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그~네의 교직 생활과 슬픈 삶의 이야기 ***
1947년 6월 25일 ( 고인이 되신 할머님과 생일이 같은 음력 4월 보름날 ) 난, 함양의 신라시대 옛 고을 명칭인 천령군의 이름인 천령봉( 옛 날의 봉화 자리) 자락의 경남 함양군 함양읍 삼산리 (磊山뇌산 마을) 495번지에서, 당시 (구) 석복면(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함양읍에 합병 됨 )에서 당시 면서기를 하시던 부친인 (고) 선산 金가 世자根자님과 鄭자 永자珠자 ( 본명: 정시남 )의 친가와 외가의 6남매 장남으로 당시 시골에서는 그런대로 가정형편이 좋은 환경에서 친가, 외가의 축복을 받으며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어린나이인 7살에 석복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비교적 공부를 잘하기에 친가, 외가의 장손으로 기대가 컸고, 그 당시에 다른 친구들은 책 보따리를 메고 다니는데 비해 가방을 메고 다니던 급우 3명 중에 들 수 있었고, [어린이]라는 소년 월간지를 정기 구독 할 수 있을 만큼 뒷받침해 주시는 선친의 뜨거운 교육열과 모친의 인자함과 할머님의 남존여비의 엄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기는 하지만 시골 학교에서 6년 동안 줄 곳 반장을 할 정도로 공부는 비교적 잘하는 편이었고 그 시절은 넉넉하지는 못 했으나 행복했다고 기억됩니다.
46세를 일기로 뇌졸중으로, 71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작고하신 조부님과 조모님 2남 1녀의 한분뿐인 고모님이계셨는데, 일제 강점기 시대 고모부님( 함양 수동 가성의 박씨 )이 무슨 일인지 남원 감옥에서 옥사를 하셨고, 고모님이 함양 지곡 덕암의 하동 鄭자 順자明자 고모부님께 재가를 하였기에, 두 분이 낳으신 고모님의 딸 2명, 고모부님의 딸 2명을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이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종사촌 누나(2명은 작고) 4명과 우리 6남매, 합계 10남매를 세 분이 힘들게 기르게 된 셈이지요.
제가 어릴 때 종조부님이 당시 함양군의 민의원에 출마하여 1대, 2대에는 낙선을 하고, 3대 민의원( 지금의 국회의원 )에 6.25 사변 때 좌익, 우익 할 것 없이 억울한 분들의목숨을 구하고, 도우신 덕분으로 자유당 공천으로 당선이 되셨고, 그 자제분인 나와 동기인 한 살 위인 아저씨는 4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하고, 선친은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하기 위하여 면사무소에 사표를 제출하여 실직을 하셨기에, 그 후 일본서 유학, 공부한 실력을 바탕으로 외자청에 잠시 근무하고, 줄 곳 200여호의 우리 마을 이장을 오랫동안 지내셨습니다.
이장으로 재직을 할 때에 우리 동네 앞 (구)석복들판의 논 경지정리를 동네의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함양에서는 제일 먼저 주관하셨고, 일본식 호적을 우리식으로 고치는 읍사무소 일에 인턴제로 친구인 호병계장님의 일을 도우며 (구) 석복의 민원처리에 노력하시면서 민의원을 지낸 분이 취직도 시켜주지 않았기에, 어머님과 할머님, 선친이 콩나물 장수, 누에고치 장수, 도토리 묵 장수, 약초와 산나물을 캐서 팔기..., 등 궂은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고생하시다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56세 일기로 안타깝게 타계하셨습니다.
저는 선친의 높은 교육열과 어머님과 외가의 헌신적인 노력, 할머님의 지극 정성 덕분에, 초등학교에서는 줄 곧 어린나이에 반장을 하였기에, 그 후에 함양중학교( 당시는 공부를 잘해도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률이 10% 이하 )에 입학을 하였고, 중학교 성적은 상위권에 들 정도로 친가나 외가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기에 나이가 어려서, 철이 덜 들어, 개구쟁이이기는 하였으나 학교공부는 비교적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미국을 자주 오갈 만큼 대통령의 신임을 맡던 할아버지가 자유당이면서도 4사 5입, 3선 개헌 반대로 비주류가 되었으며( 광복 20년 책을 보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음-그 곳에는 함안 국회의원 김영상 으로 오기가 되어 있음 ), 저의 가정에 첫 시련은 중학교 1학년 때에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 대통령의 망명과 자유당의 몰락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아...! 우리 집안은 완전히 망했구나...,” 는 독백이 나오는 정도였었고, 그 후 집안의 시련은 시작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별일 없이 함양중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제 기억으로는 180여명 지원에 120명 합격의 함양농고에 개구쟁이로 놀면서도 쉽게 장학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공부는 상위그룹을 유지하였기에, 인문계 학생들은 인문과목을 100% 공부하는데 비하여, 농업계 학생들은 농업과목 50%와 인문과목 50%에, 불리한 교육과정과 학교 농장의 노동을 하면서도 초급대학이기는 하여도 당시로는 국비지원이기에 학비가 고등학교보다 싸고, 100% 취업이 보장 된 2년제 진주교육대학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진주교대에 다닐 때에는 그 당시는 책값이 비싸기에 교과서도 제대로 다 사지 못 하고 친구의 것을 빌려서 쓰기도 하고, 처음에는 친구와 둘이서 자취를 하다가 그것도 힘이 들어 몇 달 후에는 쌀 한 말에 300원(?)짜리 2인 1실 하숙을 하다가, 그것도 물가에 따라 올라가 졸업 당시에는 쌀 한말에 1,000원 정도로 기억되는 하숙을 하면서, 요즈음은 꿈과 같은 대학이라고는 하나 교육대학은 고등학교와 같은 반편성에 교수님들이 반에 오셔서 수업을 하였기에, 고등학교 연장과 같은 대학답지 않는 느낌의 드는 학교생활이었습니다.
교대를 졸업한 후 67년도에는 만 21세 나이에 병곡초등학교 첫 발령을 받아 일선교단에 서게 되었으나, 선친이 할아버지의 재선거운동을 돕고자 당시 민중당(야당) 함양군 총책임자라는 자리에 계시었기에, 5월 14일 군 입대 영장을 받아 놓은 저를 학교장의 감언이설과 압력으로 지리산 자락의 휴천 문정초등학교로 보내고, 저는 거기서 할머님과 자취를 하며 군 입대까지, 그 당시에는 2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풍금을 칠 줄 아는 선생님이 없기에, 2학년 수업이 끝난 후에는 전교생 음악과목을 지도를 하면서 두 달 반을 보냈습니다.
그리곤 남자이기에,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실패( 68. 1. 21 사태)의 남과 북이 전쟁 일보 전 같이 긴장이 감도는 해인, 68년 5월 14일이 39사단(창원 훈련소)에 입대, 6주 신병교육을 마치고는 후반기 교육이 없이 바로, 101 보충대( 의정부 ) 행 열차에 몸을 싣고..., 그 며칠 후 28사단에 배치- 82연대에서 700(행정병)으로 보병에 비해 군대행정을 보며 비교적 쉽게 군복무를 약 3년간 무사히 마치고, 선친과 일본유학 동기인 당시 학무과장님의 배려로 집과 제일 가까운 지리산 마천초등학교에 복직하여 5~2반 담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지리산 천왕봉 바로 밑의 마천은 전깃불도 없고 벽지도 아니고 한 곳이기에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오지였으나, 나중에는 벽지( 승진 부과점이 있음 )가 되었고, 사람들이 약간 거칠기는 하여도, ‘사람의 냄새가 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인간미가 풍기는 곳으로 함양읍에서 1.5시간 비포장 길을 남원 방향으로 가야하지만 서로 도울 줄 알고 순수했으며, 같은 동료 중에서 군 복무를 마친 교사는 나와 지금은 거창 북상초등에 근무하는 대구교대 출신 두 사람 말고는 후배들은 R.N.T.C 제도로 현역병 면제를 받게 되었기에, 총각선생 7명과 4명의 처녀 선생들이 있었기에, 선 후배간의 유대도 강하기에 비교적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 할 수 없는 것이 된, 제 인생의 제2의 전환점은 초등, 중등의 급여 차이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당시 교사의 본봉이 2~3만원( 당시 금 한 돈 값이 3,000원 ) 남짓한데, 중등학교는 학교장이 육성회 수당을 15,000원 받는데 비하여, 초급대학과 4년제 대학 학력 차이로, 초등교사는 3,000원으로, 중등학교 기능직이 받는 수당과 같은 3,000원으로 기억이 되는데(?), 그것은 학령 2년 차이로 의무교육을 담당하는 초등교사를 천시하는 學閥(학벌) 위주의 급여체제이지 學力(학력)위주의 급여체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왕교직에 몸담을 바에야 보수가 높은 중등에 진출하고파 그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첫 번째가 사표를 내고 학령 2년과 교직과목을 이수하기 위하여 야간대학에 편입하는 길과, 두 번째는 대도시 근처로 전근하여 낮에는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밤에는 야간대학에( 당시는 방통대가 없었음 ) 3학년에 편입학 하는 길과, 세 번째는 중등교원 검정고시를 치르는 길이 있기에, 저는 가정 형편상 6남매의 장남이기에 돈이 가장 적게 들고 노력만 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세 번째의 길인 검정고시를 선택하기로 결심하고 환경을 바꾸기 위하여 원하기만하면 보내주는 섬(거제도-당시는 오지)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곤, 지금의 (구) 거제대교를 건너가면서 저는 자신과 3가지 약속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 검정고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합격을 할 때까지 이 다리를 건너오지 않겠고, 공부에 방해가 되니 ㅏㅂ격할 때까지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 둘째, 젊은 나이이지만 공부에 방해되니 여자를 합격 할 때까지 멀리 하겠다. 셋째, 나 자신을 반성하기 위하여 매일 일기를 쓰겠다. ( 그것도 하루 공부한 시간을 중심으로 )였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지 않는 핑계 겸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교회를 찾아 1주일을 반성하는 자리로 우리 반( 5~2반 ) 부반장 부친이 강도사로 계시는 면소재지인 학교와 거리가 2km 떨어진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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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과 운이, 타이밍이, 함께 하였기에 거제로 전근을 간 73년도에 독학으로 공부하여 부산, 대구, 경북, 경남 합하여 28명 응시한 축산( 지금은 동물자원 )과에 1차 시험인 8월에 저 혼자 합격을 하고, 2차 시험인 심층 면접도 무사히 합격하였으며, 3차 시험인 수업은 교사 2년 이상 경력은 면제였기에, 최종합격 통보를 1973년 말에 받았고, 전국에서 같은 과목에 5명이 합격을 하여 중등학교 준교사(축산) 자격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남해가 고향이고, 진주농대 축산과 출신 농과 장학사가 자기대학 후배를 축산과에 우선적으로 인사발령 하였기에 자리가 없어서 전깃불도 없는 한산중학교로 75년 9월 발령, 전보되었습니다.
그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 한 기술과 수산( 저희들이 다니던 시절에는 기술이라는 과목이 없었으나 필수이고, 선택과목으로는 남학생은 농, 공, 상, 수산 중 선택 )이기에, 트랜지스터라디오 기술교과서 (차서욱 편) 헌 책과 수산은 참고서마저 없기에, 거제 수고 교과서를 참고서로 가르칠 수밖에 없는데다가 그 곳에 간 다음 해에 연구, 시범학교를 하는 바람과 섬사람들의 텃세에 신혼 초에 고생깨나 했으나, 바다낚시와 테니스를 배우고 섬사람들의 강인한 기질과 생활력을 배웠으니 지금 생각을 하며는 그 때도 행복했다고 기억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중풍, 위축신인 줄 알고 한의원으로,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계속하였으나 3여년간 고생하시다 나중에는 혼수상태에 빠지신 선친을 비포장도로로 부산 송도복음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진단 결과 결핵성 뇌막염으로 판정되어, 의료보험이 생기기 전 해이기에 적용되지 않기에 하루 입원비가 15,000원이어서( 당시 제 월급이 5~만원으로 기억? ), 그리고 의사선생님이 보름을 입원 후에, 아이나, 파스.., 등 결핵약을 처방해 주시면서 주사제, 복용 약 등으로 자가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보름 입원 후에는 집으로 모시고 와 치료를 하면서 주기적으로 부산 송도복음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결과를 검진을 받으면서 치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76년 추석에 당직이고 인근 분들이 아무도 당직을 바꾸어 주지 않기에 그 다음에 가서 뵈면 되겠다고 생각 하고 있었는데, 76년 음력으로 8월 말에 부친이 갑자기 타계하셨기에, 한산도에 전깃불이 처음 들어온 해인 77년 전깃불을 일주일 보고, 6남매 장남이기에 고향인 함양으로 내신, 도서벽지에 근무한 교사에게는 준벽지 이상으로 전보를 하여야 하는 원칙에도 자리가 없어서 백남근, 백남태 장군의 고향인 백전중학교로 전보되어, 가족과 같은 분위기속에서 처음에는 음악전담 교사와 3학년 기술, 농업교사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전교생 9학급이 됨으로 음악교사가 부임하였기에, 제 과목인 기술, 농업을 가르치면서 보리 베기, 모내기, 못자리 물 퍼기, 학교 화단공사, 학교 주변의 정원수 심기, 자전거 수리, 각 교실 공구함 설치와 수리, 이태리포플러 삽목, 염소와 닭 기르기..., 이런 것들을 군청, 농촌지도소와 연계하여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와 같이 하면서, 학교발전을 위하여 젊음의 열정을 바치며 제 교직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학교인 백전중의 4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모교인 함양중학교로 전근하여 3학년 내용이 제 전공인 축산인데도 2학년 9학급( 전교생 9 * 3 = 27학급 )의 농업교사로 1년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3월 초 어느 날 뜻 밖에도 원하지 않은 거창농고( 현 아림고 )로- 그 당시에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전근을 하면 영전이고, 전공이 축산이기 때문에- 발령이 나( 3월 10일자 ) 처음에는 함양~거창을 통근을 하다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동생인 딸을 데리고 거창으로 이사를 오고...,
(고)김동영 의원과 현 김태호 도지사의 모교이기도 한 거창농고는 그 당시는 한 학년이 농업과 5반, 축산과 2반, 농업토목과 1반, 임업과 1반 계 : 9반 * 3학년 = 27 학급에 전교생이 1,200명이 넘는 학교로 상살미(현 거창대)에 대지가 3만여평의 공원과도 같은 좋은 외부환경의 큰 학교였으며, 육상, 축구부, 씨름, 태권도, 유도..., 등으로 6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경남에서는 진주농고( 진주농전- 현 진주산업대의 전신 ) 다음의 규모의 거창 農林(농림)고이기에, 이 곳 근무 8년 동안에 축산, 농업 전반의 실무의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거창농고 재직하던 82년~90년까지 우리 가족은 처음에는 단간 셋방에서, 전세방,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사택, 근처 단독 전셋집에 살다가, 중동의 6층 32평형 세륭 아파트를 구입하기까지 수차례 이사를 하며 사는 동안 아들( 거창 대성고 ), 딸( 거창고 )이 거창에서 초, 중, 고를 졸업을 하였기에 그네들의 고향이 되고, wife는 풍물, 낙화, 매듭공예, 탈공예, 등공예, 거창문화원회원, 거창여성합창단원, 학교 어머니회회장 등 활동을 하였기에, 난 그때부터 마음은 함양을 향하고, 몸은 거창에 사는 나그네~경계인(바래기재 경계)이 되어버렸습니다.
저창농고는 그 당시 자립형 농고 체제로 학교 내의 3,000여평의 과수원을 없애고 초지와 옥수수 농장으로, 학교 인근 중산리에 제 2농장을 마련 할 정도의 축산( 젖소 60여두, 한우 및 육우 20여두, 면양 한 쌍, 오골계, 공작, 칠면조, 황금계, 은계 등 애완 조류 수십 마리, 돼지 200여두, 꿀벌 30여통, 육계 수천 마리* 4회전/1년, 산란계 2,000여 마리 )로, 논 50마지기 만여평의 대규모 농장에, 축산과만 하여도 축산과 교사가 3~4명, 전담 기사가 3~4명, 축산 연구생(기숙학생) 7~10명 정도의 학교에, 전교직원은 50명이 넘는 학교였습니다.
실업과 교사 최고 근무연수인 8년 거창농고에서 이론을 뒷받침한 축산 실무를 많이 배우고는 다시 고향인 모교 함양종고( 교명이 그 후 함양실고- 현 함양제일고 )로 전보 발령되어 전보되어, 부임 다음해부터는 실과부장 4년( 당시 보통과 4반, 농과 1반, 전자과 2반, 상과 2반 : 계 9반에서~ 실업계, 인문계 통, 폐합으로 순수 실업계로 바뀌어 학년 당 8학급 * 3 = 24학급)과 축산과 농업교과를 가르치며, 젖소, 한우, 돼지를 기르며 생활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학교 5년의 만기가 되어 지금은 명문고가 된, 순수 인문계고등학교인 함양고로 옮겨서 기술, 농업을 가르치게 되었고, 전근을 가던 다음에 새마을 부장, 다음 해부터는 학생부장을 맡으면서 학생들과 정답게 지냈으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1학년 1인 1화분(국화) 가꾸기, 학교 정원수 전체의 밑거름주기, 정원수 전정하기, 등을 학생들과 같이 하며 경찰, 군청, 학교, 민간단체와 합동 교외지도를 하였으며..., 그러나 불행하게도 방통대에 편입하여 법학사를 거쳐 진주 경상대 교육대학원 입학을 한 후에 I. M .F 사태가 오고...,
원래 군청에서 근무하다가 동기들로서는 제일 먼저 계장으로 승진한 하나뿐인 남동생이 전매서( 지금은 KT&G )에 다니던 장인이 정년퇴직을 함으로 재미삼아 건설을 해 보라고 권하여 도우다가, 자그마한 빌라( 3층 9세대 )로 시작- 25세대 5층 아파트-, 함양에서 최초로 10층 아파트를, 함양의 강변 우회도로, 지리산 자연휴양림 진입도로...,등 건설업과 도자기 공장, 등으로 나중에는 공직을 그만두고 건설업을 택한 남동생의 부도로 나의 슬픈 이야기가 시작되고,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급여압류에 신용불량자에 여관, 식당 경영을...,
부도가 나던 날 학교에서 돌아와 부도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경남은행에 6,500만원 부도라...,” 하기에, ‘그 큰 회사가 겨우 돈 6,500만원이 때문에 부도가 났나?’ 생각을 하였으나, 동생 부부는 인건비는 지불하고는 어디론가 가는 곳을 알리지도 않고 떠나가 버리고, 상림 입구의 당시 시가 12억원정도( 팔려고 하니 10억 정도로 평가 )의 1층은 별궁숯불갈비와 살림집, 2~3층 별궁장 여관( 객실 25실 )을 내 앞으로 등기 이전을 해 놓고는 부채가 15~16억원정도의 정답이 보이지 않는 숙제를 남겼기에, 우리부부는 신용불량자에 빚 독촉과 고통으로 나날을 보내게 되고, 삶이 허무하고, 내가 진 짐이 너무나 무겁지만 내려 놓지도 못하고...,
그 때부터 매일 날아오는 것은 가압류, 압류, 지급명령..., 등 붉은 줄이 그어진 법원으로부터 빚 독촉과 하도급 업체들의 입에도 담기 어려운 전화로, 때로는 찾아와 폭언과 행패에다 빚쟁이들의 폭언과 견디기가 힘든 행패들.., 경영하는 식당의 재료, 채소, 술과 음료수 등도 현금을 주지 않으면 주지 않으려 하고..., 진실은 3개월 후에 밝혀지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동생이 부도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건축한 8층짜리 반월빌딩 주상복합 상가 입주자 13명이 동생과 내가 짜고 여관, 식당을 내 앞으로 등기, 이전을 해놓고 동생은 도망갔다고 나와 동생을 민, 형사 고소를 해 놓은 상태였으나 조사결과 무혐의, 빚쟁이기에 경찰관도 동정하고...,
그 당시는 우리 집 큰 아들이 대학졸업 후 병역복무를 마치고, 딸은 서울서 대학을 다니고, 동생의 딸은 대학 입학, 아들은 함양고 2학년의 민감한 나이이기에, 25객실 별궁여관은 동생의 친구에게 4억원 근저당에 5,000만원 전세를 준 상태이고, 식당은 제수씨가 직접경영을 하고 우리 wife는 식당일을 도와주는 정도였기에, 식당경영과 동생의 회사경영 상태는 전혀 모르는 처지였었기에, 더구나 함양고 2학년으로 학생회 부회장이던 조카의 정신적 타격이 컸기에, 하도급업자, 빚쟁이들의 행패가 그때는 막무가내일 정도로 심하기에 청소년기의 특성상 이를 목격하고 격분하여 어떤 일을 할 지 모르는 입장이기에 안절 부절하고...,
그 인고의 세월은 보내다가 함양고의 5년 만기이기에 옮긴 곳이 안의고로, 각 학년 보통과 1반, 정보처리과 1반, 계: 6학급에 전교생이 160여명의 선비, 양반의 고장 함양이라면 이곳을 말할 정도로 안의면 소재지를 읍 4동이라고 할 만큼 역사와 전통과 자긍심으로 유명한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의 5년간 근무하면서 법원으로부터 받은 압류 등에 관한 서류가 200p 짜리 2권 반 (약 500p)가 될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을 해 봐도 그 시절은 너무나 괴로운 나날들이었지만 학교장, 동료 교직원들의 위로로 참고 견디었고...,
당시에 분기별로 주는 보너스 때가 되면 명목상 급여액은 700여만원이나 급여압류로 공제하고 남은 돈으로 대학 졸업 후 상환하는 2자녀의 학자금을 공제하고 남는 것은 거의 빈 봉투이기에, 한 때는 월급을 32,500원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의 월급날은 기분이 나쁜 날이기에, 그 때부터 아예 월급봉투(내역)을 보는 것을 포기 할 정도였기에,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긴~터널 속에서 정답이 보이지 않는 인고의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으나, 쉬는 시간이면 남자휴게실에서 학교도서관의 책을 보면서 그 인고의 세월을 보낼 수 밖에는 없었고...,
원래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중등교원 검정고시를 치를 당시 나의 꿈은 초등학교 교사 7년, 중등학교 교사 7년, 그리곤 대학교수였으나, 그 꿈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남들처럼 승진이라도 해보고자 대학원에 입학은 하였으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어떻게 하면 물려받은 논과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팔아 동생의 부채를 갚고도, ‘급여압류에서 풀려 월급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가 우리 집의 과제가 되고, 그 생각으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시간을 보내고,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시간이 나면 테니스도 치고, 바둑을 혼자서 두고...,
그 잡초 같은 인고의 세월 동안은 식당을 경영 할 때는 아침에 일어나면 식당 바닥 닦기~ 학교의 생활~ 하교 후는 식당일 돕기로 밤늦게 까지 보내고, 여관을 경영 할 때는 퇴근 후는 카운트 보조맨으로,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낮에 청소하는 사람과 소위 말하는 조바도 내보내고, wife 혼자서 그 일들을 하고 빚을 갚고 압류를 풀기 위하여 온 가족이 고군분투하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시간들의 연속이었으나 시간과 인내라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을 해 주었고, 동생은 재기하여 다시 건설을 시작하고 급여압류는 2004년 말에 끝이 나고...,
그리곤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니 그 동안에 교직에 있는 친구, 동기들은 교장, 교감, 빠른 분들은 교육장, 도교육청 과장이기에, 그 시점( 퇴직을 4.5년 앞 둔 )에서 할 수 있는 길은 하고 싶어 하던 ‘학업을 계속하는 길이 최선이다.’라는 생각으로 합천의 초계중으로 발령 전보되던 해에 늦깎이 대학원 박사과정( 교육철학 및 교육학 전공 )에 지원, 입학하여, 2005년 3월부터는 낮에는 초계중 교사로, 매주 목, 금요일 오후, 밤에는 학생으로 리포트와 과제들로 씨름을 하면서 하루 하루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되고...,
그 때는 삶 자체가 힘은 들었으나 젊은 친구들과 같이 공부는 하는 자체가 재미가 있기에, 2005년~2006년 2년간을 그렇게 보내고, 그러는 도중에 경남교육청 민원모니터 단원 지원이 인터넷에 있기에, 제2기( 2006년~2007년 )를 지원하여 농어촌 스쿨버스와 군내버스 연계를 통한 합리적 운영방안, 제 3기에는 유압식 높낮이 조절 책걸상, 폐교를 활용한 기자재 재활용과 폐교의 합리적 활용 방안, 등을 제안하여 일선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도교육청에 전달하여 협의 하였고, 민원모니터링을 하여 학교 밖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그러다가 초계중학교가 도교육청 연구,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승진에 필요한 연구점수가 필요한 선생님이 있다고 교감선생님이 “가까운 합천중학교로 양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하기에, 본인으로 보아서도 박사과정을 수료하였기에, 도서관과 교육청이 가까운 읍 소재지 학교로 전근하는 것이 학위 논문을 쓰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고, 초계중에는 사택에 있었기에 사택 생활을 하지는 못하나 생활 근거지가 된 거창과 거리도 조금 가깝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꺼이 그 자리를 양보하고 합천중으로 전보를 하여 이동하였으며...,
나의 교직생활의 마지막 2.5년을 합천중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환경이 어려운 보육원 학생, 특수반( 일명 사랑반 ) 학생 등을 도우며, 학생부에서 주로 아침에는 교문의 안전지도, 점심시간에는 교내 생활지도, 틈이 나면 일탈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이나 학생회 간부들을 가사실에서 상담 등을 하면서..., 마지막을 67년 3월 교육대학 졸업 후 교단을 첫 출발할 때의 초심인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교사, 학부모는 그들을 위하여 존재한다...”라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제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올 해 학년 초에 학교장과 개인면담 시 퇴임식에 관한 언급이 있기에, 8월 말에 퇴임이 예정되어 있기에 제 생각은 여름방학 후에 개학식 날 전교생 모임 때 “여러 선생님과 학생들 덕분에 무사히 40여년간 교직을 무사히 마치고 떠납니다. 학부모님이나 졸업 한 선배들께 대신 안부나 전해주십시오”라는 인사나 하고, 선생님들께 식사나 대접하고 떠날 예정이라고 했기에 그렇게 할 줄 알았는데, 6월경 교감선생님께서 “그러면 전례가 되고, 학교로 봐서 그렇게 대접 할 수가 없다.” 고하여 정년퇴임식을 하게 되었고...,
무더운 여름방학 동안에 학교장, 교감선생님과 주무를 맡은 교무부장, 친목회장이자 체육부장..., 등 많은 선생님들의 열과 성의를 다하여 준비한 덕분에 너무나 과분한 퇴임식 대접을 받고, 그것도 7억여원을 들여 몇 개월에 걸쳐 리모델링한 체육관에서 공사가 거의 끝이 났으나 아직 의자가 도착하지 않았기에, 진정으로 잘 대접하여 주어야 할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을 마룻바닥에 앉히고, 더구나 귀중한 4교시 수업시간을 빼앗아 저를 위하여 퇴임식을 하게 된 점은 한 편으로는 고맙기도 하지만, 너무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그리하여 1967년 3월 2일 출발한 교직생활이 2009년 8월 31일자로 42.5년이라는 시간을 초, 중, 고에서 어려운 일도, 즐거운 일도, 보람 있는 일도, 좌절을 맛보기도 한 가운데, 잡초근성으로 저의 교직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을 해 보면 젊은 시절에는 몰랐는데, 교직은 ‘제자가 잘 되는 것을 보람으로 느끼고 사는 직업’이기에, 열심히 성의를 다하여 신뢰하고 열심히 지도하지 못 한 아쉬움은 있으나, 타 직업에 비하여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고, ‘적당히 하려면 쉬우나 잘 하려면 끝이 없이 어려운 것이 교사라는 직업이다...’는 생각을 갖고, 교육계 공인을 떠나 자연인으로 돌아왔습니다...!
-2009년 9월 3일 (전) 합천중학교 교사: 김병호-
첫댓글 그리 슬픈 이야기는아니네요,,,
혹시 함양사람이던데 아시는지요
직접쓰신건가요?...너무길어서 못읽겠...ㅜ
직접쓰신건가요?...너무길어서 못읽겠...ㅜ
천천히 봐야줘,,, 만화는 긴것도 잘보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