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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아빠의 꿈을 묻다
일흔 둘, 아빠의 하루는 새벽5시에 시작된다. 사과 한 알과 계란 프라이로 아침을 챙겨먹은 뒤, 톡톡 흑채 뿌리고, 쓱쓱 광대뼈에 썬크림을 바른다. 집을 나서기까지 덜거덕 소리 한 번 없이 모든 행동이 조심스럽다.
“엄마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아니가. (웃음) 아침잠이 많아서 깨우면 안돼. 낮에는 엄마가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잖아. 구름이(고양이) 똥 치우고 털 밀어야 되고, 아빠 작업복도 매일 줄 세워서 다려주고”
은퇴 후 아빠는 4년 째 자동차 공장 경비로 일하고 있다. 근무지까지 차로 50분. 교대시간 40분 전 도착을 위해 1시간 반 전에 출발한다. 퇴근은 다음날 아침 7시 30분. 24시간 교대 근무다. 출퇴근하는 임원들에게 경례하고, 방문객들 인적사항 작성해서 문 열어주고, 화재 위험이 없는지 순찰 하고, 기계 소리가 이상하면 담당자에게 연락하는데, 간단한건 직접 손보기도 한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직원들 발열 체크가 추가됐다.
“밤에 자는 시간이 있으니까 안 힘들어. 집에는 못가도 밤10시부터 아침6시까지 자는 시간이야. 기계 소리가 윙윙 시끄러우니까 예민한 사람들은 못자는데, 아빠는 잘자. 집처럼 편하지는 않지만 그만하면 잘 자는 편이야. 나이 들어서 육체적으로 힘든 거 빼고는 이제까지 했던 일 중에 제일 편해”
아빠는 스물다섯 살부터 공무원, 수의사, 회사원, 공인 중계사로 쉬지 않고 일했다. 휴일에는 아빠와 결혼하겠다는 유치원생인 나를 배 위에 올려놓고 재웠고, 초등학생인 내 손을 잡고 책방에 가서 만화책을 빌려줬다. 퇴근 후에는 고등학생인 내가 놀고 있던 독서실로 보온통에 담긴 죽을 배달했다. 공부는 잘 되냐, 아픈 데는 없냐, 무슨 일이 하고 싶냐, 꿈이 뭐냐 아빠는 가끔 물었고, 나는 기분 내키는 대로 조잘거렸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아빠가 하고 싶은 건 뭐였을까? 꿈은 뭘까?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아서 들은 적이 없는 그 이야기가 알고 싶어서 아빠를 인터뷰하기로 했다.
그는 수의직 공무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급 1800원 받아서 하숙비 1500원 내고 나면 남는 돈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일 년도 안 돼 그만둔 이유가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공무원들이 외상으로 술 마시고 지역 업자들에게 술값을 대신 갚게 했는데, 외상청구서 갖다 주는 일을 막내인 아빠가 해야 했다. 울화통이 터져서 당장 그만두고 가축병원을 개업해서 충북 단양군 매포면에 하나 밖에 없는 수의사가 되었다. 개 보다 소, 염소, 돼지 손님이 많다보니 출장 진료가 잦았다. 어느 날 별방리에서 소가 난산이라는 연락을 받고 오토바이로 산길을 두 시간 넘게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 세상에 소가 새끼 낳다가 못 낳는 것도 처음이고, 의사 부른 것도 처음이라고 신기해했어. 그 동네 생기고 나서 쭉~ 사람도 의사 있는 데서 애 낳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그러대. 보니까 송아지가 나오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거야. 머리랑 앞발이 먼저 나와야 되는데, 뒷다리부터 나와 있으니까 엉덩이에서 계속 걸려. ”
소는 그 집의 유일한 재산이면서 동시에 가족이었다. 소 주인은 이미 이틀이나 지났으니 새끼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어미 소라도 살려 달라고 했다. 동네 사람 네 명이 큰 나무 판자를 소 배 부분에 대서 일으켜 세우고, 아빠는 자궁과 질이 다칠까봐 조심조심 송아지 뒷다리를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아주 조금씩 안에서 돌렸다.
“나중에는 사람들도 힘이 빠져서 주저앉아 버리니까 소도 퍽 쓰러졌어. 내 팔이 어깨까지 다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소가 앉으니까 팔 부러질까봐 옆으로 같이 촥 엎드려서 다 같이 좀 쉬었지. 쉬고 다시 일어서서 또 조금씩 뱅뱅 돌려서 드디어 머리랑 앞다리가 나왔어. 네 시간 넘게 걸렸지. 그런데 송아지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온 거야. 더 신기한 건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고 힘 하나 없던 엄마소가 벌떡 일어나서 양수 덮어쓴 송아지를 쓱쓱 핥아. 송아지도 비틀 비틀 일어나서 젖을 먹더라. 사람들이 다 같이 만세를 불렀어. 생명이란 게 그렇게 대단해. 그 날이 사월 초파일이었어. 잊어버리지도 않아.”
10년 수의사로 일하며 그도 세 아이의 아빠가 됐다. 좀 더 안정된 수입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낯선 곳에서 아이 돌보기를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친척이 많은 부산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수입포장육 회사 검역 일을 했는데, 직속 상사의 괴롭힘이 심했다. 사사건건 트집 잡아 혼을 냈고, 회식 때 술을 많이 안먹는다고 비아냥거렸다. 지금은 술 한 모금 안마시는 아빠가 그때는 매일 술에 취해 늦은 밤 퇴근했다. 상사가 먹이니까 마셨고, 괴로워서 또 마셨다. 어느 밤엔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울기도 했다. 그러고도 다음 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남들보다 두 시간 일찍 출근했다.
“자식들 먹여 살려야 되는데 쉽게 못 그만두지. 내만 그런 게 아니고 보통 다 그렇게 살아. 첨에 하다 그만둔 공무원도 나 혼자였으니까 생각할 것도 없이 때려쳤지. 자식들 있었으면 글쎄.. 못 그만 뒀을 걸. ”
“그때 상사한테 내가 처신을 잘 못했어. 그 부인이 보험 영업을 했는데 우리 부서 사람들이 다 보험을 들어줬는데 나만 안 들어 준거야. 그때 내가 둔하고 고집 있고 절대 구부리지 않고 그랬어. 회사 생활 하려면 타협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걸 오십이 다 돼서 알았어. 남보다 많이 늦게 알았지.”
그렇게 아빠는 20년 동안 회사 생활을 했다. 그 사이 거실장 가득 차 있던 오십 여개의 수석을 모두 버렸고, 열 개의 낚싯대를 팔았다. 아빠가 기이하게 생긴 돌을 찾아서 공동묘지도 마다않고 달려갔다거나 물고기 한 마리 안잡아오면서 이름도 모르는 섬에 가서 앉아있기만 했다는 건 엄마가 말해줘서 알았다. 이야기는 주로 엄마와 많이 했고, 아빠와는 엄마 몰래 밤에 라면을 끊여먹으며 마음만 나눴다. 그게 이제야 아빠의 꿈을 물어본 이유이자 변명이다.
“목장. 소가 막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넓은 데서 나는 말 타고 소 몰고 싶어. 촌에서 자라서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거든. 사람은 나쁜데 동물은 착하고 교감도 잘되잖아. 사람은 성악설이 맞고, 동물은 성선설이 맞는 것 같아. 그래서 대학 가려고 진료 결정할 때도 축산학과 가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키우는 건 안배워도 할 것 같아. 그런데 소 키우다보면 병이 날 거 아니야. 고치는 건 배워야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의학과로 갔지. 그런데 뭐, 회사 다니면서 애들 키우다 보니 먹고 살 돈도 없는데, 목장이고 뭐고. 현실에 치여서 꿈이고 나발이고 없지. 애들 어릴 때는 이 놈 아팠다 나으면 저 놈이 아프고.. 건강하게 잘 크기만 하면 된다 싶고. 좀 있으니 이 놈 등록금 내면 저 놈 등록금도 내야 되고. 하루하루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거지.”
그렇게 회사 정년이 가까워졌고, 일하면서 따놓은 공인중개사 자격증으로 아빠는 퇴직 후에 엄마가 하던 부동산 일을 함께 했다. 아들 장가보낼 때 집을 마련해줘야 하는 게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 벌이는 계속 돼야만 했다. 그가 생각하는 아빠의 책임을 다하니 예순 다섯. 이제야 은퇴 할 수 있게 됐는데, 정작 본인은 그 흔한 보험 하나 들어놓지 못했다.
40년 넘게 쉬지 않고 일했는데,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삶. 지금 일하는 공장 경비원 중 아빠는 최고령이다. 그 세대 특유의 성실함과 조직 생활에서 터득한 처세술로 성질 괴팍한 반장과도 잘 지내서 올해도 계약을 했다. 휴일 없는 교대 근무가, 집 아닌 곳에서 자는 잠이 편할 리가 있을까.. 그래도 월 150만원을 버니 아빠는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내년 3월에 재계약이 안 되면 공공 근로를 신청해야 하는데, 하루 서너 시간 일하고 월 3,40만원 받는단다. 국민연금 58만원을 합쳐도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우리 세대는 보통 다 노후 준비 안 돼 있지. 그래도 지금이 제일 좋아. 애들 키우는 걱정 없고, 회사 스트레스 없고. 욕심이 없어져서 그런가 편안해졌어. 요즘 옷도 사고 외식도 해. 자식들 키울 때는 니 엄마랑 둘이 외식 한 게 결혼 20주년 때 딱 한 번 밖에 없었거든. 그때는 자식들한테 돈이 드니까 우리 쓸 돈은 없었는데, 지금은 많이는 아니어도 둘이 필요한 것만 쓰면 되니까 좋지. 내 맘 같아서는 팔십까지 경비 아저씨 하고 싶은데, 그렇게 시켜 줄라나? 현실적으로는 딱 삼년만 더 하면 바랄게 없겠어”
아빠의 이야기 속에는 후회나 억울함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땐 다 그렇게 살았어’라는 말 속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어보였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아빠는 그동안 해왔던 일의 설명은 필요이상으로 디테일하게 말하면서 그때 느낌이나 생각에 대해서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자주 말문이 막혔다. 어쩌면 아빠의 인생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감정보다 책임이 우선인 삶. 다음날 새벽 출근 때문에 빨리 자야 한다는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지금 꿈은 무엇인지 물었다.
“칠십 넘어서 지금 꿈이 어딨노. 아프지 않고 죽으면 되지. 인생 나뭇잎이 떨어질까 말까 하면서 겨우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이제 떨어지면 그냥 땅 속으로 스며드는 거지. 나름 열심히 살아서 후회는 없어. 특별히 다시 살아본들 더 잘 살 자신도 없고”
불가사리
빛과 시간을 다스리는 현실 마법사
- 사진작가 이동진
아름다운 장면을 마주할 때, 예쁜 상차림을 받을 때, 귀여운 모습을 목격할 때, 우리는 ‘찰칵’ 소리와 함께 찰나를 갖는다.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을 꺼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은 시간의 한계를 극복한 ‘마법’이다. 그렇다면 ‘사진작가=마법사’라는 공식이 가능하지 않을까? 10여 년간 카메라로 순간을 채집해온 사진작가 이동진에게 ‘그 세계’ 이야기를 청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일도 있냐’는 밥벌이
코로나19 앞에서 ‘마법사’ 같은 소리는 접었다. ‘세월호’ 이후 이렇게 일감이 뚝 끊긴 적도 없다고 말하는 이동진은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저 ‘현실적’이라고만 하면 ‘핀’ 안 맞은 사진처럼 흐릿하니 초점을 맞춰 소개해볼까. 이동진은 상업 예술을 하는 프리랜서 노동자다.
11년 전, 그는 사진 아카데미에서 만난 동기와 ‘다 본다’는 뜻의 ‘DaView(다뷰)’ 스튜디오를 차렸다. 기업체 사·외보, 전시·행사, 대학교 브로슈어, 패션 광고와 영화 포스터 등 여러 장르의 사진을 찍어왔다.
고객의 의뢰를 받아 사진을 찍어주는 ‘클라이언트 잡’이자 전문직, 각 산업현장에 필요한 상업 사진인데 결과물은 정답이 없는 예술의 영역이다. 재능이 있으면 유리하고 감수성과 기술력을 고루 갖춰야 한다. 조직생활에 비해 자유롭지만 다양한 사람을 상대하다보니 서비스 마인드가 내재된 직업. 프리랜서 상업 예술 노동자의 정의다.
“사진 찍는다고 하면 ‘작가세요?’, ‘연예인 봤어요?’, ‘멋있어요’ 같은 얘길 많이 듣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그런 일도 있냐’고 해요. 저희는 여기저기 다니며 고객이 찍어달라는 건 다 찍거든요.”
기업체 사·외보만 해도 고속철도를 설치하는 토목 현장에서부터 연탄 나르는 봉사활동 현장, 섬마을 농가는 물론 아시아의 ‘갑부’들이 모인 컨퍼런스에 가서도 촬영을 한다.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담을 때도, 석학들로부터 1 대 1 인생강의를 들을 때도 있다.
‘그런 일도 있냐’는 돈벌이지만 이동진은 적성만 맞으면 이보다 재밌는 일도 없다고 말한다. 가령, 만난 지 3분밖에 안 된 사람과 스스럼없이 밥을 먹을 수 있거나, 멀미를 하지 않는 체질 같은 것. 호기심이 많고, 몸으로 부딪쳐 견문 넓히는 것을 즐기는 타입 말이다.
“월드컵, 세월호, 코로나19….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마다 일 의뢰가 안 들어와요. 그래도 11년이라니 잘 버텼네요. 힘들어서 그만 둔 선·후배도 많은데….”
11년. 이동진의 그 세월 안에는 바빠서 한 달 동안 집에 네 번 밖에 못 들어간 날이 있었다. 작업료를 떼인 날도, ‘갑질’을 당한 날도 있었다. ‘다뷰의 사진’과 ‘실장님들’이 ‘최고’라며 이어온 인연, 쉽게 누릴 수 없는 다양한 경험,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난 사람들과 눈을 마주친 순간들로 그의 11년은 꽉 차 있다.
‘남들처럼’이 아니라 ‘나처럼’
10여 년간 그만 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냐는 물음에 이동진은 망설임 없이 답한다. 일이 없어 불안하고 초조한 적은 있었어도 그만 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고. 대체 어떤 모습에 반했길래 이 사랑은 변함없는 걸까.
“집안이 폭삭 망했던 것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1981년생 이동진은 ’IMF 키즈’다. 삼형제 중 둘째인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 부사관을 지원했다. 어차피 군대는 가야하니 기왕이면 돈도 벌자는 생각이었다. 이후 청주에서 5년간 복무하면서 취미로 ‘청주디지털카메라동호회’에 가입한 것, 출사를 다니며 사진에 재미를 느낀 것, DSLR카메라와 렌즈를 산 것, 전역 후 카메라 장비를 몽땅 챙겨 터키 여행을 떠난 것이 그의 이십대 중반까지의 이야기다.
전역 전만 해도 사진은 취미였지 꿈은 아니었다. 군부대 인근 서점에서 우연히 <보석의 세계>라는 책을 발견한 후 보석과 보석 디자이너의 매력에 빠졌었다. 전역하면 ‘이탈리아에 가서 보석 공부를 해야지’. 제대할 때까지 독학을 하며 유학자금을 모았다.
“전역할 때 퇴직금을 주더라고요. 500만 원. 지원서를 쓴 피렌체 학교에 입학하려면 6개월 넘게 남은 상황이었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돈으로 뭘 할까 고민하다 여행을 떠났죠. 5년 동안 고생한 저에게 주는 선물,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어요.”
그의 첫 DSLR카메라, ‘캐논 300D’와 여행을 하며 보낸 6개월의 시간은 그의 두 번째 직업을 점지해주었다.
“터키에서 한국인 일행을 만났는데 이란과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로 갈 거라고 하더라고요.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중에 ‘스티브 맥커리’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란과 파키스탄이 주요 활동 무대인. 그의 사진 속 배경이 궁금했었는데 거길 지난다잖아요. 껴달라고 그랬죠.”
‘스티브 맥커리 로드’ 여행이 끝날 무렵, 그는 사진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에 가지 말고 사진 공부를 해보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이동진은 귀국하자마자 충무로 사진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아 낮에는 학원에서 사진을 배우고 저녁에는 강남에 있는 주얼리 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독학으로 배운 보석 공부 덕에 주얼리 숍에 취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정장 차림으로 아카데미에 등원하고 오후에는 주얼리 숍으로 출근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밤 12시 30분.
“그런 생활을 1년 간 했어요. 제가 크리스탈이랑 진주 귀걸이를 많이 팔았는데 ‘강남 사모님’들이 저를 좋아해주셔서…(웃음). 대표님이 새 매장을 낼 건데 저보고 맡으라고 하시더라고요. 한 달 기본급 500에 플러스 알파를 주겠다고요. 그때 조금 흔들렸죠. 아카데미 수료하면 스튜디오 어시스트로 취직하는데 한 달 급여가 15~20만 원밖에 안 되니까.”
그의 선택지에 ‘남들처럼’은 없었다. 대학을 가지 않은 것도. ‘돈’보다 ‘꿈’을 택한 것도 마찬가지. 타협한 게 있긴 하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니라 상업 사진을 택한 것. 좋아하는 일을 하되 ‘밥’은 굶고 싶지 않았는데 다큐멘터리 사진 쪽은 그럴 가능성이 낮았다.
누군가의 역사와 함께하는 일
“저희가 필름 카메라 마지막 세대예요. 디지털화가 되면서 후보정 작업도 사진작가의 역량이 되었죠. 카메라도 그렇고, 후보정 프로그램도 그렇고 새 기능이 추가될 때마다 일단 써 봐요. 모르는 건 공부하고요. 그런 시도들이 쌓인 건데 남들은 실력 있는 것처럼 보이나 봐요.”
실력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력’인 것 같다는 말에, 좋아하는 일이라 잘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는 그. 그러고 보니 같은 유형의 사진인데 본인과 다른 시선으로 찍은 결과물을 보면 질투가 난다고, 여러 잡지와 이미지를 보며 안목을 키우려는 노력이 몸에 뱄다는 말을, 방금 생각난 듯 덧붙인다.
“사진을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하잖아요. 운전하다가, 걷다가 빛이 좋으면 사진이 찍고 싶어져요. 카메라가 없으면 ‘이 각도에서 찍으면 예쁠텐데’ 생각하며 ‘폰카’로라도 찍어놔요. 직업병이라면 그 정도? 아, 주변을 관찰하는 것도요.”
힘든 만큼 재밌는 분야가 사람을 찍는 일이다. 다만 결혼식 사진은 딜레마다. 온라인 결혼준비 카페에 ‘사진작가 트집 잡아 액자 더 얻어내는 법’ 등이 정보랍시고 공유되는 걸 알았을 땐 씁쓸했다. 실력과는 무관하게 나이가 많다며 젊은 사진작가로 교체해달라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인으로서 흔들리지 않고 지키려는 원칙은 확고하다.
“사진 공부할 때 제일 처음 배우는 건데요, 멋진 사진을 얻고 싶은 욕심에 거짓된 연출은 하지 말라고요. 누구나 아름다운 작품을 얻고 싶잖아요, 저도 가끔 피사체 앞에서 갈등하곤 해요. 조금만 손대면 멋진 그림이 나온다는 걸 아니까. 그 순간 자신을 이겨야 돼요. 저는 ‘프로’니까요.”
옳지만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인 직업윤리를 가진 이동진은 올해 마흔 살이 되었다. 직업 수명이 짧은 편이라 필드에서 뛰는 것도 5년 남짓 남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후의 삶도 슬슬 준비해야 할 때라고. 최근에는 코로나19로 공백이 생겨 조금 더 오래 이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제가 하는 일은 누군가의 역사와 함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찍은 사진 한 장으로 그때 하던 일, 곁에 있던 사람들이 소환될 거잖아요. 제가 그 사람의 역사를 관찰해서 기록한다는 생각으로 매순간 집중해서 찍어왔던 것 같아요.”
지난주에 무얼 먹었는지, 한 달 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찰칵’ 붙잡아 둔 사진 한 장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상에 잠깐 ‘과거’가 머물렀다 가는 게 어떤 의미일까. ‘복고풍’이, ‘뉴트로’가 왜 사랑을 받는지 생각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진작가=마법사’라는 공식은 맞는 게 아닐까. 현실에 발을 딛고 선 마법사.
콩스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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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르다 보니, 다 7기 학인 글이네요. 한글 배우는 엄마를 인터뷰한 숑의 글도 좋았는데 업로드를 안 해주셨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