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27th, 2007
아침 9시, 조용히 눈이 떠졌고 곧장 씻고 나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침 인사도 없이 서로 그렇게 불편한 분위기는 방안에 둥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먹구름처럼 떠다니는 분위기를 잡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내버려둘 뿐.
짐을 싸고 있는 내 모습에 더이상 나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니면 이 사태를 어떻게든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안절부절해 하던 토마스가 방안을 이러저리 왔다갔다 하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고멘나사이, 혼또우니 고멘나사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일본식 표현이
마치 한국식이라도 되듯 토해내는 토마스.
차라리 "아임 쏘오리"라고 쿨하게 악수를 건네며 말을 했더라면 더 나았을 뻔 했다.
지 딴엔 자칫 성의 없게 들릴지도 모를 "아임 쏘리"를 피해
보다 정중한 느낌이 나는 말을 택한다고 했던 것이 "고멘나사이"였겠지만,
오히려 나의 화를 더 돋굴 뿐이었다.
"모르겠어, 지금 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나로선 미안하단 말밖엔 할 말이 없어.
어제 내가 한 말 그저 나 혼자 갖고 있었던 생각이라 이해해주고 못 들은 걸로 해주면 좋겠어.
우리 어차피 나흘동안 같이 여행다니기로 한거니까 그것만큼은 그렇게 했으면 해.
친구로서 독일까지 찾아온 친구에게 최소한 내가 마음 먹은 만큼의 호의는 베풀어 주고 싶어."
.... 끝이 없이 흘러나오는 토마스의 독백.
귀에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버리는 토마스의 말이 물 위의 기름처럼 동동 떠다닌다.
방안의 숨막히는 적막.
이제 배낭만 매고 방을 나서면 된다.
그래, 가자, 가. 더이상 이 상태로 여행을 어떻게 해. 가자고, 가. 열심히 외쳐대는 머리 속의 울림.
그러나 갈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하는 토마스를 차갑게 무시하게 떠나버릴 수가 없었다.
친구로서 토마스만큼 내 맘을 잘 알아주는 친구가 또 어딨어??
김민영, 너 토마스한테 받아 처먹은 것만 해도 얼마냐...??
지 아쉬울 땐 좋다고 헤헤 거리고 싫을 땐 지겨워하고.
이제와서 부담스럽다고 내쳐 버린다는 게 말이 돼?
인사도 없이 그냥 배낭만 매고 떠나버리면 모든게 끝이야??
수만가지 의문들이 물음표를 띄고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몇 번.
또 다시 적막이 흐른다.
"당장 일어나, 니가 이러니까 내가 더 싫어지는 거야. 지금 이 방에 있기도 싫으니까 우선 나가자."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을까? 순간 어리둥절해하는 토마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정말 배낭 매고 떠나버릴 줄 알고 있었던 걸까?
바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고개만 든 체 혹시나 잘못 들었는지 의아해하는 토마스.
"나가자고, 우선 나가서 생각해 보자구!" 신경질적으로 되받아쳤다.
무슨 생각인거니, 김민영.
아- 나도 미치겠다 정말. 어젯 밤만 해도 아침만 되면 곧장 내 갈길 가려고 맘 먹었었는데.
이렇게 또 다시 맘이 흔들려 버린다.
철저히 이기적이 되어주신다.
친구라는 이름의 토마스라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욕심이 내 발을 붙잡은 격이 됐다.
결국 그 욕심의 끈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호텔 밖으로 같이 나와버렸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미쳤다, 정말 미쳤다.
머릿 속엔 이미, 서로에게 기억하기에 적당한 이별의 시간을 갖아보겠노라고
자기 합리화를 해대고 있다.
적당한 이별의 시간이라, 훗. 웃기지도 않는 이기적인 민영씨.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독일에서 더 여행을 하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면 될 것을
그 놈의 볼 것 없는 자존심에 좋은 이별 기억을 갖아야할 것이 아니냐고 둘러대는 모습이라니.
포츠담의 상스시 궁전을 찾았다.
"Sans Souci" 불어로 "근심이 없는" 이란 뜻이라고.
서로 근심 백만개씩 가슴에 끌어안고 찾아간 우리 둘은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근심이나 녹여가지고 올 수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더 늘어나 오는 건 아닐테지.
역에서 간단한 브런치를 먹고 오후 1시에 여유있게 도착했는데
3시 40분에나 가이드 투어가 가능하단다.
할 수 없지 기다리는 수 밖에.
상스시 궁전 외 정원 및 별궁 관람 통합 티켓, 10유로.
궁전 뒤로 난 여섯 단의 테라스 정원이 참 특이하대서 와보고 싶었는데
정말 직접 와서 보니 입이 쩍- 벌어진다.
서로가 서로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지나가는 한 아주머니 왈,
"저리 가서 둘이 서보세요, 내가 찍어드릴게~ (윙크 살짝)"
냅다 내 디카를 잡아 빼더니 얼른 저 분수 앞에 서보란다.
아이고야, 막무가내 이 아주머니 -ㅁ-;;
어정쩡하게 군대에서 정렬하듯 서서는 딱딱한 포즈를 잡고 있으려니
"자~ 찍어요, 하나둘셋!"
"오호호~ 땡뀨 땡뀨" 감사하다고 했지만 이건 완전 곤욕이었다.
눈치도 없는 아줌마 덕분에 둘만의 기념사진도 남겨오게 됐다.
근심 없는 궁전 앞에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흐린 하늘, 흐린 날씨.
모든게 우리들 마음같은지 비도 내렸다 말았다, 내렸다가 말았다가..
남녀가 우산을 세 번 같이 쓰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들 하던데
오늘 같이 쓴 것만 쳐도 그럼 토마스랑 난 사랑 몇 백번은 이루어지고도 남았겠고나. -_ -;
도금된 챠이니즈 하우스.
지붕이 꼭 아이스크림 같이 생긴게 군침이 확 돌았는데
아직까지 사진만 봐도 스푼으로 지붕 한 스푼 떠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ㅋㅋ
저 멀리 보이는 별궁은 너무도 멀어서 가볼 꿈도 못 꾸고
이렇게 저렇게 정원을 거닐다 보니 가이드 투어 시간도 다 되서 다시 상스시 궁전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철학과 문학, 예술에 전념하고 싶어서 소규모로 지었다는데
작은 규모는 그렇다치고 로코코 양식의 최절정을 달려주신다, 아주~!!
내부가 어찌나 화려하고 휘황찬란한지 눈이 부셔 한참을 적응하지 못하고
적응이 됐을 땐 금과 은, 각종 보석으로 만든 인형의 집 안을 구경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까지.
헛헛- 갖고 싶고나야-;;;
토마스랑 나, 왕과 왕비 놀이에 지대로 맛들어주셨다. 케케
가이드 투어를 마치고 나니 폐관시간이 슬슬 다가오고.
아쉬움에 마지막은 오랑주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곳에서 봐온 오랑주리에 비해 크기도 어마어마하고 스타일도 어찌나 독특하던지.
멀리서 대단한 궁전인가 했는데 기껏 오랑주리 -_ -
오랑주리야, 널 무시하는 건 아니란다.
난 그저,, 그렇다는 것 뿐이쥐..
하루종일 얼마나 걸었을까.
정말 오랜만에 여유있게 하루를 시작하고 보냈다.
하루동안 몇 개를 둘러보고 어딜 갔다 어디를 또 가서 다음엔 어디를 둘러보는 식의 여행은 제껴두고
사진 찍기에 열중하지도 않은 체로.
그냥 둘러보다 생각나면 그때서야 한 컷,
조금 다리가 아파오는 듯 하면 벤치에 잠깐 앉아 이야기도 하다가,
후둑 후둑 후두둑 비가 내리면 우산 펴들고 같이 거닐기도 하면서..
덕분에 30여군데를 둘러볼 수 있는 통합티켓엔 자랑스럽게 4개의 구멍만이 뚫렸다.
"토마스, 이제 가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오후,
어젯밤과 오늘 아침의 서먹함은 잠시 꽁무니를 빼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없었다.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만큼 배려하고 있었다.
편안히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모두 말 한마디 내뱉기 전에 한참을 생각하고 있었다.
쿠담거리 어느 독일 전통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오늘처럼만 여행하면 남은 이틀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다고 마음은 이미 정해진 뒤였다.
사실 아침만 해도 어제 저녁의 혼란스러운 상황 이후 내 스스로도 내 맘을 추스리지도 못한 상태였고,
하루의 시간으로 마음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토마스와 나선 길이었지만 결국 떠나는 쪽을 택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잘 보냈지만
그래서 더더욱 남은 이틀이란 시간이 나를 끌어당겼지만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독일에서의 이틀이란 일정을 포기하는 결단이 필요했고,
무참히 떠남으로써 영혼의 소울 메이트 같던 토마스를 잃을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바보같이 나중에 지금 이순간, 떠남을 결심했던 바로 이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할지도 모른다.
사랑과 우정사이.
대체 토마스와 나의 지금 이 관계는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사랑과 우정사이?
어렸을 때 김희선과 류시원이 나오는 미니시리즈를 보면서
사랑과 우정에 대해 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기억난다.
남자 혹은 여자가 친구로서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반대쪽이 상대방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로 지낸 오랜 우정을 걸고서라도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받아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무시하거나 그 사랑을 이용하는 행위는 명백한 배신 행위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어린 시절 정의 내렸던 사랑과 우정 사이의 결론에 반하고 있다.
토마스는 한없는 사랑을 주지만 나는 이기적으로 철저히 거부하고 있었다.
잔인하게 순수한 그 마음을 이용하고 있었다.
나쁜 기지배.
나중에 한국 여자애들은 모두다 재수 없어! 라고
토마스가 말을 떠벌리고 다니게 된다해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다 내가 자처한 일이었다.
토마스와의 관계를 화두로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 친구들은 그랬다.
서로의 관계에서 한 쪽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더 늦기도 전에 그만 두는 것이 낫노라고.
상대방이 사랑을 원하는데 그 사랑을 똑같이 줄 수가 없다면 싹뚝 끊어야 한다고 했다.
일말의 희망조차 안겨주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것이 상대방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배려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 "남 주기는 아깝고 내가 갖기는 싫고"의 행위를
"우리의 우정은 소중해"라는 주장 하에 당당히 저지르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친구들의 질타에도
꿋꿋하게 "토마스랑은 친구로 지낼거야"라고 당당히 자신했던 내 모습이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말 친구들 말이 옳았던 걸까.
지금껏 나는 토마스를 내 욕심으로 매어두었던 걸까.
이제서 슬슬 묶어놓았던 끈을 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구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렇게.
불룩 튀어나온 배를 부여안고 호텔로 향하는 길,
"나 조금있다 호텔에서 니 노트북 좀 쓸게.
체코에서 묵을 호스텔도 예약하고, 기차 시간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결국 말했다, 말했어.
갑자기 가던 발걸음을 멈추는 토마스,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한다.
"나는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루 보내고 나서
남은 이틀도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또 착각이었던거야?"
"내가 분명히 오늘 하루만 같이 보내는 거라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너무 즐겁게 보낸 뒤라 난 니가 갈거란 생각도 못했어."
아.아.아. 또 다시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기적인 김양, 스스로가 쳐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 허우적 대는 꼴이라니, 원.
토마스가 평소같지 않게 쌀쌀맞다.
서로가 말도 없이 호텔에 도착해서는 토마스가 냉큼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내 설치해주며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면 돼"라고 쏘아붙인다.
원인은 난데 이렇게 되니 나마저 기분이 팍-상한다.
제길, 오늘 떠날 거 이왕이면 옛 정 생각해서 좋게 떠나려고 하루동안 같이 보냈더니 이게 뭐야.
역시나 같이 보내는 게 아니었어.
별별 생각들이 다 떠오른다.
이젠 서로 말도 없이 차가운 공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제보다도 메스꺼운 분위기,,,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숙소 예약과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이번엔 토마스가 탁자 앞에 앉았다.
뭘 하던지 말던지 상관도 안하련다, "잘자"라는 말도 없이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역시,,, 친구들 말이 맞았던 걸까.
남녀의 우정이란 결단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그 무엇이었단 말인가.
애초에 우정이란 이름으로 토마스를 잡아두는 것이 아니었었는가.
퀘 세라 세라...
첫댓글 은근한 짐으로 다가오는 듯한 이 묘연한 관계 . . 그냥 이렇게 the end?
정말이지 적절한 표현이네요, 하지만 여전히 ...ing 입니다~^-^;;
궁금해궁금해!!!!!
아,,뒷 이야기들이 정말 궁금하네요~~~남의 연애사의 관심많은 여인네-_-;
소설읽는거 같아요. 넘잼있어요. 아직도 ing 라면.. ㅋㅋ 님 생각되로 좋은 친구로 남았음 좋겠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