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7: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우리는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면,
주님께 속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중국의 어느 노(老) 목사님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은 청년 시절에 예수를 영접했다.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다.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모든 교회가 폐쇄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다 처형되었다.
당시 신학생이던 목사님도 징역 22년형을 언도받아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다시 2년이 더 지난 다음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집은 차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하게 변해 있었다.
아내는 이미 죽은 다음이었고 한 아들은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 있었고,
다른 아들은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신앙을 지키려고 견뎌 온 수용소 생활 22년의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에 마당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그때 주님 음성이 들렸다.
“얘야,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 상황이 이런데도 계속 나를 사랑하겠느냐?”
목사님이 대답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목사님이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을까?
비결은 다른 것이 없다.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주님이 사랑하는데 왜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묻지는 말자.
주님의 사랑은 세속적인 형통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설마 스데반은 주님께 저주를 받아서 돌에 맞아 죽었을까?
예전에 공연한 『뮤지컬 버스』의 내용을 책에서 읽었다.
산길을 통하여 시골 마을을 운행하는 버스가 있다.
그날도 몇몇 승객을 태우고 산길을 운행하는데 버스가 갑자기 브레이크 고장을 일으켰다.
한쪽은 절벽이고 다른 쪽은 깎아지른 듯한 내리막길이다.
승객들이 연신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기사는 브레이크가 들지 않는 버스를 위태위태하게 운전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보나마나 대형 참사가 일어날 것이 뻔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슬아슬하게 곡예 운전을 하는데 다행히 건초 더미가 있다.
“와! 살았다.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건초 더미를 향해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의 눈에 건초 더미 앞에서 어른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어떤 아이가 버스를 향해서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경적을 울려도 비키지 않고 손만 흔든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건초 더미를 이용해서 차를 세우려니 아이가 죽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피하면 버스 안에 있는 승객의 생명을 장담하지 못한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당황하던 운전기사가 입술을 앙 다물더니 결국 마음을 정리한다.
건초 더미를 향해서 버스를 몬 것이다. 버스가 건초 더미에 박혔다.
승객들은 무사했지만, 버스를 보며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던 아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죽었다.
그 아이의 희생을 담보로 승객들이 살아난 셈이다.
승객들은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깐 뿐, 이내 숙연한 마음이 되었다.
자기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아이가 죽은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승객들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기사의 아들이었다.
기사는 승객들의 생명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수년 전에 스위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한 실화이다.
누군가 “하나님이 언제 저를 사랑했습니까?
제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덕을 본 것이 뭐가 있습니까?”라고 항변하면,
하나님은 “내가 너를 구원하지 않았느냐?
내가 내 아들의 피 값으로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지 못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 사람은 어떤 것을 누려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지 못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은 영원한데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영원한 것을 제한적인 것으로 채울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에서 만족을 못 얻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만족을 누릴 방법이 없다.
- 『거룩한 에로스 아가』, p179-1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