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회사에서만 이뤄지는 타율적이고 의존적이고 소외된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이다. 나를 비롯해 가까이 있는 이의 필요를 채우는 모든 활동이 노동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걸레로 방을 닦는 노동이 삶이다.
3년 전 독립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속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동물권을 말하면서 집에선 엄마의 고기반찬을 먹는 괴리에 대한 충격이었고, 살림 노동을 중요시하지 않음이 곧 세상에서 벌어지는 고난을 외면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는 ‘보다 높은 존재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 존재가 내 마음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아무것도 바꿔놓지 못한다’는 자각이 있었던 것 같다.
2년 전 졸업한 뒤 곧바로 취업하지 않고 마을밥상에서 약간의 급여를 받으며 밥 짓는 일을 했었다. (그 경험 덕분에 버는 돈에 소비를 맞추지 않는 연습을 했다.) 인간은 신을 닮아 노동하며 사랑하는 존재임을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내 노동이 누구에게 가닿는지 바로 볼 수 있었고 (내 앞에서 사람들이 밥을 먹으니까), 심지어 내 필요를 가장 먼저 채웠으며 (나도 그 밥을 먹으니까 ^^), 과도한 노동에 매몰되지 않게 서로 살펴주는 관계가 있었다. 생산물로부터, 관계에서 소외가 없는 노동이었고 그 지점에서 사랑을 느꼈다.
물론 임금노동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분명한 유익이 있다. 다만 진정한 자기표현과 사회적 관계 맺음, 자연과의 화해가 가능한 노동이 동시에 삶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 피폐해지기 십상이다.
헤겔의 노예 변증법에 따르면 지금 일터에서의 나는 생산성과 자립성을 지니고 있고 경영진은 내 생산력에 의존하는 셈이다. 그러나 기계에 의존한다는 점,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또 회사라는 외적 강제 안에서 이 모든 일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임노동자도 타율적일 수밖에 없다. 타율적인 노동은 죄를 만든다고 했다. 스스로 정신을 메마르게 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행동하지 못하도록 가두기 때문이겠다. 공동 창조자로서 새로운 노동 질서를 꾸려갈 힘을 상실해가는 죄다.
구조적 문제는 새롭게 짠 구조로 대항하라고 배워왔다. 일터에서 만나는 이들을 생명으로 대하고, 나를 부리려는 힘 앞에 과하게 복종하지 않고, 억누르는 힘 앞에 쫄지 않고 당당해지는 것. 일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으며 충분한 안식을 확장하는 것. 그리고 내 일상을 비춰주는 이들과 미시적인 듯 거시적인 새 문화를 계속 일궈가는 것. 그게 내가 해가고 싶은 구조 변혁적 노동운동이자 공동 창조에 대한 동참이다.
지난 몇 달간 직장 동료들이 전부 떠났고, 조만간 몇 동료가 비슷한 이유로 떠난다. 나도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며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이 시간을 지나온 힘은 고작 내 멘탈이 아닌 더불어 사는 관계에서 받았다. 교회 언니들은 일터에서도 주인처럼 지내라고, 경영진이 압박한다고 압박당하면 그게 지는 싸움이라고, 아무리 꺾어도 뿌리가 든든하면 다시 자라듯이 마을에서 받은 생기로 그곳에서도 생기 있게 지내는 배치를 만들라고 조언했다. 처음엔 마냥 견디라는 소리로 들려 억울했지만 막연히 버틴다는 의미와는 다르게 어떤 오기가 생겼다. 아무리 짓누르고 상처 입히려고 해도 굴하지 않는 자의 생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그게 저자가 말한 공동 창조자의 힘이자 에덴동산을 갈고 지키는 기쁨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노동이 임금노동에만 절대 국한되지 않음을 몸으로 배웠다. 심지어 내 곁엔 직장인이 생각보다 많지도 않으며, 직장인이 있다고 해도 일에만 매몰되지 않는 삶의 배치를 꾸려가기에 지친 기색도 없고 오히려 생기 있게 지낸다.
사람들은 취업하지 않은 상태를 숨기고 싶어 하고, 취업하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한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면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오직 월급을 위한 노동하며 퇴사나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노동을 좁은 의미로만 해석하던 관점에서 해방돼 기쁘다. 내 존재 이유를 사무직 임금노동과 그에 따른 돈에서 찾지 않아도 자족하며 살 수 있는 삶터가 있음에 기쁘다. 일상의 살림 노동을 통해 가까운 이들의 필요를 채우는 창조에 동참할 수 있어 기쁘다.
인간의 삶은 수동적인 삶에서 창조에 참여하는 삶으로 바뀐다고 했다. 주어진 틀 안에서 자율적으로 일하는 만족을 넘어 아예 틀 자체를 새롭게 구현하는 노동 참여가 동시에 가야 한다는 배움으로 새긴다.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우리를 지배하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들(노동을 임노동과 동일시하는 것) 중 하나에 대해 저항력을 길러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배와 착취에 물들지 않기 위함이며, 그것이 곧 생명답게 살 길이기 때문이다. 또 주변에서 일어나는 노동 현장의 소외에 눈 뜨고 그 고난을 외면하거나 천대하지 않기 위해서다.
경영진과 자본가가 대단한 탐욕가라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그렇다. 무조건적인 복종을 당연시하는 무기력한 구조에 휩쓸리지 않는 힘은 창조와 사랑의 노동을 실제 일궈가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수동적으로 움직이면 보답하고, 실험과 갱신을 위한 의지(창조적 백수 등)는 처벌하는 체제에 빨려들어가는 순간 인간의 존엄성은 유린당하지만, 그렇다고 유린당하고 앉아만 있을 우리가 아니잖나... 케이에서도 직장인 엄살 따윈 통하지 않고 말이다.
내 노동은 어떤 생명을 살리는가? 평화를 일구는 데 어떤 모습으로 동참하는가? 내가 자율적으로 해가는 노동은? 나는 다른 이의 (살림) 노동에 얼마나 의존하는가? 매번 되새겨야 할 질문들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