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신차려보니 제복과 부츠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고 침대에 엎드려 이불깃으로 입을 막고 끅끅대고 있었다.
지금 몇 시일까. 어두워서 시계바늘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날 등진 것처럼.
습관적으로 앙드레를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불러서 뭐라고 말해?
10년간 짝사랑해온 남자에게 들은 말이 겨우 최고의 친우라니. 속상하니까 위로해달라고?
앙드레는 어렸을 때부터 눈웃음이 예쁜 아이였다.
가끔 하는 윙크라던가, 내가 무리한 지시를 할 때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미안하게 만드는 표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하지만 실연과 실명 중 무엇이 더 괴로울까?
정답은 자명했다. 나에게 닥친 일이 더 괴롭다.
앙드레는 나를 위해 눈까지 잃었는데 나는 남자에게 차였다고 울면서 앙드레에게 기대려고 하는 것이다.
앙드레는 그래도 나를 토닥이며 위로해 줄거야.
아니, 다짐했잖아. 이제부터는 내가 앙드레를 보살필 거라고.
페르젠과의 이별보다는 머릿속의 이기심을 이기는 게 더 힘들었다. 꼬박 하루를 침실에서 나오지 않고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었다. 하지만 내 감정과 상관없이 시간은 간다.
'샤틀레를 만나야지. 조만간 아버지가 영지에서 돌아오기 전에 대화를 해야 한다.'
머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무거운 다리를 끌어보니 몸이 움직여졌다.
세수를 하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았다. 눈이 퉁퉁 붓고 머리도 부스스해 보기 흉하다.
나는 상대방을 움직일 때 외모가 큰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아서 늘 피부와 머릿결에 신경을 쓴다. 하지만 샤틀레와 협상할 땐 필요할 것 같지 않아서 하녀를 부르지 않고 직접 머리를 빗었다.
귀찮게 몸단장을 했으면 억울할 뻔 했다. 베르나르 샤틀레는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늘도 변함없이 악담과 욕설을 퍼부어댔다.
"인형아. 어째서 날 가둬두고 있지? 어서 근위대로 보내 고문이든 뭐든 해라."
내 사정따위는 봐주지 않는다. 오히려 내 인내심이 바닥나서 자신을 공격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내가 너의 개를 패도 신경 안 쓰는 거냐. 하긴 아랫것들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건 너희네 특징이니까?"
바라는대로 해 주지!
나는 침대로 달려들었다. 셔츠 옷깃을 오른손으로 틀어쥐고 샤틀레의 상체를 끌어올렸다.
내 눈과 그의 눈은 아주 가까이 맞닿았고, 이글거리는 내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처 부위가 당기는지 끄응~소리를 냈다.
"똑똑히 들어 샤틀레. 내가 너에게서 정보를 얻고 싶어서 그냥 놔두는 것 같아? 아니면 여자라서 사람을 죽이는 걸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
당황한 로자리가 옆에서 허둥거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 난 지금이라도 네 눈을 도려내서 잘근잘근 씹어먹고 싶어.
내가 왜 안 그러는지 알아?"
내 증오가 여과없이 전달되었나보다. 베르나르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앙드레가 말려서야. 네 눈이 아직 두 개인 것에 앙드레에게 감사해라."
나는 베르나르 샤틀레의 멱살을 놔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진심이 담긴 협박이 효과가 있었나. 아니면 로자리 때문일까. 샤틀레는 바로 고분고분해졌다. 앙드레와 그를 한 공간에 놔두고 싶진 않았지만, 오를레앙공과의 관계를 물을 때만 동석시키기로 했다. 그간 앙드레가 계보를 다 정리해놓아서 필요했기 때문이다.
짧은 문답에 끝난 후 앙드레는 바로 방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눈에 아직 통증이 있을텐데 인맥 명단을 다 정리한 것이 미안해서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장폴이 아버지의 젖은 망토를 받아들고 인사하고 있었다.
"잘 했다, 오스칼. 흑기사를 잡았다지? 소장 진급은 따논 당상이다. 이제 너도 명실공히 내 뒤를 잇는 장군이구나."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아버지에게 실망스런 소식을 전해드려야 했다.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그는 흑기사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흑기사인지 아닌지 내가 보면 안다. 어디에 가둬뇠냐. 내가 직접 심문하겠다."
나는 샤틀레를 근위대에 넘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앙드레 말대로 반국왕파에 연줄이 있어 나쁠 것이 없고, 오를레앙공의 비밀도 쥐는 셈이다.
그리고 앙드레가 구설수에 오르는 것도 싫었다. 눈도 눈이지만 가짜 흑기사 노릇 때문에 취조당하게 놔둘 수는 없다.
"직접 심문하시다뇨. 사사로운 심문은 법으로 금지된 지 오래입니다. 흑기사라는 증거도 없은데 총상을 입혔으니 상처가 나을 때까지 치료해 주는 것 뿐입니다."
문을 막아서는 나의 팔을 치우려던 아버지는 움찔했다. 늘 유행을 좆는 아버지는 요즘엔 계몽귀족을 자처하기 때문에 이런 논리에 약하다.
"좋아, 그럼 상처가 나으면 근위대 심문부로 넘겨라."
아버지와의 실랑이는 피곤했다. 아버지가 앙드레의 실명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화나면서도 다행이었다. 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면 분노를 터뜨리고 질책하면 그자리에서 펑펑 울었을테니까.
정신적으로 편할 틈이 없다. 페르젠과 이별하고, 흑기사와의 기싸움을 하고, 아버지와 언쟁까지. 쉬고 싶다. 가의 자지 못한데다가 꿈자리조차 어수선했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편하게 누워 내 마음속 날뛰는 사나운 망상을 잊고 싶다.
'누가 위로해줘! 제발!'
그래서 나는 늘 조건 없이 나를 위로해주는 오랜 친구, 술을 마시기로 했다.
“레모니, 불을 모두 끄고 나가봐. 이제 혼자 있고 싶으니 오늘은 다시 침실로 안 와도 돼.”
레모니가 모든 등을 소등하고 나가자 나는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다.
단짝과 의논하지 않고 결정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샤틀레 건은 조만간 정리가 될 것 같다. 어쩌면 로자리도...
샤틀레는 아직 앙드레에게 사죄하지 않았다. 대가도 따로 치르게 해야지. 내가 감정을 싣지 않고 처리할 방법도 고민해야겠다.
그래, 앙드레는 사임이 아니라 휴가로 처리할까.
비쉬에는 함께 가야지. 앙드레는 어린애같아서 혼자서는 절대 안 갈테니 무급휴가라도 내자. 내가 아니면 누가 걔를 챙겨주겠어.
잔을 테이블 모서리에 내려놓는 바람에 술잔이 기우뚱 기울어젔다.
"앗!"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지려는 잔에 손을 뽇았다. 내용물은 다 쏟았지만 잔은 잡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 여행을 갔을 때 산 병과 잔 세트이다.
나는 세공유리가 아니라 그것을 채우는 내용물의 도수에만 관심 있지만 이 세트를 샀는데, 앙드레가 계속 쳐다보며 눈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싸기도 했지만 앙드레는 나와 함께가 아니면 술을 마시지 않으니 술잔도 필요가 없었다.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망설이는 앙드레를 위해 내가 샀고 제작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 부르주아처럼 진열된 잔을 그냥 들고 왔다.
우리는 몇 년간 이 술잔으로 술을 마셨다.
'잔마저 깨지면 안 되지. 이 술병세트는 비쉬에 가져가야겠다.'
복도의 조명등 불빛이 들어오길 바라면서 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불빛 말고도 들어오길 바랬다.
다른 무언가
나를 위로해줄 무언가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부터 챙기고, 나만 위해주는 존재.
이것 봐. 바로 오잖아.
"오스칼, 불도 켜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이직했는데 출퇴근 시간이 길어졌어요. 지하철에서 씁니다 ㅋ 약냉반칸이라 힘들드아 ㅠㅠㅠ
첫댓글 하도 기대다보니까 앙드레보다 자기 마음 먼저 챙기는데 오스칼 바보야 철 좀 들고 자기 마음이 뭔지 모르겠으면 잠깐 떨어져있던가ㅠㅠ
오스칼도 힘들었을 거에요 ㅠ 다른 이들과 침착하게 대화하는 것으로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서 저도 모르게 앙드레에게 지나치게 기댄 게 아닐까.... 하지만 오스칼의 본심은 아녔으리라 믿어요 ㅠ
오오...한계로 치닫는 오양 앙군...! 곧 끝날 거 같은데 ㅠㅠ 그냥 천천히 오조 오억편 써주심 안될까요 ㅜ 그리고 계몽귀족을 자처하는 쟈르파파라니 새롭군요
이 시기에 이직이라니 역시 눼이님 능력자시네요 건승을 기원합니당
@alexis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끝내려고 휘갈기고 있슴다. 쟈르파파는 즉흥적으로 강남좌파로 설정해봤어요. 당시 센스 자랑하고 싶은 귀족들은 다 계몽운운했고 젊은 시절 화끈하셨으니까~♥
원래 영영 관두려다가 월급쟁이 생명 조금 더 연장할까 하고 이직했는데 역시 노예생활은 싫네요 흑흑.....ㅠㅠ
7편 언능~~~~~~~~
잼있어요. 이직하셔서 힘드시겠어요.
새직장에서도 건승하세용.
출근하면서 쓸수있는능력이 부럽습니당ㅎ
데헷 감사합니당. 놀면서 부업 시작한 게 있는데 출근하니까 넘 힘드네요 ㅠㅠ 쟈철이 붐벼서 책을 못 읽으니 팬픽질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