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1 : 수리산 전투에 북한군이 참여 했다 ?, 그리고 경안리 일원의 U자형 함정의 비밀은?
1. 나의 소언
일본 육전사 연구 보급회에서 '72년도에 발행한 한국전쟁사를 육군 군사연구실에서 '86년도에 번역 출간한 한국전쟁에 나와 있는 내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미 일본은 한국전쟁에 관하여 한국, 미국, 중공, 북한의 공간사와 기타 많은 자료를 취합하여 전쟁사를 집필했다. 사실 우리는 그런 준비가 전혀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이 났고 그걸 기록에 남길 여유가 없었다고 봐야 하며 있는 것은 대부분 살아 남은 몇몇의 영웅담같은 전사엿고 , 지금도 그 후휴증이 남아있다고 봐야 한다. 솔직히 잘 싸웠는데 낙동강까지 밀려갔겠는가?
절대로 참전용사님들의 호국정신을 폄하하고픈 마음은 없다. 너무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지난 20여년을 현장에서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와 탐문활동을 하며 우리 당시 지휘관의 실태를 보면 소대장이나 중대장이나 대대장이나 연대장, 삳란장에 이르기까지 별 차이가 없다 나라를 잃어 준비없는 군대가 갑작스레 탄생하는 과정에 생겨난 아픔이다. 병사의 나이나 사단장의 나이가 비슷한 시기다.
그러니 뭘 기대하겠는가. 지금이야 고급 교육을 받고 준비된 계급이 있지만 그 당시는 그저 달았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인맥과 지연에 의해 많이 초창기 군 창설 관련자는 구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주요 직책의 많은 장군급이 북한지역에 해당되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6.25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는 절대 볼 수 없지만 어딘지 약간의 의문점은 남는 것은 어쩔수 없다. 굳이 창설 요원의 고향과 인맥관계는 밝히고 싶지않다.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다.
2. 북한군 공간사의 기록?(제7권 208p~)
수리산 방어는 미군의 자료에는 미군과 터키군이 한 것으로 되었고, 그 상대는 중공군이었다. 그러나 북한 공간사에는 본인들이 계획하여 방어작전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공군과 인민군 부대의 제4차 작전"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3회에 걸친 작전을 승리로 마감함으로서 동서해안선의 방어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방어전에 들어갈 계획을 수립했다.
이리하여 북한과 중공의 인민군 부대는 '51. 1. 8일 수원-여주-원주선에서 본격적인 방어로 전환하고 새로운 작전을 준비한다. 유엔군은 주타격 방향을 서부로 돌리고 200킬로미터에 걸친 전전선에서 이른바 "직선전술"로 돌출부를 만들지 않고 한 걸음씩 전진하면서 인민군의 대량 소모를 꾀했다. 유엔군은 대량의 포와 전차, 공군기와 함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유엔군의 게획을 간파하고 기동방어를 실시하면서 유리한 지역에서 가장 유리한 시기에 강력한 타격을 주어 병력과 전투장비를 대량으로 소멸시킬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1951. 1. 25일 제4차작전이 시작되었다.
1951. 1. 27일,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수원-여주의 68km의 정면에서 공격을 해왔다. 2월 3일 수원 북방의 수리산-이호리(여주동측)까지 진출하였다.
수리산과 그 동쪽 일대에서 우리 북한과 중공 인민군 부대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유엔군은 수시로 배치를 변경하며 수십대의 전차를 선두로 수리산 일대의 인민군 진지를 연속적으로 돌파해 왔으며, 수리산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은 인민군 부대는 동쪽의 중공군 부대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방어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인민군 제82연대 장병들은 우세한 유엔군에 대하여 유감없는 전투력을 발휘했다. 배윤성이 지휘하는 대대의 제1중대는 2월 3일 11회에 걸친 유엔군의 돌격을 저지하다 결국 돌파당했다. 당시 중대의 노동당 세포위원장인 신천균의 격려로 12명의 노동당원과 민청원이 참가한 돌격대가 진지를 탈환하였다.
이 대대는 3일간 42회의 유엔군의 돌격을 격퇴하고 수리산을 고수하였으며 이 방어기간중 수십명의 민청원과 모범적 군인이 그 공적으로 전선입당(공산당원의 자격)의 영예를 얻었다.
이 수리산 일대에서의 10여일간에 걸친 방어전투에서 인민군은 4,500명의 유엔군을 살상 또는 포로로 하였고 20여대의 전차와 21대의 비행기를 격파 또는 격추하였다.
수리산과 그 동쪽 지역의 공산군은 2월 8일 본격적으로 한강 북안지역의 방어로 전환하여 김량장리와 여주지역의 인민군은 2월 11일 격안리, 이호리 북쪽 지역으로 철수했다.
3. 중공군의 항미원조전쟁사 제2권에 나와 있는 전사기록이다.(336p~ )
결론부터 말하면 중공군 전사에는 김량량리-신갈 151고지선에서 터키군의 용맹성을 과시한 전투나, 미 제25사단과 터키군이 합동작전을 펼친 수리산 전투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마찬가지로 쌍터널 전투도 그렇다.
수원에 있는 칠보산 전투에 대해 언급이 있는 반면 우리는 칠보산 언급이 또한 없다. 무엇이 진실인가?
제12장(336p) 제4차 전역 제1단계 작전에 보면 1951년 1월 15일 유엔군이 "울프 하운드"라고 명칭을 붙이고 탐색성 공격을 시작하였다. 평택.안상. 천안 지구에 있는 미 제25사단, 제3사단, 한국군 제1사단과 터키여단을 대대, 중대규모 병력으로 차량에 탑승하여 항공기, 전차의 엄호를 받아 낮에는 전진하고, 밤에는 집결하여 움직이면서 교란하는 전술로 지원군 제50군 전초진지인 발안자. 오산리, 김량장리, 양지리선을 향해 탐색성 공격을 하였다. 15일부터 23일까지 미 제25사단은 평택에서 3차례 오산리로 진출하여 지원군 제50군 제148사단 전초진지를 공격하고, 미 제3사단과 한국군 제1사단은 안성에서 김량장리로 4차례진출하여 지원군 제50군 제150사단 전초진지를 공격하였다. 장호원 일대의 미 제24사단, 기병제1사단, 한국군 제6사단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대 등이 1월 18일부터 지원군 제38군 제112사단 전초진지인 이천 지구를 향해 , 18일부터 21일까지 미 제24사단은 이천ㅇ로 3차례 진출하였다. 24일, 미 기병1사단 1개 연댄ㄴ 이천을 점령한 후 계속 이천 북쪽을 향해 교란하고, 22일 미 제2사단은 1개 연대로 원주방향으로 교란하였다고 기록한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제50군과 제38군 제112사단은 적을 적극적으로 적을 타격하였다. 제50군 제1150사단 제449연대 1개 대대는 18일 밤 김량장을 습격하고 미 제3사단 수색중대 50명을 섬멸하여 지원군사령부 표창을 받았으며, 제112사단도 4차례 야습을 한 바 있다고 기록한다.
1월 25일까지 유엔군은 오목천리(수원서쪽), 수원, 김량장리, 양지리, 이천 일선을 점령하였다고 기록 한다
리지웨이는 미 제8군을 정리하고 탐색성 공격을 한 후 마침내 1월 25일부터 전 지상부대 16개 사단, 3개 여단과 1개 공수연대로 "썬더볼트 작전"을 계획하여, 미 . 영군을 주력으로 서부전선에 중점을 두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전선을 수원, 이천, 여주 일선에서 한강 일선으로 추진하는데 목적을 두고, 동시에 중.동부 전선에서는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2개 군단이 양평, 횡성, 강릉 일선으로 추진시키고 이를 방어하기로 계획하였다고 한다.
※ 우리 전사보다 일목요연하게 기록된 당시의 유엔군과 국군의 각 군단별 배치계획은 다음과 같다
[미 제1군단 : 3개 사단과 2개 여단을 지휘하고, 터키여단, 미 제25사단, 미 제3사단, 영 제29여단을 제1제대로 하여 야목리, 수원, 김량장리의 30km지역에 전개하여 서울방향으로돌격을 하고, 국군 제1사단은 오산리이남 지구에 위치하여 예비대가 된다
미 제9군단 : 3개 사단, 1개 여단을 지휘하고, 미 제1기병사단, 영 제27여단, 미 제24삳ㄴ을 제1제대로 김량장리 동쪽에서 여주까지의 38km 지역에 전개하고, 한강이북 예봉산 방향으로 돌격하고, 한국군 제6사단은 장호원리에 위치하여 에비대가 된다.
미 제10군단 : 4개 사단과 1개 공수연대를 지휘하고, 미 제2사단, 궁수 187연대, 한국군 제8, 5사단을 제1제대로 횡성, 양덕원리, 청평천 방향으로 돌격하고 미 제7사단은 제천에서 예비대가 된다.
한국군 제3군단 : 2개 사단을 지휘하고, 국군 제7사단을 제1제대로 조동리에서 정선 동쪽의 북동리까지 30km 지역에 전개하여 하진부리, 현리 방향으로 돌격하고 제3사단은 춘양에서 예비대가 된다.
한국군 제1군단 : 2개 사단을 지휘하고 제9사단과 수도사단을 북동리에서 옥계까지의 30km 지역에 일선으로 전개하고 동해안을 따라 북쪽을 향해 공격과 배합한다.
미 제1해병사단은 의성지역에, 국군 제11사단은 대전지역에 위치하여 미 제8군의 예비대가 된다.]
이와같은 유엔군과 국군의 재반격계획(썬더볼트)에 대응하여 현재 수원에서 동쪽 원주까지 지원군 제50군, 제38군 112사단, 제42군 125사단과 인민군 제5군단과 더불어, 2월 6일까지 모든 보충을 받을 것이며, 2월 6일까지 기다리면 아주 불리하다.
따라서 제38군의 주력은 1일 저녁 먼저 한강을 건너 경안리, 용두리 북쪽과 동쪽지역에 집결하여 이천 방향으로 출동할 준비를 한다.
제42군 주력도 1일 저녁 먼저 출발하여 용두리, 지평리 지구에 집결하여 문막리와 동남지구를 향해 출동할 준비를 한다.
제5군단은 횡성, 학곡리, 거리평(횡성 동쪽) 지구에서 신림리 방향ㅇ로 출동할 준비를 한다.
제2군단은 상안홍리, 운교리(원주 동북)이남 지궁에 집결하여 제천방향으로 출동할 준비를 한다.
의외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제1군단 제17전차사단을 한강 북안으로 추진시키고 주력은 면목리 일대에, 각 1개 연대는 독도, 한강리 지구에 위치하도록 하고 2~3개 중대를 한강 남안으로 보내 교두보 진지를 구축하도록 하였다.(345p)
특히 한강남안 고수방어작전을 위해(345p~355p)서는 다음과 같이 대비 하였다.
1951. 1월 25일부터 시작하여 유엔군은 미군 5개 사단, 영군 1개 여단,한국군 2개 사단 등의 부대를 집중하여 연대, 대대 단위로 항공기, 전차, 대포 지원을 받아 서족 수원에서부터 동족 원주에 이르는 선까지 여러 방향으로나누어 지원군 제50군, 제38군 112사단, 제42군 125사단과 인민군 제5군단 진지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1월 27일, 칠보산 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제50군 제442연대 제4중대는 5개 방향에서 공격하는 미군 700여 명과 전차 20여 대, 항공기 30여 대의 공격을 받아 적 약 200명을 살상하고 전 중대원이 진지에서 죽거나 부상했다.
제443연대 제7중대는 29일 곡사리 진지에서 미군 1개 대대 도는 중대의 공격을 8차레 무리치고 200여 명을 살상했다.
제444연대 제8중대는 29일, 속달리진지에서 미군 1개 대대의 공격을 4회 물리치고 167명을 살상하였다.
제447연대는 30일, 동원리 진지에서 전차 80여 대, 항공기 20여 대와 배합하여 공격하는 3,000여 명을 4차례 물리쳤다.
30일 저녁, 제50군은 제148, 제149 양개 사단으로 총 2개 대대 4개 중대를 조직하여 미군에게 돌파당한 모든 진지를 회복하였다. 제149사단은 28일부터 31일까지 미군의 공격을 연속 저지하고 700명을 살상하고 진지를 고수하였다. 제38군 제112사단은 부대 사상자로 인한 감원이 비굑적 많은 상태에서도 미 기병 제1사단 등의 1개 연대 내지 1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진지를 고수하였다. 제42군 제125사단 1개 연대는 29일, 미 제24사단 300명의 공격을 격퇴하고, 그 대부분을 섬멸하엿다. 인민군 제5군단은 28일 원주 동북에 도착한 미 제2사단 1개 소대를 전멸시켰다.
2월 3일,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수리사남산, 군포장, 광교산, 문형리, 발리봉, 천덕봉, 이포리 일선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때 상기 각 중공군 부대는 제50군이 작전을 할 수 있는 부대는 1개 연대와 또 다란 2개 연대 및 4개 중대뿐이였다. 제112사 병력도 반으로 감원되었다. 한강 남안의 진지를 확보 유지하고, 유엔군의 주요 공굑집단을 계속 견제하고, 지원군 주력이 동부전선에 집결하여 반격을 할 수 있도록 팽덕회는 제50군의 방어정면을 축소하고, 종심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2월 4일 13시 반, 인민군제1군단으로 하여금 제50군이 방어하고 있던 남태령, 과천, 군포장 일선 서쪽의14KM 정면을 교대하도록 하고 5일 저녁 교대 완료 하였다.
동시에 제38군 주력은 한강 남안에 도착하여 한강 남북 양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제112사단의 방어를 강화해 주고, 제50군이 명렬히 공격을 받으면 소부대를 보내 측방으로 공격하여 제50군의 압력을 경감해 주도록 하였다.
※비교적 상세한 미 제9군단 지역, 무갑산-양자산-세월리 지역의 중공군 전투모습
서부전선 유엔군은 지원군의 한강이남 제1선 진지를 저령한 후 3일부터 미 제25사단,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은 지원군 제50군과 인민군 제1군단 진지를 맹렬하게 고역하였다. 4일, 5일의 전투는 더욱 격렬하여 전차 100 내지 200여 대, 항공기 수십 내지 100여 대를 집중하여 윤번공격을 하였고 지원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여 탄약이 떨어지면 육박전을 전개하고 5일 저녁, 축차적으로 후방을 향해 한시적 이동을 하였다. 이와 동시에 미 기병제1사단과 미 제24사단도 지원군 제38군 진지를 향해 맹공하였다. 2월 4일, 제113사단은 세월리, 중산리에서 미 제24사단 1개 연대의 공격을 궤멸시키고 300여 명을 살상 또는 포로로 하였다. 그날 저녁, 제112사단이 반격을 하여적 300여 명을 섬멸하였다. 지원군의 양개 사단은 25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많은 중대가 탄약이 고갈되어 방어할 수가 없었다. 2월 7일까지 지원군은 한강 이남의 내비산(안양) , 문형산, 무갑산, 국주봉(?,관산) 일대에서 유엔군을 저지하였다.
이때 한강이 해동하기 시작했다. 인민군 제1군단, 지원군 제50군의제2선 방어 지대가 돌파되고, 한강 남안의 방어폭도 축소되었다. 지원군 사령부는 지언군 제50군과 인민군 제1군단 주력을 6일 저녁 강북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강남에 일부를남기도, 거점 상에 위치하여 적의 공격을 차례로 저지하고 지체시킨다. 2월 7일 저녁 인민군 제1군단은 4개 대대, 지원군 제50군은 1개 연대와 1개 대대 병력을 남겨 한강 남안 교두보진지를 통제하고, 주력은 한강 북한으로 철수하여 방어한다. 제38군은 명령대로 한강 남안에 남아 원래의 진지를 고수하고, 동부전선 지원군 주력의 횡성 지구를 향한 집결을 엄호하고, 동부전선 부대의 측익 안전을 보장한다.
지원군 제50군과 인민군 제1군단 주력이 한강 이북으로 철수한 후 2월 8일부터 미 제1군단은 한가을 향해 적극 다가서고, 2월 10일, 미 제25사단은 인천항과 김포공항을 점령하였다. 미 제9군단은 미 제24사단, 미 기병 제1사단, 영 제27여단, 그리스 대대와 한국군 제6사단 등이 부대를 집중하고 제38군 진지를 윤번으로 맹공하여 지원군이 밤새 구축한 진지를 겨우 1시간 만에무너버렸다. 제38군 부대는 "사람이 있는 한 진지가 있고, 진지와 생사를 같이 한다"는 맹세를 하고 쓰러지며 상번천리, 회덕리,격안리, 무갑산, 장심리, 남치현, 외두릉리 일선을 고수하였다.
경안리 350고지에서는 연속 7주야를 전투하고 중대가 겨우 4사람만 남았으며 , 제38군은 한강 남안 진지를 17주야 동안이나 고수하고 2월 16일과 18일 계획에 다라 서부전선 한강 남안의 지원군과 인민군 부대가 전부 한강 북안으로 철수하였ㄷ고 기록하고 지원군 제38군, 제50군과 인민군 제1군단의 장병들은 23일 동안 유엔군과 국군을 1만 여명 섬멸하였다고 기록한다.
4. 내용의 분석
당시 인천-김포지역에 북한군 제1군단 예하 부대들이 방어임무를 수행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북한군 자료는 맞지않는다. 실제 수리산 반월저수지에서 좌측으로 광명에 이르는 구간에 동란(1.4후퇴)시 북한군을 보았다는 제보자는 못 만나 보았다.
그러나 중공군이 단독으로 전투를 했다기 보다는 지역을 알고 있는 북한군이 일부 함께하여 전투를 지원했다고는 보여진다.
미군의 전사는 수리산 탈환이후에도 미 제25사단이 한강변으로 계속 진출하고 후속하는 터키군에게 넘겨주곤 했는데 2월 8일까지의 기록이 다 중공군이다. 1번국도를 따라 서쪽지역의 시흥 목감의 운흥산이나 박달산 등에서도 중공군과 전투였다.
더구나 미 제25사단은 계속 국도변을 따라 바로 좌측에 터키군과 바레트 특수임무부대가, 그 좌측에 미 제24연대가 진출하고 1번국도를 따라서는 돌빈특수임무부대가 공격을 계속하여, 광명의 도덕산은 바레트부대가 탈취하고 이어서 10일에는 제35연대가 영등포를, 제24연대가 김포를 탈환하여 한강선 진출을 마무리한다. 그 우측에 관악산을 국 제15연대가. 3번국도를 따라 광교산-청계산으로는 미 제3사단이 진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북한군의 공산당원과 민청원의 실체를 잘 알고 우리의 사상무장에 참고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북한군의 자료에 특이한 것은 그들은 전투지역에 노동당원과 민청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들은 군인만이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고 공산당원이 지배하고 있으며 민청원이 있다는 것은 전투지역 주변에서 자발적이든 강제든 많은 공산분자들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행, 한국전쟁사 제8권의 관련 부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 220~222페이지에 나와 있는 공산군 전투편성상에 서부지역 작전지역은 북한군은 제1군단(제8.17.19.47사), 중공군은 제50군(148.149.150사)으로 되어 있다.
북한군은 제1군단이 인천-영등포 지구에, 제2군단(2.7.27.31사)이 횡성지구에, 제5군단(6.7.10.12.43사)이 홍천-횡성간에 1월 12~14일까지 집결하여 휴식과 부대정비에 들어간다.
반면 중공군은 제50군은 제150사단이 수원-김량장리에 이르는 도로 북쪽에 경계를 담당하고 , 주력이 서울-수원간에 위치하였다. 제38군은 제112사단이 광주 경안리지역의 경계를 담당하고 주력은 금곡리와 사릉리지역에, 제39군은 문산지구에, 제40군은 의정부,동두천, 영평 지구에, 제42군은 제125사단이 양덕원리 서북쪽에 위치하고 주력은 가평 지구에, 제66군이 김화지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한다.
두번째 : 235쪽의 용인전투 분분에 터키군이 1월 25일부터 27일어간에 김량장리와 신갈의 151고지 전투간 474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51. 7. 6일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했다고 기록한다
240쪽의 수리산 전투는 미 제2사단 예하 ㅈ35연대와 텈여단이 1월 31일부터 2월6일까지 중공군 150사단하고 공방전을 펴쳤다고 기록한다. 북한군이 말하는 북자는 한글자도 없이 중공군이다.
245쪽의 모락산-관악산 전투는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당시 미 제25사단에 배속됨) 서울 재탈환을 위한 교두보 확보를 위해 1월 31일부터 2월 9일까지 중공군과 격전을 벌인 전투라고 기록하다. 247쪽의 상황도엔 명확하게 중공군 150사단이 나와 있다. 그러나 250쪽의 상항도에 관악산 전투에 적군이 49사단이라고 나온다. 이것이 단지 제50군 에하의 149사단의 오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이유는 248쪽 하단부에서 249쪽 상단부에 나와 있는 내용에 보면 2월 4일 국군 제15연대가 모락산을 탈환하고, 미 제35연대가 2월 6일 수리산을 탈환한 이후 미 제1군단은 알렌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미 제25사단의 전방 진지를 돌파하여 한강으로 진출, 인천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고 김포공항 서쪽의 적을 공격하도록 하고, 그 우전방 미 제3사단이 검단산과 청계산을 경유하여 한강까지 진출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공산군은 서부전선을 담당한 중공군 제50군과 북한군 제1군단 주력이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고 일부 병력만 한강 이남에 배치하였다. 2월 5일 팽덕회의 명령에 따라 중공군 제50군 주력과 북한군 제1군단 주력이 2월 6일 저녁 강북을 향해 이동을 시작하였고, 북한군 제1군단의 4개 대대, 중공군 제50군의 1개 연대와 1개 대대 병력이 한강 남안의 교두보 진지를 통제하면서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공산군은 2월 6일을 기해 주력을 한강 이북으로 철수시키고, 일부 병력만을 한강 남안에 배치하여 유엔군의 진출을 지연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관악산을 중심으로 적은 방어거점을 강화하고자 인천에 대기 중인 북한군 제17사단 예하 병력을 이 지역으로 증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국군 제15연대의 관악산 전투는 2월 9일 08시를 기해 시작하여 10일 11시 30분경에 노량진-영등포로 이어지는 한강선에 진출하게 된다.
여기서 당시 제15연대 3중대소속으로 모락산 전투와 관악산 전투, 그리고 서울 재탈환 전투에 직접 참여한 고, 황대형 참전용사님의 증언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용사님이 남겨준 증언에 의하면 "중간 중간 중공군과 교전을 하면서 2월 초순 관악산을 점령하고 동작동 현충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중공군과 북한군의 무수한 시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체들은 모두 꽁꽁 얼어 있었는데 특이한 것이 북한군의 시체는 대부분 엎드려 있지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똑바로 누워서 있었다는 점과 중공군은 대부분 웅크린 채 죽어 있는데 시체의 방한복 상의는 누가 벗겨 갔는지 몰라도 상의를 제대로 입고 있는 시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일부는 하의가 벗겨있는 시체도 더러 있었다"라고 증언하셨다.
"혹시 지역 민청원들이 북한군 통제로 중공군 격전지에서 함께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런 의문을 가져보았다. 터키군의 김량장리나 신갈 151고지 전투, 모락산 잔투, 수리산이나 관악산 전투에 혹시라도 지역에서 동원된 민청원이 일부 북한군의 통제에 따라 중공군과 함께하다 죽은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떻게 그리 많은 인원이 죽었는데 아군은 고사하고 적군 시체조차 별로 발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미스테리다. 아마 지역 주민중 연고자 되는 분들이 일부 찾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은 지우기 어려웠다.
"북한군의 주장대로 그렇게 엄청난 인명피해가 난 것인지 의문?"
"이 수리산 일대에서의 10여일간에 걸친 방어전투에서 인민군은 4,500명의 유엔군을 살상 또는 포로로 하였고 20여대의 전차와 21대의 비행기를 격파 또는 격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군측의 자료에는 전장에서 확인된 시체만도 중공군이 4,251명이나 되었고 이에 반해 미군의 피해는 11일간의 전투에서 전사 70명, 부상 220명에 불과했다고 기록한다.
과제 2 : 미 제9군단(기병 1사, 미 24사(국 제6-19연대 배속))의 경안리~양평 남한강 서안까지 진출 작전은?
이 과제를 언급한 것은 우리가 유해를 곤지암리 북방 상열미리 국수봉, 무갑산-관산-앵자봉-양자산 일원에서 15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발굴한 근거는 우리의 제19연대가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어 이곳 전투에 참가했다는 자료에 근거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곳 전투에 대해 별로 언급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사 중편 380페이지 하단부에
미 제1군단의 우익에서 공격을 개시한 미 제9군단은 26일 제8기병연대가 제1통제선의 양지리 부근에서 예상 외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28명이 전사하고, 141명이 부상자가 발생하자 제5기병연대가 초월 공격하여 양지리 부근에서 적 300여 명을 사살하고 17번 도로를 따라 진출하고 제2통제선에 도달할 무렵 미 제24사단을 군단의 우전방으로 투입하여 31일 이천북쪽의 제2통제선을 조금 지났다는 것.
그리고 한국전쟁 중편 386페이지에
미 제1군단의 우인접 지역에서 공격중인 미 제9군단은 2월에 저어들어 군단정면의 적정이 경미하여 2월 8일까지 무난히 한강변으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남한산과 양자산으로 연결된 산악지대로 접근하면서 도로망이 결핍되어 전차의 기동에 제한으로 전차의 기동이 제한을 받음으로서 공격부대의 진출이 매우 완만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기상악화로 항공지원마저 제한되어 공격이 돈좌되었다. 군단은 2월 5일,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를 미 제24사단에 배속시켜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9일부터 10일 사이에 실시된 전투에서 이 지역이 강력한 교두보임이 확인되었다.
교두보지역은 서쪽의 경안리에서 동쪽으로 양평에 이르는 24KM로, 한강에서 남쪽으로 6~10KM 불거져 나온 U자형 지형이였다. 교두보 전방에는 남한산과 양자산 외에도 태화산, 천덕봉 등 수개의 감제고지가 있었다.
결국 유엔군의 한강 진출작전은 인천-서울-양평 선을 목표로 하였으나 , 남한산양자산을 연하는 적의 교두보를 남갸 둔채 일단 종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유해발굴 결과와 너무 상이한 기록이다. 양지리는 지금 아시아나 C . C 가 있는 곳으로 추곡리의 태화산(641M)를 깃점으로 동북방으로는 612-314고지로 이어져 곤지암에 이고, 서북방향으로는 475-정광산562-노고봉579-발이봉511-백마산461-경안리 칠사산364 로, 백마봉에서 동북방향으로 곤지암천을 건너 바로 무갑산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양지리 일대의 집중적인 탐사와 탐문을 해 본 결과 근어리 종격실 능선에 중공군이 엄청 죽었다는 이야기는 지역 주민 여럿이 하여 실제 함께 탐사도 하여 많은 개인호를 식별도 했다. 대대라 지역에서는 충혼비도 있고 미군이 전차를 이용하여 공격을 하고 바로 철수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많았지만 미군은 유해를 다 찾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태화산에는 별로 전투가 없었다고 하며 우리는 특별한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태화산 자락 우측에서 98번도로를 이용하면 곤지암에서 도척-용인에 이르는 양호한 기동로가 있다. 바로 이도로는 최초전투시 국군 제19연대가 철수과정에 광주 경안에서 3번도로를 따라 일부는 곤지암에서 이천으로, 일부는 곤지암에서 용으로 내려갔다.
한편 3번도로를 다라 내려가면 곤지암에서 이천이 나오게 된다. 바로 신촌리에서 동북으러 정개산433M-원적봉589M-천덕봉632M-여주 대령봉419M를 지나 남한강변 세월리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유해가 발굴된 곳은 용인 포곡읍과 동백동의 법화산과 동백리 향린촌 위 고지 백련사 능선과 마성터널 위 석성산 북쪽 끝자락에서 80여구를, 도척면에서 2구, 곤지암 위 상열미리 위 무갑산-멀미재 등에서 150여구, 광주시 상하번천리 일대에서 30여 구, 정개산과 천덕봉 일대에서 10여구를 발굴했다.
수리산이나 도덕산 303고지등 1번국도변이나 3번국도 변의 광교산이나 관악산,은 사실 몇 구도 없었고, 모락산에서 30여구 발굴했다. 그런데 전사는 이곳에 치중하여 쓰여 있고 이곳 곤지암 일대의 무갑산-양자산 선의 기록은 사실 없는 편이다.
"왜 미 제9군단의 곤지암 일대 전투 기록은 미비할까?"
내가 처음 이곳을 발굴하게 된 계기가 있다. 바로 2000년도 어느날 휴일에 나는 가족을 태우고 곤지암을 찾았다. 이유는 국군 제19연대의 행적을 추적해 보고 싶어서 였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곤지암 면사무인지 읍사무소인지 바로 옆에 있는 경로당에 갔다.
처음에야 무슨 부부간첩이온 줄 알고 머뭇거리던 분들이 시가니 경과하면서 나에게 동화되어 전쟁이야기를 쏟아내는데 상열미리 지역에 국군과 미군이 수없이 죽었다고 한다.
"어르신 나이가 얼마일 때 보셨나요?"
"내가 그 때 12살이었지. 부모님들은 피난을 천안으로 가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남아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파놓은 방공호에서 주로 숨어 있었지요"
"그런데 어떻게 시신은 보셨느지요?"
"거 있잖아요, 강가에서 모래 실고 다니는 트럭보면 옆으로 물이 쫘악 흐르잖아. 그런 모습이야"
"도락구(트럭, 일본식)가 우리 지 앞으로 수십대는 들락거렸을거요. 아휴 말 말아요. 피가 동네 길에 가득해!"
"그럼 혹시 누가 실고 다니는지 기억나시나요?"
"뭐라 하나 들것에 들고 다니는 사람, 몇이서 끌고 나오는 사람, 구군도 있고 미군도 있고 무슨 노무자도 많았지"
그래서 나는 가족과 이 어르시늘 모시고 살고 있다는 상열미리에 가서 또 다른 지역주민도 만나고 해서 발굴지역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여 무려 10여년의 조사끝에 '09년부터 발굴작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사에 보면 310~311페이지(제8권)에 킬러작전(2. 21~ 3. 4)간 미 제1군단의 제25사단이 무갑산 일대를 방어 중이었고, 미 제9군단의 미 제24사단은 중공군의 한강교두보 남쪽과 남동쪽을 방어하고, 미 제1기병사단이 남한강 동쪽의 하진 일대, 영 제27여단이 주암리, 국군 제6사단(-)이 판대리에 방어 편성중이였다고 기록한다. 지평리 전투에 참가했던 미 제2사단은 미 제10군단의좌익으로 원주 서쪽 섬강에 방어편성 중이였다.
일본측 한국전쟁 7권 206~207페에지에 보면 남한산교두보편에 미 제25사단은 공격이 에정대로 진전이 되었으나 우측인 미 제3사단 정면과 이천에서 북상중인 미 제1기병사단의 공격은 쉽게 진전되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미 제3사단은 한국 제15연대의 도움으로 광교산과 청계산을 탈취하였으나 경안리 정면은 쉽사리 돌파할 수 없었다. 미 제1기병사단도 경안리 동쪽 공격도 교묘한 박격포 사격과 거듭되는 역습으로 조금도 진척도지 못햇다. 미 제9군단은 이 공격에 미 제24사단을 투입했으나 역시 진전은 없었다.
후에 판명된 바로는 한강 남안에 남아 있는 정면 40km의 진지에 중공군 제38군을 기간으로 하는 약 4만명의 대군이 한 달에 걸쳐 산악지대에 구축한 동굴이나 엄체호 진지를 거점으로 포진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경부국도정면에서의 화력전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고 이 험한 산악지대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한다.
이르 통해 종산군은 최종목표가 한간이나 38선 확보가 아니라 부산공략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고 평가 했다.
결론적으로 이곳 양지리 북방(태화산 북쪽)의 무갑산~양자산 선에서의 전투는 제대로 기록이 미비한 가운데 중공군의 항미원조전쟁사에는 언급한대로 그래도 상세히 제38군이 동측에서 벌어질 횡성포위공격을 보장하기 위해 강력하게 저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발굴한 유해는 37도선 상에서는 가장 많이 발굴 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과제 3 : 지평리 전투와 쌍터널 전투의 망미산은 어딘가, 그리고 쌍터널 전투의 진실은?
지평리 월산저수지
모리치고개
323m
추읍산 고길고개 배미산 석불역 중간담
396 망미리
주읍리 옥현리
망미터널
매봉산
곡수리
'51. 1.4 후퇴 이후에 유엔군은 바로 위력수색(울프하운드 작전)에 이어 좀더 강력한 위력수색작전인 썬더볼트작전으로 전환하였다. '51. 1. 15~ 2. 10일까지 실시된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은 서부. 중서부지역의 위력수색작전, 용인전투, 수리산 전투, 모락산-관악산 전투와 중동부지역의 제2전선 차단작전인 문경의 적성리 전투, 남대리와 영월 부근 전투, 홍천 포위 공격 등이 그것이다.
먼저 수색정찰간 쌍터널 전투부터 알아본다
여기서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한강 진출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주력부대들은 1월 중순 적 제2전선부대릐 침투로 제천-영월 이남지역에 형성된 돌파구내의 북한군을 격파하고 원주-평창선으로 진출 중에 있었다. 이때 미 제10군단 예하의 미 제2사단은 한강진출작전의 동측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여주-원주를 연하는 선을 점령하고 일부부대로써 지평리까지 수색정찰를 실시 하였다.
우리측 전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 제2사단과 미 제24단의 합동 정찰대는 1월 29일 중공군의 보급품을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지평리 부근의쌍터널을 목표로 정찰을 실시하였다. 이때 중공군 제42군 제125사단은 터널을 내려다볼 수 이쓴 감제고지에서 정찰대를 지켜본 뒤 퇴로를 차단하고 기습공격을 가하였다. 정찰대는 항공폭격과 미 제23연대 제3대대와 프랑스 대대의 증원으로 구출되긴 했으나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2월 1일 철수했던 적이 2개 연대를 투입하여 반격을 재개함으로써 쌍방은 쌍터널 부근에서 하루종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친 끝에 적은 아군의 포격과 항공 폭격에 큰 피해를 입고 북쪽으로 철수하였다라고 기록한다(한국전쟁 중원 387페이지, 6.25전쟁사 8권 267페이지)
그렇다면 일본의 한국전쟁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제7권 211~226p)
1월 27일 오후, 미 제1군단이 수원 북방의 선을 공격하고 있을 무렵,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에게 쌍터널의 정차릉ㄹ 명했다. 이날 오후 제23연대 C중대의 미첼소대는 차륜수색대를 편성하여 이 터널을 수색하였으나 중공군은 없었다.
그러나 28일 오후, 항공 정찰기가 쌍터널 부근에서 집결중인 부대가 보인다고 보고함으로서 29일 06시에, 여러 부대에서 차출된 인원과 원 미첼소대원 30명(원래 60명이었으나 제대로 편성못함)으로한 수색대를 편성하여 무기운반차 2대와 9대의 짚차에 분승하여 여주 이호리에서 11시 20분 출발하였다.
미첼 중위는 27일 정찰에서 특별한 것이 없었기에 안이한 생각으로 정찰에 임했다. 수색대는 터널에 임박하여 461고지(456?, 거래산 동북쪽)나 구둔역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채로 신촌(구둔역 밑)의 작은 냇가를 12시 15분에 건넜다. 동행한 스타이 대위는 신촌의 삼거리로부터 혼자서 구둔리역을 정찰하러 갔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되고 삼거리에 남겨둔 짚차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전원 살해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미첼은 건널목까지 도착하여 수색병을 터널로 보낸다. 이때 초왕리(지금 무왕2리 마을회관 북쪽) 북쪽 능선을 달려내려오는 15~20명의 중공군이 보였다.(※초왕리와 무촌리를 병합하여 일제시대에 무왕리로 표기 : 6.25전쟁 당시에 일본 지도로 전투) 미첼 부대가 사격을 하자 바로 박격포탄이 차륜을 에워사듯 낙하하였다. 이 당시에 바로 부대대장 엔젤 소령이 탑승한 연락기가 나라와 461고징[ 약 150명, 초왕리 남쪽 339고지에 약 50명의 중공군이 보인다고 통보했으나 무전기 상태가 안좋아 알아듣지 못하고 비행기는 연료부족으로 떠났다.
일본판 지도의 1951. 1. 29일 쌍터널 부근
봉미산
군내면(지금의 지평리)
망미산(지금의 배미산) 석불 322고지 초천리
396m (323m) 339고지
광양리 ◎쌍터널 초왕리 하동터널
전양현터널 (지금의 무왕리)
무촌 신촌
송현리 461고지(456?)
곡수리 고래산542m
"50밀리기관총에 기름을 제거하지않아 얼어붙고 후폭풍 위협으로 75밀리무반동총도 못쏘았다."
미첼부대도 상황이 어수선하여 철수를 결심하고 차량들을 돌리는데 461고지에서 달려오는 중공군이 목격되어 50미리 기관총으로 사격하려 했으나 총에 기름을 너무 칠하여 얼어붙어서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75밀리 무반동총을 쏠려고 해도 차량들이 엉켜있어 후폭풍으로 10여명이 날아가 판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적은 사리지고 포위가 되어갔다.
"터널 위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선착순에 미첼 부대가 이겼다?"
이에 미첼중위는 적이 보이지않는 동쪽 능선을 고려하여 하동터널 위로 올라가 기다리면 구원부대가 올 것으로 판단하고 부대원들을 터널위 고지로 오르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적도 오르고 있다.
그러나 산에 빨리 오르는 과정에 차에 있는 중화기는 무거워 추진하지 못하고 경기관총 2정과 3.5인치로켓포 및 자동소총만 가져갔고 그나마 신병 7명은 올라가지도 못하고 길 옆 도랑에 웅크리고 있다가 전원 사살 당했다. 따라서 고지에는 51명이 올라섰다.
" 철모를 쓰고 살아난 미첼부대, 방한복을 뒤집어 입은 인원도 설상복이 되어 살아났다"
고지에 오른 오후 내내 남쪽으로부터 5~6회나 적의 돌격이 되풀이 되었으나 적을 최근거리까지 끌어들여 사격하므로써 실탄을 절약하며 격퇴허였고, 몰래 북쪽으로 접근한 적병이 경기관총을 난사하여 7명을 부상시켯다. 이를 본 "리 중사"는 분연히 산을 달려 내려가 적의 경기관총에 접근하여 적병을 사살하였다. 나중에 확인결과 철모를 쓰고 있던 부대원들은 심한 충격을 받았지만 살아났다.
미 제23연대는 제2대대에 구출 명령을 내렸고 제2대대장은 즉시 F중대(타이렐 대위)에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수색부대의 불시의 사고에 대비한 준비가 되어있지않아 전차도 없이 3/4톤 8대와 짚차 13대에 나누어 타고 문막에서 461고지에 이르는 28km를 달려 17시 20분에 도착한다. 그리고 야간 공격으로 461고지를 공격하게 된다.
"다섯번째 부상이다"
한편 터널 위 고지에서는 전면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미첼 중위는 "부상을 당해도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리고 중공군의 야간 공격을 기다렸다. 밤이 되어 예상했던대로 박격포탄이 떨어지고 나팔을 불며 얼어붙은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아슨 중사 이하 4명"이 포복으로 능선에 올라 전방을 보니 적병이 올라오고 있었다. 4명은 사격을 하는 동시에 바로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라이슨 중사는 포복으로 미첼 중위에 기어와 머리 부상을 가리키며 "다섯번째 부상이다"라고 하였다. 모두가 철모를 쓰고 있어 철모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이지만 모두가 살았다고 한다.
"중공군은 계속 다가오고, 실탄은 바닥나고, 하지만 중공군은 같은 방법으로 열번이상 공격을 했다"
계속되는 중공군의 공격은 러첼부대원의 강력한 저항에 성공하지 못했고, 항공기를 이용한 보급작전도 이루어졌다. 구출부대인 타이렐 중대는 461고지를 점령한 후 터널 위 고지를 공격할 것인지 머뭇거리는 상황에 저 멀리 구둔리 쪽으로부터 3명의 미군이 나타났다. 진지를 탈출하여 내려오는 부상병이었다.
"수색대는 전멸했다. 중공군이 수백명 몰려와 수류탄을 투척했다. 탈출한 것은 우리 3명이고 생존자는 아무도 없다"
구출부대 타이렐부대는 그 말을 믿었다. 마침 터널위 고지는 조용했다. 따라서 소대에대한 야간 공격명령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신촌 서쪽 고지에서 화력지원을 준비하고 있던 제1소대장으로부터 진지로 찾아온 미군이 지금 고지를 확보하고 있고 본인은 위생병으로 구급약을 가지러 차량으로 간다는 보고였다.
타이렐 대위가 직접 그 병사를 만나 확인결과 30여 명이 지금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즉시 중대장은 구출작전을 위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항복하면 어떨까?라는 소리가 들려 5번이나 부상한 마아틴 상사가 "어느놈이 그런 소릴 하느냐?'
점점 터널위 고지는 비탄의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상당한 미첼 중위부터 중간간부진이 앞장서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솔선하여 적진으로 돌격하는 등의 강력한 의지로 버티고 있었다.
"GI! GI! t쏘지 말라"
드디어 미 제23연대 F중대가 진지에 도착했다. 1월 30일 어둠이 밝았다. 부상자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이 추위에 어둠 속에서 가파른 산을 내려가는 것은 무리다"라고 불평했으나, 들것으로 운반되는 중상자는 그저 감사하며" 내 발로 걸을 수 있어"라고 사양하기까지 하엿다 한다.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병사들 사이에도 죽음에 직면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는 이렇게 차이가 있단다.
이상의 전사사실에서 몇가지를 알아볼 수 있다.
첫째 : 일본 전사책에는 쌍터널 고지 전투에 구출 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프랑스 군대 언급이 없다.
물론 이것이 교범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보다 먼저 미군측이나 프랑스측 사료를 검증하여 서술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내용이 없다. 다만 2월의 지평리 전투에 대해서는 홍학지라는 중공군 부사령관의 회고록에 프랑수 대대 언급이 있다.
둘째 : 전투에서 철모를 착용하는 것의 중요성 인식, 병기 수입시 과도한 기름칠이 가져오는 격발불능(특히 동계) 제고다
셋째 : 미첼 중위와 예하 중간 간부들의 감투정신이다
부상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지휘하고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드는 라이슨 중사와 마아틴 상사같은 전투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넷째 : 망미산의 위치가 지금 지도와는 다르다. 전쟁 당시의 지도는 일본이 제작한 지도로 망미산이 지금의 배미산이다. 지금 망미산은 석불 우측 길건너 323고지가 망미산이다.
우리는 이곳 망미터널 주변에서 30여 구를 발굴했으며, 터널 위에서 제보에 의해 유해발굴을 하여 4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런데 직접 현장을 통제하며 발굴했는데 모습이 나폴랭옹하고 아주 두상이 같았다. 앞뒤가 튀아나온 모습으로 코카스스인처럼. 그래서 우리는 프랑스무관을 통해 이곳 전투에 희생자가 없는지 확인결과 지평리 전투에서 3며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장에 달려왔다. 그런데 수습하여 프랑스에 본내려는 도중에 어디서 막힌 것인지 아니면 아니라는 확인에서 인지 프랑스에서 인수해 가지 않았다.
과제 4 : 지평리전투 및 횡성 대재앙으로부터 국군 제6사단과 영 제27여단 , 미 제1기병의 위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