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도 6월이면 '여름철 휴가'로 들뜨기 시작한다. 해외 휴양지 정보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국내외 여행 등 휴가 계획을 거의 마무리하고 출발 날짜를 기다린다. '전쟁 중에 무슨 한가하게 해외 여름휴가?'라고 할 지도 모르겠으나, 우크라이나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선 전쟁을 체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특히 수도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중산층이 몰려사는 대도시들이 그렇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COVID 19) 팬데믹(대유행)이 끝나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5개월째 이어지면서 러시아인들의 휴가 트렌드는 많이 바뀌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막혔던 해외여행의 욕구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우리나라와는 반대다. 해외여행이 국내여행으로 바뀌고, 국내 여행지도 다양해졌으며, 해외 휴가 1순위였던 튀르키예(터키)에 대한 선호도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사진출처:픽사베이.com
매년 러시아인들의 여름 휴가 계획을 묻는 조사 결과를 이맘 때(5월 말~6월 초) 발표하는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브치옴'에 따르면 러시아인 대다수는 올 여름휴가를 집(51%)과 다차(주말별장, 29%)에서 보낼 것이라고 밝혔다. 집과 다차를 합치면 80%에 이르지만, 그나마 코로나 팬데믹 시절과 비교하면 크게 낮아진 것이다. 코로나19 첫해인 2020년에 비하면 '집에 머물겠다'는 응답이 10%포인트(p)가 줄었고, '다차로 가겠다'는 사람도 지난해에 비해 10%p가 줄었다.
반면 해외여행은 코로나 시절인 지난 2021년에 비해 오히려 절반 이상(5%p)이 준 4%에 불과했다. 국내여행은 15%로, 200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2019년(9%)부터 팬데믹을 거치면서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휴가철 여행을 꺼려하는 이유는 경제적 문제(38%)와 건강(14%)으로, 절반은 넘었다. '브치옴'도 여행을 선택한 응답자들의 올해 휴가비용은 지난해보다 20%나 늘어났다(45,089 루블, 약 68만원)고 지적했다. 역대 최고치다.
브치옴의 2023년 러시아 휴가 계획 여론조사/캡처
올해 해외여행 계획이 줄어든 것도 역시 경제적 부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겨울이 긴 환경적 요인으로 러시아인들은 남쪽으로의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이 늘 존재한다. 선호도가 가장 높은 곳은 터키와 이집트다. 그러나 터키의 주요 휴양지들이 코로나 사태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호텔 가격을 대폭 올린 게 러시아인들의 여행 욕구를 꺾은 것으로 분석됐다.
차르그라드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관광산업협회 유리 바르지킨(Юрий Барзыкин) 부회장은 13일 "여행 비용이 터키와 이집트 등 해외 여행을 나서는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라며 "현지 호텔비 인상 외에도 서방의 제재로 인해 러시아의 항공권 가격이 올라가고, 루블화마저 약세를 보이면서 해외 여행 비용이 크게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 결과, 국내 관광의 비중이 팬데믹 이전에 비해 10%p 이상 높아진 80%를 넘어섰다고 했다. 또 해외 여행지도 터키 일변도에서 아랍에미레이트(UAE)와 튀니지 등으로 넓어지고 있다고 바르주킨 부회장은 밝혔다.
주목할 것은 터키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이유다. 해외 피서지 뉴스가 거의 매일 '주요 뉴스'로 다뤄지는 러시아 포탈 얀덱스의 '젠(DZEN.ru)' 뉴스 사이트에는 터키의 호텔과 리조트, 해변, 현지 분위기 등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주를 이룬다. 휴양지의 바가지 요금과 현지인들의 불친절이 대표적이다.
터키의 유명 휴양지 안탈리아 해변/사진출처:위키피디아
러시아 매체 오늘의 경제 등에는 터키 여행자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넘쳐난다.
"누가 몰디브로 갈 돈으로 터키 흑해 해변에 갈까요? (러시아 흑해 연안인) 소치나 크림반도로 가는 것이 더 저렴하다."
“이전과는 다른 터키에서 돌아온 느낌이다. 가격이 터무니없다. 해변에서 남편과 시저 샐러드 2개와 알코올 칵테일 2잔을 주문하고 2,700 루블(약 4만1천원)을 냈다. 이게 정상이야?!"
"해변이 진짜 엉망이다. 청소를 아예 안한 것 같다.”
"나는 누구에게도 터키로 가라고 권하지 않겠다. 터키인들은 주요 관광객(러시아인)을 이런 식으로 대접했던 것을 후회할 것이다."
항공사와 여행사들은 매일 러시아 도시에서 터키로 출발하는 항공편 수를 대폭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바르지킨 부회장은 "올해 휴가 시즌이 시작되면서 터키 호텔들이 러시아 여행객을 홀대하기 시작했다"며 "앞으로 터키가 러시아인이 가장 좋아하는 해외 휴양지의 지위를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젠(dzen.ru) 뉴스 사이트 메인 페이지의 '관심있는' 코너. 5개 기사중 4개가 터키 관광 관련이다. 위는 구글 자동번역/캡처
또다른 인기 여행지인 이집트에서는 한 유명 해변에서 러시아인이 수영 중에 상어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TV채널 360에 따르면 이집트의 휴양지 후르가다의 드림 비치에서 지난 8일 러시아인이 상어에 물려 사망했고, 해변은 일시적으로(사흘간) 폐쇄됐다. 이집트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 러시아인에게 바다에 들어가지 말라는 건 '오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해변 폐쇄는 치명적이다.
상어에 희생되는 사고는 매년 전 세계적으로 약 60건 정도로 추정된다. 이집트에서도 1년전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연히 해변은 일시적으로 폐쇄됐다. 바르지킨 부회장은 "상어 출몰은 이집트 여행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러시아 피서객 유치에는) 특별한 예방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여행사 측은 “해변이 폐쇄되면 대형 수영장이나 바다에 대형 그물망의 울타리를 친 호텔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며 "상어 사고가 일어났지만, 여행 취소 요청은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국내 관광지는 흑해 휴양지에서 시베리아와 극동, 북부지역으로 다양화하고 있다. 여전히 크림반도(22%), 바이칼(호수)과 알타이(각각 14%), 크라스노다르와 상트페테르부르크(각각 11%)가 가장 원하는 휴양지이지만, 전쟁의 여파가 미치고 있는 크림반도는 2021년에 비해 7%p가 줄었고, 대신 소치와 같은 다른 흑해 휴양지가 10%로 올라섰다.
'브치옴'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3분의 1가량이 여전히 남쪽으로 휴가를 희망하지만, 시베리아와 우랄, 극동, 북부지역(아르항겔스크와 무르만스크)도 희망 여행지에 포함되는 등 선택지가 넓어지고 있다. 특히 모스크바 등 수도권 주민들은 흑해 연안(10%)이나 크림반도(5%)에 비해 상트페테르부르크(13%), 북카프카스의 스타브로폴(10%), 타타르스탄의 수도 카잔(9%)의 선택이 비교적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