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화를 걷다] 아토스, ‘아기오 오로스’의 수도원 나라
신이 내던진 땅, 그곳에 피어오르는 노래
그리스는 로마가톨릭이 아니라 정교(正敎)의 나라이다. 정교는 정통의 기독교라는 뜻이고, 가톨릭은 5세기 이래 정교에서 가지를 치고 나가서 분리 독립한 종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톨릭의 역사가 훨씬 깊고 정교회가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상황이라 정교는 아직 우리에게 낯선 감이 있다. 그래서 가톨릭이 더 정통성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 그리스인뿐 아니라 사업 혹은 유학 등으로 우리나라에 와 있는 러시아인도 정교도이기에 이들 또한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정교회를 찾아간다.
그리스는 종교계와 속계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서, 전국민의 대다수가 자연스레 정교도에 속한다. 종교의 자유가 있으나, 특별하게 다른 종교를 가진 것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당연히 정교도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스의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일축을 담당하고 잇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교육부는 과학기술부와 통합된 적이 있으나, 그리스에서는 ‘교육종교부’로 불린다. 정교도의 생활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세례, 결혼, 장례식 등의 행사가 거의 교회에서 치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명이 없으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수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종교를 강요받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개인이 다른 종교를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고, 다른 종교를 가진 것으로 등록이 되면 정교도로서 갖추어야 할 각종 의례에서 벗어난다.
정교에도 속인들이 다니는 교회가 있고 또 수도승이 모여 사는 수도원이 잇다. 정교의 수도원 전통은 가톨릭보다 훨씬 더 동방적이다. 산속 같이 외진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세속과 완전히 등을 지고 살아가는 모양새가 근동에서 볼 수 잇는 은자(隱者)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 정교 수도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아기오 오로스(聖山)’이다. 이곳은 많은 수도원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수도원의 나라’이며, 주엣 이래 하나의 독립된 나라에 비길 정도로 자치성을 강하게 지녔던 곳이다.
‘아기오 오로스’는 ‘성스러운 산’이란 뜻이지만 그냥 오로스(山) 혹은 아토스(山)로 불리기도 하는 곳으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 테살로니키 부근의 해변 할키디키 반도에 부속된 아토스 반도에 자리하고 있다. 할키디키 반도는 손등 모양의 땅끝에 작은 바도 세 걔가 손가락 같은 모양새로 달려 있는데, 가장 동쪽에 있는 반도가 아기오 오로스이며 그곳에 아토스 산이 우뚝 솟아 잇는 형태다. 아기오 오로스란 이름은 1144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메기스티 라브라 수도원에 내린 칙서에 처음 언급된 데서 유래하게 됐고, 그 후에 ‘아토스의 아기오 오로스(Agionymo Oros of Athos)’로 불리기도 했다.
아토스는 그리스정교 수도원의 세계적 중심지로서,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곳은 그리스에 속해 있으나 수도원의 자치 구역으로 그리스의 법이 아니라 전통의 자체 종교적 법에 따라 통치되는 독립된 나라와 같다. ‘성모마리아의 정원’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소규모 암자나 부속 시설을 제외하면 현재 약 20여 개의 대(大)수도원이 있다. 아토스 산은 해발 2.033미터로 위엄과 정기를 품고 있으며, 그 동굴이나 바위 벼랑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이 원초적 자연을 배경으로 천 년의 풍상을 견뎌내고 있다.
그리스는 중세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기독 정교회(Orthodox Christianity)뿐 아니라, 그 전부터 연연히 내려오는 방만하고 자유로운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저농을 함께 지니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그리스는 문화적, 종교적으로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전통을 아우르는 중심에 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전통의 어울림
아토스도 기독교가 그리스에 들어오기 전 이미 그리스 신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곳으로, 이곳에서 거인 기간데스(자이언트)들과 올림포스 신들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아토스는 하늘(우라노스)과 땅(가이아)의 아들로 기간테스의 두목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아토스가 트라케의 큰 산을 떼어내어 올림포스 신들을 향해 던졌는데, 그 것이 빗나가서 바다에 빠져 생긴 곳이 그의 이름을 딴 아토스 반도가 됐다고 한다.
아토스가 언제부터 그리스정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러시아에서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 왔고 그때부터 이곳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마리아가 사도 요한과 함께 키프로스로 항해하다가 심한 폭풍을 만나서 이곳 아토스 해변에 닿게 됐는데, 그곳은 오늘날 ‘이베리아인들의 성(聖) 수도원’이 있는 곳이었다. 사실 10세기 이후 이곳 아토스에는 그리스인뿐 아니라 멀리 이베리아(이스파니아)인, 아르메니아인, 시케리아인, 이탈리아인들이 세운 수도원도 있었으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곳도 있다.
뜻밖에 아토스에 닿은 마리아가 주변 경관에 감탄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이곳이 당신의 땅이요 정원이요 천국이 되리라…..’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후 이곳이 ‘성모 마리아의 정원(Lot and Garden of Virgin Mary)’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4세기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곳에 수도원을 많이 지었다는 말도 있으나 그런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아무튼 4세기 이후 이곳에 기독교도 및 은둔의 수도승들이 생겨났고, 9세기 경에 이르러 많은 군집이 이루어지면서 수도원이 많이 들어서게 됐다.
아토스, 즉 아기오 오로스 수도 생활의 선구자로 7세기 말 페트로스 아토니티스, 8세기 혹은 9세기의 에우티미오스 네오스 등 고명한 수도승들이 있다. 전자는 은둔적 수도생활, 후자는 집단적 수도생활을 지향한 것으로 서로 차이가 있다.
은둔의 아토스
아토스의 수도 생활이 본격화하게 된 것은 843년 비잔티움 여제 테오도라가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해 성화상을 다시 인정함으로써 성화상 투쟁에 종지부를 찍게 될 즈음이다. 약 100여 년 계속된 성화상 투쟁을 피해 수도승이 이곳으로 피난처를 찾았기 대문이었다.고 한다.
성화상 투쟁이란 8세기 초 비잔티움 황제 레온 3세 때 시작돼 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갈등으로, 레온 3세가 정교회의 성화(聖畵) 및 성상(聖像)을 금지하면서 발생했다. 그리고 약 1세기 후 테오도라 여제가 소집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화만을 인정하는 선에서 일단락됐다. 공회의 결과, 성상은 우상이라 할 수도 있으나 성화는 그렇지 않고 기독교의 이해를 돕는 수단으로 정교에서 용인되게 됐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내려와서 정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마리아 성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885년 바실레이오스 1세 황제의 칙서에 의해 아토스는 다른 세속과 단절돼 수도승들만 머물게 됐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내려온다. 이어서 960년 흑해의 트라페주스 출신인 아타나시오스 아토니티스는 흩어져 은둔해 있는 수도승들을 수도원 조직 내로 포섭하고 그 생활지침으로 제1차 강령[Typiko 혹은 Tragos(염소가죽에 적었다는 뜻).을 만들었다. 후에 이 강령은 비잔티움 황제 이와니스 치미스키스(재위 969-976)의 윤허를 얻게 됐고, 아타나시오스는 당시 아기오 오로스의 58개 수도원의 대표가 됐다.
‘정교의 본산(방주: Ark of Orthodox)’으로 불리는 이곳 아토스 자치체제의 삶은 가치관, 사고방식, 주변 환경, 일상 등에서 현대의 세속적 삶과 다르다. 우선 아토스에서는 시간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원초적 자연과 하늘을 배경으로 울려 퍼져 경이로움을 더하는 곳이다. 일력도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인 그레고리력(曆, Gregorian calendar: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개정한 것으로 100으로 나눠지는 해는 윤년에서 제외하되, 400으로 나눠지는 해는 윤년으로 둠)이 아니라 그 전의 율리우스 구력(舊曆: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동거했던 로마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 제정한 것으로 4년마다 윤년을 둠)이 사용되고 있다. 지금도 여성들은 이곳에 출입할 수가 없다.
흑해 트라페준다와 마케도니아 베르미오의 ‘성모 수멜라’ 수도원
흑해 남부의 해변 도시로 지금은 터키 영토이지만, 고대 그리스인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이곳 그리스 신화의 고양인 트라페준다에는 정교회의 상징으로서 ‘성모 수멜라(파나기아 수멜라)’ 수도원이 있다. 386년에 세워진 이 수도원에는 예수의 제자인 누가(루카스)가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성모 수멜라’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베르미오 마을 새 ‘성모 수멜라’ 수도원에 보관돼 있다.
‘수멜라’의 뜻은 흑해 방언으로 ‘멜라스 산으로’라고 한다. 380년 성모 마리아가 한 젊은 수도승에게 나타나 자신이 인도하는 곳으로 ‘아테네의 성모 상’을 옮기라고 지시한 다음, 그것을 들고는 사라졌는데, 그는 이곳 멜라스 산에서 성모상을 찾게 됐고 그곳에 이 수도원을 세웠으며(해발 1,320m), 성모상은 ‘수멜라 성모상’으로 불리게 됐다.
1923년 터키 공화국과 그리스 간에 무슬림과 정교도 간 주민 교환이 이뤄졌을 때 무슬림들이 이 수도원을 약탈하여 방화했는데, 당시 수도승들은 수멜라 상 등 성물(聖物) 3점을 인근의 작은 교회로 옮겨 보관했다. 1931년 터키 수상 이스메트 이노누가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그리스 수상 엘레브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이 성물들을 이양해줄 것을 부탁했고 이노누가 그 청을 받아들여 성물들이 아테네 비잔티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 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51년, 마케도니아 서부에 위치한 베르미오 마을에 같은 이름을 가진 새 수도원이 세워지게 되고, 3점의 성물도 그곳으로 옮겨졌다. 이 수도원은 1923년 소아시아 및 흑해에서 쫓겨난 후, 흑해의 고향과 수멜라 수도원을 가슴에 묻고 살았던 그리스인 정교도 실향민들의 염원이 가시화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