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된 지리산 산행
무리하지 않는 계획을 세워 등산을 하자 목표인 노고단 대피소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고,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경도 천천히 감상할 수 있었다. 노고단 대피소에서의 하룻밤은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위에서 보내는 밤이라 그런지 불편했음에도 특별했다. 지리산 등산 마지막 셋째날은 노고단에서 출발해 능선을 따라가다 피아골삼거리에서 하산하는 일정이었다. 지리산의 피아골계곡은 지리10경 중 하나인 피아골 단풍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10월 중순부터 11월 초순까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뽐낸다. 원래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던 나로서는 피아골 계곡을 볼 생각이 꿈에도 없었지만, 무리한 계획을 세운 덕택에 피아골의 단풍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립공원 이야기 10 - 지리10경
1경 - 천왕일출 (天王日出)
사방이 막힘없이 탁 트인 1,915m의 천왕봉에서는 동틀 무렵 끝없이 펼쳐진 회색구름 바다 저 멀리서 서서히 서기가 어리다가 오색광채의 거대한 태양이 천지개벽의 순간을 알리듯 떠오른다. 천왕일출의 이 거대한 파노라마는 예로부터 3대의 공적을 쌓아야만 맞이할 수 있다할 정도로 극히 만나기 힘든 경이와 감탄의 장관이다.
2경 - 피아골단풍 (직전단풍,稷田丹楓)
매년 10월 중순부터 지리산 제일의 활엽수림 지대인 피아골 계곡은 단풍으로 물들어간다. 설악의 단풍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 것이 많아 사람들을 압도적인 분위기로 몰고 간다. 산도 붉고 물도 붉게 비치며 사람들도 붉게 물든다하여 삼홍의 명소로 친다.
3경 - 노고운해 (老姑雲海)
지리산 주능선의 서쪽 최고봉인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구름바다이다. 멀리 남해바다와 섬진강에서 만들어진 구름이 주변의 산야를 가리고 노고단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면서 마치 속세를 떠난 천상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노고단 주변의 원추리꽃, 진달래, 철쭉들과 어울려 그려내는 자연적 조화가 신비스럽다.
4경 - 반야낙조 ((般若落照)
심원계곡 건너 서북병풍이 짙은 암영을 드리우면서, 하루의 고된 장정을 마친 태양이 휘황찬란한 황금빛을 발산하며 고요히 사라져가는 모습은 경건한 감동을 안겨준다. 반야봉이 주능선상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이 황홀경을 접할 때는 호젓함과 함께 사념에 젖어들 수 있는 여유를 갖게한다.
5경 - 벽소명월 (碧宵明月)
지리산 주능선의 한가운데인 벽소령에서 태고의 정적과 고요함 속에서 주변의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벽소령의 명월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다. 맑은 날 밤 창백한 달과 쏟아질 듯 하늘을 수놓는 은하수의 세계는 적막한 느낌이 드는 벽소령의 독특한 분위기와 만나 신비경을 그려낸다.
6경 - 세석철쭉 (細石躑躅)
매년 5월말 6월초에 걸쳐 수십만 평의 광대한 세석고원 일대는 철쭉의 연분홍 빛으로 곱게 치장한다. 막바지 봄날에 접어든 때에 수십만 그루를 헤아리는 철쭉은 결코 뽐내거나 호사스럽지 않게 시야를 가득메우고 꿩들은 한가로이 목청을 돋구어, 고원 특유의 정경이 낭만적이고 목가적이다.
7경 - 불일현폭 (佛日顯瀑)
쌍계사 뒤편 3km의 협곡에 청학봉과 백학봉을 좌우로 한 험준한 협곡속에 높이 60m의 천지를 진동하듯 백척 단애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는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한다. 이 불일폭포는 빈말로 흩어지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일단 중간에 고였다가 다시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2단식 폭포인데 온통 바위절벽으로 둘러싸인 주위의 경관이 장관이다.
8경 - 연하선경 (煙霞仙景)
세석고원과 장터목 사이 연하봉에는 청암절벽이 솟고 철따라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고사목과 어울려지면서 한신계곡을 넘어온 운무가 이 봉우리에 잠시 머물면 신선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날것만 같은 꿈같은 선경이 펼쳐진다. 탁트인 전망, 기암괴석, 주변의 기화요초와 고사목,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천연의 조화를 이룬다.
9경 - 칠선계곡 (七仙溪谷)
일곱선녀가 목욕을 즐겼다는 지리산 최대의 계곡이다. 울창한 원시림이 하늘을 뒤엎고 청아한 옥류는 심연에 잠시 머물면서 포말음을 토해내며 폭포에 쏟아져내려 비경의 연속을 이루어낸다. 태고의 신비한 정적을 간직한 거대한 밀림, 하얗고 반들거리는 암반위로 씻기듯 흘러내리느니 시원하고 맑은 계곡수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지대이다.
10경 - 섬진청류 (蟾津淸流)
섬진강은 전북 진안, 장수지방에서 발원하여 기름진 평야지대와 산굽이를 감돌아 하동포구를 통해 남해바다로 흘러드는 300리의 물줄기이다. 지리산 서남쪽을 거쳐 지나갈때에는 그 푸른 강물위에 지리산 산자락을 실어 남국의 흥취를 한층 돋운다. 은빛 백사장도 곱거니와 청류위에 뜬 거룻배는 지리산의 역사와 수많은 사연들을 들려주는 듯하다.
노고단의 운해와 피아골 단풍, 그리고 연곡사
뱀사골 계곡이 품고있는 옥색 물줄기와 어우러진 단풍을 보고나니 피아골 계곡의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가 되었다. 지리10경에 포함되지 않은 뱀사골 계곡조차 아름다운 단풍을 자랑하는데 2경에 해당하는 피아골 단풍은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않을까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렌 맘으로 등산길에 오른건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능선을 따라가다보면 산 위로 해가 뜨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고, 어제 왔던 길을 다시 걸어야 하기 때문에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도 큰 아쉬움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노고단고개까지는 0.4km, 노고단고개에서 노고단까지는 0.7km이다. 노고단에 올라 바라보는 일출과 운해는 지리3경에 뽑힐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하지만 내가 노고단 대피소에 묵을 당시 노고단은 자연 복원을 이유로 오전 9시부터 개방하고 있었다. 노고단은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음에도 1970년대에 수많은 등산객들이 텐트를 치며 비박을 하였다. 노고단 주변의 식물을 비롯한 환경은 자연스레 파괴될 수 밖에 없었고, 노고단의 귀중한 생태계는 사람들의 발에 짓밟혀 아직도 회복이 덜 되었다.
가로막힌 노고단 입구를 바라보며 아쉬움에 발길을 돌렸지만, 많은 등산객들은 이를 무시하고 노고단에 올라 일출과 운해를 감상했다. 지리산 국립공원 또한 탐방객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하루에 노고단에 오를 수 있는 인원들을 제한하고 예약한 사람들에 한해서만 노고단 일출을 볼 수 있게 허가하였다. 당시에 방침을 따른 나만 바보가 된 셈이었다. 특히 그 날은 노고단 아래로 운해가 쫙 깔린데다 일출도 장관인 날이라 더더욱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능선을 따라 걸으며 바라본 운해와 일출은 지리산이 왜 제1호 국립공원이 될 수 밖에 없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양탄자처럼 깔린 운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고단에서 바라봤다면 훨씬 아름다운 사진을 담을 수 있었겠지만,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는 그 날 노고단에 오르기로 다짐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노고단고개에서 피아골삼거리까지는 2.5km 거리이며 완만한 하산길이라 어렵지 않게 도달알 수 있었다. 피아골삼거리에서 피아골대피소까지 하산하는 길은 2km밖에 되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가파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피아골대피소는 지리산에 있는 8개 대피소 중 유일하게 홈페이지 예약이 불가능한 곳이다. 규모도 작아 수용인원은 36명에 불과하며 능선 위의 다른 대피소와 달리 산자락에 있어 편의성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피아골대피소가 인기있는 이유는 피아골계곡이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지리산 최고의 단풍이라는 피아골 단풍은 여유를 두고 천천히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굳이 단풍이 아니더라도 피아골계곡의 아름다운 물줄기는 수많은 탐방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피아골대피소를 지나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며 계곡으로 진입한 순간 내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 지리산 국립공원 남부는 10월 중순에 물들기 시작하여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 11월 초순이다. 내가 피아골계곡을 탐방하던 시기는 단풍이 물든 시점이었으므로 피아골 계곡의 단풍나무들은 마치 여름처럼 생생한 초록빛이었다. 몇몇 단풍나무들은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있었지만 붉게 물든 계곡을 꿈꾼 나에게 큰 위로가 되지는 못 했다. 오히려 뱀사골 계곡의 단풍이 더 인상적이었을 정도로 피아골 계곡의 단풍은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실망을 금치못한 채 빠르게 하산해 연곡사에 도착하자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피아골대피소에서 연곡사까지 거리는 6.5km였으며 단풍이 물들었다면 사진을 찍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했을 테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하산을 끝낸 것이다.
피아골 단풍과 함께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건 바로 구례 연곡사였다. 지리산자락의 많은 절들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폐사가 되었는데, 연곡사도 그 중 하나였다. 오랜 역사를 자랑한 남원 실상사가 불에 완전히 타버려 흔적도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구례 연곡사는 폐사가 되었음에도 국보 2개와 보물 4개를 보유해 그 옛 모습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연곡사의 불당은 새로이 복원된 것이라 휙 둘러보면 그만이지만, 연곡사의 두 승탑은 천천히 그 모습을 감상해야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국보 제53호인 구례 연곡사 동 승탑과 국보 제54호로 지정된 구례 연곡사 북 승탑은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하는 불교 유산의 걸작이다. 북 승탑이 원작인 동 승탑을 모방해 만든 작품이라 알려져 있기 때문에 두 승탑의 형태는 비슷하다. 용과 사자같은 신성한 동물들을 조각한 기단은 3층으로 이루어져있으며, 탑신에는 4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기와를 묘사했는데 그 기법이 탁월하며, 머리장식은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구례 연곡사 북 승탑
구례 연곡사 동 승탑
두 승탑을 제외한 문화유산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151호인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보물 제152호인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보물 제153호인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 보물 제154호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이 그 주인공이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비례미가 아름답다. 현각선사탑비와 동 승탑비는 모두 비몸돌이 없어져 현재는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있다. 동 승탑비는 용을 묘사했지만 사실성이 떨어져 감동이 덜하다. 작고 아담해진 규모와 통념을 벗어난 조각형태를 갖고 있어 고려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현각선사탑비의 돌거북은 부리부리한 눈과 큼직한 입을 갖고 있어 웅장한 느낌이 들게 한다. 머릿돌 또한 여러 마리의 용이 얽힌 모습을 띠고 있어 사실성이 두드러진다. 머릿돌에 탑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고려 경종 4년 (979)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 또한 명확하다. 소요대사탑은 국보로 지정된 두 탑에 비해 조형성이 떨어지지만 비례미가 아름답다. 조선시대 효종 원년 (1650)에 세워졌기 때문에 국교가 불교였던 신라시대에 비해 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연곡사의 수많은 문화유산 중 두 승탑 앞에 한참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천 년이 지나는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기술을 증명하는 두 탑의 조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유홍준씨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예찬한 것처럼 구례 연곡사 동 승탑은 한국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승탑 중 가장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피아골 단풍은 볼 수 없었지만 연곡사에 들린 것만으로 피아골 탐방로를 택한 건 뛰어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3일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지리산 국립공원 중 내가 탐방한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지리산 최고의 계곡이라는 함양의 칠선계곡・지리산을 대표하는 사찰인 화엄사・지리산의 진면목이라는 지리산 종주・세석평전의 철쭉 등 지리산이 보여주는 풍경은 무궁무진하다. 지리산은 가을뿐 아니라 봄에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하동의 쌍계사 또한 지리산 국립공원에 속한 명찰인데, 봄이 되면 만개한 벚꽃으로 뒤덮인다. 지리산 국립공원 마지막 여행기 주제는 바로 쌍계사의 벚꽃을 감상하러 떠난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