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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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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소설 사대부士大夫
이장희 추천 0 조회 60 14.05.30 22: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설 사대부士大夫

 

책으로 들어가기 전에 :

지난 사람들이 살았던 삶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물며 그 사람들이 지향하고자 했던 삶의 방향도 더욱 알지 못한다.

그러함에 그 사람들을 평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 처해 보지 않고는

그 사람들이 하였던 처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섣불리 그 사람들을 평하려고 나선다.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역사소설에 있어서도 작가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쓴 글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영웅이 되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로 왜곡되어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동일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도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과 이념이 같으면 충신이요, 다르면 역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시대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지 않고는 단편적으로 그것을 잘라 평가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책 한권을 통해서는 그 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으니

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써는 그에 대한 앎만 키워 갈 뿐이다.

 

 

                소설 사대부士大夫  

                                  - 만대산의 후예들  

                             고정욱 지음 / 황금두뇌 출판

                             송헌문화재단에서 발행한 ,

                             고령 신씨 시조부터 근,현대의 인물들까지를 소개한 가장집家狀集 중 제 5권이다. 

 

                                                        * 고령신씨5,6세조 묘역 高靈申氏 五,六世祖墓域 :

                                                                           (전남 곡성군... 상세한 설명은 아래에 있음)                                                        

 

                            

 

<이 책은 ...>  

고령 신씨의 북백공파의 종가가 있는 곳에

북백공 신면의 정려가 모셔진 사당인 충절사에 도둑이 들어  [공자행단현가도]를 잃었다.

소설의 전개는 잃어버린 공자행단현가도를 찾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나,

그 과정에서 고령 신씨 가문들의 뛰어난 후손들의 업적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지방지에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단편소설에 당선된 신예작가이자 

이 집안 후손의 한 사람인 신희창의 눈으로 본 고령 신씨 가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문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살았던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의 한 부분일 것이다.

 

잘 모르고 있었던 역사 속의 몇 분들을 이 책에서 만나고 그들의 삶은 다시 조명해 보았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 집안의 선조들의 업적이 이렇게 상세히 기록되어 전해내려 오는 것은 흔하지 않을 듯 싶다.

 

<내용 정리>  

[공자행단현가도]는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화면 중간에 공자가 앉아 좌우에 늘어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제자들과 학문을 하며 가르침을 주는 공자의 진정성이 배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그림이다.

조선 명종 때 1552년 명나라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으로 가게된 함칠봉(咸七峰, 본명은 咸 軒)이

공자의 출생지 마을에 있는 공자의 종가宗家에 가서,

공자의 후손인 공대춘孔大春에게서

750년 경 당나라의 유명한 화가였던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행단현가도]을 선물로 받아와서,

함칠봉의 고향인 강릉에 오봉서원五峯書院에 봉안하였다. 

그 뒤 계속 보존되던 그림을 북백공의 14대 종손 신긍휴申肯休가 보고는 감명을 받아,

1887년에 화가 나능호가 정중히 본을 떠서 그때부터 신씨 집안에 전해지게 되었다. 

 

#

고령 신씨의 후손 중에는 종묘에 배향된 종묘 공신도 있고 그외 유명한 분들이 많으나,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분은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이다.

 

신숙주는 조선시대 초기 훈민정음을 만든 집현전 학사로

한명회 등과 함께 세조의 편을 든 간신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에서는 문신들을 우유부단하거나, 비겁한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해 놓았다.

어떤 분들은 사육신들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해서,

이와 대비하여 신숙주가 더 나쁘게 묘사되었던 것은 아닌까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광수의 소설은 일제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나라를 지키고 충성을 하던 사람들이 필요한 시기에

검열을 피하고자 역사적인 것을 빗대어 표현하여 사육신 같은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본받도록 한 것으로도 보인다. 

 

신숙주는 조선시대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집현전의 수찬修撰을 지내면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하였고,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참여해 정난공신 2등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우의정 · 좌의정을 지냈으며,

1471년(예종 즉위년)에는 좌리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 신숙주가 관직에 있을 때 바쁜 정사로 고향을 찾아본 지가 한참이라

                                         임금의 명으로 잠시 고향 곡성으로 내려 온 적이 있었다.

                                         전라감사는 이 소식을 듣고 신숙주를 맞이 하기 위해서 급히 마을 입구에다 돌장승을 만들어 세웠다.

                                         다만 기일이 촉박하여 돌에 새긴 것이다 보니 전체적인 모양이 섬세하지 못하다.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 6대왕을 섬기면서 간행한 《보한재집保閑齋集》 17권을 비롯해

여진정벌을 마치고 북정에 관한 것을 편찬한 《북정록北征錄》 6권,

일본 서장관으로 갔을 때의 견문록인 《해동제국기》1권,

그밖에《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동국정운(東國正韻)》《국조보감(國朝寶鑑)》 《세조실록(世祖實錄)》《영모록(永慕錄)》등을 수찬하였다.

 

1443년 봄 세종은 변효문卞孝文을 통신사로 제수하고 일본에 보낼 서장관으로 신숙주를 정했다.

일본으로 간 신숙주는 일본의 곳곳을 다니며 구경하고 일본어도 열심히 익히어 능통하게 되었으며, 일본의 풍습을 주도면밀하게 살폈다.

그래서 신숙주는 조선시대 최고의 일본통이 되었고, 훗날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라는 책도 펴 내었다.

훗날 신숙주가 성종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 일본과의 화평을 해치지 마십시요. 일본과의 외교는 무척 중요합니다.

   이들은 성정이 거칠고 위험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일본이 작다고 깔보고 무시하지만...

   예를 갖추는 것 같지만... 방자하게 노략질도 잘 하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일본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 오랑캐를 다스리는 법은 바깥을 징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치를 잘하는 데 있습니다.

   나라가 튼실하면 절대 오랑캐가 넘보지 못합니다.....

 

신숙주는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신숙주는 일본에서 돌아와 세종에게 일본어의 문자와 언어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는 문자를 자기들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세종은 나라의 통치 이념을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고 

선진 농사법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깨우치게 하려면 쉽고 간단한 문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새로운 언어체계를 연구하도록 집현전 학사들에게 지시하고 그 가운데 핵심인물이 신숙주였다.

신숙주는 명나라의 최고의 음성 언어학자로서 조정의 실수로 요동으로 유배를 오게 된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왔다갔다 하면서 중국의 음을 번역하여 오성五聲을 정했다.

신숙주가 집현전에서 연구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는데 어느 날 세종이 집현전을 둘러보다가

- 밤공기가 싸늘하다. 이것을 갖다 덮어 주어라.

하면서 내관에게 어의를 벗어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신숙주는 자신을 덮고 있었던 어의를 보고는 큰 감격으로 절을 올렸다.

 

신숙주가 서른 살이던 1446년 9월 29일 드디어 훈민정음이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이후 신숙주는 승승장구하였고,  특히 명나라에서 사신들이 오면 중국어가 뛰어난 신숙자가 늘 그들을 상대하고 접대하였다.

 

1450년 2월 세종이 오랜 병고 끝에 승하하고,

그 뒤를 문종이 이어 받아 바로 직제를 개편하게 되었는데 그 소임을 신숙주에게 맡겼다. 

평소에 문종이 병약하다는 것을 걱정하였던 세종은 문종을 불러

- 세손(훗날 단종)은 영민하고 기골이 빼어나 능히 나의 뒤를 이을 만한 자질이 있다.

   그러나 너무 어려 보살핌을 받을 필요가 있으니,

   뒷날 김종서에게 잘 부탁하도록 해라.

 

문종은 왕이 되자마자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는 보위에 오른 지 겨우 2년 3개월만에 문종은 눈을 감았다.

그가 믿을 사람은 김종서와 황보인黃甫仁 뿐이었다.

- 그대들은 제발 우리 어린 임금을 잘 보살펴 주시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황보인이 영의정이 되고 김종서가 우의정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명나라로 사은사를 파견하였는대, 이 사은사를 맡은 것이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호랑이 같은 삼촌이라 단종에게는 늘 힘드는 상대였다.

이를 지켜 주는 사람이 김종서와 황보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왕을 보필한다는 이유로 권력을 장악하고 인사문제에도 적극 관여하게 되자 사람들의 불만이 점차 많아졌다.

 

수양대군은 권람을 통해서 알게된 한명회의 추천으로 신숙주를 청해 만났다.

- 나는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게 되었소.

   그대는 중국어는 물론 시문에도 능하니 그대가 서장관으로 따라가 주면 좋겠소.

신숙주는 이 기회에 중국의 문물을 보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서장관의 임무를 받아 들였다.

명나라에 도착한 수양대군은 중국인들을 만나면 막힘없이 중국어로 내화를 나누면서 시를 원하면 시를 써 주고,

문부文賦를 원하면 문부를 써 주는 신숙주의 탁월한 능력이  볼수록 탐이 났다.

그래서 신숙주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수양대군은 정성을 다했다.

신숙주는 나약하고 어린 임금이 신하들의 입김에 휘둘려서는 명나라의 기세와 일본의 위협에 당해내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었고,

강력한 임금이 나서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신숙주는 모든 기준을 나라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충성으로 따진다면 자신은 단종의 신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인품과 그의 기질을 살펴본 신숙주는 마음이 흔들렸다.

국제적인 시각과 안목을 가진 자신이 볼 때 왕족 가운데 왕이 누가 되든, 국가를 강하게 보위하고 백성들을 잘 지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한명회가 말했다.

- 난세를 평정할 사람은 수양대군 밖에 없어.

한명회는 자신의 넓은 정보망을 통해 문무백관들의 이름을 가지고 살생부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김종서를 없애는 것으로 큰 일은 끝내고 계유정란을 마무리하였다.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고 한명회는 좌부승지가 되었다.

신숙주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수양대군이 대권을 잡자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1455년 10월 신숙주는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로 떠났다.

명나라에 머물고 있던 1456년 정월 23일 몸이 약했던 부인이 세상을 따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 박종화는 <목 매이는 여자>라는 작품에서

               같은 해 6월 사육신 사건때 신숙주가 비굴하게 살아서 돌아온 것을 안 부인이

               수치심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맸다고 묘사하고 있다.)

 

신숙주는 홍문관에서 역사를 편찬하면서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양대군과 반대편에 있던 안평대군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몽유도원도>에 글을 쓰면서 안평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힘든 것도 많았다.  

 

 

세조가 왕이되고 나서 북방의 여진족들이 수시로 국경을 드나들며 갈등을 일으켰다.

여진족은 척박한 땅에 살면서 주로 목축을 했기 때문에 곡물같은 것은 농경국가인 조선에 많이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세조는 신숙주를 함길도 도제찰사로 보내어 여진족을 평정하였다.

승전 장계를 받아본 세조는 기쁜 나머지 신숙주가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선물로 보냈다.

함께 궁궐 텃밭에 심은 표주박을 함께 보냈다.

 

그 텃밭은 농민의 고통을 직접 겪어 보겠다고 부왕 세종이 농사를 짓던 땅이었다.

거기에 세조는 표주박을 가꾸고 있었는데,

여름에 이를 본 신숙주가 세조에게 말했다.

- 전하 외람되오나 저 박은 익지 않을 것입니다.

-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는가.

- 박이라는 것은 농사꾼이 똥거름을 치고 수시로 가꾸어야 하는데

   궁궐 안에서 전하의 옥수에서 자란 박이 어찌 익겠습니까?

- 그럼 어디 두고 보자 익나 안 익나.

이렇게 내기 아닌 내기를 했던 박이 가을 볕을 받아 잘 영글었던 것이다.

- 저걸 따와라! 바가지로 만들어 내 직접 범옹(신숙주)에게 보내리라.

   내가 농사 짓는 것을 우습게 여겼겠다.

세조는 술을 마실 때 쓰라고 표주박을 만들어 각종 하사품과 함께 신숙주에게 보냈다.

거기에는 정성의 뜻도 담겼지만 신숙주를 놀리는 마음도 있었다.

신숙주는 세조가 보내준 표주박으로 술을 마시며 기뻐했다.

세조가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사육신은 충성의 대상인 왕이 다르다는 이유로 신숙주를 욕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 후 신숙주는 영의정, 예조 판서 등 15년간 업무를 맏았고,

성종대까지 원로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1475년 6월 21일 신숙주는 나이 59세로 운명했다.  

생전에 신숙주는 집안의 가훈을 구상했다.

그 내용중에서도 특기할 것은 딸도 소중히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 부인은 남편을 맞이하여 안에서 가정을 맡아 가르치나니 집안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이 이에 달렸거늘

      세상 사람들이 다만 아들만 가르치고 딸 가르칠 줄을 모르니 의아한 일이다...]

딸을 가르치는 가훈은 시부모 모시는 법에서 남편을 대하고 집안 다스리는 일까지 세세히 일렀다.

그 결과 후손들은 다른 집에 시집을 가서도 그 집안을 일으키고, 길이 길이 칭송을 받게 되었다.

안동 권씨 추밀공파 권진權振에게 출가한 후손녀는 문과 급제자만 30여 명을 배출하도록 길러내기도 했으며,

1536년에 이문건이 세운, 아버지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 신씨 고비古碑는 한글창제 90년 만에 세운 첫 한글비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사육신,생육신이라는 고전적 학문으로 선생을 폄훼해 왔는데

사실 신숙주 선생에 대한 폄훼는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그 원인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만  하더라도 그렇게 폄훼 되지는 않았다.

신숙주는 오랫동안 세조와 친분이 있었고

힘이 없고 약한 것은 힘이 강하고 뜨는 것에 소속 되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학자이다 보니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반대자적 위치도 아니었기에 반현실적,반유교적 입장을 취했는지도 모른다.

최근 이정명의 [뿌리 깊은 나무] 소설에도 선생의 역할이 잘 나와 있다.

문제는 오늘의 시각에서 과거를 재단하는 외눈박이 시각에서 핵심을 비켜 숲 대신 나무를 보다 보니

선생이 남긴 교훈과 선생이 서야 할 자리를 잃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계유정란을 통해 정권을 확고하게 만든 세조는 함길도 관찰사에 신숙주의 아들 신면이었다.

아들이 관찰사에 올랐으니 영의정이었던 신숙주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켜 함길도 일대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어지러웠다.

신면은 부임해서 동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중에 이시애의 역도들에게 포위를 당하여 싸우다가 죽음을 맞았다.

뿐만 아니라 한명회와 신숙주가 이시애와 내통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이시애 일당이 퍼트려 세조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신숙주와 한명회는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남이를 대장으로 한 토벌군이 결국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다.

후에 모함임을 알게된 세조는 신숙주를 18일 만에 풀어 주었다.

그리고 세조는 신면의 우국충절을 높이 기려 정문을 세우도록 했으나, 그 위치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400여 년이 지난 후인 고종 7년  경기도 화성에 새로 정려각을 지었다. 

 

 

#

고령 신씨 가문의 한 사람인 신숙주는 시조로 부터 8세에 해당한다.

그 이전에도 5세인 순은醇隱 신덕린申德?이라는 분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그 만큼 신씨 집안은 꼿꼿한 가문이다.  

이렇게 정권과 이념이 같으면 함께 정치를 하고 이념이 다르면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 사대부는 거의 모두가 난蘭과 매화梅花를 특히 사랑하였다.

                                                                               (춘란 春蘭 : 사진은 곡성군 관음사 인근에서...)

 

 

 

#

조선 세종대에 와서 수많은 젊은 학자들이 역할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신장申墻이 세종의 은총을 많이 받았고,

훗날 문종이 된 세종의 원자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신장은 명필로도 알려졌는데, 숭례문의 편액을 썼다고도 한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 정설이나 추사 김정희는 신장이 현판의 글씨를 썼다고 주장하였다.

 

 

#

근대사에서 뛰어난 고령 신씨 중의 한 분은... 바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였다.

신채호는 신숙주의 18대 손이다.

단재라는 호는 정뭉주의 단심가에서 따 왔다고 한다.

두문동 72현의 정신이 단재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총명하였다.

1898년에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과 큰 세상을 경험하게 되고, 국제정세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후에는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고 민중의 계몽을 위해서도 힘썼다.

황성신문에서 논설을 통해 독자들을 일깨우기도 하고,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을 통하여 나라의 빚을 갚아 나라를 지키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신민회를 통해 교육과 산업으로 국가의 힘을 기르자는 운동과,

우리나라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민족사관의 의식을 길러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다.

우리나라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삼국시대와 발해에까지 논리적으로 복원하였고,

넓은 만주 벌판이 발해와 고구려의 땅으로 우리의 역사임을 당당히 밝혔다.

비폭력을 부르짖는 나약함을 질타하고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총칼을 들자고 강조하였다.

 

뒤에 임시정부에서도 활동을 하다가 자신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자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자노선을 만들었는데,

특히 의열단이라는 단체에도 가입하여 의열단 선언이라고도 하는 <조선혁명선언서>를 만들어 투쟁의 의지를 높이기도 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 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 글은 의열단 단원들을 감동시켜, 그들이 목숨 바칠 때 마다 이 글을 품에 품고 폭탄을 던지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의열단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거나  친일파를 테러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제를 괴롭히고 응징하려 하였다.

 

임시정부의 개혁도 추구했지만 임시정부는 권력 때문에 분열된 양상을 보여

신채호는 무정부투쟁을 벌였고, 중국 등의 다른 나라와 함께 6개국 무정부주의자들의 국제조직 즉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을 만들었다.

활동에 필요한 자금이 필요하자 국제거래에서 쓰이는 국제위채를 위조하기도 했다.

신채호는 국제위채를 대만에서 현금으로 교환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감옥살이를 하였다.

일제의 재판에서 국제위채를 위조해 사기를 친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하자

신채호는

-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으려고 취하는 건 모두 다 정당하다.

   나는 민족을 위해서라면 도둑질도 거리낌없이 할 것이다.

  양심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남의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자들이 어찌 그 나라를 되찾겠다 하는 사람을 사기꾼이라 이야기 하느냐?

신채호는 여순 형무소에서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 없이 뇌일혈로 스러져 사망하셨다.

 

 

#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만들기 위해 의논을 하던 때였다.

훗날 이 회의를 [임시의정원]이라고 하였는데 신채호도 의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의장, 부의장 그리고 2명의 서기를 뽑았다.

그리고는 나라의 이름을 정하는 순서였다.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청년 신석우가 발언권을 얻어 말했다.

- 우리의 국호는 온 국민들이 친숙하고 익숙한 대한이 어떻습니까?

  대한으로 망한 나라 대한으로 세웁시다.

  다만 왕이 없어졌으니 제국은 아니고 민주국가의 이름으로  민국을 붙여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합시다.

일부의 반대가 있었으나 역사적인 대한민국의 국호가 이때 결정되었다.

또한 신석우는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국무총리로 이승만을 추천하였다.

이 신석우도 고령 신씨 집안의 후손이었다.

사실 신채호는 이승만의 강대국들의 힘을 통한 외교에 의한 독립을 반대하고,

전쟁으로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해야 한다며 그에 필요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는 입장이었다.

 

신석우는 민족자본을 마련하여 독립에 사용할 수 있도록 애썼다.

조선일보가 경영난으로 위기를 맞자 신석우는 아버지의 재산을 조국 독립에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민족 독립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래서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월남 이상재李商在에게 사장을 맡겼다.

조선일보는 그 이후에도 어려움이 있었으나  방응모方應謨가 인수한 뒤로는 오늘날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신간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민족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전개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뒤에 1945년 광복 이후 장개석 총통과의 인연으로 초대 주중대사가 되기도 했다.

 

 

#

일제 시대에 제암리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던 신재우申載雨

과거제도가 없어지자 고향으로 내려와 사곡서당寺谷書堂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제의 강요로 그 지방에서 면장을 맡았다.

3.1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퍼졌을 때, 그의 고향 제암리 교회의 청년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발안주재소 앞에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격렬한 시위가 있은 후 일본군은 면장과 이장들에게 마을 사람들을 제암리 교회로 모이게 지시했다. 

그러나 신재우와 교회 사람들은 일본군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대적인 학살을 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은밀히 사람들에게 응하지 않도록 전했다.

그러나 그 많는 사람들에게 일일히 전달하지 못해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되자

일본군들이 교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총을 쏘아 순식간에 주검과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는 증거를 없애려고 불을 질렀다.

신재우는 그날로 면장 사퇴서를 내고는

- 한 명이라도 덜 죽게 했어야 했는데...

괴로움으로 두문불출 술로 세월을 보냈다.

스코필드라는 선교사가 와서 제암리 사건을 사진으로 찍어 미국으로 보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들이 제암리 교회를 포위하여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신재우는 밤 늦은 시간에 스코필드 선교사와 만나  산길로 해서 제암리 교회로 들어갔다.

스코필드는 이 참상을 사진에 담기 바빴다.

미국인 목사 언더우드는 죽은 사람들을 땅에 묻어주고 장례를 치렀다. 

신재우는 아들을 교육시켜 민족을 위한 선구자로 키우려 힘썼다.

 

 

신재우의 아들 신종식申鍾植은 아버지가 열망했던 교육사업을 하고자 뜻을 세웠다.

조상이 물려준 땅을 내놓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학교 설립 준비위원회를 열어 1950년 5월 15일 경기도 화성에 화남중학원을 열었다.

그러나 개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1954년에 다시 발안중학교로 재인가를 받아 국가에 헌납하여 공립학교인 발안중,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개교하였다.  

 

 

<읽고 나서 ...>  

사람들이 일생 살아오면서 남긴 업적을 어느 작가가 다 서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글을 읽고 잘 요약하는 것도 어렵다.

개인의 주관이 끼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지나간 역사의 일부를 잘 공부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된다.

혹시 잘못 이해하여 기술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면 정정하겠습니다.

 

아울러 고령신씨의 후손이신 [숲지기 : 다음 블로그의 필명]님의 도움으로

여러 곳을 함께 견학할 수 있어서 금상첨화였다.

아래 부분에서 주련의 시를 잘 해설해 주시면 다시 추가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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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신씨5,6세조 묘역 高靈申氏 五,六世祖墓域 :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 산 46번지

 

니곳은 고령신씨 5세조인 순은공醇隱公 신덕린申德隣 선생 내외분과, 6세조인 호촌공壺村公 신포시申包翅 선생 내외분을 모신 묘역이다.

5세조 순은공은 휘諱(이름)가 덕린德隣이고 자子는 불고不孤이며 호號가 순은醇隱이다.

고려 29대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시학侍學 전교령典校令 좌사의左司議 등을 역임하고

보문각제학寶文閣堤學과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하였다.

특히 선생은 학문에 조예가 깊어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교은 정이오와 함께 고려말 육은六隱으로 추앙받았다.

 

 

 

글씨를 잘 써 선생이 쓴 글씨체를 덕린체라 하고, 모든 사람들이 선생의 글씨 한 점을 갖기를 원했으며,

필법이 신묘하다는 평을 들어 해동명적海東名蹟에 올라 있다.

선생은 중국 원나라에서 고려 30대 충정왕을 폐위하고 공민왕을 왕으로 삼아 충정왕이 강화로 쫓겨 갈 때

위험을 무릅쓰고 호종하여 충절의 도리를 다한 신하로 인정 받았으며 보문각제학과 예의판서짇도 공민왕조가 아닌 32대 우왕조와 그 후에 역임하였다.

고려가 멸망하자 개성의 두문동에 들어가 조선왕조에 항거하여 [두문동 72현杜門洞72賢]으로 춘신의 절의를 지켜 고려 충신각에 배향되었다.

서거 후 증손인 문충공(식숙주)의 귀貴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순은공 때부터 고령신씨는 명문거족의 기틀을 다졌다.

배위配位인 정부인貞夫人 광주정씨光州鄭氏의 묘는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있었으나

도시계혹령에 의해 개발예정지가 되어 1982년 4월 24일 이곳 순은공 묘에 이안移安 합장하였다.

 

아들은 1남인데 호가 호촌壺村으로 증좌찬성贈左贊成 포시包翅이다.

 

                                                           * 주련에 걸려있는 시

                                                                       영정조시대 시인 申光河“가 쓴 七言詩에서 발취한것입니다.

                                                         終古神區自有主 (종고신구자유주)   예전부터 좋은 터는 따로 주인이 있어

                                                         奕葉蟠根我仙申 (혁엽반근아선신)   우리 고령신씨의 잎과 뿌리가 번성하였네.

                                                         五色雲中金爵峙 (오색운중금작치)   오색구름 속에 봉황이 서 있는 듯

                                                         ?稜金碧炫晴空 (고능금벽현청공)   높은 용마루 단청한 처마 공중에 찬란하여

                                                         佳氣三時鬱鬱靑 (가기삼시울울청)   아름다운 기운 언제나 푸르고 울창 하네

                                                                    (숲지기님의 보충설명으로 추가하였음...)

 

 

 

                                                           *  마당에 있는 문인석...

 

 

6세조 호촌공은 휘가 포시이고 호는 호촌이다. 공민광 10년인 1361년에 출생하여 포은 정몽주와 수은 김충한

성균생원成均生員을 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고려가 멸망하자 부친인 순은공, 빙부聘父인 수은공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항거하여 

[두문동 72현杜門洞72賢]의 칭호를 받아 고려 충식각에 배향되었으며

역시 글씨를 잘 써 해동필첩海東筆帖에 들었다.

 

조선조의 세종은 부친인 태종(이방원)과 문과에 합격한 호촌공의 재능을 인정하여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처향妻鄕인 남원의 호촌에 은거하며 제자들을 기르는데 진력하였다.

그 후 세종이 다시 벼슬을 내리고 부임을 재촉하였고 장남인 암헌공(신장)의 간절한 진언도 있어

70세가 되어서야 좌사간左司諫으로 부임하니 세종은 바로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승급시켰다.

서거 후 손자인 문충공(신숙주)의 귀貴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아들은 셋을 두었는데 장남이 호가 암헌巖軒에 동조좌참판工曹左參判 장檣이고 차남은 호가 정은靜隱으로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평枰이며,

3남은 사헌부 감찰의 제梯로 감찰공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순은공이 별세하여 그 아들 호촌공이 부친의 묘자리를 찾아 순행巡行하던 중에

예전에 순은공 댁에서 일하던 사람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물으니 지금은 승려가 되어 사찰을 지키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호촌공이 순행의 이유를 말하니 자기의 사찰까지 안내하면서

이곳이 천하명당이니 옛 주인의 유해를 이곳에 모시도록 하시라는 권고를 했다고 한다.

장례일에 되어 이곳 가곡으로 운구하고 보니 승려는 간데없고 절마저 불태우고 빈터에 사탑寺塔만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승려가 명당에는 두 주인이 있을 수 없으므로

묘를 모시는데 사찰이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사찰을 불태우고 어디론지 떠난 것이다. .

 

재실齋室은 순은공과 호촌공 양위의 재실로 당호堂號를 치일재致一齋라고 한다.

지금 북동쪽으로 약 100여m 떨어져 서 있는 문화재 보물 제1322호인 오층석탑은 이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2007. 11. 5. 고령신씨대종회高靈申氏大宗會에서 세운 안내문에서...)

 

                                       * 인근에 대나무 밭이 있다.

                                          이 대나무는 줄기의 색갈이 다소 검은 것이 특징이다.

                                          벼슬이나 덕망이 높은 훌륭한 집을 찾아가 그 집 울타리와 함께 심어져 있는

                                          대나무를 베어오는데 이를 걸죽(乞竹)이라 한다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이 걸죽을 잘라 대칼을 만들어 탯줄을 자르면

                                          그 집안좋은 기운이 이어져 태어난 아이가 출세한다고 믿었다

                                          그때 사용한 대나무는 평생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이 걸죽을 잘라 몸에 지니고 가면  효과를 본다하여

                                          과거 시험 때가 되면 이 대나무가 훼손이 심해 대나무 숲을 지키는 사람까지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벼슬을 하고 있는 집안에서는 기가 새어나간다 하여 거절하였다고 한다.

                                          (설명인용/대나무/한중일문화코드읽기/이어령)                                                   

 

 

곡성 가곡리 오층석탑 谷城 柯谷里五層石塔 : 보물 제1322호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가곡리 2

이 탑은 백제시대의 양식을 충실히 계송한 고려시대 백제계 탑이다.

기단부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하층기단의 지대석은 시멘트로 덮어버렸다.

1층 탑신은 갑석 중앙에 있는 탑신 괴임면에 깊이 2cm의 홈을 파고 세웠는데

4개의 돌을 II자형으로 조립하였으며 양 우주(기둥모양)가 뚜렷하다.

2층 탑신의 받침은 옥개석(지붕돌) 윗면보다 넓으며 1개의 돌이다.

2층 탑신은 1개의 돌로 양 우주를 나타내었고 남쪽 면에는 면석 부분인 양 우주 사이가 위아래가 긴 네모모양의 홈을 12cm의 깊이로 팠다.

이것을 보면 마치 감실을 마련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탑은 감실의 모양으로 만든 점과 짜임새 있는 옥개석 돌의 맞춤 방법은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탑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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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숲지기님이 추가로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1397년 이성계가 두문동에 불을 지르면서 모두 타죽거나 그 이전에 참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과연 모두 그랬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72현 중에는 다른 지역에서 여생을 마친 인물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신덕린의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으로 예의판서를 지냈다.

그는 해서·초서·예서에 모두 능했고,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팔분체는 예서에서 2할, 전서에서 8할을 취한 서체로,

중국 한나라 때 왕차중王次中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필체는 독특하여 당시 사람들이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렀다.

 

1392년(공양왕 4년) 마침내 고려가 망하여 많은 충신 열사들이 송도松都 부조현不朝峴에 올라 각자의 뜻을 글로 남길 때

김충한 공이 『願從伯夷 採薇西山 원컨대 백이를 좇아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리라』고 하자

순은공께서 『翩然高擧 與子偕矣  세속을 훌쩍 떠나 그대와 더불어 지내리라』고 읊으셨다.

 

그리고는 두문동에 머물다 아드님이신 호촌공과 함께 남원 옛집으로 낙향, 김충한 공과 망국의 한을 달래며 여생을 마치셨다.

순은공은 당시 문학 절행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목은牧隱 이색李穡 ? 야은冶隱 길재吉再 ?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제공과 더불어 같다고 하여 세인들이 육은六隱이라 했으며 공의 덕망을 추앙했다.

공은 특히 목은공과 절친해 목은집牧隱集에 『憶申判書 억신판서』라는 글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少年日日苦相邀   젊어서는 날마다 애써 만났고 

          泥醉沈吟放短謠    술 취하면 함께 노래 불렀지 

          閑裏草書風雨快   한가할 때 쓰는 초서 비바람처럼 호쾌하고

 

          靜中柴立海山遙   한가로히 서 있는 청수한 모습은 먼 해산에 있네

          酒樽何日添春暖   술동이는 그 언제나 따스한 봄을 더할런고

          ?髮如今帶雪飄   귀밑털은 지금에 날리는 눈발을 띠었다오

          契友獨公猶健在   가까웠던 옛친구들 다 가고 공 홀로 건재하니

 

          可憐老牧政心焦   가련한 늙은 내 마음 정히 애타는 구나            ]

                                                                       -<목은시고>


신덕린의 손자는 신장申檣은, 과거시험에서 할아버지의 명필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지신사 박석명이 아뢰기를, <새로 급제한 신장은 전조前朝의 간의諫議 신덕린의 손자입니다.

신덕린이 글씨를 잘 썼는데 신장의 필법은 그와 비슷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기어 신장을 상서의 녹사錄事로 임명하였다.

                                                                      -<태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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