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순성(巡城)놀이(1)
(숭례문∼경교장, 2016년 9월 17일)
瓦也 정유순
엊그제 추석에 당일치기로 고향선산에 가서 성묘를 올리고 고속도로와 국도를 적절히 이용하여 별 어려움 없이 다녀왔고, 오늘은 서울 한양도성 순성놀이를 하기 위해 속칭 남대문으로 불리는 서울의 숭례문(崇禮門)에서 아침 8시에 인왕산을 향해 출발한다. 순성(巡城)은 조선시대부터 “한양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심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말하는데, 현대의 순성놀이는 서울특별시와 시민단체인 서울KYC 주최로 2011년부터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놀이’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하루에 한양성곽을 돌아본다는 의미로 감히 “순성놀이” 이름을 붙여본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네이버 캡쳐>
태조7년(1398년)에 완공된 숭례문은 한양의 남쪽에 있는 정문으로 국보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29년(1395년)과 성종10년(1479년)에 대규모 개축을 거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전화(戰禍)를 입지 않고 잘 버텨 왔다. 하지만 1907년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嘉仁)가 조선에 오자 “대 일본 황태자가 약소국 조선의 정문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치욕”이라며 숭례문 좌우의 성벽을 헐어내는 대신 그 자리에 도로와 전찻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는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으면서 조선왕조의 정문역할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 2008년 2월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13년 5월에 복원되었으나 지금은 무슨 연유인지 내부 공개도 안 되고 관람도 허용되지 않는다.
<숭례문>
또 그러면 왜 숭례문이 남대문이 되었고 국보1호로 지정되었는가? 일설에는 일제강점기 때 용산에 군사기지를 만들면서 철거하려 하였으나 일본 측 입장에서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철거를 보류하였으며, 더 나아가 숭례문을 속칭인 남대문으로 ‘조선 문화재 보물제1호’로 등재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을 통과해 한양을 함락시킨 승전문(勝戰門)이기 때문에 조선 문화재 보물제1호가 된 것이 해방되고 난 후에도 그대로 국보1호로 이어온 일제 잔재의 가장 치욕적인 문화재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다면 어떤 변명도 필요 없을 것 같고, 주저하지 말고 하루 빨리 뜯어 고쳤으면 한다.
<화재 전 숭례문의 모습-문화재청 사진-네이버캡쳐>
새벽부터 요란하게 내리던 비도 잦아든다. 받쳐 든 우산도 접어 넣고 길 건너 대한상공회의소 앞으로 간다.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상공회의소 효시는 1884년(고종21년)에 한성상업회의소(漢城商業會議所)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그 후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5월에 조선상공회의소를 창립하고, 1948년 7월에 대한상공회의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52년 12월에 상공회의소법을 제정∙공포하여 공법인화 되었으며, 지방에도 현재 72개의 지역상공회의소가 있다.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와 함께 소위 경제4단체로 불린다.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상공회의소 담벼락에는 지방별로 서울(1884년) 인천(1885년) 등 설립연도 순으로 표지석을 장식해 놓았다. 한양도성이 놓였던 자리에는 바닥에 성벽처럼 돌을 깔아 놓았다. 길을 따라 소의문(昭義門, 속칭 서소문) 쪽으로 수십 발작 내밀자 부영빌딩 앞에 ‘시위병영(侍衛兵營) 터’가 나온다. 시위병영 터는 조선후기에 임금의 호위를 위하여 조직된 보병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선포 이후 전투부대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산되었다. 여기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은 후에 항일시위 투쟁의 의병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각 지역 상공회의소 표지석>
<성곽이 놓였던 자리의 바닥 돌>
<시위병영 터 표지석>
소의문(昭義門)은 1396년(태조5년) 다른 성문과 함께 지으면서 소덕문(昭德門)으로 하였다가 1744(영조20년)년에 문루를 고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도시계획에 따라 주변의 성곽과 함께 철거되었고, 지금은 ‘서소문로’라는 도로가 애오개(兒峴 또는 阿峴) 쪽으로 확 뚫렸고 고가도로가 시작되는 야트막한 언덕이 소의문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서소문로-도로 끝부분이 소의문자리로 추정>
서소문로 큰 길을 건너 배제학당역사박물관과 중부등기소 길을 따라 정동제일교회 앞으로 하여 정동 길로 들어선다. 정동(貞洞)은 조선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가 죽자 이곳(주한영국대사관 자리 추정)에 능역이 조성 되였으나, 다른 왕릉과는 달리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으며, 너무 크고 넓다하여 도성 밖으로 이장한 후 정릉(貞陵)에서 릉(陵)자만 떼어지고 마을이름이 ‘정동(貞洞)’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는 신덕왕후 소생인 방석(芳碩)이 세자로 책봉이 된 것에 대한 태종(이방원)의 사적인 감정에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구 정동-네이버 지도>
정동 길로 접어들자 우측으로 정동극장(貞洞劇場)이 보인다. 정동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圓覺社)를 복원한다는 소명으로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육성이라는 세 가지 목표로 1995년에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국립극장 분관으로 출발하였다가 1997년에 완전한 재단법인 독립체제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정동극장-네이버 캡쳐>
다시 정동극장을 지나 지척에는 리모델링 등 공사 중으로 연말까지 임시 폐쇄된 덕수궁 중명전(德壽宮 重明殿)이 나온다. ‘을사늑약 체결의 아픔이 서린 곳’인 덕수궁 중명전은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덕수궁(당시에는 경운궁)을 확장 공사 할 때 궁궐로 편입되었다. 덕수궁 본궁과 이 일대의 사이에 이미 미국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과 같이 사용했다고 한다.
<덕수궁 중명전 폐쇄 안내>
중명전은 왕실도서관으로 지은 2층 벽돌건물이며 독립문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A.I.Sabatin)이 설계했다고 한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고,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1920년대에는 일제에 의해 이 일대가 덕수궁에서 제외되면서 환벽정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들이 없어졌다.
<덕수궁 중명전-네이버 캡쳐>
경향신문 쪽으로 가다가 캐나다대사관 앞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정동근린공원이 있다. 정동근린공원은 한국의 가톨릭수도원의 첫 자리인 ‘정동수녀원’이 있던 곳에 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정동수녀원은 1887년에 프랑스 사람 <블랑주교>가 조선의 어려운 사람을 도우기 위해 프랑스 자카리아수녀(초대 원장) 등 4명이 와서 한옥에서 수녀원을 약50일 간 운영하다가 명동성당으로 옮겼다고 한다. 수녀원 건물은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원 언덕에는 구 러시아공사관 터가 있다.
<구 러시아공사관 터>
당시 러시아공사관은 일본의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사주를 받은 사무라이들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한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일본의 만행이 날로 포악해지자 목숨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태자(순종)는 한밤중에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여 약 1년간 지내다가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은 러시아 공관 터와 3층 규모의 구조물만 남아 있다.
<구 러시아공사관 남은 건물>
다시 큰길로 나오니 신문로가 나오고 길 건너에는 흥화문(興化門)이 보인다. 흥화문은 1616년(광해군8년)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이었으나, 일제가 1910년에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어 폐궁이 되었다. 그 후 흥화문은 안중근장군에 의해 죽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위해 일제가 지은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옮겨졌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박문사는 폐사가 되고 영빈관(현 신라호텔)이 들어서서 정문으로 이용되어 오다가, 60여년 넘어 경희궁으로 되돌아왔으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곳에 서서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정문 노릇만 하고 있다.
<흥화문>
신문로는 돈의문(敦義門, 일명 서대문)이 몇 차례 그 위치가 바뀌면서 “새로 문을 낸다”라는 뜻에서 신문(新門)이라 한데서 유래되어 길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어찌했던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 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경향신문사와 경교장 사이의 언덕 위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만 한다. 조선조 시대에 한양 서∙북쪽의 중요 관문(關門)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터인데 일제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한양도성 돈의문 터 안내>
돈의문 터로 짐작 가는 가까운 곳에 강북삼성병원이 있고, 그 안에 경교장(京橋莊)이 있다. 경교장은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란 사람이 지하1층 지상2층 건물로 지었고,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해방 후 중국에서 귀국한 백범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는데, 죽첨장이란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의 경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하였다고 한다.
<경교장 측면>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7.11∼1949.6.26)가 신탁동치반대운동과 건국∙통일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경교장’이라고 불렀으며, 민족진영의 집결지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서거한 곳으로, 집무실에는 유리창에 권총 탄환이 뚫고 간 흔적을 만들어 남겨놓았다고 하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하지는 않았다. 백범이 왜 암살이 되었고 배후가 누구인지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지만 알만 한 사람들은 대충 짐작을 한다.
<1949년 6월 애도의 물결에 쌓인 경교장-서울시제공-네이버캪쳐>
이번 순성놀음에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성벽이 지나가는 자리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에 크던 작던 또는 높던 낮던 전부 언덕으로 되어 있어 도성 안과 밖의 물길을 갈라놓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도성 밖으로 떨어지는 물(비)이나 흐르는 물은 성 밖으로 흘러 나가기 때문에 도성 안으로 들어 올 수 없고, 성곽 안으로 떨어지는 것만 모두 청계천으로 모여저서 왕십리 밖에서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 서해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첫댓글 와~ 서울쪽으로 올라 오시니
인기가 더 많은 것같애요, ㅎㅎ
ㅎㅎ 그렇네요.
독자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