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떨기나무 (하)
여러 학자들이 내놓은 몇 가지 견해
넷째는 이 떨기나무 불꼿 광경을 일종의 자연현상으로 보는 견해다. 예컨대 루이 골딩(Louis Golding)이 시내산 근처의 와디(wadi)에서 봤다고 하는 모래 회오리바람에 햇빛이 비춰 마치 언덕 전체가 화염에 쌓인 것처럼 보인 현장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견해도 역시 모세가 본 초자연적인 현상을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설명해 보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섯째 견해는 L. 풍크(L. Fonch)가 주장한 것으로, 모세의 떨기나무는 시내산에서 자라는 산사나무(hawthorm)였다는 전해이다. 이것이 좀 근사하게 들리는 까닭은 그 나무의 선홍색 열매가 불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언어적 뒷받침이 없다.
여섯째 제안은 W. 스미스(W. Smith)와 H. N. 몰뎅키(H. N. Moldenke)와 같은 학자들이 생각해낸 것으로서, 모세의 떨기나무는 ‘Lorantus acaciae’(로란투스 아카치아에)로 알려진, 빨간 꽃을 피우는 겨우살이가 떼지어 붙어 있는 아카시아 숲이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것도 언어적으로 뒷받침이 없이 단지 색깔로 인한 상상에 불과한 견해다.
일곱째 견해는 꽤 오래된 것으로서, 현재의 시내산 기슭에 있는 성 카테리나 수도원(Santa Caterina Monastery)의 경내에 자라는 거룩한 가시나무(holy bramble, 학명 Rubus smguineus)가 바로 그 떨기나무였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퍽 설득력 이 있어 보이지만, 그 가시나무는 원래부터 시내 반도에 서식한 것이 아니라 수도승들이 지중해 지방으로부터 옮겨다 심은 것이므로 크게 신뢰를 줄 수는 없는 주장이다. 단지 전통적으로 이와 비슷한 모양의 나무가 아마도 모세가 본 떨기나무였을 것으로 믿게 하려는 선의가 배어 있는 나무일 따름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일곱 가지의 주장들 중의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해결은 되지 못한다. 필자 개인적 견해론 모세가 본 떨기나무가 꼭 과학적으로 또는 식물학적으로 설명돼야 하는 나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광경이 하나의 계시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의 현장이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났고, 그 불꽃이 타오르기는 했지만 사그라지지 않은 것은 그것이 물체의 연소로 인한 자연적인 불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시떨기나무
‘개역한글판’엔 ‘가시떨기나무’라는 말이 오직 1번 나타나는데, 그것은 앞에서 본 떨기나무(출 3:2~4)의 히브리어인 ‘쓰네’를 번역한 말이다. 그러므로 쓰네는 총 6번 사용됐는데, 그 중에서 5번은 ‘떨기나무’로 옮겨졌고, 1번은 가시떨기나무로 옮겨졌다. 후자로 번역된 경우의 문맥은 다음과 같다.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신 33:16).
이것은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축복하는 말씀 가운데 있는 요셉에 대한 축복(신 33:13~17)의 일부다. 동일한 원어를 두 개의 서로 다른 단어로 번역한 것은 독자들에게 상당한 오해를 유발시키고 연구자들에게는 불필요 한 혼란을 야기한다.
한편, ‘공동번역’과 ‘새표준번역’은 공히 히브리어 쓰네를 출애굽기에서는 ‘떨기’로 번역했고, 신명기에선 ‘떨기나무’로 번역했다.
가시나무떨기
신약에서 모세의 떨기나무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바토스’(batos)인데, 이것을 ‘개역한글판’은 모두 가시나무떨기로 번역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막 12:26).
이 말씀은 누가복음 20장 37절에도 반복돼 있고, 같은 단어가 스데반이 말한 사도행전 7장 30절과 35절에도 언급돼 있으며, 이 네 경우 모두에서 우리말로 가시나무 떨기로 번역돼 있다. 이 단어의 번역이 신약 안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했으나 구약과의 통일성은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이 바토스를 가시나무떨기로 번역하지 않고, ‘가시덤불’(막 12:26; 눅 20:37) 또는 ‘가시나무덤불’(행 7:30, 35)로 번역했다. 이래서 이 나무의 우리말 호칭은 매우 혼란스럽게 되었다. 성경 번역자들이 단어의 용례들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가능한 한 역어를 통일시켜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남대극
삼육대 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