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홍성 광리교회 고성은 목사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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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소망하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하고 있고,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부활을 말할 수 없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이른바 ‘No cross, No crown’, 즉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복음이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에 머물지 않고 영광과 승리의 부활로 나아간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늘도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떤 부활을 소망해야 할까?
사람의 부활을 소망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갇혀 있을 때 그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셨다.(요 11:17-44) 그리고 자신 또한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안식일 다음 날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막 16:1-7) 이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회상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게바에게 보이신 후 열두 제자에게와, 오백여 형제에게도 일시에 보이셨고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으며, 맨 나중에는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하고 있다.(고전 15:3-8)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아해하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눅 24:13-35)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불신하던 도마조차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부활을 믿게 되었다.(요 20:24-29) 이처럼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수용한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의 삶 속에서 부활에 대한 놀라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예컨대 서원보(W. C. Swearer) 선교사는 1901년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한 해미 신앙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는 태풍이 왔을 때 바다에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이 지도자는 천국에서 아들을 다시 볼 것이라는 부활의 소망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1
이처럼 부활신앙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과 함께 현세에 선한 소망을 던져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실제적으로 한국교회 역사 속에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희귀한 일이 더러 있었는데, 이는 부활에 대한 예표가 되었다.2
경기도 안산구역 전도사 김동일씨의 통신을 거한즉 본구역 사랑리교회 박봉근씨는 이왕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족 중에 예수 믿는이를 원수같이 여기고 무수히 비방하더니 하루는 박씨가 믿는 형제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내 처가 사경에 이르렀으니 죽던지 살던지 찬미와 기도나 하여 달라고 간청하매 형제 몇 사람이 가 본즉 병자는 이미 죽었고 집안 식구는 장사 지낼 공론이 분분하거늘 그러나 기도하여 달라하거늘 형제들과 박봉근씨와 일심으로 찬송과 기도를 몇분동안 할 새 죽었던 사람이 차차 생기가 있어 그 아침에는 다니기도 하며 말도 하니 의연한 새사람이 되매 온 집안이 주를 독실히 믿으매 인동에 사는 외인까지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하였다더라
교회의 부활을 소망하라
사도 요한이 서신을 보냈다는 요한계시록 속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교회로 존속하지 못하고 유적지로 변하였다. 그중 유일하게 서머나(현재 터키 이즈밀) 지역에는 순교자 폴리갑 감독을 기념한 교회가 재건되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교회 속에도 설립된 후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교회들이 있지만, 설립되었다가 자취를 감춘 교회들도 결코 적지 않다. 달리 표현하자면,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교회들이 된 것이다. 특히 해방의 봄 속에 깃든 분단의 겨울 속에서 북한 교회들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현재 교회 환경의 변화와 교인의 지속적인 감소 등으로 인해 다수의 농촌교회와 도시 개척교회들이 생존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진배 없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냉엄한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는 다 죽었던 교회가 되살아난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강화 화도면에 자리한 문산교회의 부활 이야기이다. 1906년에 태동한 문산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여 1907년 3월에는 교인들의 헌금과 미 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의 보조로 초가 10칸을 매입하여 독립적인 예배당까지 마련하였다. 그렇지만 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정미의병이 발생했을 때 일제의 강화수비병토벌대가 교회를 핍박함에 따라 교인들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이 같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교인 박기산은 10여 년을 홀로 기도와 예배로 인내하며 교회를 지켰고, 1915년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를 계기로 문산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기독신보」는 문산교회의 부활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3
강화군 화도면 문산동 사는 박기산(朴起山)씨는 교회 속장으로 일가의 핍박과 동리의 군축을 인하여 교우가 점점 흩어지고 교회가 없어지게 된지라 박씨가 애통하고 기도하고 십년동안을 혼자있어 기도하고 다 쓰러져가는 회당에서 매주일에 예배하고 성일을 지키더니 하나님께서 도우사 작년봄 부흥회에 자기 집안 식구들이 병도 고침을 얻고 다시 회개하는 열심도 얻어 함께 예배함으로 교우들이 차차 다시 일어나는지라 그 부친은 근본 여러해 동안에 영국종고성교회[성공회]를 믿어 그 교회의 회장으로 시무하셨으니 이름은 사가리아라 그때의 부흥회를 인하여 자기 집안 식구들이 특별히 은혜 받음을 보고 마음이 감동하는 중에 성신의 책망하심을 당하여 진리로 돌아온지라 부자형제가 단합하여 열심히 믿음에 교우들이 삼십명 달하고 금년봄부터 회당을 다시 건축하기로 시작하여 여름에 준공한지라 유월 이십구일 예배에 각 처 교우들이 모여서 회당봉헌식을 행하였는데 본지방 목사 김광국씨와 감리사 최병헌씨가 성례의 순서를 행하고 강도한지라 회당은 비록 크지 못하나 초가로 일곱간이오 당일에 모인 교우는 백여인이라 기쁨으로 찬송하고 정성으로 예배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박씨가 십년동안이나 잘 참고 견딘 정성을 권고하심이라 하더라
국가의 부활을 소망하라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한 70명의 야곱의 후손은 430년 만에 애굽에서 탈출하는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였다.(출 12:40-42)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9:10)처럼 70년 만에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고국으로 귀환하였고, 이후 무너진 성을 재건하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크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스 1:1-4)
우리나라도 1910년 일본에 합병되는 한일병탄의 치욕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일제 치하 36년 만인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그렇지만 해방의 기쁨은 이내 남북분단의 아픔을 가져왔다. 비록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역사로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새 역사를 창출해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충남 아산에 있는 구미동교회(현재 백암교회) 출신 김복희를 들 수 있다. 이화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 3・1운동이 발생하자 학교의 휴교로 인해 고향 아산 백암리에 내려온 후 영신학교 교사 한연순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녀는 일제로부터 독립이라는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남북통일의 ‘큰 일’도 반드시 이루어주시리라는 확신 속에 평생을 기도하였다.4
이처럼 김복희가 가졌던 남북통일에 대한 기대와 확신은 다른 무엇보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체험한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만큼 조국해방은 함석헌 옹의 표현대로 느닷없이 도둑처럼 찾아온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강원용 목사는 자신의 회고록 『빈들에서』에서 느닷없이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에 대하여 시편 126편 1절의 표현처럼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는 일제 말기 사상범으로 수감되었다가 가석방된 그가 재수감의 우려 속에 가족들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생활하던 중 산에서 해방을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5
우리는 그렇게 산속에서 외부와는 일체 단절된 채 한 열흘 정도 살았는데, 어느 날 아랫동네에서 느닷없이 애국가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가 8월 18일 정도였던 것 같다. 깜짝 놀라서 마을 쪽을 자세히 관찰했더니 마을에서 국민학생쯤 되는 아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우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됐든 진짜 해방이 되었다면 우리 식구는 힘든 산속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우리에겐 해방이 정말 실감나는 ‘해방’인 셈이다.
1 W. C. Swearer, “Su-won and Kong-chu Circuit,” Official Minutes of the Seventeenth Annual Meeting, Korea Mission, Methodist Episcopal Church(1901), 43.
2 “희귀한 일”, 「그리스도회보」 1912년 6월 15일, 3.
3 “박씨의 인내력”, 「기독신보」 1916년 8월 2일, 3.
4 김광신 편, 『우리 어머니 김복희 장로의 일생』(우일문화사, 1980), 48.
5 강원룡, 『빈들에서 (1): 나의 삶, 한국현대사의 소용돌이』(도서출판 열린문화, 1993), 140.
고성은 목원대학교와 호서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목회활동 연구』, 『철마 정경옥, 생애 연구』, 『동부연회 순교자열전』(공저) 등이 있다. 현재 충남 홍성에 있는 광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목원대 외래교수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