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 자료의 이름을 보면 '국어 최종', '국어 진짜 마지막' 등으로 저장된 것이 가끔 있다. 여러 번 수정하고 공들인 모양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예쁘다.
- 창 밖에 보이는 풍경이 화려해졌다. 초록이 우거진 풍경과 나뭇가지만 앙상한 풍경 모두 좋다고 지난 번 일기에 썼는데 나뭇가지만 앙상한 것도 그 나름대로 운치 있고 아름답지만 마음이 설렐 정도로 아름다운 건 솔직히 지금의 봄 풍경이다. 이 풍경은 지난 번 발표에서 우민이가 중학생의 삶이 그러하다고 비유했던 '짧은 봄'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슬퍼지네). '지금'을 누리기.
p.s.
(15반) 준형이는 짧은 중학생 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발표자가 질문했을 때 '많이 먹고 많이 놀고 많이 쉬어야 한다'고 했는데 중학생 시절뿐 아니라 삶을 그렇게 보내야지. 서진이가 말한 것처럼 '주어진 인생을 즐겨야지'. 할 것을 하고 쉴 때는 확실하게. (이 시점에서 '할 것을 할' 시간의 지분이 너무 많은 중학생들의 삶을 생각하니 또 슬퍼지네.)
- 어제 13반에서 희수가 발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발표를 잘 마무리하였다. 질문에 답변할 학생들에게 발표자가 마이크를 전달하며 진행하지만 희수는 불편한 상황이니 답변할 학생들이 센스있게 희수에게 와서 마이크를 받아 갔다. 그런데 앉아서 희수가 올 때까지 기다린 학생도 있다(기성아?).
-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해석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붙들려 고통 받을 고정 불변의 실체는 없다(=공)'는 것을 잊지 않고자 한다. 그런데 최근 나를 괴롭힌 것은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 무례한 느낌을 주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었다(해당 선생님께 사과하였고 그 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하셨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한 포기 풀과 다름없다고 하신 법륜 스님 말씀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 보았다. 그런데 내 행동이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끝나면 모르는데 누군가와 관계하여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생각되면 가볍게 넘겨지지 않는다. 내가 그에게 사과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용서하듯 나 스스로도 용서해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보았지만 역시나.
쉽지 않다.
다음에 말과 행동을 선택할 때는 추후 마음 고생을 하지 않도록 조금 더 천천히 선택해야지. 늘 멈추어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 습관이 되기를.
- 어제 교무실 앞에서 스케이트 선수인 권민솔 학생을 보았다. 아마 수행평가 때문에 교무실을 찾은 것 같다. 작고 반짝이는데 정말 이래서 스타(별)인 건가. TV에서 경기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실물로 보니 연예인 본 느낌이다. 훈련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학업도 같이 해내려는 모습이 예쁘고 대견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들 살아가고 있구나.
- 벚꽂에 이어 잠깐 피었다 지는 라일락의 때가 되었다. 어제 퇴근길에 라일락을 보면서 스처 지나간 나의 학생들을 떠올렸다. OO이는 잘 지낼까? 이제는 떠올리는 것이 많이 힘들지 않고 떠올릴 대상이 있음에 감사하다. 실연의 상처를 잊는 데 보통 11주가 걸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그 연구 결과가 맞는 걸까? 혹은 그런 연구 결과를 듣고 그 연구 결과에 맞추어 마음이 그렇다고 단정짓고 있는 걸까?
p.s.
실연 이야기를 하니 연애를 주요한 삶의 가치로 꼽은 몇 학생이 떠오른다(15반의 C, 11반의 B). 학생들이 학업에만 매달려 시들어가는 줄 알았으나 살아있네. :)
- 어제 혜리가 '후회'에 관하여 발표 시 이야기하였는데 읽던 책 '챌린지 블루(이희영)'에도 후회에 대한 구절이 있어 눈길이 머문다. 수용하기(받아들이기).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기.
어른이 된다는 건 말이야. 완벽한 선택을 하는 게 아니야. 그냥 후회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지. 그것 역시 신중한 선택이었다고. 그 순간을 결정한 스스로를 존중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결정한 일에 후회가 남을까 두려워하지 마. 그것마저 받아들여.
- 아침에 출근길에 산책하는 예원이와 쭈니를 보았다. 다소 출근 시간이 급박하여 인사는 하지 않았지만 예쁜 풍경이었다. :)
- 우리 지각생 체크 도우미 정훈이는 왜 그럴까. 8:40 종소리의 여운이 끝나면 지각생 써달라고 거의 매일 이야기하는데 왜 오늘도 또 안 쓴 걸까. 어제 선생님 도우미할 때 축구했다 소리만 썼는데 머리에 그저 축구 생각만 있기 때문일까. 아침부터 붙잡고 급발진 시전함. 종소리의 여운이 끝나면 바로 좀 써달라고! 하... 우아하게 살게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 복도를 걷는데 뒤에서 "선생님, 선생님!"하고 여러 번 부르는 소리가 따라온다. 규리, 수안, 혜라가 따라오며 세상 반갑게 인사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ㅋㅋ 예뻐! 청량감 선사. :)♡
- 자고 있는 명운이를 예찬이가 점심 먹으라고 깨우는 것을 보았다. :)
- 학교에서 이러저런 활동이 있다. 그럴 때 소외되기 쉬운 학생이 있는데 챙겨주는 학생들이 있다. 고마운 학생들이다...
- 선생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같은 문장인데 희망과 절망 두 가지 버전으로 해석되는 것이 있다.
"어쩜 저런 아이들이 다 있지?"
학교에서 심미적 체험을 하곤 한다. 가끔 나에게 삶으로 감동을 주는 어린 존재들이 있다. 나는 사실 그들에게 배운다.
- 마이크를 건넨다. 자기 삶을 살아내느라 그 나름대로 분투 중인 착하고 예쁜 어린 영혼들에게,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12반>
- 규리가 '호수의 일'을 가지고 발표하였다. 소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질문을 선정하여 흥미로웠다. 평소 소문에 시달리는 연예인들을 보면 무시하거나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등 보통 두 갈래의 선택으로 나뉜다. 나라면 어떨지 생각해 보는데 선택이 쉽지 않다.
규리는 '호수의 일'에서 '은기'를 '어린 새'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핸들을 꺾어 절벽으로 떨어질 것(회피)이 아니라 정면 돌파로 헤쳐나가기 바란다고 하였다. 발표에 비유가 풍부하여 인상적이었고 전달이 잘 되었다. 인상적인 구절로 마무리한 것, 이 소설을 여리고 잘 상처 받는 사람들에게 추천하여 준 것도 좋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하여 라디오 DJ의 낭독을 듣는 듯했다.
- 영준이는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는지', 예린이는 '그리운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나에게는 '너'다.
- 오늘 예은이 발표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이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실패한 사람들은 성공의 과정을 밟는 중이다.
아침마다 집에 신경쓰이는 일이 있는데 발표를 들으며 위안이 되었다. 힘든 학생이 있다면 그에게도 친구들이 발표한 시가 가닿았으면 좋겠다.
별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14반>
- 서원이가 '연금술사'를 가지고 발표하였다. 제목의 의미를 물었는데, 주제와 관련된 핵심 질문이기도 하다. 서원이는 '자신을 개선시키는 사람'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는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며, 과정을 통해 얻은 경험이 인생의 끝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하여 인상적이었다. 좌절감이 들 때 그의 말을 떠올려 볼 만하다. 삶의 과정에 있음을 알기.
- 선오는 '셋 중 하나는 외롭다'를 가지고 발표하였다. 외로웠던 경험이 있는지 물었는데 민겸이는 십 몇 년째 외롭다고 한다... 저런저런. 선오가 자신이 외로웠던 경험을 말하면서 '나는 개미였다'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미지를 중심으로 활용하여 전달을 효과적으로 하였다.
- 민욱이는 '루아르 계곡의 맥주'를 가지고 발표하였다. 그는 특이하게 문체상의 특징을 말하였는데 수안이가 피드백할 때 이 점을 잘 짚어주었다.
- 지오는 자신만 생각했던 모습을 돌아보고 한 장의 연탄처럼 다른 사람에게 열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어제 11반 주원이 발표에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지오의 말을 생각해 볼 만하다. 타인에게 온기를 주는 것. 그건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온기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온기를 주기. 사랑하기. 나는 오늘 연탄 같은 학생들을 보았다.
p.s.
사랑은 이해와 관련된다.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되지 않고 분노가 치미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맞닥뜨릴 때 나의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어렵다. 현재까지의 결론은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그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나 수준이니 그런 것임을 알기'다.
<13반>
- 예나가 시 낭송을 다른 학생을 시킨 이래 트렌드가 되었다. 다들 시 낭송 할 사람을 구해서 그 학생에게 시 낭송을 시켰다. ㅋㅋ
- 태혁이는 '서시'를 가지고 발표하였다. '순수함과 순진함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질문이 흥미로운데 시의 주제와의 관련성을 마무리할 때 이야기해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예나가 순수함과 순진함의 구분 기준을 '상황에 대한 판단력 유무'로 이야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시의 화자는 어려운 현실임을 알고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말하였다는 점에서 순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다.
- 민지가 '사향'을 가지고 발표하였다. 그는 '시를 통해 어떤 경험이 떠올랐는지'를 물었다. 전에 살던 곳이나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많은 가운데 태호는 외국에서 본 것들로 "나무도 있고..."라고 이야기하여 빵 터졌다. 상민이가 창 밖을 가리키며 나무는 지금 밖에도 있다고 소리치며 킥킥거렸다.
- 예지가 첫 번째 질문을 하다 수업 종료 시간이 되어 중간에 멈추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이어질 두 번째 질문과 발표가 기대된다.
오늘도 학교 다니느라 수고 많았어. 벌써 수요일이구나. 내일 또 만나. :)♡