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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통해 배우는 인물론과 지도자론
삼국지(三國志)는 도다(戶田) 선생님께서 불법을 근저(根底)로 하여 광포(廣布)를 위한 인재육성과 청년육성에 사용된 대하소설이다.
광선유포(廣宣流布)의 지도자론(指導者論)
오늘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삼국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왔으나, 많은 청년들이 ‘다시 한 번 부탁드리고 싶다’는 요망도 있었기 때문에 <삼국지> 를 통하여 지도에 임하고자 한다.
그 까닭은 <삼국지>는 도다 선생님이 불법을 근저(根底)로 하면서 광선유포를 위한 인재육성과 청년육성에 사용하신 소설이며, 거기에는 광포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 <삼국지>에는 인물론(人物論)도 있고 지도자론(指導者論)도 있으며, 세간의 전통과 풍속도 포함되어 있어 종교나 민족성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요소를 담고 있는 대하소설(大河小說)이다.
또한 여기에 묘사된 인물상에는 지옥계(地獄界)를 비롯하여 수라계(修羅界), 천계(天界), 보살계(菩薩界) 등 십계(十界)의 차원에서 보아 여러 가지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축도가 나열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따라서 묵은 책인 듯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엄연히 현대에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삼국지를 읽고, 현실에 전개(展開)하며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도다 선생님은 벌써 30년 이전에 이미 삼국지를 읽고 현실에 인용하시고 있지만, 이 하나의 사실만 보아도 도다 선생님이 얼마나 뛰어난 선견지명이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라는 것은 근세기 중국이 ‘위(魏)’나라 조조(曹操)와 ‘오(吳)’나라 손권(孫權)과 ‘촉(蜀)’나라 현덕(玄德)의 삼국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시대를 말한다. <삼국지>에는 약 100년간의 치란흥망(治亂興亡)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삼국시대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유동(流動)의 시대이다.
묵은 권위는 붕괴했으나 새로운 권위는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고, 사회규범이나 가치관도 여러 가지로 혼돈되어 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것은 어느 차원에서 말한다면 현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특히 능력이 주어져서 의욕이 있는 인간에 있어서는 절호의 시대였다.
운이 좋으면 신분이 얕은 한 사람의 남자에서 황제의 자리를 얻는 것조차 꿈이 아니라는 것이 삼국 시대의 양상이었다. 또한 현재의 중국 지명으로 말하자면 ‘위는 화북(華北)’ ‘촉은 사천(四川)’ ‘오는 강남(江南)’의 땅에 각각 해당하고 있다.
또 당시의 서양은 제정 로마제국의 말기였다. ‘오현제(五賢帝)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군인황제시대’였다.
당시 로마제국의 통일과 치안은 거의 상실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독력(獨力)으로 통치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내다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사분통치제(四分統治制)를 두고,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
그것은 공명(孔明)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와 통하는 바가 있으며, 거의 같은 시대에 동·서양 양쪽에서 비슷한 정치 양상이 나타나고 있던 사실에서 역사의 묘(妙)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로마제국의 ‘오현제시대’ 에 대하여 약간 말해 두고 싶다.
지금도 앞으로의 시대에 있어서도 제군들은 현명한 지도자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도 제군들은 여러 가지의 것을 배우고 또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제황(五帝皇)’이란, 서력(西曆) 1세기말 이후의 약 80년간(서력 96∼180) 로마제국 전성시대에 이어진 5인의 황제를 말한다.
각각 ‘현제(賢帝)’로서 정치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으나, 그 오인(五人)이란 네로와 · 트라야누스 · 피우스 · 마르쿠스 · 아우렐리아누스이다.
공포정치가 이어진 뒤 황제에 추대된 ‘네로’는, 이후의 황제는 ‘최선의 사람이 통치자여야 한다’라는 스토아 철학의 사고방식에 따랐다.
그러므로 세습제(世襲制)가 아닌 가장 유능한 이 5인이 차례차례로 후계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도 여러 분야에서 ‘세습제’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학회에서는 세습제는 있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단연코 배척해 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생애 ‘신념(信念)’과 ‘신의(信義)’의 길을
현대에 사는 삼국지의 정신
민중 엄호(嚴護)의 현명한 지도자
오현제시대는 로마제국이 가장 번영한 시기였다. 즉 ‘로마의 평화’를 구가(謳歌)한 시대였다.
역사가인 ‘기본’은 이 시대를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번영의 배후에서는 점차로 정치, 경제, 사회 등에 여러 문제가 스며들고 있었다.
중국에 있어서는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시대를 이상적인 선정이 행해지고 있었던 때라고 한다. 어서에는 “대는 희농(羲農)의 세상으로 되어서‥‥”(어서 502쪽)라고 이상적인 사회의 실상이 표현되어 있다.
서양사회에 있어서 오현제의 시대도 그것에 통하는 것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지향하는 광선유포 사회의 하나의 지표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요시카와 에이지(古川英治)의 <삼국지>는 1938년 9월부터 태평양전쟁의 중반인 1948년 9월에 걸쳐 집필하고 있다.
<삼국지> 창작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이전에 종군(從軍) 작가로서 중국 대지를 밟은 자신의 견문(見聞)과 체험이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제군들이 광선유포를 위하여 활약하는 도상에 있어서의 여러 체험은 정말로 귀중하다.
노고를 기반으로 한 자신의 체험은 지금부터의 인생의 현란(絢爛)한 창조에 도움이 되어 간다는 것을 자각해 주기 바라는 것이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중국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정도까지는 쓸 수 없을 것이다. 체험은 힘인 것이다.
첫머리에 현덕(玄德)의 감개 – “유구(悠久)히 물은 흐른다 – 몇 천 년이나 이렇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여 황하(黃河)의 물을, 싫증내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요시카와에이지가 중국 천지에 대해 느끼는 감개였음에 틀림이 없으리라.
도다 선생님은 ‘수호회’ 에서 독서를 하면서 지도를 해 주셨다.
1955년 봄, 수호회 간사(幹事)들로부터 다음 교재를 상의 받았을 때 “이제야 <삼국지>를 시작할 때가 왔구나”라고 하시며, 그 이후 반년 간 삼국지를 교재로 하여 ‘지도자론’ 과 ‘인간론’ 등을 배웠다.
현덕, 공명은 ‘왕도(王道)’를, 조조 등은 ‘패도(覇道)’를 걸었다고 해도 좋다.
‘왕도’란, 즉 도덕(道德)정치를 말하며 왕은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의 군(君) · 사(師) · 친(親)이 되도록 선택 받았다는 것을 자각하여 민생(民生) 경제를 보장하고 효(孝) · 제(悌) 등, 인간이 걸어가야 할 도리에 따르는 사회 질서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왕도’의 근본은 왕 자신이 엄격한 ‘덕(德)’의 수득(修得)에 있다고도 말씀하셨다.
이에 대하여 ‘패도’란 패자가 무력으로 천하를 지배하는 권력정치이며 ‘신의’ 보다는 ‘공리(公利)’를 중시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여러 가지 이해와 공명(功名)과 책략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러니만큼 이 ‘덕의 엄격한 수득’이야말로 무엇보다 간요(肝要)하다.
인간으로서의 참다운 ‘덕’은 정법 정의의 신앙에 면려해 가야만 수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조조에게 가신(家臣)인 정립이 이렇게 진언한다.
“왕도 정치가 땅에 떨어진지 이미 오래이니 천하는 어지럽고 민심(民心)은 싫증을 내고 있습니다. 패도 독재의 강권(强勸)이 펼쳐지기를 세간은 대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이것은 나라를 통치하는 힘이 없는 황제를 폐하고, 무력이라는 힘을 가진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암암리에 조조의 결단을 촉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조조는 ‘인의’를 중히 여기고 효제를 존중한 현덕과는 대조적인 자세였다.
나는 이전의 <젊은 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삼국지 등을 이야기 했다. - 조조의 용맹. 관우의 인격. 장비의 힘. 공명의 지(智). 손권의 젊음 그리고 시비론(是非論)과 선악론(善惡論) 등 많은 토론을 했다.
왕도의 사람이 되자, 패도의 사람으로는 되지 말자. 민중의 왕이 되자, 권력의 우두머리로 되지 말자. 대중의 벗이 되자, 재력(財力)의 노예가 되지 말자. 선의 지자(智者)가 되자, 악의 지혜자로 되지 말자.”(1955년, 27세)
도다 선생님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었다.
“유비현덕이 우유부단(優柔不斷)하므로 조조에게 패하는 곤욕을 당하는 것도 부득이 했다.” 라고 엄하게 보고 계셨던 일면도 있었다. 또한 “제갈공명도 또 현덕도 이상주의자였다” 라고.
이상주의자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실의 승부에 이길 수 없다. 승부는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상을 잃은 현실은 오직 추하기만 한 것으로 되기 싶다.
그러므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이 양쪽 자세를 바탕으로 한 ‘중도주의(中道主義)’가 아니면 현실의 여러 문제를 극복해 갈 수는 없다.
그러나 “삼국지에 있어서는 조조와 같은 현실론자가 그들 이상론자에게 승리해 버렸다는 슬픔이 있다.” 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이상주의만으로는 정치력, 경제력 등을 내세우는 현실주의에 패배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이 방정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또 미래도 그러할 것이다.
또 ‘장비’ 와 ‘관우’ 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었다.
“장비는 지나치게 조잡하고 경박하기 때문에 일신(一身)을 망치게끔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생명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라고. 장비의 실패가 술에 있었던 것은 아시는 바와 같다.
또 “관우는 중후(重厚)한 인품이었다. 때로는 손해 보는 것 같은 우직한 성격이지만 그의 훌륭한 점은 의(義)를 지키면서도 자신을 조금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또 ‘관우’는 신의(信義)의 사람이었다. 절조(節操)를 소중히 하고 의를 중히 여기며 살았다고 말씀하시며 관우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하셨다. 여러분도 부디 이 관우와 같은 ‘신의의 사람’ 의 자세를 부탁하고 싶다.
현덕, 관우, 장비의 세 사람 사이에 맺어진 유명한 ‘도원(桃園)의 의(義)’에 대해 도다 선생님은 “보다 중요한 것은 세 사람이 다 같이 서로의 단점을 잘 알고 서로 보충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었다.
우리들도 서로가 동지이다. 형제 이상으로 깊은 유대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상대의 단점을 추궁하기보다 서로를 감싸주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어가기 바란다.
또 “따라서 먼저 세 사람의 성격상의 차이를 잘 봐야 한다.”라고도 말씀하시며 인물에 대한 견해도 가르쳐 주셨다.
<삼국지>를 단지 재미있게 읽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생과 인물관에 통하는 길을 해독(解讀)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평생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 상대방의 성격을 알고, 어떻게 지키고 살려 가는가.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리드하는 지도자의 근본 요건인 것이다.
“무엇이 단점이고 장점인가를 알아가는 것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결국 세 사람이 의를 맺었을 때에는 서로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의를 맺었을 때’ 라는 것은 우리들로 말한다면 광선유포에의 맹서를 서로 세운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포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서로 좋아하게 된다는 강한 결속이 중요하다. 그러한 동지로서의 유대만큼 존귀하고 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서주(徐州)가 몰락 된 이래 수년 만에 현덕, 관우, 장비를 중심으로 군신(君臣) 일동이 한 성(城)에 살 수 있는 날을 맞이했다. 그 날을 맞이하여 <삼국지>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되돌아보면 - 그것은 모두 인고(忍苦)의 덕택이었다. 또 분산시켜도 다시 맺으려는 결속의 힘이었다. 결속과 인고의 두 가지를 잘 이루게 한 것은 현덕을 중심으로 하는 신의 그것이었다” 라고.
무슨 일을 이루려고 해도 그 나름대로 ‘인고’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 입장이나 장소는 달라도 유사시에는 같이 모여 같이 나아가려는 강한 동지애에 의한 ‘결속’이 필요하다. 하물며 광선유포라고 하는 대목적으로 전진하는 제군은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배신이 다반사로 되어 있는 난세(亂世)에 도원에서 의를 맺은 세 사람이 생애 뜻을 같이 했다는 사실은 오늘날도 충분히 감동적이며, 이 세 사람의 결합이 있었기 때문에 <삼국지>는 시대를 초월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역시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의 하나는 마음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들도 마음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불법이다.
현실은 서로 헐뜯고 적대시하며 질투하고 반목이 소용돌이치는 추악한 사회이다. 바로 삼악도(三惡道) 사악취(四惡趣),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세계이다. 그러한 속에서 정말로 아름답고 무너지지 않는 인간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불법에 의하는 이외는 없는 것이다.
가와모토 씨가 <삼국지> 속에서 유독 높게 평가하고 있는 인물은 관우와 장비만큼은 뚜렷하지 않지만 ‘오호(五虎)의 대장군’이다.
‘오호의 장군’이란 관우, 장비, 마초(馬超), 황충(黃忠), 조운(超雲)의 다섯 사람이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도 훌륭한 사람은 있는 것이다.
지위나 처지의 높이나 또 화려한 외형상으로 인물을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늘에서 묵묵히 고생하는 사람 가운데 인재는 많이 있다는 것을, 젊은 리더인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된다.
패도를 배척하여 ‘왕도의 사람’ 이 되라
가와모토 씨는 말한다.
“조운의 충성은 현덕이 죽은 뒤 그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조운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그 인품이 좋다는 것과 판단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강할 뿐만 아니라 싸움의 정확함의 면에서는 <삼국지>중에 오직 조운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는 조금이라도 해이한 마음으로 작전에 실패한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제갈량(濟葛亮) 공명이 세운 작전을 가장 확실하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조운(趙雲) · 자룡(子龍)이며 공명은 누구보다도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는 대목이 있다” 라고.
나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러한 경험으로도 이 말에 대해 수긍할 수 있다.
역시 ‘인품’ 과 ‘인격’ 이 뛰어난 사람은 누구에게도 신뢰 받고 믿을 수 있는 존재로 된다는 것을 제군들은 명심하기 바란다.
또 ‘판단의 올바름’ ‘강함’ ‘싸움의 정확함’ 이라는 것은 리더에 있어서 필요한 자질이다.
나도 청년부 시대부터 항상 그것을 명심해서 지휘를 해 왔다. 미래를 담당할 청년부인 제군들에게도 그것을 강하게 말씀 드려 두고 싶다.
거기에 조운의 만년의 심기(心氣)를 대변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주군 · 현덕의 사후(死後) 공명은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상주(上奏)하여 북벌(北伐)에 출정한다, 그때 공명은 늙어서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되어 있는 조운을 굳이 부대 편성에서 제외하여 본진에 남겨 두려고 했다.”
그때의 조운의 심기를 ‘요시카와 에이지’ 씨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조운은 그 정을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기는커녕 편성 발표를 보자 ‘어찌하여 나의 이름이 없느냐 고얀지고’ 하며 승상부(承相府)에 찾아가 공명과 정면 단판을 한다.
“나 자신이 말하는 것은 장담 같으나, 선제(유비현덕) 때부터 적진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었으며 적을 만나서는 앞장서서 뛰지 않음이 없는 조자룡이오. 늙었다고 해도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지지 않을 생각이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다시없는 일신의 행복이다. 그런데 재상은 이렇듯 말하는 조운의 만절(晩節)을 굳이 고목과 같이 썩게 하시려는 생각인가요.” 이 말에는 공명도 질려 버렸다고.
이렇게 해서 조운은 스스로의 소원대로 5천의 정병(精兵)과 같이 대선봉군에서 선구를 끊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조운의 기백, 신념의 자세가 부각되어 있다.
조운의 당시의 연령으로 말한다면 지도부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스스로의 신조와 신념을 청년시대에 이어 변함없이 관철해 간다. 조운의 훌륭함이 느껴진다.
광포와 신심에 있어서 우리들의 자세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이다.
조조 군에게 대패하여 현덕이 천리 길을 패주(敗走)할 때의 일이다.
그는 그를 그리워하는 수많은 민중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인덕(仁德)이 있는 현덕은 사랑하는 백성을 내버리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서민과 함께 움직이는 행군은 막심한 곤란과 역경에 부딪친다. (조조군의 추격을 만나 많은 민중이 싸움의 희생이 되었다.)
그것을 본 현덕은 심각한 비탄에 잠겨 “가련 하도다. 무고한 백성들 내가 있기에 이와 같은 화를 입는다 - 나만 없다면”이라고 하며 강에 투신하려고 한다. 현덕은 이러한 감상적인 측면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 현덕에 대하여 주위의 신하들은 “죽음은 쉽고 삶은 어려운 것. 원래 살아 나가는 길은 난고(難苦)의 투쟁입니다. 많은 백성을 내버리고 당신만이 먼저 벗어나려고 하시나이까.” 하고 한탄하며 충고한다.
그리하여 현덕은 죽음을 단념하고 재기할 것을 기약하게 되지만 결과적으로 패주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패주할 때 민중을 데리고 간 현덕의 판단이 옳았는지 어떤지 - 이것은 의론(議論)이 엇갈리는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덕의 판단에 대하여 ‘어이가 없어 할 말이 없다’라고 엄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허나 민중을 생각하는 현덕의 심정은 정말로 존귀하다.
이 고사(故事)는 지도자가 민중을 깊이 사랑하고 있어도 민중을 수호해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또 내가 항상 실감하는 바이다.
시대는 더욱더 ‘에고의 시대’로 되어 가고 있다. 민중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지도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한 측면에서도 불법자는 어떠한 고난과 곤란이 있다고 해도 절대로 민중을 수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불법은 민중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패주의 마지막 부대를 맡은 것은 관우였다. 그 때 그는 도망치다가 헤매는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지키며, 도망치다 뒤쳐진 민중을 구조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분투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러한 모습에서 “회원을 위해 솔선하여 행동하는 창가반을 연상한다” 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적절한 이 말은 가슴에 인상 깊게 새겨져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광포대원(廣布大願)이야말로 우리들의 사명(使命)
역경 속에 ‘성장’과 ‘승리’의 힘
문룡(蚊龍)이 숨는 것은 승천(昇天)을 위하여
하나의 ‘인격’이 갖는 힘에 대하여 말씀 드려 두고 싶다.
조조는 어느 때 적장이었던 관우의 지조 바른 인격을 찬양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가리지 않고 무인(武人)의 훌륭한 심조(心操)에 접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그 순간은 하늘도 땅도 인간도 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는 듯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 그러한 일개의 인격이 다른 것을 훈화(薰化)하는 것은 후세 천 년, 2천 년에까지도 미치리라” 라고.
이와 같이 한 사람의 고결한 인격이라는 것은 적군과 아군을 초월하고, 시대도 초월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켜 향상케 하는 것이다.
참다운 인격자, 훌륭한 힘 있는 인재, 지도자의 존재라는 것은 항시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보면 그러한 인물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나도 내외를 불문하고 이따금씩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인재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때마다 이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역경(逆境)’과 ‘불우(不遇)’함에 처했을 때 어떠한 처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장래가 있는 여러분들에게 이 점을 언급해 두고 싶다.
그것은 아직 촉나라를 일으키기 이전의 현덕의 일이다. 사람들이 현덕의 불우함을 분개하고 있었으나 그 자신은 담담해 있었다.
그 때 현덕의 가슴 속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몸을 굽혀 분수를 지키고 하늘의 때를 기다림. - 문룡이 연못에 숨는 것은 승천을 위해서다.” 라고.
문룡이란 수중에 숨어 있으면서, 운우(雲雨)를 기다렸다가 때가 이르면 하늘에 올라가 용이 된다는 동물이다.
여러분도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 환경을 한탄하는 그와 같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슨 일이라도 초조해 한다고 해서 잘 되어 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청년 시대는 수행의 시대이다. 금후 40대, 50대로 되어 전개될 사회와 광선유포의 본무대를 가슴에 간직하며 담담히 때를 기다리는 포부와 깊은 경애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구부러짐을 펴기 위해서이고 현재의 본분에 전력을 다하면서 하늘의 때를 기다린다는 삶의 자세를 알기 바란다.
또 대성인도 광선유포는 ‘때를 기다릴 뿐’ 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 ‘불우(不遇)’라는 것에 관하여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말씀을 배견하고 싶다. 가마쿠라(鎌倉)의 쓰루오카 팔번궁(鶴岡八幡宮)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의 일이라.
문하인 이케가미(池上兄弟)는 막부(幕府)의 작업 봉행(奉行)이기 때문에 당연히 재건을 맡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참언(讒言)을 당하여 그 소임에서 제외 당했기 때문에 형제는 그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대성인에게 보고를 한다. 대성인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도하시고 있다.
즉 ‘부디 부디 온편(穩便)하게하여 적대시한다든가 원망하는 기색 없이 몸조심하며, 하인도 없이 좋은 말도 타지 말고 톱과 쇠망치를 들고, 허리에 차고 항상 웃는 모습으로 있으시라’ 라고.
즉 “부디부디 지금은 온화한 태도로서, 조영(造營) 공사에서 제외당한 일을 가지고 적대시하고, 원망하는 듯한 모습을 하지 말고 또 몸차림은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며, 하인들도 데리고 다니지 말고, 좋은 말에도 타지 말며, (목수답게) 톱, 쇠망치를 손에 들고, 허리에 차고 언제나 웃는 모습을 하고 있으십시요”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여러분도 이 지도를 총명하게 자기 자신에게 맞춰서 명심해 주시 바란다.
긴 인생의 도상에는 조직이나 무슨 일에 있어서도 자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고 고민하는 일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정말로 훌륭한 신심과 인격 있는 인물이라면 곧 제천(諸天)이 그 사람에게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자리를 주지 않을 리가 없다. ‘하늘의 때’가 오면 불우(不遇)를 맛본 몫의 몇 배나 되는 중요한 입장에서 반드시 대활약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일로 상심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신심을 후퇴시키는 그러한 일은 단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 드려 두고 싶다.
또 이에 대하여 인생에는 때로 ‘패배’할 때도 있다. 그 때에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하는가.
현덕이 패전의 고배를 마셨을 때, 맹우(盟友)인 관우가 현덕에게 이렇게 타일러 말한다.
“승부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 사람의 성패는 모두 때가 있나이다.‥‥ 때가 오면 저절로 열리고 때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긴 인생을 대처하려면, 득의(得意)한 때에도 득의함에 교만하지 않고, 절망의 구렁에 임해서도 멸실(滅實)에 빠지지 않고 - 거기에 동요하지 않고 빠지지 않고, 출소진퇴(出所進退), 유유함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요” 라고.
인생의 일면의 패배에 즈음하여 그것에 집착하여 비탄만 해서는 인생 그 자체의 패배에까지 빠져 버린다. 오히려 패전은 다음의 승리에의 도약대라고 스스로의 힘을 축적해 가야 한다. 거기에야말로 ‘인생의 묘통(妙通)’이 있다.
관우는 다시 ‘인간에게는 몇 번이나 니어(泥魚: 뻘 속의 물고기)의 은인(隱忍)에게 배워야 할 시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고 현덕을 격려하고 있다.
‘니어와 인생’ - 이것도 역시 음미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젊은 제군이 여기에서 무엇인가 참작해 주었으면 한다.
유비현덕에 대하여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모친의 존재이다.
그의 모친이 얼마나 훌륭했던가. 평범한 일로 보이지만, 모친과 자식 관계는 얼마만큼 중요한 의의가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통하는 일이고, 신심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모친과 자식 관계를 많이 보아 온 나에게는 그와 같이 결론을 찾아 낼 수가 있다. 모친의 올바른 ‘일념의 소작(所作)’ ‘일념의 힘’이 얼마만큼 자식에게 통하고 있는가를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유비는 대단히 부모에게 효도하는 청년이었다. 아버지는 없다. 어머니 혼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우한 가정에서 뛰어난 인물이 나온다는 것도 지금이나 예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쨌든, 현덕은 어머니를 진심으로 소중히 대했으며 그의 어머니 또한 마음이 강건한 어머니였다. 위대한 어머니는 어느 시대이건 그러한 것이다.
현덕이 고향을 떠나 2, 3년 - 아직 뜻을 못다 이루었음에도 고향을 생각하여 어머니 곁으로 돌아갔을 때, 노모는 상냥하게 자식을 맞기는커녕 엄하게 이렇게 말했다.
“왜 오셨는가, 어린 아이같이...... 그래도 그대는 우국(憂國)의 위장부(偉丈夫)가 아닌가. 돌아 온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오래 있으면 안 된다. 오늘 하루 밤 쉬면 곧 집을 나서는 것이 좋겠다” 라고.
그리고 “천억(千億) 백성의 행복을 생각해요. 늙어서 얼마 살지 못할 이 어미 한 사람쯤이 무엇이 대단한가. 그대 마음에 모처럼 분기한 큰 뜻이 이 어미 한 사람 때문에 둔해진다면, 어미는 억민(億民)을 위해 생명을 줄여서 그대를 격려하고 싶다고 생각하오.’ 라고 준엄한 애정으로 격려한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현덕은 뜻을 굽히지 않고 더욱 결의를 깊게 굳혀서 앞으로 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촉의 대군을 거느린 공명은 최후의 전선이라고 할 중원(中原)으로 진출한다는 대망을 앞에 두고, 언제나 치밀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실적인 일에 있어서도 대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치밀하지 않으면 현실에는 절대로 승리할 수가 없다. 그것을 전제로 하여 무한한 미래를 지향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공명도 항시 용의주도하게 일을 추진하였고, 그 작전은 치밀하기 그지없었다.
현덕이 사망한 후, 그가 먼저 3년간 내정(內政)을 넓히고 충실하게 하는데 힘을 키우려고 한 것도 그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즉 “3년 출사(出師)하지 않고, 군사를 양성하며 병기(兵器), 양초(養草)를 축적하여 권토중래(捲土重來), 이리하여 선제(先帝)의 지우(知遇)에 보답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떠한 난사(難事)가 겹치더라도 중원 진출의 대책은 몽매(夢寐)의 순간에도 잊을 수 없는 공명의 일념이었다. 그의 소망, 그의 생활, 그의 나날, 이 모두를 응축하여 그것에 목숨을 걸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내 자신도 광선유포라는 대원으로 살아 왔다. 아침부터 밤까지 1년 365일 일각이라도 광선유포라는 것이 나의 뇌리에서 떠난 적은 없었다.
공명은 내정을 확충함에 있어서 ‘3년 동안 그는 백성에게 연민을 가지고 위로했으며, 친지나 부모와 같이 생각했다.’ 라고 한다.
이 그의 자세는 우리들의 회원을 소중히 하라고 하는 초창 이래의 전통정신에 상통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회원을 부하와 같이 취급하여 으시대고 있는 간부는 어느 사이엔가 학회에서 떠나게 되어 있다.
또한 “그는 또 학문과 문화의 진흥에 노력했으며 아동들도 도(道)를 알고 예를 갖추었다. 교학의 근본을 그는 사제(師弟)의 결부(結付)에 있다고 하여, 스승을 중시하고 그 덕을 함양시켰다” 라고 있다.
학문과 문화의 진흥, 그리고 덕의 함양을 주안(主眼)으로 한 어린아이의 교육 - 참으로 장래를 내다 본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미래부의 육성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해도 좋다.
또 사제의 관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도 학회의 방침에 일맥 통하는 것이 있다. 거기에는 낭만이 있고, 역사가 있고, 아름다움과 강함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장대한 흐름이 쌓여져 가기 때문이다.
다음에 ‘인재를 찾아 내는 눈’ 이라는 관점에서 말씀 드리고 싶다.
새로 오(吳)나라 주인이 된 손권(孫權)을 향하여 참모의 역할을 맡았던 주유(周愉)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시대가 된다 해도 반드시 사람 가운데에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공명이 항상 유비를 향하여 하는 말에 “모든 것은 사람에게 있다” 라고 있다.
또한 ‘망촉(望蜀)의 권(卷)’에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영지(領地)를 확대할 때는 다시 그것을 요지(要地)로 합시다” 라고.
그와 마찬가지로, 광포활동과 전진에 있어서도 남을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된다. 후배를 자기보다 훌륭한 인재로 육성하는 것이 간요하다. 거기에 지도자로서의 훌륭한 자세가 있다.
그것을 방정식으로 해 가는 데에 전체가 당당한 기세로 성장하며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관우와 장비가 패망하고 촉의 진영을 혼자 걱정하는 제갈공명의 심중을 ‘오장원(五丈原)의 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공명의 마음속 깊은 근심은 적료(寂廖)라는 하나의 사실 그것이었다. 그에게는 과학적 창조력이나 무진(無盡)한 작전 구상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필승의 믿음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촉나라 진영의 인재의 결핍만은 어떻게라도 보충할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하여, 학회에는 인재가 속속 육성되고 있으니 이처럼 기쁜 일은 없다.
“모든 것은 사람에게 있다” 를 명심
도다 선생님은 공명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인간은 각자의 장점도 있으며 단점도 있는 것이다. 역시 위대한 공명에게도 어찌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촉나라에 인재가 모이지 않았다. 그것은 공명의 재능이 너무나도 뛰어나고, 지나치게 꼼꼼했기 때문이다.”라고 평하고 계셨다.
재능이 있다고 해도 모든 것을 혼자 해버린다면 남을 육성할 수가 없다. 모두의 의견을 잘 듣고 그런 연후에 결론을 내려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 적재적소에 사람을 살리게 하면서, 각자에게 책임을 주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감을 갖게 해 가지 않으면 사람은 육성되지 않는다.
또한 도다 선생님은 공명에 대하여 “게다가 그에게는 인재를 열심히 찾을 여유도 없었다. 거기에 후계자가 육성되지 않았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쨌든 공명이 죽은 뒤, 촉이 30년간이나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전혀 인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신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유비현덕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유선(劉禪)이 촉의 황제 자리에 오르지만, 명군(名君)이라고는 평가되지 않았었다. 그에게는 선제(先帝) 현덕과 같은 커다란 재능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해 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유선은 유비가 40대 후반에 태어난 자식이며, 유비 사거(死去)의 때 유선은 약관 17세였다. 지나치게 소중히 키웠다는 약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앞서의 가와모토씨도 “제갈량을 비롯하여 보다 선택된 사람들이 모인 집단 속에 장중(掌中)의 구슬처럼 키워진 조자(曹子: 태자)가 바보의 대명사와 같은 어른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은‥‥‥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도다 선생님도 “양친이 한참인 나이에 태어난 자식은 우수하게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 라고 하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제군도 여러 가지 고생이 많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어려움을 이기는 이상의 교육은 없다’ 라는 의지로써 이제부터의 인생에 대처해 가기 바란다.
그러한 모든 것이 자신을 연마시키고 자신의 ‘덕’으로 되며 또 자식을 위한 호신(護身)이 되기 때문이다.
만년기에 접어 든 조조의 모습을 통하여, 어떤 영걸(英傑)이라도 연령과 경우의 추이와 같이 인간이 갖는 평범한 약점에 빠지기 쉽다는 교훈을 읽을 수가 있다.
“옛날 아직 궁문(宮門)의 한 경비원에 지나지 않았던 청년시대의 조조는 가슴 가득히 커다란 뜻에 불타고 있었다. 지위는 낮고, 몸은 가난했지만 동배(同輩)인 자가 상관에게 아부하여 입신(立身)을 꾀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한심한 사내인가’ 라고, 그 심보를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부하의 감언(甘言)과 남의 아부를 듣고 기뻐하는 상관에게는 더욱 모멸을 느끼며, 그 어리석음을 비웃고 그 잘못된 근성에 침을 뱉었던 것이었다. 실로 이전의 조조는 그렇게 단정하고 씩씩한 기개를 지닌 청년이었다” 라고 있다.
제군도 또 그러한 이상에 불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슬픈 일이지만, 50대 후반에 접어들었을 때 조조는 이전의 영걸(영웅)의 면모를 잃어 간다.
“그런데 근래의 그는 어떠할까. 적벽(赤壁)의 싸움 전, 관월(觀月)하는 선상(船上)에서도 자기의 노령을 헤아리고는 있었으나, 늙어지면서 청춘 시대 역경 속에서도 장담(壯談)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달콤하고 듣기 좋은 측근의 말에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어느 사이에 옛날에 멸시하고, 침을 뱉고, 또 어리석음을 비웃던 그러한 상관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우리도 신심을 잃고, 광선유포 대이상(大理想)의 정열의 불꽃을 꺼 버리면 이러한 모습으로 빠져 버릴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도다 선생님은 만년(晩年)의 조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었다.
“조조는 대성(大成)하면서 만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충고하거나, 반대 의견을 내는 자는 멀리하거나, 죽이거나 하게끔 되어 버렸다” 라고.
또 이것에 관련하여 “젊은 시절에 지도자의 입장이 되면 노인의 의견을 소중히 해야 한다. 반대로 노인이 되어서 지도자가 됐을 때는 반드시 젊은이의 의견을 들어가야 한다” 라고도 말씀하셨다. 정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삼국지>를 통해서 몇 가지의 소감을 이야기했다. 앞으로 제군의 활약과 성장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지도로 대신 하기로 한다.
(1987년1월)
(1987년1월) 삼국지를 통해 배우는 인물론과 지도자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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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배웁니다
노고많은님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