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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바의 소개
로마주변에는 약 60여개의 카타콤바가 현재까지 발견되었다. 그중 중요한 몇 곳을 소개한다.
성칼리스투스의 카타콤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었던 2세기말에서 3세기 초, 당시 교황 제피리누스(199-217)는 로마의 명문이었던 체칠리아 가문으로부터 이 지역의 땅을 희사받게 되었다. 교황은 자신의 부제였던 칼리스투스에게 명하여 이곳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초기 교회 공동체의 정식 관리를 받게 된 첫 번째, 공적 재산이었으며, 동시에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인의 지하 공동 묘지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현재 발견된 모든 카타콤바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지하 5층까지 개발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한 통로는 2킬로미터 정도나 뻗어 있다.
모든 카타콤바는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이름들은 카타콤바 안에 있는 성인이나 또는 땅을 희사한 봉헌자들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 카타콤바 역시 순교자 교황 성칼리스투스(217-222)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다. 순교자 교황 성칼리투스는 부제가 되기 전, 유대인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이탈리아 지중해 바다 가운데 있는 사르데냐 섬의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중노동을 하다가, 로마의 귀족 부인이며 신자였던 마르치아의 도움으로 자유를 얻어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그 이후 당시 교황 제피리누스의 부름으로 부제가 되어 약 20년 동안 이곳 카타콤바의 관리 및 교황의 보조자로 일했다. 제피리누스 교황이 서거하자 교황으로 선출되어 양떼들을 보살피는 목자의 역할을 하다가 순교하였다.
교황들의 무덤
카타콤바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장소가 바로 3세기에 만들어진 교황들의 무덤이다. 이곳에는 모두 아홉 분의 성인 교황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 중 세 순교자 교황은 다음과 같다.
성폰시아누스(230-235)
세베루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막시미누스(235-238)는 다시 그리스도인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명하였다. 당시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속속 잡혀가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평생 중노동을 하거나 경기장에 던져져 맹수의 밥이 되도록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교황 폰시아누스는 자신의 양떼들을 보살피다가 체포되어 종신 중노동형에 처해졌고, 사르데냐의 탄광으로 추방되었다. 광산의 중노동자로서 힘든 일을 하던 교황은 탄광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시신을 몇 년 후 광산 주변에서 찾아 내어 이곳에 안치하였다.
성파비아누스(236-250)
교황은 14년간 재위하면서, 막시미누스의 대박해시기 때 순교했던 교황 성폰시아누스의 시신을 찾아내어 카타콤바로 옮기는 등, 그 당시 순교자들을 위해 특별한 일을 많이 하였다. 막시미누스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해는 데치우스(249-251)가 황제로 오르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부르며, 옛날 자신의 선대들이 하던 식대로 신전 안에 석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 꿇고 축복의 주문을 읊도록 명령하였다. 교황 파비아누스도 끌려가서 주문을 읊는 것뿐 아니라 배교하도록 강요받았는데, 이를 거부하자 즉시 신전 밖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때가 250년 1월 20일이었다.
성식스투스 2세(257-258)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253-260)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의 공적인 교회 묘지였던 카타콤바에 대해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스 태생의 교황 식스투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안에서 교회 전례 모임을 갖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그 역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258년 8월 6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체칠리아 무덤
성녀로 익히 잘 알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2세기 때,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남편 발레리아누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으며, 초기 공동체를 위하여 많은 헌신을 하던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황제대 일어난 박해 때 두 사람 다 순교하였다. 성녀는 죽기 전에 자기 가문의 소유지를 공동체에 기증하였고, 그녀 자신도 순교 후 이곳에 묻혔다. 821년 교황 파스칼리스 1세(817-824)가 그의 시신을 로마 시내의 테베레 강 옆에 있던 성녀의 생가(이곳은 5세기 때 이미 성당이 되었음)로 이전할 때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성녀가 어떻게 순교하였는지 잘 보여 주고 있는 이곳의 석상은, 17세기 초 카를로 마데르노라는 유명한 대리석 조각가가 1599년 성녀 체칠리아의 기념 성당에서 성녀의 유해 보수 작업을 위해 처음으로 관을 열었을 때 보았던 모습을 스케치하였다가, 나중에 조각하여 성당 지하에 있는 성녀의 무덤 앞에 봉헌하였다. 현재 이곳에 있는 석상은 그 작품을 그대로 복사하여 놓은 것이다. 목 부분을 잘 보면 잘린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있다.
성녀는 순교사상 처음으로 뜨거운 목욕탕에서 증기로 질식시켜 죽이는 방법으로 처형당했으며, 이 방법이 여의치 않자, 다시 참수형을 받아 처참한 순교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녀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오른쪽 손가락 셋을 펴고 있고, 그 위에 왼쪽 손가락 인지 하나를 포개고 있는데,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일체라는 것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표현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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