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집집이 새로 이엉을 입혔다. 밤 사이 우물 앞 얼음이 풀리고 동네 닭들이 모여 헤집는다. 맞은편 안산 골짜기에 희끗희끗 보이던 눈은 자취도 없고 축축이 젖어 한걸음 가까이 다가든 듯싶다. 간밤 비를 몰아간 바람은 언덕 다박솔밭에서 울고 마을은 잠자는 듯 조용하다.
길가 보리밭 두렁에 어린아이 셋이 나란히 서 있다. 얼굴, 손, 저고리, 바지에 점점이 흙이다. 바지괴춤이 배꼽 아래로 내려앉고 길과 밭두렁 사이 작은 도랑을 막고 눈 섞인 물이 괴기를 기다린다. 붇는 줄 모르게 물은 야금야금 밭밑까지 젖어들었다.
노마는 앉아 두 손을 물에 잠그더니 가만히 있다.
"차냐."
"아니."
옆에 기동이도 손을 잠근다.
"차냐."
"아니."
그 옆에 꼬마도 마저 손을 잠근다.
노마는 차츰 손이 저려 온다. 옆에 기동에게 묻는다.
"너 차냐."
"아니."
노마는 참는다. 기동이도 손이 저려 온다. 그 옆에 꼬마에게 묻는다.
"너 차냐."
"아니."
그리고 꼬마는 아니라고 하였으니까 또 참는다.
마침내 노마는 손을 물에서 꺼낼 언턱거리를 얻었다. 고요히 가라앉은 앙금 노란 바닥이 불룩불룩 움직인다. 재빨리 손을 올려 샅에 넣으며,
"저게 뭐냐."
두 아이도 거진 선후가 없이 날래게 손을 꺼내 노마가 하는 대로 샅에 넣는다.
"뭐 말야."
"뭐 말야."
물은 구름처럼 앙금이 일며 흐려졌다. 보이는 것이 없다.
"가만있어."
찬찬히 물은 가라앉고 역시 앙금이 노랄 뿐 아무렇지도 않다. 기동이는 노마를 쳐다본다.
"뭐 말야."
노마는 좀 궁했다. 가만있어 하다는,
"이거 말야."
하고 불시에 돌 하나를 집어던지고 달아났다. 정면으로 물을 받고 두 아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일어선다. 보리 뿌리 한 뭉치를 집어 들고 기동이는 노마의 뒤를 쫓는다. 꼬마도 따른다. 바람개비처럼 활개를 내저으며 노마는,
"아하하하."
그 소리에 비로소 마을은 너무 조용했던 걸 깨닫는다. 노마는 밭고랑에서 고랑으로 건너뛴다. 꼬불꼬불한 윗물길을 동네로 향해 달음질친다. 움푹움푹 허방을 빠지며 울 뒤로 돌아가 도야지 우릿간 옆 짚가리 속을 들치고 몸을 숨긴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지며 좀 떨어진 곳에서 꼬마 목소리로,
"꽁꽁 숨어라."
지금 기동이는 열나게 구석구석 찾는 모양, 조금 후 그 기동이 목소리로,
"어디 숨었니."
또는,
"찾으러 간다."
숨바꼭질하듯 왼다. 사실 숨바꼭질로 변했는지도 모를 일, 그 소리는 차츰 멀어 간다. 노마는 머리를 뽑아 들었다. 갑자기 좌우에 햇볕이 환하고 쳐다보는 죽나무 상가지에 까치 한 마리가 썩은 가지를 물고 앉았다. 거기만 바람이 불어 꽁지가 거슬린다. 그런데 아까 물 속에서 무엇이 불룩불룩했던 것인지 도시 알 수가 없다.
"밤이면 구구구 하고 우는 그놈이 그랬을까."
요즘 밤이 되면 이상스런 소리가 났다. 구구구 하고 땅 속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듯한, 아버지가 몹시 신기해하는 그 소리, 무엇이 그러느냐고 물으면 경칩 우는 소리라던 그 경칩이란 놈이 그랬는지 뉘 알리요.
"옳아, 그거야."
노마는 갑자기 몸을 일으킨다. 한번 그놈을 밝히어 볼 일이었다.
"기동아, 어디 숨었니."
이번에는 노마가 숨바꼭질할 때 술래처럼 외친다. 큰길을 가로 건너 노마는 일부러 진땅으로 골라 디디며 기동이 집을 향해 갔다.
양지쪽 오줌독 앞에 발틀을 놓고 기동 아버지 흥서는 수숫대로 울타리발을 치고 섰다. 노마는 말없이 눈치로 기동이 형제를 찾는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흥서는 노마를 바라보더니 말을 건다. 어제도 노마집엘 다녀간 사람이건만―---
"아버지 밤에 잘 주무시디."
"응."
"기침 안 허구."
"응."
"아침에 밥 얼마나 자시디."
"……"
"얼마나 자셔."
"조금야."
"얼마, 반 사발?"
"응."
기동 어머니가 달걀 꾸러미 서넛을 둥쳐 들고 문 앞에 나타났다가 노마를 보자 되돌아서 안으로 들어간다. 기동 아버지는 두 손으로 발눈을 조인다. 토담 모퉁이로 노마는 사라지고,
"기동아, 어디 숨었니."
그 소리가 동네 아래로 작아 간다.
기동 어머니는 집 안에서 다시 나왔다.
남편의 등뒤에 한참 말없이 섰더니,
"오늘은 좀 임자가 가슈."
"어디 가란 말여."
"어딘 어디유."
그리고 달걀 꾸러미를 흥서 옆에 가져다 놓으며,
"바깥 사랑으로 바루 가지구 들어가요."
흥서는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한다. 한참 만에 허리춤에서 담배를 빼들며,
"글쎄 미쳤지. 없는 돈에 일부러 사서까지 가주갈 건 뭐여."
"누군 돈 아까운 줄 몰라 그러는 거유. 남 허는 것 좀 못 보우. 경춘이는 날마다 이른 새벽에 가서 앞뒤로 다니며 마당을 쓴답디다. 그놈이 일이 허구 싶어 그러겠수. 다 검은 속이 있어 그러지. 그리구 어제 그놈이 오묵골 노마네 집 논에 두엄을 내더란 말을 임자 귀루두 들었지."
"남 그런다구 나까지 같이 놀아나란 말여."
"그러니까 남에게 빼앗기기 전에 발바투 들어서란 말 아뉴."
"어엿이 임자가 있는 걸 마당을 쓴다구 되구 달걀 꾸레미를 가져간다구 될 거여. 소갈찌없는 소리 작작 해."
"임자가 어디 성한 사람유. 내일 어떨지 모레 어떨지 모를 사람이니까 허는 말이지."
"성치 않으면 그럼 당장 숨이 넘어간단 말여. 원 친차좋자 지내던 사이에 그렇게 됐으니 가엾단 생각은 없구 계집년이 인정머리가 없어. 저리 가, 저리 가."
저리 가 소리를 거푸 지르며 그걸로 후리려는 듯이 담뱃대를 거꾸로 잡는다. 아내는 피해 부엌 쪽으로 대문을 꺾어 돌아서며 앙탈이었다.
"당장 죽지는 않는대두 그 꼴루 농사 짓진 못하겠지. 이왕 누구에게나 넘어가고 말 땅이니 자기가 맡어 부치도록 허라는 게 잘못한 말이 뭐람. 저러다 경춘이놈에게 빼앗기고 내 생각 헐 때두 있으리다."
"조게 그래두 주둥이를 닥치지 못허구."
그러나 담뱃대를 고쳐 물고 그는 발틀 앞을 떠나 마당으로 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다.
진실로 흥서가 오묵골 노마네 집 논에 생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해마다 흉풍이 없이 양식 가까이 소출이 나는 근처서는 골답으로 꼽는 닷 마지기 논이다. 그렇지 않아도 농토라는 게 남의 소작이 겨우 서너 마지기 천둥지기가 있어 농사 짓는 흉내나 낼 뿐, 그 모자라는 벌충은 식구가 각자 도생으로 여자는 여자대로 시오 리 밖까지 바다 물줄기를 따라 나가 조개를 캐다는 밤새 까서 이튿날 새벽에 안팎 오십 리 길을 걸어 항구로 팔러 나간다. 남자는 남자대로 또 품을 팔러 항구로 나가고, 밤늦어 집에 돌아와 동트기 전에 일어나 나가느라 단잠을 자지 못하는 터가 아니냐. 그러나 흥서는 그 논이 있는 오묵골 근처에 곁눈질을 하는 것조차 마음에 꺼릴 만큼 그와 노마 아버지는 말하면 사이가 가까운 친구였다.
"계집년이 소갈머리가 없어서."
하고 흥서는 또 한번 아내를 욕해 본다.
노마와 기동이는 짜장 숨바꼭질을 벌인 모양, '떴니' '떴다' 소리가 매갈잇간 근처서 조그맣게 들린다.
마을에서 하나인 기와집 마당귀에 높다란 종대가 서고 그리고 또 지주인 그 집 안주인은 마음이 상냥하였다. 색빨래를 하느라 팔목까지 파랗게 연두물이 든 손으로 기동 어머니가 가지고 간 달걀 꾸러미를 마루 끝에서 찬장으로 옮기어 가며 또 한번 치사였다.
"제삿날도 가깝고 긴하게 쓰긴 잘 허겠어도 너무 미안허구먼. 집의 닭도 알 안길 때가 됐을 텐데."
"그러지 않어두 안길려구 모아 뒀든 거와요. 남의 집 닭들은 안는가 봐두, 무슨 놈의 닭이 알을 안어얍죠."
"요새 달걀금 비싸다는데 항구로 내다 팔어두 얼만가. 서속 한 말 값은 될 거 아냐."
그리고 달걀을 집어넣는 아래 찬장 속을 고개를 기우듬이 들여다 보더니 곰팡 슨 호박고지 한 뭉치를 끄집어냈다. 마루전에 걸터앉았는 기동 어머니 편으로 몸을 돌리며,
"요전날 감자도 어찌 맛있게 먹었는지 몰라. 씨 할 건 남기고 보낸건가."
"노마 집에도 좀 보내구 집에도 좀 남겨 뒀어와요."
"노마 집엔 그런 것 장만도 안 해뒀든가."
"뒀어두 남어나겠어요. 사내는 앓고 양식은 떨어지고 헌데."
주인 여자는 호박고지를 들고 마루전으로 나온다. 기동 어머니는 자기에게 줄 것인가 하고 잠시 보다가 외면을 한다. 안주인은 호박고지를 풀더니 훅훅 입으로 불어 곰팡을 날린다.
"요샌 노마 아버지 병이 좀 어떻다든가. 가 좀 봤나."
"요즘은 좀 더하든뎁쇼. 뒷간 출입두 못 하구 똥오줌을 받어 내는 걸입쇼. 차차 농사 질 때는 돼오는데 그러구 어떻게 할 셈인지 몰라와요."
"사랑 양반도 그래 걱정이셔. 인정에 겨와 어쩌시지는 못 하시고."
"허지만 인정은 인정이시구 댁 농사는 농사입죠. 어디 하루 이틀에 날 병이얍죠. 그리고 날래 병줄을 놓는다손 치더라도 올 안으로 일어나 농사 짓게 되겠더라구요. 다리 마디하구 눈감으면 염허겠더라니까요."
그리고 사람은 얌전해도 약질이어서 힘드는 일은 못 할 사람이라는 것, 성했을 때도 자기 남편이 거지반 농사일을 거들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지탱해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걱정이라는 둥 기동 어머니는 한편의 가치를 깎기에 열고가 났다.
그러나 그는 오래 노마 아버지의 험담을 하지 못했다. 마루 밑에서 개가 짖고 나오며 바로 노마 어머니가 중문 안에 나타났다. 기동 어머니는 적이 어색해서 입귀가 이그러지는 웃음을 바로잡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반색을 해서 그를 맞았다. 코를 쭝끗거리며 꽁무니로 도는 개를 피함인지 수줍어 그러는지 기동 어머니는 낯을 붉히고 부엌 쪽 축대로 올라서 추녀 밑으로 해서 노마 어머니 등뒤에 조그맣게 쪼그리고 앉았다. 옆에 둥구미를 꼈을 바에는 무슨 궁한 청이 있어 왔을 텐데 잠잠히 눈치만 살핀다. 기동 어머니는 궁둥이를 돌려 마주 앉으며,
"얼굴색이 무서우. 어디 아푸."
"아픈 데는 없어두."
하고 그는 면난쩍어 낯을 비빈다. 주인 여자는,
"없는 살림에 아이 아버지는 앓고 얼굴이 좋아질 리 있나. 그리고 요샌 병이 좀 난가."
"그저 한모양이야요. 그래두 요즘은 입맛이 달어 백삿걸 찾기는 해두 뭬 있어야 해줍죠."
그러고 잠깐 동을 떴다가,
"아씨께 또 좀 사정을 빌러 왔사와요. 이따 저녁거리가 없는데 아이 아범은 저만 가지고 어린애처럼 볶구 앓는 사람 두고 가진 것 없군 더 못살겠어요."
이만치 말해 놓고 노마 어머니는 고개를 다소곳이 처분만 기다린다.
주인 여자는 호박고지를 펴 행주로 싹싹 곰팡을 닦아 내며 잠잠히 말이 없다. 여기 조마조마하여 속을 졸이기는 노마 어머니보다 기동 어머니가 더했다. 그는 주인 여자의 다음 움직일 태도 여하에서 조금 전 자기가 한 말에 그 확답을 얻는 듯싶었다. 마침내 주인 여자는 입을 열었다.
"나도 사정이 그렇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광에 있든 곡식은 전부 지난번에 항구로 실어 내고 꼬옥 계량할 것만 남겼는데 거기서 축을 내면 어쩌나. 인젠 양식은 일절 안 내기로 했다네. 그리고 자네가 그 동안 가져간 건 수월헌가."
바깥 주인이 상처를 하고 헌몸으로 이 집에 후실로 들어온 주인 여자는 수단이 능글맞다. 안으로는 남편을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고 밖으로는 별로 나가는 것 없이 동네간에 덕망을 얻어 마을 여자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러나 당자가 더 그것을 자각하는 모양, 의젓이 아래턱이 받친 얼굴에 그 표를 냈다.
"할멈."
하고 그는 호기찬 소리로 부엌을 향해 부르더니,
"찬밥 남었지."
그리고 노마 어머니를 돌아보고,
"저리 부엌으로 가보게. 자네도 먹고 아이 아범도 좀 갖다 주고. 먹든 건 아닐세. 숫밥야."
"숫밥 아니면 어때요. 주시는 것만 고맙죠."
"그리고 종종 들르게. 찬밥도 남고 김치 같은 것도 남으면 모아 둘게니까."
치마를 털며 그는 일어섰다. 손을 목 뒤로 돌려 쪽찐 머리를 매만지며 방을 향해 간다.
"기동넨 방으로 들어오게."
때묻은 부엌 문지방에 개가 턱을 걸고 들여다보고 늙은 부엌데기가 찬간을 향해 돌아선 등뒤에 추워서 그러는 양, 노마 어머니는 팔짱낀 어깨를 올려 목을 오그리고 섰다.
기동 어머니는 마당으로 내려가 처음 보는 것이 아니건만 장독대 옆에 박힌 펌프를 만져 보며 소리를 높여 감탄이었다. 두레박 없이 물을 져올리니 신통하고 힘이 안 들어 좋겠고. 그리고,
"노마 어머니 이것 좀 나와 보슈."
그러나 노마 어머니는 돌아서려지도 않는다.
조금 후 둥구미에 찬밥덩이를 굴리며 노마 어머니가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그 집 대문을 나왔다. 뒤따라 기동 어머니도 팔짱을 끼고 같은 울상으로 나온다.
"아이 아버진 편찮구 저녁거리가 없어 어째."
축축이 젖은 토담에 햇볕이 당양하고 앞서고 뒤서고 두 여인은 긴 토담을 다 가도록 말이 없다. 토담이 기역자로 꺾인 모퉁이께 이르러 기동 어머니는 걸음을 멈췄다.
"조금 있다 아이 어머니가 우리집으로 오든지, 노마를 보내든지 허슈."
그리고 돌아서 팔짱을 푼다.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날씨는 아직 쌀쌀해도 저녁이면 더러 문 앞 마당에 나와 서서 거니는 사람이 희끗희끗 보였다. 어둠이 졸아들며 따라 하나 둘 멀어 가듯 사라진다.
마을 저편 끝 구붓한 보리밭을 등지고 앉은 노마 집 밖에서 기동 아버지 흥서는 뒷짐을 지고 컴컴한 서까래 밑을 찬찬히 살피며 돈다. 어제 지붕에 이엉을 올리고 어둔 데서 하느라 고삿줄이 잘못 얽히지 않았나 살피는 거다. 싸리짝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그편으로 돌아선다. 노마 어머니가 물동이를 이고 나왔다.
방 안은 메주 뜨는 내 같은 매캐한 내가 독하고 그것이 코에 배서 아무렇지 않아지도록 아랫목에 다리를 꼬고 누웠는 노마 아버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맡 들창에서 오는 희미한 빛을 받고 노마 아버지의 눈등이 꺼진 눈, 코밑에서 턱 아래로 흐른 그림자, 배 위에까지 손을 껴 올려논 손가락까지 방 안 어두컴컴한 가운데 그 모양은 어떤 끔찍스런 생각을 일으켰다. 흥서는 머리를 돌리었다. 빈 담뱃대로 화롯전을 두들긴다. 그는 노마 아버지의 그 자세를 어떻게 좀 헐고 싶었다. 역시 노마 아버지는 기동이 없다.
"오늘 밖에 좀 나가 봤나."
굴 속에서처럼 그 소리는 방 네 귀에 울리는 듯 갑작스럽다. 노마 아버지는 약간 머리를 젓는다. 아니라는 뜻이다.
"날이 꽤 풀렸데."
그리고 방 안은 다시 잠잠하였다. 흥서는 잠시 숨을 참는 듯 다물었던 입을 열어,
"어제 경춘이가 오묵골 자네네 집 논에 됨(두엄)을 내풀더라는데 건 자네가 시킨 건가."
약간 고개를 돌려 쳐다볼 뿐 아무 기색이 없다. 흥서는 그가 이 말을 들으면 놀라 꼬투리를 캘 줄 알았다.
"자네가 시킨 건 아닐 테지."
그렇다고 고개를 바로 고치며 두어 번 턱을 끄덕인다. 어제 아내에게서 같은 말을 들었을 때에도 역시 무관심하던 그였다. 그러나 흥서는,
"그럼 그눔 허는 것이 괘씸허지 않는가. 지가 뭔데 남의 논에 말두없이 거름을 내구."
불시에 노마 아버지는 몸을 일으키려고 옆으로 누우며 팔꿈치를 세웠다. 흥서는 하던 말을 멈춘다. 그러나 상체를 약간 들고는 그대로 잠잠하고 만다.
"그리고 그눔이."
하고 흥서가 다시 입을 열자, 그는 잠깐만 하는 태도로 손을 들어 막아 놓고 역시 눈을 끔벅일 뿐 기척이 없더니,
"저 소리 들류."
"……"
"저 소리 들려."
"무슨 소리 말인가."
잠시 들창 밖에 귀를 모은다. 어두워 갈 임시면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소리 외엔 별것이 없다. 아이를 부르는 뉘 집 여자의 음성, 그보다 먼 또 사람의 소리, 담벼락에 매달린 시래기 타래를 울리는 바람 소리와 그것이 멀어 가는 소리―--- 노마 아버지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보습 벼리러 가거든 집의 것두 좀 벼려다 주우. 며칠 안 있으면 논두렁두 손을 대야겠구 헐 텐데 설마 나두 그때엔 일어나지겠지."
흥서는 덤덤하고 만다. 일없이 손바닥을 엎치락뒤치락 남의 것처럼 들여다본다. 노마 아버지는 귀 뒤를 문대고 앉았더니,
"여기 좀 보우."
하고 머리를 돌려 까칠한 귀 뒤 드러난 뼈를 가리킨다.
"여기 좀 살이 오른 것 같지 않어."
언제나 다름없이 가는 목 까칠한 그것이로되 흥서는 "그렇군" 아니 해줄 수 없다.
"요새 생굴을 좀 먹었더니 해롭지 않은 모양야. 행결 담이 가라앉구 내 병엔 그게 제일이라거든. 그걸 아무튼 장복만 하면 인삼 녹용보다두 낫다니까."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몸을 좌우로 끄덕이며 고개를 기우듬히 목 뒤를 비비었다. 그 만사태평인 태도 앞에 흥서는 까닭 없이 낯이 붉어지는 속을 감추지 못해한다. 화로에 잿덩이를 집어 부시다는,
"그걸 먹구서 설사만 안 했으면 약은 될 거여. 먹기두 좋겠구."
그리고 또 좀 어색해졌다. 앓는 속에 생굴을 먹고 그대로 새길 수 없지 하는 당자에게 바로 말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얼떨결에 불쑥 말을 해놓고 보니 반대였다. 음성을 고쳐 동떨어진 소리로,
"암 나여지. 뭘 먹구라도 하루바삐 나서 일어나야지."
방 안은 서로 안색을 분간키 어려울 만큼 어둡다. 그 컴컴한 속에 얼굴을 숨기게 되는 것을 대견해하는 흥서였다.
이왕부터 이렇게 거북한 사이가 아니었다.
노마 아버지와 흥서는 외모며 성미가 모두 판이했다. 흥서가 곧잘 일을 가르쳐 논 소를 노마 아버지가 부리면 쟁기를 논두렁에 꼬라박고 만다. 소를 달래기 전 급한 성미에 자기가 먼저 견뎌 내지 못했다. 몸도 체소하고 대살지고 흥서는 실팍한 등판에 수족이 무디고 그러면서 서로 손이 맞고 볼이 맞아 항구로 품을 팔러 나가도 짝을 지었다. 뱃짐을 풀 때 서투른 장소에 본바닥 일꾼들에게 위압을 느끼다가도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속이 든든해지던,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한 자가 움직이면 한 자도 따라서 말없이 선술집도 들어가고 또 말없이 나오고 하던 그들이다. 그렇게 밤늦은 기나긴 신작로를 묵묵히 걷는다. 말이 하기 싫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말을 아니 해도 뜻이 통하고 맘이 맞아 행동이 같이 되었다.
그러던 사이는 지금 한 자는 여전히 기승기승한데 한 자는 병이 들어 몸져누웠다. 그리고 아내는 흥서의 눈을 기어서까지 지주 서울집으로 감자 바구니, 달걀 꾸러미를 들고 자주 드나들었다. 그걸 또 흥서는 모르지 않는다. 알기는 하면서도 굳이 금하지는 못하고 다만 허물을 아내에게 입혀 눈을 흘기고 생트집을 잡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삭여지지 않는 나머지 마음에서 그는 노마 아버지를 찾아와 미간을 찌푸리고 앉았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더욱 미간이 찌푸러질 짓만 거푸 저질렀다.
흥서는 또 한번 고쳐서 말은 냈다.
"생굴이 몸에 약은 되는 건가 봐. 새터 사는 사람두 그걸 장복하구 십 년 앓던 토질이 떨어졌대지 않어."
이 말에 어기대기나 하는 듯이 노마 아버지는 터져 나오는 기침에 등을 꼬부리고 오장을 쏟을 듯이 자지러졌다. 좀 고자누룩해서 흥서는 요강을 내밀어 주었다. 컴컴한 속에서 그것을 잡아다니는 노마 아버지 손이 퉁명스럽다 싶었다. 흥서는 주춤하고 물러앉는다.
흥서가 또 좀 괴로운 것은 노마 아버지를 대하고는 공연히 자기도 아내와 한편이 되어 친구의 희생을 기다리는 듯싶어지는 거다. 자기는 그렇지 않다는 그 변명을 그는 기침 한 번을 크게 하는 데까지 저도 모르게 표하며 전에 없이 늦도록 불 없는 화롯전에 손을 걸고 죄 밑에 눌려 앉았게 된다.
방 안은 빈 듯 조용하다. 그것이 또 말없는 죄다짐인 듯 흥서는 자리가 편치 못했다. 문득 들창 밖 어둠 가운데서 땅 밑에서나 우러나오는 소리로 구구구구구―--- 두 사나이는 한곳으로 귀를 모은다.
"저 소리 들류."
"경칩 우는 소리 아녀."
멀거니 하면 가깝고 가깝거니 하면 멀다. 봄이 그렇게 젖어 오는 듯 그 소리는 그윽하다. 윗목에 쓰러져 잠이 든 줄 알았던 노마가,
"난 저거 봤어."
"뭘 봐, 임마."
"개구리야, 개구리."
"어디서 봤니."
"기동네 보리밭에서."
"모양이 어떻디."
"개구린데, 뭐 개구리야."
노마 아버지는 성냥을 그어 불을 가린 손이 맞은편 벽으로 가더니 멈췄다. 등잔에 불이 붙기 전 흥서는 자리를 일어섰다. 집 밖은 아직도 목 뒤로 스미는 바람이 차다. 그래도 땅은 녹아 발이 빠지고 바람처럼 한가닥 구수한 거름내가 코에 끼치고는 다시 없다. 북두칠성 한 끝이 시꺼먼 안산 마루에 가까이 내려앉고 흥서는 칠벅칠벅 되는 대로 발을 놓다는 문득 멈추고 섰다. 방 안에 무엇을 놓고 나온 듯 미진하다. 그는 담뱃대인가 싶어 허리춤을 더듬었다. 담뱃대는 있다. 그것이 아니었다. 아까 같은 길을 걸으며 하던 생각이 머리에 올랐던 거다. 그는 경춘이가 오묵골 논에 거름을 낸 것을 은근히 크게 보고 그리고 노마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받을 충격과 거기 따른 장면까지 머리에 그리었었다. 그 노마 아버지가 거기 무관심하긴 의외다. 그는 방에서 깨닫지 못하던 허실한 감을 여기 나와 똑똑히 느꼈다.
작은 개울 앞에 이르렀다. 건너편 둑 위에 허연 그림자가 길을 비켜 마을 컴컴한 지붕을 등지고 섰다. 노마 어머니였다. 흥서는 멈칫하고 또 한번 같은 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 밤에 어딜 갔다 오슈."
하다는,
"아, 당에 갔다 오슈."
그리고 몇 걸음 지나 놓고 나서 돌아서며,
"등불두 없이 하루이틀두 아니구 어떻게 날마다 다니슈. 낼부턴 우리 기동 어멈하고 같이 가두룩 허시구려."
그 대답은 없이 개울을 건너선 여인은,
"살펴 가세요."
그는 노마 아버지를 위해 백일 기도를 올린다고 매일 밤 등 너머 산 밑 칠성당엘 다녔다.
이튿날 흥서는 거름을 내고 오는 길인지 빈 바수거리를 진 경춘이를 동구 밖 언덕 너머서 만났다.
"경춘이 어디 갔다 오나."
하고 깎은 머리에 수건을 쓴 머리서부터 검정 고무신을 신은 발까지 한번 훑어보다는,
"이리 좀 오게."
하고 의미 없이 가던 길을 옆으로 꺾어 오묵골로 향한 밭두덕길을 몇 걸음 가다는 불시에 몸을 돌이켜 그는 다짜고짜로 상대의 멱살을 잡았다.
"이눔아."
하고 어마지두 눈짜가 허연 얼굴을 잠시 노리다가,
"오묵골 노마네 집 논에 됨은 니가 냈지."
"됨 좀 냈기로 죄 될 거 있수. 오양간은 넘구 주체할 수가 없어 좀 냈기루."
"그럼 어째 자기 논엔 아니 내고 남의 논에 먼저 내는 거여. 그리구 지금이 어디 됨 낼 때여 해토두 되기 전에."
"그래서 길 가는 사람 멱살을 잡는 거유. 이거 놓고 말헙시다."
흥서는 상기가 된 붉은 얼굴을 잠잠히 내려다만 본다.
"멱살 잡지 않군 말 못 허우. 이거 놓구 말허자니까."
흥서는 슬며시 손을 풀었다. 경춘이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지게를 벗어 놓고 고쳐 섰다.
"노마 아버진 장병으로 앓구 일헐 사람은 없겠구, 난 그래두 인정 쓰느라구 됨 좀 내준 건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유."
그리고 두터운 아래 입술을 내민 얼굴이 분명 넌 무슨 관계로 남의 일에 흥야항야 하는 거냐고 빈정대는 표였다. 흥서는 기가 막힌 듯 바라만 본다. 그야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네눔의 검은 뱃속을 모를 줄 아니. 유리를 박고 들여다보듯 환하다.'
하고 싶되 그가 노마 아버지 자신이 아닌 이상 이 말은 경춘이가 자기를 향해 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다만 자기도 그만 못하지 않게 짐짓 업신여기는 눈으로 노리다가,
"넌 인정을 쓰는 것인지 몰라도 글루해서 앓는 사람이 속을 상하게 되니 허는 말이다. 어저께로 기침이 더해, 이눔아."
그리고 한마디 더 다지었다.
"일후두 그 논에 됨을 낸다든가 손을 댔단 가만 안 둘 테니 그런 줄 알어."
그러나 흥서는 이튿날 자기도 그 오묵골 논에 거름을 져냈다. 두 짐째 풀고 돌아오는 길에 등 너머 언덕에서 짚풀을 긁고 있는 동네 노인 옆을 지나다가 그는 묻지 않는 말에 먼저 설명을 하였다(그야 동네 노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설명이었지만).
"노마 아범은 꼼짝을 못 하구 누웠구 노마는 철부지구 논에 거름 낼 때가 되어두 지푸래기 한 올이고 끌어낼 사람이 있어얍죠. 하 딱해 오묵골에 됨 한 짐 내주고 오는 길입니다."
사실 이따 노마 아버지에게도,
'오늘 자네네 집 논에 됨 한 짐 냈네.'
하고 바른 대로 알릴 생각으로 시작한 일 흥서는 아주 태연했다. 노인도 첫말에 알아들었으면 그러리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 일인데 그는 귀가 절벽이었다.
"뭐."
하고 귓불에 손을 오그려 대더니,
"자네네 집 논엔 벌써 됨을 냈어."
하고 동문서답을 하는 데는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또 한번 음성을 높여,
"노, 마, 아, 범, 은."
하고 간을 늘이어 외자, 처음 말할 때와는 의미까지 달라져 어째 변명을 하는 것만 같아서 어색했다. 그런데 노인은 또 딴청으로,
"자네가 노마네 집 논에 됨을 냈다, 건 왜."
하고 이해부득이란 듯이 똑바로 쳐다본다. 흥서는 또 한번,
"그런 게 아니와요."
하고 처음부터 되풀이할 때는 근처에 있는 동네 아이도 구경이 난 줄 알고 하나 둘 모여들고, 그는 더욱 어색해서 낯을 붉히게쯤 난처했다. 그리고 끝끝내 변명을 하기 위한 어색한 짓이 되고 말아 처음은 서너 짐 낼 작정이던 두엄을 두 짐만 내고 말았다.
같은 날 흥서는 또 좀 큰 실책을 저질렀다.
마당에서 흥서는 울타리 발을 치고 섰다가 체부에게서 납세통지서를 받고, 함께 서울집으로 가는 같은 것과 신문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아무 때 갖다 주어도 좋다는 듯 그는 문지방 너머 내던져두고 하던 일을 끝낼 것처럼 동작이 느리광했다. 그러다는 새끼 방울이 풀려 굴러내리자 손을 털고 돌아서더니 도리어 서두르기 시작하여 매무시를 고치고 버선을 갈아신고 그리고 가지고 갈 통지서와 자기 집 것이 바꿔진 것같이 몇 번이고 뒤집어 보는 거다.
하지만 가지고 가서는 두 장을 함께 서울집 바깥 주인 앞에 내밀어 놓았다. 주인이 알아 자기 것은 자기 것대로 끄르고 흥서 것은 흥서 것대로 내용을 읽어 달라는 거다. 주인은 잠깐 보고 흥서의 것은 윗목으로 밀어 던지고 두꺼비처럼 넙죽이 버티고 앉아서 그는 신문을 보았다.
"올두 비료는 부채표루만 쓰시납쇼. 올은 한 섬에 얼마나 허는죠."
흥서는 윗목에 발을 고이고 앉아 왼편 관자놀이의 흉터를 비비었다.
"그렇지 부채표지. 값은 얼마나 될지 살 때 되어야 정한 금을 알겠지만 지금 같어선 작년보담 훨씬 올랐는걸."
"종자는입쇼. 올두 은방으로 청허시납쇼."
"글쎄 면에서 헌 말두 있구 허니 올은 홍조를 심어 볼까. 헌데, 노마 아범은 병이 어때."
마고자 자락으로 눈을 씻으며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가망 없지."
"가망 없어와요."
"그럼 올 농사는 어떡헐 생각이래. 제 말 좀 들어 봤나."
"그게 그러와요. 친친헌 사이에 지가 한 해 농사쯤 지어 줘두 좋겠사와두 남과 달러 친구가 하던 걸 가루차는 거 같어 당자에게 말허기두 어렵굽쇼, 또 남들두 어떻게 생각헐까 봐 난처하와요."
그리고 흥서는 머리를 직수굿이 숙이고 앉아 주인의 다음 말을 조비비며 기다린다. 방 안은 미닫이에 볕이 당양해 밝고 주인은 신문을 보며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끄덕하고는 다시 말이 없다.
마침 마당에 면 손님들이 떠들며 들어서자 그대로 주인은 일어섰다. 흥서도 따라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에 이르러 입이 열려 무슨 말이 나올 것 같아 그는 주인의 수염 난 얼굴을 바라보는 거다. 뜰 아래 내려서서도 주춤거리며 흥서는 손을 맞이하기에 분주한 주인의 시선이 마주치기를 기다린다.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것만이 아니다. 두 번 얻지 못할 무슨 고비판을 놓친 것만 같아 언저리에서 어름어름하는 거다.
이날 만약 아내가 무엇이고 안주인에게로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으면 별다른 의미에서 그는 악성을 쳐 말리었을 것이다. 어쩐지 오던 복을 박차 버린 것 같은 까닭 모를 절망에서 거는 자기 평생 요모양으로 고생만 하다 말 팔자라고 백 번 다지는 거다. 개천을 건너다가 헛딛고 발을 적시고는 또 팔자를 탓했다.
그러나 같은 마음으로 저녁 후 노마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는 또 달랐다. 어쩐지 평소에 느끼던 거북스런 불안 없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친구가 대해졌다. 화로 앞에 앉는 태도까지 달라 조심성 없이 거칠게 궁둥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노마 아버지가 병들기 전 때처럼 사이는 만만해져서 흥서는 아무 표리 없이 그러나 퉁명스럽게 오늘 오묵골 논에 거름을 냈다는 말을 하였다.
한데 노마 아버지는 기색이 좋지 못하다. 까닭 모르게 낯이 질려 움직이지 않는 눈으로 보꾹만 쳐다보고 누웠다.
"왜 자네네 집 논에 내가 됨을 냈대서 그러나."
노마 아버지는 대척이 없다.
"어디가 아퍼서 그러나."
"……"
"어디가 아퍼."
그러나 노마 아버지는 보기 싫다는 듯 벽을 향해 돌아누우며,
"다 성가시구, 다 보기 싫어."
"나 오는 게 그렇게 보기 싫구 성가신가."
역시 대척이 없다. 거기 맞장구쳐서 흥서는 무럭무럭 부아가 끓었다. 병자의 기침을 돋울까 보아 삼가던 담배를 전에 없이 뻑뻑 거푸 피웠다. 한동안 묵묵히 앉았더니,
"보기 싫다는 사람, 안을 채구 앉았을 거 뭐 있나, 가지."
그리고 다시 아니 올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방문 밖에 나서서 컴컴한 속에 신을 찾으면서 일부러 거레를 한다. 나와 붙들어 들이기를 기다리는 거다. 하나 방 안은 여전히 괴괴하다. 집 밖을 나와서는 진정 노여워 흥서는 일절 발을 끊겠다고 맹세를 하였다.
때로 경춘이는 노마 아버지를 찾아왔다. 방문 밖에서 담뱃대를 털고 흙발을 엉거주춤 방바닥을 지려 디디며 화로 앞에 모로 앉았다. 아랫목에 노마 아버지를 보되 고개를 반쯤 틀어 옆눈으로 본다. 그 모양이 흡사 흥서와 같았다. 그는 올 때마다 달걀 몇 개를 조끼 주머니 속에 넣고 와 방바닥에 꺼내 놓았다. 자기 딴은 문병을 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꼬옥 병자가 비위를 거슬릴 말만 한다.
"얼굴색이 아주 글렀수. 저번만두 더 무서운데 저 병엔 첫째 먹길 잘해야 헌다는데 약두 소용 없다는걸."
하고 혀끝을 차며 딱한 얼굴을 한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급자기 그 말대로 되어 가는 듯싶어 볼따구니를 만져 보게 된다.
흥서가 뇌까려 돌아가던 날도 그렇다. 오던 맡에 꺼내는 말이,
"오늘 흥서가 오묵골 논에 됨을 냅디다. 그건 노마 아버지가 시킨 일유."
그러나 노마 아버지가 듣는 둥 마는 둥 하니까,
"아직 일치 않우. 해토두 되기 전인데."
하고 옆으로 슬슬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쿨룩쿨룩 기침을 손으로 막으며 엎드리는 노마 아버지를 짐짓 측은하게 낯을 찌푸리고 보더니,
"몸이 저렇구 올 농사를 어떻게 지우. 사람이 가랫줄 하난들 당길 수 있어야 허지. 노마는 어리구 아낙네 혼자 질 수는 없구."
그리고 정색한 얼굴이 잠시 어색한 웃음으로 입귀가 이그러지더니,
"나두 손이 논 사람이구 한 해 농사쯤 내가 지어 줘두 좋겠구만두."
하다가 얼굴을 곧추 들고,
"노마 아버지 생각은 어떠우. 그럼 가을에 한 마지기에 두 말씩 쳐서 한 섬을 도지루 내리다. 그야 물론 지주에게 가는 도지두 내가 물구 말여."
그러나 노마 아버지는 잠잠히 동하지를 않으니까,
"왜, 내가 너무헌 말 같어 말이 없수. 그럼 농사 질 사람 없는 줄 알고두 지주가 가만히 둘 줄 알우. 벌써 딴사람에게 넘겼는지두 모를 일인데."
아랫목에 누운 노마 아버지는 입을 다문 채 점점 안색이 달라 갔다. 핼쓱한 얼굴에 눈짜가 바로 서는 것을 보고야 경춘이는 당황해졌다. 이런 때 밖에 흥서가 들어오는 기척이 나자 그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나갔다.
그 경춘이가 앉았던 자리에 흥서가 같은 모양으로 앉아 흘금흘금 노마 아버지의 기색을 살핀다. 그 모양이 또 흡사 경춘이다. 노마 아버지는 그것이 조금 전 장면의 연장인 듯, 그리고 같은 요구를 흥서 이놈도 다조지며 직수굿이 앉았는 듯싶어졌다. 그리고 이번은 상대가 흥서라는 데 노마 아버지의 노염은 좀더 컸다.
'흥서 너두 거기 욕심이 있어 허구헌 날 찾어와 턱살을 쳐들고 앉었던 거로구나. 내 그저 해동머리 들어서며 발길이 잦드라니.'
그리고 바람 부는 날 입술이 퍼렇게 몸을 얼리며 지붕을 이어 주던 일, 살무사가 약이 된다고 거피해 말린 놈이 꺼멓게 되도록 먼지에 찌든 놈을 구해 오던 일―---일찍이 은혜로 입었던 가지가지를 그는 더러운 것을 삼켰던 듯 가래침과 함께 뱉어 버리는 거다.
"천하의 의리부동헌 놈 같으니."
하고 흥서의 관자놀이 흉터까지 징글징글한 것으로 비위가 상했다.
노마 아버지는 그 같은 눈으로 급기야는 자기 아내까지 고쳐 보기 시작하였다.
아내는 밤이면 하얗게 소복을 차리고 칠성당에 기도를 올리러 간다. 생굴을 먹고 귀 뒤에 살이 올랐다고 생각하는 속엔 아내가 이 칠성당에 가는 공을 은근히 크게 보던 노마 아버지다. 그런데 문득 믿은 낙에 곰이 핀 것을 발견한 듯 그는 정신이 맑아 눈을 고쳐 떴다. 아내가 진정 자기를 위하여 매일 밤 진날 마른날 가리지 않고 그러는 것일까 싶어졌다.
'아내도 누구와 한 가지 자기가 일찍이 없어질 날을 몽총히 입을 다물린 속에 고대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서 병이 낫기를 소원하는 기도가 아니고 그 반대 것인지 뉘 알리요.'
하다는 깊은 밤 북두칠성 아래 옥수를 떠놓고 소복한 젊은 계집이 골수에 맺힌 묵념으로 합장을 한 뒷모양이 눈에 선하고, 그러나 너무도 악척스런 그 환상에 제 자신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는 감으로 머리를 내저었다.
"아냐, 그건 내가 옥생각하는 거지."
소리를 입 밖에 내여 뙖다.
그러나 한번 버릇한 의증이 그대로 날래 삭을 리 없다.
아내가 당엘 갈 때 살며시 부엌으로 내려가 세수를 하고 발까지 씻는 모양 물을 버렸다, 펐다 하고 그리고 옷도 거기서 갈아입고 나갔다. 노마 아버지는 이것이 수상타는 거다.
'왜 떳떳한 일을 허는 거면 숨기숨기 헐 게 뭐냐. 칠성당을 팔고 밤마다 어느 사내놈을 맞으러 가는 것이 아니면 아니랄 무슨 증거가 없지 않으냐.'
그리고 동네를 뚝 떨어져 서편 등 너머 밭 가운데 있는 빈집(지난해 가을에 항구로 쓸어 간 중국인 배추장수 집이다)은 그런 남녀가 밀회하기에 합당한 곳이다.
"옳아, 분명 노톨이 집일 게여."
지금 거기서 연놈은 한참 흥에 놀리라, 그는 눈에 생기가 나서 일어앉았다. 그리고 등잔 앞에 돌아앉아 불장난을 하기에 골몰한 노마가 소스라쳐 놀라도록 큰 소리를 쳤다.
"너, 노톨이 집 알지. 지금 이 길루 가보구 오너라."
"……"
"아, 등 너머 노톨이 집 몰라."
있는 곳을 몰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까닭을 몰라 노마는 멀뚱멀뚱 쳐다만 본다.
"가라문 가지 않구. 냉큼 궁둥이 못 들겠니."
"무서운데 혼자 어떻게 가. 어메 보구 가라지 않구."
그러나,
"그래두 궁둥이 못 들겠니, 못 들겠어."
하고 목침을 들고 겨누며 노마 아버지는 문칫문칫 다가가고 노마는 그러는 대로 움질움질 윗목으로 피해 간다. 급기야 윗목 구석까지 다가가서 오지독 옆에 손으로 머리를 싸고 오그린 아들의 가는 목, 작은 등허리를 한참 목침을 든 채 내려다보고 묵묵하더니,
"너 그럼 노톨이 집은 그만두구 기동네 집두 못 가겠니."
"가서 뭐라구 그래."
"그저 가보구 오기만 해."
그리고 바지괴춤을 치키며 울상으로 방문 밖을 나가는 노마를 다시 불러 흥서가 있고 없는 것을 자세히 보고 오라고 다져 이르는 거다.
아내와 흥서가 서로 배가 맞았다는 생각이었다(그래서 흥서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거고 그리고 계집은 눈을 속이려고 흥서를 남편 앞에 앉혀 놓고 자기는 정한 장소에 먼저 가 기다린다). 어느덧 연상이 이것까지 이르자 그는 애초에 흥서를 경춘이와 같은 것으로 보던 의증이 아내의 그것을 잊을 정도로 머리에서 사라졌다. 혹은 처음 흥서를 보는 눈으로 아내를 보던 그 눈을 딴 데로 방향을 돌린 같은 이유에서 아마 흥서의 그것도 이런 데로 돌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노마 아버지는 전에 없던 생기가 나서 몸을 일으키자면 가까스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일어앉게 되던 사람이 빨랑빨랑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가는 팔목을 걷어붙이고 어두운 밤길을 바삐 오느라고 숨이 가뻐 돌아온 노마를 가까이 앉히고 첫째 흥서가 있고 없는 것, 방 안에 누구누구 있는 것 꼬치꼬치 캔다.
"기동 아버지 있는 걸 네 눈으로 똑똑히 봤어."
"똑똑히 봤대두."
"뭘 허구 있어."
"허는 거 없어."
그는 암만해도 곧이들리지 않는 듯, 열기가 도는 눈을 꿈벅꿈벅 노마의 안색을 살피더니 대문을 닫아걸게 하고 아내가 돌아오기를 귀를 날카로이 조마조마 기다린다.
안으로 닫아걸었다지만 사이가 번 싸리짝문이다. 틈으로 손을 넣고 고리를 벗길 수 있는 것이로되 노마 어머니는 담 밑에 우두머니 집 없는 사람처럼 오그리고 앉았다. 방 안에서 악장을 떠는 남편이 식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다. 죄 없이 남편에게 집을 쫓기어난 몸이라는 설움에 잠겨 보는 거다.
방 안에서는 독 속에서 나는 듯한 노마 아버지의 볼멘 음성이 멍멍하게 울려 나온다.
"아주 나가거라. 아주 나가란밖에 뭐."
그리고 방문이 탕 하고 열리며 처마 밑이 왕왕 울리도록,
"너 없이두 못 살 나 아니구, 나말구도 좋은 서방 많겠구, 너구 나구 아주 남 됐으면 그만이겠구나. 아주 나가거라."
성한 사람 이상으로 그 소리는 기승스럽다. 어떻게 그를 장병으로 앓던 사람이라 할 수 있을소냐, 남편은 그 동안 꾀병을 앓았던 듯도 싶다. 노마 어머니는 거기서 병들기 전 남편의 음성을 들었고 병들기 전 남편을 대하는 듯한 감정도 가져 본다. 그러면 하여튼 자기가 매일 밤 칠성당에 기도를 올리는 본의가 남편의 병 낫기를 위한 것일진댄 오히려 이것을 기뻐할 것이로되 노마 어머니는 그것을 깨닫기 전에 먼저 뇌까리는 거다.
'남편 한몸 살리려고 밤마다 고생되는 줄을 모르고 칠성당에 올라가 빌기도 하고 바람 부는 날 눈 내리는 날 가리지 않고 개에 나가 바위에 붙은 굴딱지를 따는 때도 그 한알 한알이 모두 몸에 약이 되어지라고 밤에 칠성당에 가서 옥수 떠놓고 기도하는 같은 정성으로 비는 내 속은 일호도 몰라주고.'
캄캄한 별 없는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을 섞은 냉랭한 바람을 의지 없는 한데에 앉아 받으며 팔짱을 오그릴 때 이것도 제게 한해서만 부는 바람인 양 그는 더욱 외로워진다. 그러나 코를 홀짝홀짝 언제나 다름없이 을씨년스런 얼굴일 뿐 노마 어머니의 설움이란 그리 오래 가는 것이 아니어서 기둥 모서리에 고무신에 묻은 흙을 닦으며 귀를 모아 방 안의 기색을 살피는 거다. 그는 무엇보다 발이 시렸다.
내다버린 듯 사람을 밖에 둔 채 괴괴한 방 안에는 노마의 잠꼬대 하는 소리가 나고 한잠 깊이 든 모양, 노마 어머니는 그림자처럼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캄캄한 속에서 더듬더듬 노마를 가운데로 밀고 등뒤에 숨소리를 죽이며 오그리고 눕는다.
"앙큼스런 게 그새 또 어딜 갔다 온 거야."
잠이 든 줄 알았던 남편은 갑자기 소리를 쳤다.
"그렇게 잠시를 못 떨어질 사이거든 아주 나가 살란밖에."
사이를 가로막은 컴컴한 어둠에 소리가 막혀 아니 들리는 듯 노마 어머니는 쥐죽은 양이다.
"세상에 어느 놈이 없어서 흥서 같은 놈허구 배가 맞어. 난 그래두 매일 보러두 오구 허는 체허길래 고맙다 했더니 아 천하에 의리부동헌 놈 같으니."
그리고 격동한 듯 음성을 높여,
"도토루 계집년이 글러. 계집이 먼저 꼬릴 쳤길래 그 우매헌 놈이 맘이 동했지. 뻔해. 아주 나가거라, 아주 나가."
금방 요정을 낼 것처럼 몸을 일으킨다. 한참 어둠 속을 노리다가는,
"오줌 요강 이리 집어줘."
골창 밖에는 비가 내리는 모양, 낙숫물 지는 소리가 나고 그 속에서 개개개 개개개 지금은 제법 여물어진 개구리 우는 소리가 먼 듯 가까운 듯 들린다.
이제는 아주 날이 풀렸다. 노마는 버선을 벗어 버렸다. 맨발로 흙을 밟아도 발이 시리지 않았다. 개울 두던 울타리 밑에는 도릴 만하게 나물이 자란 것은 벌써지만 우물 두던 개나리 가지에 눈이 트고 속을 까보면 노란 것이 말려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먼 곳에는 여기보다 훨씬 봄이 짙어 그것이 야금야금 밀물처럼 가까워 오는 것이리라. 노마는 물을 뒤집어 작은 벌레를 들쳐 내는 데서도 그것을 느끼고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노마는 버선 버릴 염려가 없으니까 아무 데고 맘대로 다녀도 좋았다. 그리고 좀더 많이 널리 다닐 수 있는 장난으로 노마를 선두로 기동이 꼬마, 차례차례 막대기총을 어깨에 메고 논틀 밭틀 험한 데로만 골라 간다. 지금 그들은 등 너머 밭 가운데 있는 빈집으로 호랑이 사냥을 가는 길이다. 그러나 노마의 속은 그 빈집에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인가 기동이 형제를 꼬여 이끌고 가서 한번 자세히 밝혀 볼 작정. 언덕을 올라서자 내려다보이는 황토밭 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있는 네모진 붉은 토담집 담 중간에 뚫어진 들창 속이 시꺼멓고 그 속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축생이 있어 지금 노마가 오기를 벼르고 있는 듯 싶어 노마는 먼저 가슴이 두근거리고 걸음이 죽는다. 그래,
"저기 먼저 가는 사람은 대장, 꼬래비는 사냥개."
그리고 노마는 슬며시 떨어져 사냥개가 된다.
그리고 급기야 이르러 앞을 살피자 별것이 없다. 꺼멓게 그슬린 토방 구석구석에 썩은 호박통, 신다 버린 헌 신짝, 깨어진 접시, 벽에 걸린 채 남아 있는 농립, 대체 이까짓 것을 가보라고 아버지는 밤마다 볶았던 것인지 노마는 더욱 까닭이 몰라졌다. 하나 기동이를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를 만들려니까 노마는 벽 한가운데 뚫린 들창 밖으로 막대기를 내밀고 탕탕탕, 그 막대기 끝이 가리키는 맞은편 보리밭 고랑고랑 푸른 줄기가 허리를 감고 넘어간 언덕 건너편 논둑에 열심히 작대기 끝으로 논바닥을 찌르고 섰는 사람이 있다. 이쪽으로 몸을 돌리자 바로 기동 아버지 흥서다. 기겁을 해 기동이는 내밀었던 막대기를 뽑으며 목을 움츠리고 숨는다. 그 꼴이 우스워서 노마는 또 흥서 그자를 겨누고 탕탕탕…….
흥서는 천천히 논둑을 돌며 먹을 것을 둘러보는 듯 여전히 그런다.
지게에 낫을 얹어 지고 집을 나왔을 때엔 나무를 나온 모양인데 저도 모르는 결에 걸음은 오묵골을 향해 걸리었고 노마네 집 논 앞에 이르자, 비로소 깨달은 듯 놀라며 발을 멈추었다.
오늘도 아내는 치마 속에 굴 담긴 바가지를 감춰 들고 서울집으로 가는 모양이더니 그는 희색이 만면해 돌아왔다. 흥서는 안마당에서 쓰레틀을 고쳐 마치고 앉았다. 아내는 문지방을 넘어서며부터,
"됐수, 됐어."
그리고,
"낼 종자 받으러 오랍디다."
"그게 그렇게 좋을 게 뭐람."
"올부턴 아홉 마지기 종자를 받게 됐으니 그럼 안 좋아."
기어이 오묵골 논을 독차지하고 만 것이다. 아내는 부엌으로 마당으로 들락날락하며 신이 나 오금을 주는 것이었다.
"안으로 뭐 가주간다구 날 죽일년 벼르듯 했지. 지금도 좀 그래 보지, 왜. 나 아니드면 당신 주변에 말이나 붙여 봤겠수. 어림도 없지."
"그래 큰소리를 허는 거여."
"큰소리를 헐 만두 허지 우리 형편에 평생을 가면 만져나 볼 거유."
"쓸데없는 소리 말어. 내가 그 땅 부칠 줄 알어."
"안 부치면 내버릴 텐감."
"내버릴지언정 난 안 부칠 테니 생각해 해."
그는 거친 한마디를 남기고 지게와 낫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의 그 꼴이 보기 싫다는 거지만 자기 역 마음이 설레 가만히 있지 못했다. 지게에 감아 맨 새끼가 풀려 땅에 끌리는 것도 모르고 질질 끈다. 그러면서 밭가슴에서 나물을 도리느라 나풀거리는 노랑 저고리 다홍 치마는 전에 없이 귀엽게 보는 거다.
산골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옆으로 끼고 총총히 둑을 연해 가로놓인 닷 마지기 논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익숙했던 것인지 흥서는 돌 하나 말뚝 하나에까지 내 얼굴을 보는 듯 눈에 익고 정이 붙는다. 논배미에는 흥건히 물이 넘쳐 바닥에는 벌써 푸른 기가 돈다. 누구나 침을 삼키던 양석 나기 고래실이다. 양석은 고만두고 그 절반만이라도 얼마리요. 흥서는 지금까지 목을 넘어오는 덩어리를 막듯 찌푸린 상으로 눌러 오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넘쳐났다. 그것은 어기댔던 까닭으로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내 것이라는 만족감 그것이다. 작대기 끝으로 꾹꾹 논바닥을 눌러 보면 모태(母胎)와 같이 끈적끈적한 탄력을 다물고 어서 씨앗이 심어지기를 기다리는 듯 흥서 자신보다 한 보 앞서 논바닥은 희망에 넘쳤다. 흥서는 또 한번 아내가 옮기던 서울집 안주인의 말을 외어 본다.
'노마 아범하곤 친형제간은 아니라도 형제나 다름없는 친근한 사이고 그리고 사람도 착실하고 해서 자그나문 경춘이를 줄 것이로되 특별히 흥서에게 맡기는 것이니 그리 알게.'
그리고 흥서는 내일 아홉 마지기 종자를 받게 된다. 그 아홉 마지기 종자가 모가 되고 모가 심어지고 그것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굳고 하는 날이면 그렇다.
"남헌테 구구헌 꼴 안 뵈구 조박석죽은 헐 수 있겠지."
그러나 말보다 속은 예산이 많아 벌써 허리띠끈 풀러 논 배포였다.
그리고 논두렁 하나를 꺾어서서 무심히 쳐다본 맞은편 둔덕 보리밭 가슬에 노마가 섰다. 흥서는 무춤하고 놀랐다.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서서 노마는 유심하게 내려다본다. 이유 없이 남의 물건을 훔치려던 현장을 들킨 것만 같아서 흥서는 어색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바로잡지 못한다. 아까부터 그곳에 서서 흥서의 자초지종을 다 내려다본 듯싶은 노마의 그 눈앞에 흥서는 태연해지지 못하는 거다. 그러나 실상 의표된 것은 버릇인 찌푸린 상을 좀더 찌푸리고 돌아섰을 따름이다. 노마는 둔덕을 뛰어내려 논둑을 돌며 가까이 온다. 그 등뒤에서,
"우랭이 잡우."
"응 우랭이 잡어."
흥서는 짐짓 작대기를 집고 물 속 논바닥을 구부려 들여다본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우렁이가 있으리요, 그는 실없는 말로 들리기 전에 먼저 당황해지고 만다. 어린아이에게 완전히 속을 뽑히고 만 감이었다. 노마는 말없이 옆에 버티고 서서 그의 일거일동을 지킨다. 흥서는 등줄기가 꼿꼿해지는 자세로 서서 만사를 한갓 침묵으로 때우려 든다.
"거짓부렁야, 우랭이두 없는데."
노마는 흥미를 잃고 돌아서 막대기를 휘적휘적 오던 길로 논둑으로 꼽쳐 돌아간다. 문득 흥서는 몸을 돌이키더니,
"노마야, 이리 온."
하고 턱으로 불러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더듬더니 구멍 뚫어진 백통전 한 닢을 꺼내 든다.
"너 이것 가지구 엿 사먹어라."
담배를 사려고 넣어 두었던 돈이다. 그에겐 적은 돈이 아니로되 아까운 줄을 모르는 흥서였다. 하나 무슨 뜻으로 그 노마에게 돈을 준 것인지는 또 좀 몰랐다. 다만 보리밭 사잇길로 두던을 넘어가는 노마의 검정 바지저고리를 입은 작은 뒷모양이 무한 측은했다. 조금 후 두던을 넘어 맞은편 언덕길에 노마를 선두로 조랑조랑 기동이 형제가 뒤를 따라 이리 꾸불 저리 꾸불 멀어 가는 모양이 보일 때 흥서는 좀 더 마음이 애련했다.
점점 그 모양은 졸아지며 언덕 너머로 사라지자 흥서는 자기 한 몸만 천리 만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외로움에 사무친다. 허옇게 식어 넋을 놓고 섰는 귓속이 징하게 고요한 가운데 개골개골, 이제는 낮에도 개구리가 울고 그리고 친구는 여전히 몸져누웠고 흥서는 부지중 손을 올려 귀 뒤를 더듬어 본다. 처음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던 날 밤 노마 아버지가 생각났던 거다. 오래 잃어버렸던 물건을 불시에 얻게 되어 만져 보는 감이었다.
아아 그러나 이 골수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어쩌리요. 그것은 흥서 자신이 노마 아버지만큼 귀 뒤에 살이 여위든지, 아니면 노마 아버지 자신이 흥서만큼 귀 뒤에 살이 오르든지 하지 않고는 도저히 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첫댓글 1938년이란 말인가요? 음..그나저나 마르시아스님 요즘 너무 뜸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