석강과 밤의 야대(夜對)에서 효경을 진강할 것을 건의하였다. 명종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였고 석강에서 효경이 강론되었다. 당시의 경연관은 회재 이언적(李彦迪)이었다. 이날 진강된 구절은,
“몸과 터럭 하나라도 어버이가 주신 것이다. 이를 감히 손상할 수가 없다. 이렇게 함이 효동의 시작이다.”
회재는 이 구절을 풀이하면서, 군주는 자신의 몸을 보전하는 일에 더욱 마음을 써서 한순간이라도 게으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효경은 명종 때 경연의 교본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전기의 경연에서 효경이 진강된 사례는 위에서 본 명종 무렵의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왕실에서의 효경 학업에서 실제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다음 왕위에 오를 원자나 세자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서연이었다.
제4장 효행 문화의 지속과 과제
뿌리가 튼실해야 소담스런 꽃과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효행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숭조경천의 조상숭배는 단군신화에서도 드러난바 한국 문화의 원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고맙다’로 대변되는 문화기호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효선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언덕이며 인류 문화의 보편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제도로서 교육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신라 신문왕 시절 홍유후 설총(薛聰) 선생의 주창으로 세워진 국학(國學)에서부터였다. 모든 지방에서는 향교(鄕校)에서 가르치던 효경(孝經)을 들 수 있다. 나아가 효경은 과거시험이었던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중요한 과목이기도 했다. 국학과 향교를 합하여 줄여 부른 것이 학교(學校)였다. 그만큼 국가 사회적으로 효행을 모든 분야의 윤리 강령으로 삼았던 것이다.
교육의 정치 문화적 기능은 사회 통합과 그 제도가 교체될 때 더욱 긴요한 화두가 된다. 정치적으로는 삼국이 하나로 통일이 되었으나 사회문화적으로는 봉합이 된 상태였다. 더욱이 골품제도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왕족과 귀족, 귀족과 평민 사이에 갈등을 해소하려면 무언가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던 시대 상황이었다.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그 사회가 발전하고 잘못하면 뒤지거나 망할 수도 있다. 신문왕은 새로운 역할 모형으로 당나라의 교육 정치제도를 수입하고자 하였다. 그 선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이가 바로 홍유후 설총이었다.
당 나라의 국자감(國子監) 제도를 본떠서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세웠다. 국학은 국가의 유교진흥책의 일환이었고 예부(禮部)에 속했다. 말하자면 국립대학을 세워 교육부 산하에 관할하게 한 셈이다. 국학의 명칭은 경덕왕 때 가서 태학감(太學監)으로 바꾸었으나, 혜공왕 때 다시 국학으로 되돌렸다. 그 뒤 국학은 성덕왕 16년(717)에 당으로부터 공자(孔子)․십칠(十七)․칠십이 제자(七十二 弟子)의 화상(畵像)을 모셔와 국학에 안치하고 석전(釋奠)의 예(禮)를 행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교학(敎學)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국학의 권위를 높이게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기존의 골품(骨品) 제도만으로는 새로 유입된 고구려, 백제의 영토와 유이민을 지배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왕은 정치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해 줄 수 있는 새 지도층을 길러내고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나라의 정치풍토를 쇄신하고자 이를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키우고자 하였다. 그게 바로 신문왕이 국학을 세우게 된 근본 원이 되었다. 설총은 그러한 일련의 역할을 앞장서서 해야 했으니 뭔가 백성들을 설득할 만한 수준의 교육과 올바른 문자생활을 체계적으로 할 이두(吏讀)의 정리가 절실하였다. 설총은 국학 교육의 선구자였다. 해서 선생을 동방십현이라 하여 각 향교에서 머리에 위패를 올려 향사를 올린다. 한문은 익히기에 너무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그러했다. 우리말에 맞는 토착화된 문자생활을 꿈꾸었던 것이다.
1. 국학의 창제와 성격
국학은 당(唐) 나라의 국자감을 모방하였으나 신라의 국가적 관심과 실정에 맞게 내용을 변화시켰다. 당 나라 국자감의 선택과목이었던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필수과목으로 선정하였다. 또한 설립 초기에는 유교의 사상을 연구 보급하려는 학문적 목적을 띠었다. 뒤로 갈수록 역량 있는 사람이면 차별을 두지 않고 관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국학에서 갈고 닦은 수업의 성적을 바탕으로 하여 필요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는 신라 때 관리 채용을 위한 일종의 국가시험 제도로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도 한다. 원성왕 4년(788) 종래의 골품제를 기초로 한 벌족(閥族) 본위의 인재 등용을 지양하여 학벌 본위의 관리 채용을 지향하기 위해 독서삼품과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제도에 따르면, 응시자는 그 독서의 성적에 따라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어 채용하게 마련이었다. 즉 ① 《춘추좌전》, 《예기》 또는 《문선》을 읽어서 능히 그 뜻을 통하고 《논어》, 《효경》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 ② 《곡례(曲禮》,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 ③ 《곡례》, 《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구별하였다. 그러나 만일 《5경(五經)》, 《3사(三史)》,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통한 자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기용하였다.
의 효시였다. 말하자면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원이 될 공평하고 새로운 길을 열었음은 물론이고 귀족을 제어할 수 있는 통과제의(通過祭儀)가 되었다. 귀족의 자제라고 적절하게 등용하는 당시의 폐해를 줄이고 일정한 양성체제를 거쳐서 시험에 통과한 이를 가려서 뽑아 쓴 제도니 가장 공정하고 설득력이 있는 인재 등용의 제도 개혁인 셈이다. 新羅神文王元年始立國學置卿一人以掌之 古之國學今之鄕校則當時瑤石宮也 學國學也校鄕學也 註解混爲一事可疑然瑤石宮之爲國學則審矣(삼국유사)
2. 향교의 설립 운영
향교는 성균관의 하급 관학(官學)이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묘(文廟), 명륜당(明倫堂), 중국과 조선의 어진 인물들을 제사지내는 동무와 서무, 유생들이 생활하는 동재, 서재가 있었다.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를 두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향교에는 정부에서 5∼7결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守令)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전쟁과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의 발흥으로 부진하였다. 그리하여 효종 때에는 지방 유생으로서 향교의 향교안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자는 과거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등의 부흥책을 쓰기도 하였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서울의 국립대학이 성균관, 지방의 공립학교가 향교, 사립학교가 서원으로 볼 수 있다.1894년(고종 31)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는 이름만 남아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주로 수행하였다.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고 선현제사를 하는 곳인 만큼 향교는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 중요도 때문에 향교 주변 근방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내려서 향교 주변을 걸어가게끔 했을 정도로 향교 주변을 신성시하기도 했다. 향교를 그냥 문묘(文廟)라고 부르기도 한다.열에 아홉은 고려 시대 당시 절이었던 곳으로, 절을 향교로 개조한 것이고, 기존에 있던 절들은 대다수가 산자락으로 이전했다. 순흥향교의 경우 향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사찰이 있었던 부지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인근 사찰터에서 부재를 가져다 향교를 짓기도 했는데, 고령향교나 부여향교의 경우 향교 건물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삼국 시대 주춧돌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경주나 개성의 경우는 과거 한 나라의 수도로써 중앙교육기관이 소재했던 만큼(신라는 국학, 고려는 개성 성균관) 각 고을에 있던 기존의 교육기관들이 향교 역할을 했다. 향교가 있는 곳은 대부분 과거에 고을이 위치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전국의 교동(校洞), 명륜동(明倫洞), 향교리(鄕校里)와 같은 지명들은 대체로 향교가 있거나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천의 관교동도 향교와 관련 있는 명칭이다. 향교는 고을의 중심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향교가 있는 동네는 한때 그 도시의 중심지였다고 볼 수 있다.
3. 서원과 서당
서원은 조선 시대의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학문과 유학의 진흥, 그리고 사회교화를 위하여 큰 구실을 하였다. 때로는 정략적인 붕당의 줄 세우기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며 도학(道學, 성리학)을 연마하는 강학소이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고거를 준비하는 유력한 교육의 모꼬지이기도 했다.
서원의 발생은 조선 중종 36년(1541)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이 교화시책의 하나로 고려조의 안향(安珦)을 모시고 학문을 강론하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비롯한다. 명종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편액이 내려짐으로써 사액 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구실은 학문을 강론하던 정사(精舍)와 제향을 모시던 사묘(祀廟)의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명종 대에 29개고, 선조 대에 124개소로 늘어났다. 뒤로가면서 자신들의 조상을 받들기 위한 우모소(寓慕所)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어 그 본디의 취지가 희석되었다.
서원의 교육 내용은 성리학(性理學) 곧 도학을 중심으로 하였다.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소학, 가례(家禮)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자집(諸史子集)을 강론하였다(伊山院規, 퇴계). 성적의 평가는 통(通), 략(略), 조(粗), 불(不)의 4 단계로 하였다.
서원의 입학생은 생원과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다. 신예한 소장선비들이 구심점을 이루었다. 서원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직분으로서는 원장과 강장(講長), 그리고 훈장(訓長)이 있었다. 원생의 정원은 대략 20명 내외였다. 2019년 들어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지정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4. 효행 체험 교육의 당위성
역사는 강물처럼 도도히 흐른다. 효행교육은 강물은 여전하건만 시대와 문화의 변천에 따라서 선조들이 행하여 오던 효행교육을 중시하던 전통은 신식 교육의 도입과 더 불어 약화일로를 걷게 되었고 전통문화 공간으로서 오늘날의 성균관과 향교만이 보전되고 있다.
갑오경장(1894) 이후 서양의 근대식 교육제도가 들어와 학교 중심의 교육이 실시되면서부터 향교의 교육 기능은 사라지게 되었다. 남아있는 것은 제의기능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일부 충효교실 같은 사회교육의 교육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치열한 입시경쟁이나 취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학생이나 학부모들의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통문화로서 효행교육과 오늘날의 학교교육을 함께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점이다.
효행교육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교육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은 급별 학교에서 인성 교육 과정을 정식으로 교육과정에 반영해야 한다고 본다. 경험교과로서 급별 학교 혹은 교육 기관에서 일정 부분 학점이나 필수 혹은 선택 교과로서 이수하도록 해야 한다. 고대와 현대가 함께 어울리는 그런 내용의 경험교과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템플스테이처럼 각 향교에서 소정의 시간을 안배하여 한 학기 혹은 두 학기를 학습과 체험을 통한 과정으로 시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령 이러한 특별 경험 과정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효행 체험 특별과정>
급별
효행 체험 콘텐츠
기간
교육 담당
평가
유아
생활 예절- 역할놀이-인형극
1주(1년)
학교-향교
참여(필수)
초등
생활 예절- 역할놀이–답사-다도 체험
6주(6년)
학교-향교
참여(필수)
중등
생활 예절- 향교 답사 역할놀이-뮤지컬
6주(6년)
학교-향교
참여(필수)
대학
생활 예절- 향교 답사-역할놀이-뮤지컬
2주(1년)
학교-향교
참여(필수)
정규 교육과정에 넣어 학기 중 아니면 입학 전 교육과정으로 이수하게 함으로써
효행체험을 통한 전통 교육과 현대식 교육을 접목시켜 효행의 덕목을 체득하도록 한다. 이 때 저급학년의 경우 부모 교육도 함께 하도록 권장한다.
(글 정호완)
첫댓글 교수님 귀하고 귀한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에 천천히 숙지하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집필하신 '삼국유사 사전'을 구입하고 싶습니다.
영문의 소담스런 가을 거두미를, 들국화 피리니... .
졸문이지만 땅 콩 삼아 보신다면 어떨까 합니다.
'삼국유사사전'(지문당)은 저에게 여분이 없네요. 서점에
주문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문운을 빌며 사연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